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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A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이 1952년 11월 18일 '하우스걸' 수지(한국명 서수자), 아내 헬렌 무어 여사,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왼쪽부터)를 바라보고 있다. 아들 실종뒤 한국을 처음 찾은 헬렌 무어 여사가 이 대통령이 마련해준 집으로 짐을 옮기면서 촬영한 사진이다. (버지니아 마셜도서관=한용걸 논설위원) |
한국에서 2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일을 겪었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6·25전쟁에 나갔던 때는 59세가 되던 1951년 4월이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남쪽으로 밀려내려간 1·4후퇴뒤 서울을 수복한 직후였다. 한국에 도착해 지휘권을 잡았을 때는 중공군이 재차 춘계공세를 벌이며 산등성이를 타고 새까맣게 밀어내려오고 있었다. 한국군 군단장이 도망치고, 사단장들이 계급장을 떼고 꽁무니를 뺐다. 광화문에서 마포까지 155㎜포를 총 동원해 일렬로 배치해놓고 인왕산과 북한산너머로 포탄을 퍼부어댔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겨우 막아냈으나 서울은 처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랬던 한국이 마음속에 제2의 고향으로 자리잡았다. 외동아들 때문이었다. 전투기 조종사였던 아들은 환갑 생일 파티직후 야간작전에 투입됐다가 귀환하지 못했다. 다른 나라 전쟁에 참전했던 아들은 굳이 6·25 전쟁에 참전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버지를 돕겠다면 전투기 조종사 자격증을 딴뒤 자원입대해 한국에 따라왔다. 아직도 아들의 뼈가 북한 어디엔가 묻혀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와 손자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편지를 받아든 노병은 미8군 사령관이었던 제임스 A 밴플리트이다.
편지는 길이에 비해 내용이 간단했다. 잘 있느냐는 안부인사로 시작했지만 어머니가 행상으로 근근이 입에 풀칠하고 있어 학비가 없으니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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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걸'수지(오른쪽)가 밴플리트 장군의 부인 헬렌 무어 여사의 짐을 옮기고 있다. 왼쪽부터 밴플리트 장군, 헬렌 무어 여사, 프란체스카 여사. (버지니아 마셜도서관=한용걸 논설위원) |
농장 한켠에 문패를 단 그의 서재 ‘한국관’에서 편지를 몇번이고 다시 읽었다. 아이가 원하는게 뭔지 좀 더 알고 싶었다. 어디로 진학하고 싶어하는지, 학비가 얼마나 필요한지, 학용품은 어떤게 필요한지 궁금했다. 편지를 읽다보니 아들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언젠가는 북한땅에 묻혀있을 아들의 유골이나마 찾고 싶었다. 한국에 있는 어떤 인사에게 부탁하면 이 아이와 인연을 이어갈수 있을지 생각에 잠겼다. 그런뒤 조심스럽게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44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퇴역 장군과 소녀의 사랑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계속)
한용걸 논설위원
(이글은 미국 버지니아주 렉싱턴의 버지니아군사학교(VMI) 마셜도서관의 밴플리트자료와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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