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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홍칼럼] 우리 안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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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6-08 21:46:51 수정 : 2015-06-08 21:4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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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위기 본질은 질병보다 공포
결연한 의지로 두려움 몰아내는 사회역량 필요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매를 맞아도 아프지 않게 하는 법’, ‘곡식을 먹지 않고 흉년을 넘기는 법’ 같은 처방전이 담겨 있다. 상전에게 매타작을 당해 신음하는 하인이나 관아에 붙잡혀가 피가 맺히도록 곤장을 맞은 민초의 아픔을 덜어주는 요법이다. 보릿고개 때 또는 시도때도없이 되풀이되는 흉년으로 밥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백성의 허기를 달래주는 비법이다. ‘피란 갈 때 어린아이의 울음을 멈추게 하는 법’도 있다. 솜을 작고 둥글게 뭉쳐서 입에 채우되 감초 달인 물이나 단것으로 적셔 위험할 때 아이의 입에 넣어 빨게 하라고 가르쳐 준다. 그 설명 뒤로 ‘불행히 난리를 만나 울음을 멈추지 않을 때는 적들이 들을까 염려되어 (아이를) 길옆에 버릴 때가 있으니…’라는 개탄이 이어진다. 오죽하면 이런 처방까지 담았을까 싶지만 동의보감이 완성된 시기가 임진왜란 뒤였음을 감안하면 왜군에 쫓겨 도망가다 아이가 우는 바람에 잡혀 목숨을 잃는 참상이 옆에서 본 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먹고사는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해주지 못하는 나랏님 탓에 굶주린 배를 움켜쥐는 백성, 잦은 외침에 제 목숨마저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는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안타까움이 절절이 묻어나는 처방이다.

김기홍 논설실장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환자가 속출하자 정부가 ‘낙타와 밀접한 접촉을 피하라’는 등의 메르스 예방 요령을 알렸다. 병원 내 감염 단계를 지나 지역사회 감염을 걱정하고 있는 마당에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는 ‘메르스 예방수칙’을 그것도 발생 17일 만에 긴급재난문자로 보냈다. 이런 ‘메르스 처방전’에서는 국민 건강을 걱정하고 공포에 떨고 있는 국민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려는 정부의 진심을 느낄 수가 없다. 규정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라는 행정당국의 기계적인 행정절차, 일방 통고만 보일 뿐이다. 그런 처방을 받아든 국민 대다수는 앞뒤 사정 따질 새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날아든 속도위반 통지서를 받아 들 때처럼 황당한 심정이 됐다. “유니콘 타고 명동 가지 말란 소리 하고 있다”는 비아냥이 나올 만하다.

우리 사회는 지난해 세월호 비극을 겪으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는 책임 있는 국가 또는 정부’에 대해 비로소 눈을 떴다. 세월호 석 달여 뒤 개봉돼 역대 한국영화 최다 관객 수를 갈아치운 ‘명량’을 보면서 세월호 참사 때 목격했던 무력한 국가, 무능한 정부를 다시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그 뒤로 셀 수 없이 많았던 다짐과 약속에도 불구하고 독감 수준의 질병 때문에 똑같은 무기력과 무능을 일년 가까이 지나 또다시 보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메르스 사태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위기라 할 만하다. 바이러스에 놀라고 공포에 떠는 작금의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한강의 기적, 금모으기 운동 같은 빛나는 고난 극복의 역사로 국제사회의 칭송에 익숙해진 우리가 이제 와 외국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초기 대응 실패, 부실한 방역체계로 메르스 확산을 막지 못한 정부의 무능에 일차적인 책임을 물어야 하겠지만 이번 위기를 헤쳐나가는 일은 정부만의 몫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그 책임을 나눠 가져야 한다. 의심 환자가 외국을 들락거리고 골프를 치러 다니고 허위사실과 괴담을 퍼나르며 메르스 치유를 방해하고 혼란을 조장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본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메르스라는 질병이 아니라 공포다. 메르스보다 공포가 훨씬 빠르게 퍼지고 있다. 메르스보다 근거 없는 공포로 인한 혼란과 고통이 훨씬 크다. 메르스 퇴치보다 공포와 싸우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하지만 그 공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유령일 뿐이다. 질병을 견뎌내는 것은 사람의 몸이지만 공포를 이겨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담대한 자세와 결연한 의지다. 사회의 안녕을 오로지 정부에만 의존하는 시대는 지났다. 선진 시민사회는 시민 스스로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일에 적극 나서는 방향으로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다. 메르스 위기에 맞서는 대한민국의 역량을 보여줄 좋은 기회다. 국가의 역량은 시민 역량과 정부 역량의 총합이다.

김기홍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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