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안재성의 ‘돈’ 이야기…탐욕의 역사]화끈한 아우구스투스

입력 : 2015-05-11 15:12:18 수정 : 2015-05-18 08:42:47

인쇄 메일 url 공유 - +

카이사르의 옛 병사들에게 1000데나리우스 쾌척
베테랑 병사 합류 덕 내전 승리

“100!”

“500!”

“600!”

“1000!”

서로서로 높은 가격을 부르며 경쟁하는, 마치 미술품 경매장과 같은 풍경이 기원전 44년 로마에서 벌어졌다.

다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경쟁자가 옥타비아누스(훗날의 아우구스투스)와 안토니우스, 2명의 거물 정치가라는 점, 그리고 경매 대상이 미술품이 아니라 살아 있는 병사들이라는 점이었다.

즉, 수만의 병사들이 늘어선 채 자신들에게 더 많은 보너스를 약속하는 주군을 택한 것이다.

의무도, 의리도 아닌 돈으로 주군을 택하는 광경. 왜 당시 로마에서는 이런 촌극이 벌어진 걸까?

◆옥타비아누스가 대체 누구야?

기원전 44년 3월 15일 로마의 독재관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가 열리기 직전,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등 암살자들에게 암살당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당시 로마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그는 수많은 로마 시민들을 죽인 내전을 발발시킨 범죄자이자 로마의 전통 공화정을 깡그리 무시하고 독재 정치를 펼친 독재자였지만, 어쨌거나 그 시기에는 로마의 안정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뒤 카이사르 휘하에서 로마는 간신히 평화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종신 독재관으로서 모든 정무를 총괄하던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앞두고 암살당했으니 로마가 대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로마 정계는 암살 후 두 쪽으로 갈라졌다. 카이사르를 독재자라고 비판하면서 공화정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암살자들을 비롯한 보수파와 상대편을 “은혜를 모르는 암살자”라고 비난하는 카이사르파가 대립했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공개된 카이사르의 유언장은 정계에 더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제 1상속인’이 옥타비아누스라고 적혀 있는 탓이었다. 유언장을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옥타비아누스가 대체 누구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당시 겨우 19살밖에 안된, 정치 경험도 군단 경험도 없는 풋내기였다. 카이사르의 누이 율리아의 딸 아티아와 옥타비우스의 아들로 가까스로 혈연이 닿긴 하지만, 별로 가까운 친척도 아니었다.

병치레 없이 건강하던 카이사르가 자신이 훨씬 더 오래 살 거라고 예상해 세운 후계자니 이 때에는 완전 무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지명할 만큼 뛰어난 정치력과 결단력을 어릴 때부터 보여준다.

압권은 카이사르의 옛 병사들을 앞에 두고 보여준,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 화끈함이었다.

◆1000데나리우스 보너스로 손에 넣은 군대

암살자 등 보수파가 카이사르 비난에만 너무 열 올리다가 여론의 외면을 당해 스스로 몰락한 뒤 로마 정계는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르파의 중지이자 당대 실력자인 안토니우스의 경쟁으로 흘러가게 됐다.

그들의 첫 경쟁은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그리스에 주둔해 있다가 귀국한, 카이사르의 옛 병사들을 두고 벌어졌다.

갈리아 원정부터 카이사르를 따라다니면 10년 이상 종군한 베테랑 병사들은 결국 칼로 결판나게 될 차후의 권력 투쟁에서 중요한 ‘엑스(X) 팩터’였다.

먼저 안토니우스는 병사들에게 데나리우스 은화 100닢, 즉 100데나리우스를 보너스로 제시했다.

그보다 인망도 뒤지고, 병사들과 함께 싸운 적도 없는 옥타비아누스는 깜짝 놀랄만큼 과감하게 나왔다. 무려 안토니우스의 5배, 500데나리우스의 보너스를 지른 것이었다.

아무리 옥타비아누스가 무명이라고 해도 이 정도 돈 차이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병사들이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기울자 당황한 안토니우스가 600데나리우스로 보너스를 올렸다. 그러자 옥타비아누스는 지체 없이 1000데나리우스를 외쳤다.

병사들의 평균 연봉이 140데나리우스에 불과하던 시절이다. 1000데나리우스면 무려 7년치 연봉이다. 카이사르의 옛 병사들은 옥타비아누스의 화끈한 보너스에 열광했으며, 너무 큰 지출을 꺼려한 안토니우스가 뒤로 물러나면서 이 경매(?)는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끝났다.

더 재미있는 부분은 옥타비아누스가 그다지 부자도 아니란 점이었다. 그는 귀족이긴 했지만, 평범한 가문 출신이라 가문의 재산은 하위권이었다. 개인 재산으로나 유력한 후원자들로나 안토니우스의 재력이 압도적이었다.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절친인 금융업자 마티아스에게 빌린 돈으로 자금을 충당했다. 빚으로 정치를 하면서 수만 병사들에게 어마어마한 보너스를 쏜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파산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위험한 수법이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화끈한 도박은 대성공으로 이어진다. 안토니우스처럼 수많은 정예 군단을 거느리고 있지 않은 그는 돈을 아낌없이 질렀기에 자신을 따르는 첫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

이후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의 반란 진압,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토벌, 안토니우스와의 ‘2차 내전’ 등에서 카이사르의 옛 병사들은 맹활약을 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쥐었다.

로마의 지배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 다시 평화를 안긴 공적 덕에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귀한 자)’라는 위대한 경칭까지 받았다. 그 뒤의 내정에서도 옥타비아누스는 위대한 업적을 쌓아 역사에 남을 후계자 선정으로 일컬어진다.

안토니우스처럼 돈을 아까워했다면, 얻을 수 없는 영광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때의 에피소드에 대해 역사가 프란츠 하이켈하임 등은 카이사르의 옛 병사들이 카이사르에게 심취해 있었기에 그가 후계자로 고른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미화해서 전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옥타비아누스를 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뜬 구름같은 의리가 아니라 눈앞의 돈이었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세계파이낸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유스피어 다온 '완벽한 비율'
  • 유스피어 다온 '완벽한 비율'
  • 조이현 '인형 미모 뽐내'
  • 키키 지유 '매력적인 손하트'
  • 아이브 레이 '깜찍한 볼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