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은한 마름 종이에 포개진 에세이집은 지난해 7월부터 11월까지 ‘웹진문지’에 연재한 41편의 글을 묶은 것으로, ‘그’와 ‘그녀’의 시간 속에서 서로 엇갈리거나 마주보거나 교차하는 사랑의 여러 흐름이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담겨 있다. 1인칭의 에세이 같기도 하고 3인칭의 등장인물이 이야기를 이끄는 소설 같기도 해 ‘픽션 에세이’쯤 불려도 무방해 보인다.
각 에세이는 사랑의 표면이거나 사랑의 속내를 드러낸 시 한 구절에서 이미지를 따온 뒤 사랑의 다채로운 이미지, 단상을 큰 흐름 속에 자유롭게 풀어놓는 방식을 취한다. 예컨대, 허수경씨의 시 ‘혼자 가는 먼 집’에서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이라는 구절을 가져온 뒤 ‘당신’이라는 호칭을 둘러싼 사유의 편린을 드러낸다.
“둘만의 작은 공간에서 깊게 흔들리는 눈을 들여다보고 ‘너’라는 이름을 부르거나, 한 사람만을 위한 은밀한 언어들을 메일로 보낼 때, 그들은 완벽하게 세상과는 절연된 2인의 왕국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41쪽)
하지만 독특한 형식 속에 녹아 있는 시적인 이미지와 간명한 서사 ‘너머’를 봐야만 제대로 에세이를 읽을 수 있다. 바로 사랑한 이후의 슬픈 풍경까지 엿본 자의 통찰 또는 사유이다. 호칭에 대해 이어지는 사유 한 토막.
“‘나와 너’ 사이의 이 가슴 벅찬 관계의 직접성은 영원할 수 없다. ‘너와 나’의 시간은 순식간에 허공으로 사라진다. 2인칭은 언제든 날아가버릴 수 있는 휘발성이 강한 호명이다. 그 완벽한 호명의 순간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함이 스며들어 있다.”(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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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비평가인 이광호는 최근 펴낸 사랑에 관한 에세이집 ‘사랑의 미래’에서 ‘그’와 ‘그녀’의 시간 속에서 서로 엇갈리거나 마주보거나 교차하는 사랑의 여러 흐름을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보여준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
“사랑은 단번에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이별이 단 하나의 선명한 얼굴을 가졌다면, 사랑도 이렇게 남루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별은 언제나 허술하고 보잘것없었으며, 사랑이 그러하듯이 영원하지도 않았다.”(232쪽)
그렇다면 이씨는 ‘사랑의 미래’를 믿고 있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채 풀리지 않을 때, 에세이집의 마지막 글에서 작은 힌트이자 위로를 얻을 수도 있겠다.
“사랑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미래를 향해 떠날 수 있다. 어떤 희망도, 어떤 목적도, 어떤 대가도, 어떤 이름도 없이.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가 어딘가에 남아 있고, 그 하늘의 늙은 그림자 아래서 ‘당신’이 늦은 아침밥을 먹고 있다면, ‘나’도 한 숟가락의 밥을 뜨고 다시 길을 나설 수 있다.”(238쪽)
요컨대 이씨의 에세이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다른 방법에 대한 탐색쯤 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에 대해 또 말하려는 게 아니라 사랑을 다르게 사유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가 “여전히 저 진부하고 상투적인 ‘사랑’에 대해 아직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다”(9쪽)고 한 이유다.
김용출 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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