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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의 땅 위에 뿌린 피와 눈물… 슬픈 역사 넘어 미래 준비하다

입력 : 2019-01-08 10:00:00 수정 : 2019-01-07 21: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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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시베리아 콜리마대로를 가다] <10·끝> 마가단, 태평양을 향한 ‘시베리아의 창’ 사하공화국(야쿠티야)의 야쿠츠크에서 바지선을 타고 레나강을 건너 니즈니베스탸흐로, 다시 바지선을 타고 알단 강을 건너 한디가로, 오이먀콘의 톰토르를 잠시 들렀다가 우스트-네라와 마가단주의 수수만을 지나서 2200㎞에 달하는 이번 콜리마 대로 탐사 여정의 종착지 마가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가단은 북태평양 연안, 정확히는 오호츠크 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이자, 현재 마가단주의 중심지다.

마가단이라는 명칭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에벤어로 해양 퇴적물을 의미하는 ‘몬고단’에서 왔다는 설이 있고, 마른 나무를 의미하는 ‘몬고트’와 관련해 그 더미를 의미하는 ‘몬고단’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에벤어로 바람이 부는 곳이라는 의미의 ‘몬그단’에서 왔다는 얘기도 있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어쨌든 에벤어 단어에서 마가단이라는 명칭이 유래했고, 현재 러시아 소수민족 에벤인들이 이 지역의 원주민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마가단 시가 내려다보이는 크루타야 언덕 위에 서있는 ‘슬픔의 가면’. 그 언저리에 대표적으로 악명 높은 스탈린 시기 강제노동 수용소 ‘굴라크’의 명칭들이 비석처럼 놓여져 있다.
마가단 시내 숙소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됐다. 위도가 높고(북위 59도 34분), 인구가 적어서(약 9만3000명) 거리에는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고 인적도 드물었다.

다음 날 찾은 크루타야 언덕은 1930∼1950년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수형인들이 배로 갈아탄 뒤 마가단에 이르러 집결하는 장소였다. 마가단에 철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만 했다. 이곳에서 러시아 북동부 11개 수용소로 보내진 수형인들은 콜리마 대로를 비롯한 도로 건설, 광물 채굴 등에 강제로 동원됐다. 그 과정에서 무려 15만명이 사살되거나 사고로 사망했다. 스탈린 집권기 정치적 억압에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미국에 거주하던 조각가 에른스트 네이즈베스트니와 마가단 현지 건축가 카밀 코자예프가 설계한 높이 15m의 ‘슬픔의 가면’이 1996년 크루타야 언덕에 세워졌다.

이마의 세로 주름, 눈썹, 코는 십자가를 형상화하고 있다. 왼쪽 눈에서는 얼굴 모양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쪽 눈에는 기역 모양의 창문과 그 사이에 매달린 종, 그 아래에는 수번 ‘937’이 보인다.

반대편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수형인과 그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상징물 내부에는 당시 수용소의 위치와 수형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전시물들이 있다. 혹독한 추위와 열악한 산업 기반의 한계를 극복하고 달성된 스탈린 집권기 시베리아의 산업화는 정치적 억압에 희생된 수형인들의 대가 없는 노동 덕분에 가능했다.

마가단 시 도로와 건물.
크루타야 언덕에서는 마가단 시내는 물론 마가단 항도 한눈에 보인다. 마가단은 오호츠크 해의 타우이 만으로 툭 튀어나온 스타리츠키 반도의 좁은 목 부분, 서쪽의 나가예프 만과 동쪽의 게르트네르 만 사이에 위치한 도시다. 그리고 마가단 항은 낮은 산들에 둘러싸여 육지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나가예프 만의 가장 안쪽에 있다. 차갑고 불안정한 오호츠크 해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이다.

소련 시기부터 마가단 항은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지나지 않는 러시아 동북부가 다른 지역과 교류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했다. 마가단 항은 콜리마 대로를 통해 운반된 시베리아의 지하자원을 블라디보스토크 항으로 보낸다. 반대로 러시아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물자를 받아 콜리마 대로를 통해 시베리아의 여러 지역으로 보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이 모스크바에서 출발한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대양과 만나는 항구라면, 마가단 항은 레나 강에서 출발해 러시아 북동부를 지나는 콜리마 대로가 대양과 만나는 항구다. 마가단은 태평양을 향한 시베리아의 창이다.

마가단주의 경제는 러시아 다른 지역보다 좋은 편이다. 2017년 산업생산지수가 전국 평균을 상회했고, 금 생산은 러시아 전체에서 2위, 극동에서 1위를 기록했다. 마가단주 정부는 소련 시기부터 이 지역의 주력 산업인 광업을 지속가능한 성장 동력으로 삼기 위해 3개의 광물 매장지대를 추가로 개발할 예정이다.

마가단 박물관 내 스탈린 시기 강제노동수용소 ‘굴라크’에 관한 전시물.
이 지역의 또 다른 주력 산업은 전력이다. 마가단주에는 콜리마 수력발전소, 우스트스레드네칸 수력발전소가 있는데, 콜리마 수력발전소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전력의 76.8%를 담당하고 있다. 우스트스레드네칸 수력발전소의 추가 설비가 가동되면, 인접 지역인 사하공화국과 추콧카 자치구에도 전력을 공급하게 된다. 2017년 어획량이 전년 대비 10% 증가할 정도로 어업 역시 마가단주의 주력 산업 중 하나다.

이러한 경제 상황에도 마가단주는 선도개발구역이 없는 러시아 극동의 유일한 지역이다. 러시아 정부는 2015년부터 극동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포함한 민간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조세·행정 특혜와 인프라 등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선도개발구역을 지정하고 있다. 뒤늦게 지난해부터 마가단 주정부는 관광, 어업 분야 등에 특화된 ‘콜리마 선도개발구역 조성 신청서’를 극동개발부에 제출할 준비를 하고 있다.

레닌 동상 뒤에 서있는 마가단 주청사.
마가단주 경제 발전을 가로막은 가장 큰 장애물은 철도의 부재다. 2030년까지 니즈니베스탸흐에서 마가단까지 연방철도를 건설한다는 계획이 수립됐지만,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어 러시아 경제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앞으로 상당 기간 마가단주를 비롯한 러시아 동북부 전체에서 유일한 교통로는 콜리마 대로가 될 것이다.

아무르주 네베르에서 사하공화국의 야쿠츠크까지 이어지는 1157㎞의 A360 연방도로 ‘레나’, 사하 공화국 남부 베르카키트에서 중부 니즈니베스탸흐까지 건설된 767㎞의 아무르∼야쿠츠크 철도, 바이칼 호 인근에서 시작해 랍테프 해까지 흐르는 4400㎞의 레나 강은 시베리아의 육상 또는 해상 교통 간선이지만, 모두 남북을 연결하는 데 그치고 있다. 레나 강에서 시베리아의 여러 낙후된 지역을 지나 태평양 연안까지 이어지는 교통로는 2032㎞의 콜리마 대로가 유일하다. 콜리마 대로와 마가단 항의 현대화는 본격적으로 극동을 개발하고자 하는 러시아에 필수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콜리마 대로를 따라 태평양 연안의 마가단까지 시베리아를 누볐다. 책과 지도에서 보았던 수많은 지명이 더 이상 단순한 글자로 보이지 않았다. 불모의 땅 시베리아를 개척하기 위해 흘린 수많은 피와 땀, 그리고 정치적 억압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않게 됐다.

제성훈 한국외국어대 노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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