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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베탕 토도로프 지음/류재화 옮김/아모르문디/1만6000원 |
스페인의 유명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는 다음과 같은 데생 한 점을 남겼다. ‘철학은 가난하고 헐벗은 채로 간다.’ 이것은 페트라르카의 시에서 인용한 문장이다. 데생을 보면 한 소녀가 있다. 차림새를 보아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아이다. 그런데 소녀는 옷을 제대로 입지 않고 있다. 옷도 그렇지만 신발도 신지 않았다. 그런 소녀의 오른손에는 펼쳐진 책 한 권이 있고, 왼손에도 책 한 권이 들려 있다. 아직 앳되고 순박해 보이는 소녀는 질문이 가득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철학은 교육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에게서도 구현될 수 있다는 말인가.
지난 2월 타계한 문예이론가 츠베탕 토도로프는 “고야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괴테나 50년 후 등장한 도스토옙스키에게도 뒤지지 않는 심오한 사상가였다”고 말했다. 그는 신간 ‘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를 통해 고야를 화가가 아닌 사상가로 접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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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전역에 계몽주의 사상이 전파된 시기 프란시스코 고야는 혼란 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증언했다. 사진은 고야가 그린 ‘철학은 가난하고 헐벗은 채로 간다’. 아모르문디 제공 |
고야는 1780∼1790년대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는 프랑스혁명으로 유럽 전역에 계몽주의 사상이 전파된 시기다. 그러나 1808년부터 1813년까지 스페인을 점령했던 나폴레옹은 계몽주의를 통치수단으로 이용했다. 그 결과 프랑스 점령군과 스페인 민중의 극렬한 대치 속에 살인과 강간, 고문과 광기가 양 진영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계몽주의 사상을 지지하던 스페인의 진보주의자들은 심각한 모순에 빠졌다.
고야는 이러한 혼란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증언했다. 고야 역시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당시 주요 지식인 가운데 하나로 이런 사상에 젖어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전파할 수 있었다.
1799년 출판한 판화집 ‘변덕들’은 계몽주의자로서 고야의 면모를 나타낸다. 판화에는 화가 스스로 ‘인간의 과오와 악덕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50번 작품 ‘친칠라’에는 눈을 가린 당나귀가 자물쇠로 귀를 닫고 눈을 가린 두 사람에게 죽을 떠먹이는 모습이 표현됐다. 두 사람의 몸을 감싼 문장은 이들이 귀족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나태와 미신에 빠져 직접 보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고, 눈 가린 당나귀로 표현된 무지로 배를 불리는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제목인 친칠라는 당시 인기 있던 유사한 내용의 연극 주인공의 이름이다.
고야는 계몽주의가 그늘 속에 모호하게 내버려 둔 모든 것을 집요하게 탐색했다. 1793년부터 1828년 죽음을 맞을 때까지 계속된 탐색을 통해 그는 의지와 이성만큼이나 인간의 삶을 조종하여 폭력과 광기에 이르게 하는 어두운 힘을 발견했다.
고야가 그린 ‘변덕들’, ‘전쟁의 참화들’ 등 수많은 판화와 데생은 인간 본성의 어두운 그늘, 폭력성, 광기를 꿰뚫어 보여준다. 순박한 민중이 언제든지 살인자로 변할 수 있고, 순결한 가치의 이름으로 잔혹한 범죄가 저질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진실, 정의, 이성, 자유 같은 그의 가치는 여전히 익숙하다. 하지만 그는 이 길 위에 어떤 덫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동시대인들보다 잘 알았다.”
책은 고야가 보여주는 것들이 우리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계몽주의 사상은 학술적인 흥미만 제시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초석이기도 했다. 당대 사회의 수많은 것이, 특히 지금까지 이어져 온 우리 사회의 수많은 것들이 그 초석 위에 세워졌다. 따라서 이 사상을 잘 알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치, 우리가 살기를 희망하는 세계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고야의 작품은 지혜의 교훈을 담고 있고, 그 교훈은 오늘날의 우리를 향한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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