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사 각오하고 떠난 길서 새 삶 찾아"

인생 팔십.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나이일까. 대한예수교장로회 화곡동교회 안수집사이자 시인인 한뫼 전규태(82) 박사는 아픈 과거를 본지에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연세대 국문과를 나온 그는 한양대 강사, 연세대 교수, 동대학 문과대학장, 미국 하버드대 옌칭 교수, 한국고전문학연구회장, 노산문학상 심사위원, 호주국립대 객원교수, 전주대 인문대학장,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부회장 등을 맡아 학자와 문인으로 화려한 인생을 펼쳤다. 저서가 100권, 역서까지 300권에 이른다. 땀 흘린 대가이다. 그런데, 승승장구할 것 같은 그의 이력에 65세가 되던 1998년부터 2010년까지 12년은 텅 비어 있다. 세상을 등지고 여행을 떠났던 기간이다. 췌장암으로 사망선고를 받았는데,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다.
“16년 전 가족 중 한 사람의 실수로 거액의 부채를 지게 됐지요. 저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길거리로 쫓겨났어요. 급기야 췌장암 판정까지 받아 췌장의 3분의 2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충격으로 부인은 집을 나갔고, 결국 이혼으로 이어졌다. 명예와 부, 가정, 건강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면서 전 박사는 이 세상에서 철저히 잊혀진 존재가 됐다. 간혹 노숙자가 됐다, 묘령의 여자와 도피했다, 북한에 납치됐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풍문만 나돌았다. 운명이라고 하나 드라마 같은 지독하게 기구한 삶이었다.
“1998년 7월 정년 퇴임식도 못하고 서울 삼성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어요. 주치의가 딸에게만 길어야 석 달 살게 될 거라고 하고, 제게는 ‘최후통첩’을 하지 않았지요. 단지 출가(出家)하는 심정으로 살라고 권고했어요.”
전 박사는 ‘출가’라는 말이 머릿속에 박혔다. 일단 속세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석주 스님을 찾아가 스님의 도움으로 국내 산사를 두루 돌아다녔다. 이어 공무원 연금을 일시불로 받아 세계여행을 떠났다. 그가 해외에서 4개월 만에 집에 전화를 했을 때, “어, 우리 아빠 살아계셨네?”하는 말에 자신이 3개월짜리 시한부 인생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때부터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객원교수로 있던 호주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세계를 몇 차례나 도는 긴 여행을 감행했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마존 등 오지를 많이 누볐다고 한다. 글쓰기는 중단했지만, 평소 해보고 싶었던 그림은 실컷 그려 화가 반열에 오를 정도가 됐다.
“스티브 잡스도 저와 똑같은 췌장암이 걸렸는데, 돈 많은 그는 ‘부유(富裕)’해서 죽었고, 돈 없는 저는 ‘부유(浮遊)’해서 살았지요.”
이 대목에서 전 박사는 각자의 주치의가 잡스에게는 모두 잊고 한 곳에만 집중하라고 해 잡스는 하던 일을 계속했고, 제게는 무조건 절필하고 떠나라고 조언했는데, 그 말이 적중했다고 부연했다. 지금도 그는 운명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 독신자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거주하며, 노인연금과 한국전 참전용사 수당 등 월 40만원이 안 되는 돈으로 근근이 살고 있다. 그러나 희망의 끈은 놓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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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규태 시인이 모교인 서울 종로구 경운동 교동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어린 시절을 잠시 회상하고 있다. |
“단테는 짝사랑했던 여인이 시집가서 아기를 낳다 죽자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던 죄책감에 ‘신곡’을 썼지요. ‘신곡’에는 이루지 못한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이 담겨 있어요. 저 또한 세상을 남달리 관조한 바를 여행기에 담았어요.”
내년 초에 나올 신간이 그의 운명을 조금이나마 바꿔 놓을지 모른다. 또 하나, 제2의 고향이 된 고양시에서 그를 위해 국내 처음으로 ‘여행문학관’을 세워줄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인생은 새옹지마라 하지 않던가. 2011년부터 ‘인생 2막’을 맞고 있는 그에게 헤세기행문학상 수상, 한국기독교문인선교회 회장, 환경미술협회 상임고문 등 소소한 이력이 다시 붙기 시작했다. 팔순이 되던 2012년에는 시인 김지하, 김규동, 이근배 등이 ‘경의선문학’을 통해 “용기를 잃지 말라”며 축서화를 보내줬다. 한 문학지는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아우른 전 시인에게 ‘한국의 대문호(大文豪)’라는 칭호를 헌사했다.
“저는 기독교 모태신앙이지만, 누가 이 시점에서 제게 묻는다면, 이 세상 모든 종교는 가치가 있고, 희망의 빛을 준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모든 것을 놓아버린 지금, 원망도 두려움도 사라지고 매사에 감사함만 남아 있어요.”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tol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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