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얼굴만을 그리는 작가 박진홍(40). 캔버스 위엔 유화물감의 붓질 자국이 거칠게 드러나 있다. 얼굴들은 그려진 것인지 망쳐진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한 흔적들만이 엉켜 있다. 그래도 동료 작가들은 그의 그림을 두고 회화적 맛이 있다고 주저 없이 격찬한다. 장식성 그림이 판치고 있는 미술판에서 작가 자존심의 보루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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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자화상 앞에 서 있는 박진홍 작가. 그에게 얼굴 그림은 인간탐구의 여정이나 다름없다. |
전시장에 걸려 있는그림들을 둘러보면서 일본의 카프카로 불리는 아베 고보의 소설 ‘타인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소설은 사고로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은 남자가 ‘타인의 얼굴’을 한 가면을 쓰고 일어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험실 액체질소 폭발로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은 남자 주인공 ‘나’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린 얼굴로 자기 자신과 타인을 연결하는 통로가 차단되었다고 생각한다. 본래의 얼굴을 되찾기 위해, 나아가 인간관계를 회복하고자, ‘나’는 ‘타인의 얼굴’을 한 인간의 피부와 똑같은 가면을 만든다.
완성된 가면을 쓰고 타인으로 변신한 ‘나’는 아내를 유혹하고, 그녀가 유혹당하는 것을 보고 가면에 질투를 느낀다. ‘나’는 가면에 몸을 허용한 아내를 단죄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결국 ‘나’는 모든 사실을 고백하려고 아내에게 설명자료로 쓴 수기 형식의 노트 세 권을 보내고, 이 노트가 소설의 줄거리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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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의 표정까지 담고 있는 작품 ‘얼굴’. |
얼굴엔 또 다른 요소도 있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좋든 싫든 천의 얼굴이 필요한 시대다. 얼굴이라는 것은 흔히 표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표정은 타인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방정식 같은 것이다. 자기 자신과 타인을 연결해 주는 통로 말이다.
그런데도 그는 오늘도 붓과 나이프로 유화물감을 버무려 감히(?) 얼굴을 그리려 한다. 감각적인 붓질의 난무와 현란한 색채의 조화가 일품이다. 인간의 얼굴이 지닌 불가지의 영역을 시각화하고자 하는 중첩된 고뇌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얼굴 그림은 제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지요.” 결국 그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을 들여다볼 것을 환기시켜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종의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통해 인간 소외, 자아 정체성 상실 등 현대 사회의 문제를 심도 있게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17일까지 갤러리 이즈. (02)736-6669
편완식 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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