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박한 피난에 나선 임금의 행렬을 위해 평소와 같이 길의 먼지를 닦을 여유는 없었다. 때로 임금을 향해 원망(怨望)의 외마디를 보내는 백성도 있었다. 무엄하게도 욕이라니, 길섶의 그 무엄한 외마디들과 함께 먼지를 뒤집어쓰시는 황공무지(惶恐無地·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름), 서글픈 풍경이다. 임금의 이런 행렬은 피난 또는 도망이라 하지 않았다. 먼지[塵]를 뒤집어쓴다[蒙], 몽진(蒙塵)이라고 했다. 절묘한 은유법(隱喩法)이다. ‘임금님 행렬이 마치 서리 맞은 노숙자들처럼 먼지를 뒤집어썼다’는 식의 직유법(直喩法)보다 더 독하다. 상상력을 띄우기 때문이리라.
시성(詩聖)이란 이름의 두보(杜甫)의 시 구절에서 이 몽진은 비롯됐다. ‘서경(장안)이 또 무너지니 (임금의) 푸른 가마는 먼지 뒤집어쓰고 나는 듯이 달려간다’(西京復陷沒 翠盖蒙塵飛·서경부함몰 취개몽진비)가 그 대목이다. ‘나라 망가졌으되 산과 강은 남았네’ 하는 시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의 그 당나라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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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 곤녕합 안에 복원해놓은 명성황후의 거처. 왜놈 껄렁패 무리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은 고종 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는 ‘아관파천’의 계기가 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사회과학적 개념을 빌려 ‘조작적(操作的) 정의’라고 할 수 있을지. ‘이 말을 이런 경우에 쓰도록 한다’는 (사회적) 약속에 의해 정해지는 용어라는 얘기다. 말이 활용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다.
왜적의 침입에 이순신 장군의 남도 수군과 영·호남의 의병들이 안간힘을 쓰며 분전(奮戰)할 때, 임금인 선조(재위 1567∼1608)는 하릴없이 북방으로 몽진을 다녔다. 단연 ‘몽진의 달인’이라 할 왕이었다. 몽진은 파천이라고도 한다. 몽진과 파천, 둘 다 아무에게나 쓸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예외도 없지는 않지만, 임금에게만 대개 쓰였다.
근대사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 바로 그 파천이다. 아관(俄館, 즉 아라사(俄羅斯) 공사관으로 고종과 황태자가 피난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공관으로 일시에 도망간, 큰 사건이다. 1896년 2월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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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임금의 ‘피난처’였던 아관, 즉 아라사(러시아)공사관 터에 1973년 복원한 공사관 건물의 탑 부분. 세계일보 자료사진 |
경복궁을 떠나 대포 등으로 무장한 아라사 공사관으로 친러파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를 타고 갔다. 먼지 뒤집어쓸 일은 없었다. 그래서 몽진 대신 파천이란 용어를 쓴 것일까? 이 경우 아무래도 몽진은 좀 어색하다. 역사를 적은 이들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명성황후가 궁궐에서 왜놈 껄렁패 무리의 칼에 어지럽게 찔리고 잘려 시해(弑害)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아관파천의 시발점이다. 이후에도 임금은 일본군의 위세에 위협을 느꼈다. 아내를 잃고도 살해범들이 무서워 벌벌 떨어야 했던 임금의 슬픈 황당함, 힘없는 나라 백성의 무력감, 역사와 그 역사를 적은 언어의 의미를 모르고서야 어찌 실감할 수 있을까.
유혈 낭자(狼藉)한 회오리가 조선 말기 정국에 몰아쳤다. 러시아 공사관의 고종은 친일파 대신들인 김홍집(총리대신)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장박 등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흥분한 군중들은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등을 때려 죽였다. 유길준 우범선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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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 곤녕합. 명성황후가 왜놈 껄렁패 무리의 흉악한 칼에 난도질 당해 시해된 비극의 장소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고려 고종 19년(1232년), 몽골 침입으로 강화도로 파천에 나선 왕이 개경(개성)을 떠나 예성강을 빠져나온 후 강화도 해역에 들어설 때의 상황. 바다 생김새가 이상하고 급류가 흐르는 곳에서 초조했던 왕은 뱃사공이 애먼 짓을 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의심했다.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이를 따라가면 절로 물길이 나온다는 손돌의 하소연도 무시하고 목을 베었다.
