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애의 영화이야기] 누구에게나 가슴 속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들의 일상 가까운 곳에서 웃음과 감동을 안겨주는 매체로 자리매김해왔다. 한국영화 관객 1억명 시대가 활짝 열렸지만, 지금의 멀티플렉스 상영관에서는 차마 느낄 수 없는 '그때 그 시절' 추억 속 영화관 풍경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충무로의 옛 풍경은 어땠을까. 예전 극장 동시상영관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지금은 희미해진 추억의 한 단면, 영화와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함께 공유해보는 깨알같은 재미의 칼럼을 격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요즘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충무로 입성’ ‘충무로 진출’ 등의 표현은 충무로로 이사했다는 뜻이 아니라 영화계에 진출했다는 의미다. 충무로는 주로 한국영화, 한국영화계, 한국영화판을 일컬을 때 사용되는 단어다.
충무로는 서울 중구 충무공 이순신의 생가 근처에 위치한 길 이름이기도 하다. 아마도 충무로 근처에서 한국영화 관련 일들이 주로 이루어지던 때에 자연스럽게 ‘충무로는 한국영화계’라는 등식이 성립된 듯하다.
그런데 막상 그 충무로가 어디쯤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저 서울 지하철 3호선과 4호선 환승역인 충무로역 근처라고 추측할 뿐이다.
충무로역에 가보면, 지하철역사 내 대종상 관련 사진들과 대한극장 이외에는 한국영화와 관련된 무언가를 더듬어 내기가 쉽지 않다. 이 근처가 정말 왕년에 한국영화의 중심지였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사실 충무로는 종로나 을지로, 대한극장이 위치한 퇴계로에 비하면 좁은 길이다. 대로보다는 골목에 가깝다.
신세계백화점 본점 부근에서 충무로 1가가 시작돼 중앙우체국 옆길로 이어져 세종호텔 뒤 부근이 2가인데 여기까지는 명동 지역이다. 최희준의 노래 '진고개 신사'의 진고개가 그 부근이다.
삼일대로, 즉 백병원이 있는 대로를 건너 중부경찰서 뒤편부터 얼마 전 개관한 티파크 호텔 옆길이 충무로 3가, 지하철 충무로역이 있는 퇴계로의 북쪽 그러니까 을지로 쪽 길이 충무로 4가 부근이다.
이 중 남산한옥마을에서 길을 건너 혹은 충무로역 을지로 3가 쪽으로 가다보면 중간쯤에 위치한 충무로3가 지역이 바로 1950년대 후반부터 영화제작사, 수입사, 배급사, 녹음실, 편집실 등 영화 관련 회사들이 밀집되기 시작했던 ‘한국영화판 충무로’였다.
언제부터 왜 충무로에 영화인들이 모였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필자는 그 중 충무로의 위치가 영화 일을 하는데 적합했다는 의견에 가장 수긍이 간다. 명동에 비해 건물 임대료가 저렴했다는 것 등 다른 여러 이유들도 있지만 말이다.
쉽게 상상이 되진 않겠지만, 1980년대 후반 강남 지역에 영화관이 생기고, 1990년대 후반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탄생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영화는 서울시내 극장 1곳에서 개봉됐다. 한국영화든 외국영화든 예외가 없었다.
개봉관-재개봉관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고 그에 따라 영화관의 파워는 막강했다. 당시 대부분의 개봉영화관들이 종로, 을지로, 충무로 부근에 위치했었다.
충무로 3가 부근에는 스카라극장(현 아시아미디어), 그 대각선 방향에 명보극장, 충무로2가 부근에 중앙극장(현재 폐쇄), 충무로4가 부근인 퇴계로에 대한극장, 을지로4가에 국도극장(현 국도호텔), 을지로2가에 을지극장(폐쇄), 그리고 걸어서 가기에 무리가 없는 종로3가에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서울극장, 종로2가에 허리우드극장, 세종로에 아카데미극장(현 코리아나 호텔) 국제극장(현 동화면세점) 등이 있었다.
당시 유일한 영화 매출 창구였던 개봉관들과 가까운 위치에 한국영화의 중심지가 위치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1960~70년대에는 연간 100편이 훌쩍 넘는, 어떨 땐 200편을 넘는 한국영화가 제작됐다.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제작하도록 한 영화법 때문에 연 100편이 넘는 한국영화는 계속 제작되어야 했으니, 일정 수 이상의 제작인력이 필요했고, 그들이 일할 공간이 필요했다. 영화를 수입하거나 배급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원로 영화인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충무로에 나가면 모든 볼 일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만나야할 사람들이 대부분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충무로 3가 인근에 위치한 스타다방이나 청맥다방에 가보면 감독이나 배우들부터 많은 영화인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인근 골목 여관에는 시나리오 작가들이 장기투숙 중이었다고 한다. 새벽에 대절버스를 타고 촬영을 떠나는 영화인들을 상대하는 식당들도 많았고, 미장원, 의상실들도 많았다고 한다. 충무로3가에 들어서면 골목 가득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 대부분은 영화인들이었다.
1980년대부터 충무로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한참 한국영화가 바닥을 치고, 대작 미국영화는 직배사가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썰렁해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이 되면서 영화사들도 강남 등 다른 지역으로 이전했다. 국제극장, 국도극장, 을지극장, 스카라극장, 단성사를 비롯해 많았던 소형 영화관들도 대부분 사라진 지금의 충무로는 더 이상 영화인들이 모여서 일하는 공간이 아니다.
영화인들이 떠난 충무로는 주변 상업건물 근무자 상대 먹자골목이자, 출판 인쇄소나 사진 관련 업장들이 있는 지역일 뿐이다.
몇 년 전에는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도 개최하고, 충무로영화의 거리 등을 조성하는 등 충무로 재건을 위한 노력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충무로는 더 이상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 됐다.
충무로는 해방 후 도로명이 개정되면서 인근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가가 위치했다는 이유로 지어진 이름이다. 해방 전에는 일본인 지역이었고, 더 이전에는 서울 도심 외곽 지역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도로 명으로 주소가 개편되면서, 그 ‘충무로’는 ‘수표로 몇 길’ 식으로 이름도 바뀌었다.
앞으로 ‘충무로’라는 이름은 그저 충무로역에서 을지로3가역 사이 도로 명으로만 남게 됐다.
어차피 모든 것은 생겨났다가 사라진다지만, 지금도 여전히 한국영화계로 통하는 충무로 지역에 옛 시절을 기억할 수 있는 흔적이 지나치게 사라진 것 같아 아쉽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거리에 1927년에 개관해 지금도 영업 중인 맨즈 차이니스 시어터와 그 앞 인도에 점점 늘어나는 영화인들의 핸드프린팅이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지금 아시아미디어센터 자리에 있던 스카라극장은 지난 1930년 개관한 유서깊은 영화관이었다. 2005년 문화유산 등록이 예정되자 건물주가 허물어버렸다. 건물의 앞쪽 외관이라도 살려 놓았다면 어땠을까하는 상상도 하게 된다. 결국 무언가의 가치나 역사적 의의는 사람들이 공유하면서 만들어내는 것인데 말이다.
서울문화재단은 ‘메모리인 서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충무로에 대한 기억을 수집하고 있다. 1960~70년대 충무로에서 일하거나 거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집중 인터뷰는 올해 말 영상과 책자로 완성될 예정이다. 지상파 방송사를 통해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예정이라고도 하는데, 잊혀져가고 있는 충무로에 대한 기억들이라도 오랫동안 보존되길 바라본다.
서일대 영화방송과 외래교수
사진=네이버 지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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