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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탐욕이 낳은 비극…74년전 터진 조세이 탄광 사고

입력 : 2016-02-02 14:29:18 수정 : 2016-02-02 14:2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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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136명 포함 183명 사망…"환기구로 물기둥 솟구쳐"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우베(宇部)시 도코나미(床波) 해안에 유가족과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스님들이 지난달 30일 바친 꽃이 떠 있다. 멀리 1942년 2월 3일 수몰사고가 발생한 조세이(長生) 탄광의 흔적인 환기구 `피아`(Pier)가 보인다.
일본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와 규슈가 만(灣)을 이루고 있는 야마구치(山口)현 우베(宇部)시 니시키와(西岐波) 마을.

20세기초 이곳에서는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많은 탄광이 운영됐다. 조세이(長生) 탄광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일본 시민단체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水非常)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 조성한 조세이 탄광 추도광장에는 1933년 3월 촬영한 사진이 전시돼 있다.

사진을 보면 바다에 철길이 놓여 있고, 탄광 경영자로 추정되는 사람 두 명이 서 있다. 오른쪽 하단에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성이 급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조세이 탄광에는 조선의 일본어 발음인 '조센'에서 명칭이 유래했다고 전할 만큼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 많았다.

이들은 비좁고 무더운 갱도에서 반라의 상태로 감시와 통제 아래 하루에 12시간씩 석탄을 캤다. 건장하고 젊은 독신 남성들은 3.6m 높이의 울타리에 둘러싸인 숙소에 살았고, 가족이 있는 노무자는 사택에 살면서 일을 했다.

생산량이 많지 않았던 조세이 탄광은 조선인 징용자가 늘어나면서 우베 지역의 50여개 탄광 중 생산량 3위에 올랐다.

근로자의 안전보다는 생산을 중시했던 시기였던 탓에 우베시 탄광에서는 인명사고가 빈발했다.

1911년부터 1948년까지 5차례 사고가 발생해 희생자 528명이 나왔다. 특히 1915년 4월 12일에는 히가시미조메(東見初) 탄광에서 235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는 1942년 2월 3일 오전에 터졌다.

지난달 30일 한국불교종단협의회가 개최한 위령제를 앞두고 만난 전석호(84) 씨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초등학교 5학년 때였는데, 수업중에 사고가 났으니 집에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탄광에 가니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난 상태였다"고 말했다.

전씨는 "탄광에 있는 환기구로 물기둥이 솟구쳐 올라오고 갱도에는 물이 차 있었다"면서 "아직 어려서 울지 않고 멍하니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아버지가 수몰사고로 희생되면서 사택에서 쫓겨난 전씨는 다른 가족과 함께 동기생의 마구간에서 지내야 했다고 털어놨다.

조세이 탄광에서는 이 사고로 인해 조선인 136명을 포함해 모두 183명이 수장됐다. 갱도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단 2명뿐이었다고 한다.

조선인 피해자는 20대가 73명, 30대가 29명, 40대가 24명, 10대와 50대가 각각 4명이었고, 출신지는 경남(32명)과 경북(68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조세이 탄광은 사고 이후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문을 닫았다.

우리 정부는 지난 2007년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진상조사 보고서'를 발간했고, 작년 12월 일본어판을 제작해 일본 시민단체와 도서관 등에 배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초지일관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희생자의 유골 수습도 요원한 상황이다.

히로시마(廣島) 주재 총영사관 관계자는 "민간에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일본 정부는 유골을 찾는 데 별다른 관심이 없다"고 지적한 뒤 "조세이 탄광을 비롯해 한일 간의 크고 작은 아픔들이 잘 치유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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