이후 왕의 배는 바가지 따라 험한 뱃길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비로소 제 잘못을 깨우친 왕은 장사를 지내 사공의 혼을 위로했다. 그 목을 벤 뱃길은 ‘손돌목’, 매년 음력 시월 스무날쯤 손돌의 원혼이 일으키는 거센 바람을 ‘손돌바람’, 이날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하는 말이 사공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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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침공 때 고려 임금의 파천과 뱃사공 손돌의 억울한 죽음 설화가 담긴 제사 의례 ‘손돌제’ 중 혼을 위로하기 위한 바라춤. 김포문화원 제공 |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장 ceo@citinature.com
■사족(蛇足)
피난 대신 몽진이나 파천이라 하는 것과 비슷한 왕조시대의 어법 중 또 한 가지 ‘휘를 피한다’는 기휘(忌諱) 얘기다. 휘(諱)는 돌아가신 임금과 같은 높은 인물의 이름 즉 휘자(諱字)다.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괘씸죄 1호’였겠다. 천벌을 받을 짓이라고도 했겠다. 이 휘와 흐지부지가 친척간이라네. 왜?
휘지비지(諱之秘之), 그 이름[諱]이 사람들의 입살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이를[之] 감춘다[秘]는 말이었다. 그러나 꽁꽁 싸맨 것도 시간 흐르면 풀어지는 법, 휘지비지의 뜻도 풀어지고 발음 또한 편할 대로 흐지부지로 바뀌었다. ‘확실하게 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하게 넘어가거나 넘기는 모양’이란 뜻이 됐다. 유야무야(有耶無耶)와 비슷하다.
토박이 우리말이라고 여기며 쓰는 말인데 그 본디를 찾아보면 이렇게 중국 문자의 한국말 버전인 한자(漢字)의 변형인 경우가 적지 않다. 한자는 중국어가 아니고 우리말의 한 부분인 것이다.
우리 역사가 열린 시점부터 중국 대륙의 사람들과 우리 조상들은 말과 문자의 상당 부분을 함께 만들고 나눠 써왔을 것으로 학계는 본다. 비교적 최근인 570년 전쯤 세종대왕과 그의 학자들은 그때까지 써 온 한자도 섞어서 쓰기 좋은 새 문자 체계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그 혼용의 멋진 시범이다.
피난 대신 몽진이나 파천이라 하는 것과 비슷한 왕조시대의 어법 중 또 한 가지 ‘휘를 피한다’는 기휘(忌諱) 얘기다. 휘(諱)는 돌아가신 임금과 같은 높은 인물의 이름 즉 휘자(諱字)다.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괘씸죄 1호’였겠다. 천벌을 받을 짓이라고도 했겠다. 이 휘와 흐지부지가 친척간이라네. 왜?
휘지비지(諱之秘之), 그 이름[諱]이 사람들의 입살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이를[之] 감춘다[秘]는 말이었다. 그러나 꽁꽁 싸맨 것도 시간 흐르면 풀어지는 법, 휘지비지의 뜻도 풀어지고 발음 또한 편할 대로 흐지부지로 바뀌었다. ‘확실하게 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하게 넘어가거나 넘기는 모양’이란 뜻이 됐다. 유야무야(有耶無耶)와 비슷하다.
토박이 우리말이라고 여기며 쓰는 말인데 그 본디를 찾아보면 이렇게 중국 문자의 한국말 버전인 한자(漢字)의 변형인 경우가 적지 않다. 한자는 중국어가 아니고 우리말의 한 부분인 것이다.
우리 역사가 열린 시점부터 중국 대륙의 사람들과 우리 조상들은 말과 문자의 상당 부분을 함께 만들고 나눠 써왔을 것으로 학계는 본다. 비교적 최근인 570년 전쯤 세종대왕과 그의 학자들은 그때까지 써 온 한자도 섞어서 쓰기 좋은 새 문자 체계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그 혼용의 멋진 시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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