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측근이 원수고, 재벌은 핏줄이 원수다.” 그제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한 말이다. 원내대표 임기를 마치면서 ‘권력무상’의 속성을 언급한 것이지만, 그가 굳이 ‘재벌’을 곁들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게다. 정치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박 대표의 다분히 계산된 발언이라는 얘기다. 끊이지 않는 핏줄 간의 경영권 다툼이 국민경제에 작지 않은 폐해를 끼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그렇다. 권력과 재벌을 동시에 겨냥한 촌철살인인 셈이다.
핏줄이란 통상적으로 한집안의 혈통을 말한다. 부모와 자식, 형제가 같은 핏줄로 연결된 관계다. 흔히 ‘천륜’이라거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혈연관계는 끈끈하다. ‘형제 사이도 돈에서는 남이다’는 속담도 있다. 핏줄 간에 돈과 권력이 개입되면 상황은 달라진다는 얘기다. 돈 앞에서는 혈연도 철천지원수가 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돈, 돈,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슬픈 일들이 일어나는가”라고 했다. 돈 때문에 천륜을 끊은 이들을 두고 한 말일 게다.
요즘 재계 호사가들 사이에선 재벌가의 혈육전쟁이 화제다. 돈 앞에선 부모형제도 없는 재벌가의 핏줄 다툼이 끊이지 않는 탓이다. 실제 창업주가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작고하는 사례가 늘면서 형제간의 다툼도 늘고 있다. SK그룹이 최근 사촌 간에 계열분리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가 하면,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형제간 다툼도 진행 중이다. 한두 차례 핏줄전쟁을 치른 현대, 한진, 한화 등의 재벌가도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내로라하는 재벌가 중에 가족 간 분쟁을 벌이지 않은 기업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핏줄이 원수로 변한 것이다.
재벌가 핏줄전쟁의 폐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가족분쟁은 계열분리와 사업확장으로 이어지면서 중소기업의 생존을 위협한다. 쪼개진 회사를 키우려는 욕심에 중소업체 영역까지 무차별로 손을 뻗치기 때문이다. 그룹 내 계열사에 일감 몰아주기 폐해도 심각하다. 재벌가의 핏줄전쟁으로 애꿎은 중소기업만 멍들고 있는 것이다. 경영세습도 모자라 문어발식 영토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국민들이 재벌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리 없다. 사회적 책임경영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선진 글로벌 회사들과는 천양지차다. 회사를 대물림하기보다는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창업 일가는 후선에서 지원하는 그런 재벌을 보고 싶다.
김선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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