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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 ‘기축옥사’ 재구성… 스러져간 선비 1000명의 넋 위로

입력 : 2019-01-26 03:00:00 수정 : 2019-01-25 19: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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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 지음/상상출판/1만7000원
조선의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정여립과 천재들의 시대/신정일 지음/상상출판/1만7000원


조선사에서 16세기 후반은 천재들의 시대였다. 비극도 적지 않았다. 선조는 왕권 보전에만 온 신경을 썼고 영재들 역시 당파를 위해 죽음을 불사한 전쟁을 벌였다.

길 위의 인문학자로 불리는 신정일은 기축옥사와 정여립 모반사건을 재구성하면서 죽어나간 1000여명 선비들의 넋을 위로했다. 지금도 정여립은 의혹의 이름이고, 신원되지 못한 혁명가로 전해진다. 조선역사가 그를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파헤치는 저자의 필력이 느껴진다.

기축옥사는 기축년(1589년)에 벌어진 정여립의 모반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정여립은 동인과 서인을 막론하고 당대 천재로 평가받았다. 명석했으며 경사와 제자백가에 통달했다. 그는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에 올랐다가 진안 죽도로 낙향했다. 처음에는 이이(율곡), 성혼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에 속했으나 이이가 죽은 뒤 바른말을 하다 왕의 미움을 사자 관직을 버린 것이다.

낙향한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았다고 한다. 이들을 규합하여 대동 계를 조직하고 활쏘기와 말타기 훈련에 주력하는 등 무력을 길렀다. 대동계 조직을 이끌고 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자 그의 명성이 전국으로 퍼졌다. 정여립의 대동계 조직은 널리 확산했다. 백성들이 선조의 실정 등 조정에 실망한 상황도 작용했다.

그러나 지방 관료 몇몇이 작당하여 조정에 상소해 버렸다.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했다. 이 사건의 처리를 주도한 것은 정철 등의 서인이었다.

작가는 “선비들의 당쟁 속에 살아남으려는 선조,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는 유성룡과 이항복, 당리를 위해 정적을 죽인 정철”이라면서 “가장 이해할 수 역사, 가장 드라마틱한 역사가 1589년의 기축옥사”라고 풀이했다.

작가는 르네상스의 산실 이탈리아 피렌체 방문기를 전하면서 기축옥사와 대비시킨다.

“15세기 유럽은 당대 천재들인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신곡의 작가 단테와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 수많은 천재가 활동했다. 수많은 천재들이 왕성하게 활동하여 르네상스라는 새 문화를 창조해냈다. 그들을 지원했던 가문이 메디치 가문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어떠했는가? 그렇게 수많은 천재가 나타났던 시대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당쟁 때문에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맞았다. 천재들이 제 역할을 할 수가 없었던 불행한 시대였다.”

사실 16세기 후반 조선의 정정은 불안했다. 사림세력은 훈구 공신들의 부도덕함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했다. 당연히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훈구파와 세력다툼이 빚어졌다. 네 번의 사화는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반격으로 일어난 참극이었다.

서애 류성룡은 기축옥사의 처참함을 글로 남겼다. “무릇 여립과 평소에 친하게 지낸 선비들 중 죄를 얻게 된 자가 많았다. 고문을 받고 죽은 자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옥사는 덩굴처럼 얽히고 뻗어나서 3년을 지내도 끝장이 나지 않아 죽은 자가 몇천 명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정여립을 위인으로 평가한다. “정여립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는 유교의 윤리관을 여지없이 말살한 혁명성을 가진 인물이다. 정여립은 동양의 위인이다.”

정여립은 반대파당을 제거하려는 당파의 미끼로 쓰였고 당쟁의 희생양이었다. 지금도 당쟁은 면면히 이어지고 민생은 뒷전이다.

정승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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