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호가 활약하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 메이저리그를 접한 팬이라면 익숙할 이름일 것이다. 1993년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데뷔한 델가도는 1996년 24홈런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스타반열에 오른 이후 은퇴할 때까지 매년 30개 이상 홈런을 날린 대표적 슬러거였다. 그러나 그 이후 메이저리그를 접한 세대에게는 낯선 이름일 수밖에 없다. 약물에 의존한 비상식적 ‘타고투저’ 흐름에 휩쓸려 타점왕만 한 차례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독할 만큼 타이틀 운이 없었기에 야구사에 남긴 족적은 보잘것없다.
그러나 델가도는 야구 외적인 부분에서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선수다. 바로 거칠 것 없는 사회적 발언 덕분이다. 델가도의 별명은 바로 ‘그라운드의 촘스키’. 언어학자로서 학계에 전설적 업적을 남겼지만 이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사회참여를 주저하지 않았던 촘스키처럼 델가도도 옳다고 생각하면 앞에 나서 발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마침 그가 활약했던 2000년대 초반은 9·11테러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영향으로 미국의 ‘애국주의’ 열풍이 극에 달했던 시대다. 미국인이 아닌 선수들조차 성조기를 향해 경의를 표하고 성조기를 단 유니폼을 달고 뛰어야 했던 때다. 선수들은 7회초가 끝나면 일렬로 서서 관중들과 함께 미국을 찬양하는 노래인 ‘갓 블레스 아메리카(God Bless America)’를 불러야 했다.
델가도는 이처럼 스포츠를 애국주의로 물들인 비이성적 흐름에 반대한 유일한 현역 메이저리거였다. 특히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야구를 애국주의 고양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태도에 거침없는 비판의 칼날을 휘둘렀다. 7회말 갓 블레스 아메리카 의식을 앞두고 혼자 묵묵히 덕아웃으로 걸어들어가는 그의 모습은 ‘생각하는 야구인’ 델가도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단순히 미국의 애국주의 열풍에 반대만 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미국의 자치령으로 남아 있는 조국 푸에르토리코의 독립을 위해 자신이 번 연봉을 아낌없이 쏟아부었고 환경과 인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미 공군이 푸에르토리코의 비에케섬에서 실시했던 폭격훈련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해 2003년 미국이 훈련 중지를 선언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조국 푸에르토리코뿐 아니라 낯선 미국에서 활동하는 중남미계 후배 선수들의 복지를 위해 적극 나서기도 했다.
이번 WBC에 델가도는 후배들을 이끌고 코치로 대표팀에 참여했다. 선수이자 사회운동가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은 그를 중심으로 푸에르토리코는 그 어느 나라보다 똘똘 뭉쳐 돌풍을 일으켰고 미국과 당당한 승부를 벌였다. 낯선 땅에서 활동하는 조국의 후배들이 더 당당해지길 원했던 그의 바람이 어느 정도는 실현된 셈이다. 덕아웃에서 후배들의 활약을 지켜보던 그의 모습도 한층 더 당당해보였다.
서필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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