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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태릉선수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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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9-27 21:22:47 수정 : 2017-09-27 21: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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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원구 공릉동에는 사적 201호로 지정된 두 개의 능(陵)이 있다. 조선 중종 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무덤인 태릉과 조선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무덤인 강릉이다. 대한체육회가 1966년 이곳에 선수촌을 지으면서 태릉과 강릉 두 개의 이름을 놓고 갑론을박했다고 한다. 지루한 회의가 계속되던 중 누군가 정문에 가까운 쪽 이름으로 정하자고 제안하면서 태릉선수촌이 탄생했다.

어제 국가대표 선수들의 새 훈련장인 진천선수촌이 개촌하면서 태릉선수촌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1966년 문을 연 태릉선수촌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에서 양정모가 첫 금메달을 따낸 이후 역대 올림픽 금메달 116개를 낳은 엘리트스포츠의 요람이었다.

태릉선수촌이 건립된 데는 1964년 도쿄올림픽 때의 실망스런 메달 성적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사상 최대인 224명의 선수단을 파견하고도 금메달 없이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로 그치자 국민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이 정부에 강력히 권고했다. 민 회장이 직접 서울 외곽이면서 풍광이 좋고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곳을 찾던 중 문화재관리국이 소유한 현재의 선수촌 부지를 파악해 정부에 보고했다. 문화재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성사됐다고 한다.

에피소드도 적지 않다. 2012년 런던올림픽 당시 선수촌장을 지낸 박종길 전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의 회고다.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금메달 7개로 15위에 그칠 것’이란 외신이 잇달아 초비상이 걸렸다. 당시 박용성 대한체육회장은 “금메달 10개 못 따면 템스강에 빠져 죽자”고 할 정도였다. 다행이 금메달 13개, 종합 5위로 선전해 비극(?)은 면했다고 한다. 지금은 웃을 수 있지만 당시는 ‘극심한 스트레스’였다는 것이다.

그간 태릉선수촌을 거쳐간 선수는 45개 종목 2만여 명이다. ‘태릉인’으로 불리는 이들이 자주하는 “불암산을 뛰어봤어”, “선수촌 밥 먹어봤나”라는 말에는 선수촌 생활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있다. 태릉선수촌 시대는 저물었지만 태극전사들의 땀이 밴 현장을 문화재로 재등록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다행이다. 반세기 한국 엘리트스포츠 산실, 태릉선수촌의 근대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부인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박태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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