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불구 일본 폐쇄성에 상처입어 얼마 전 일본에선 평양에서 타전된 사진 한 장이 큰 화제였다. 북한을 방문 중인 곰보자빈 잔단샤타르 몽골 외무장관 일행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촬영한 기념사진 때문이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일본 스모의 요코즈나(橫綱·천하장사)로 군림했던 아사쇼류(朝靑龍)가 그 속에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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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 도쿄 특파원 |
그는 올해 초 스모대회 기간에 음주폭행 사고를 일으키고 이를 감추기 위해 거짓말까지 했다는 비난에 몰려 지난 2월 초 스모판을 떠났다. 기자회견을 통해 자발적으로 은퇴를 선언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내용적으로 사실상 강제퇴출된 것이다.
아사쇼류의 본명은 드르고르스렌 다그와드르지로, 몽골어로 ‘월요일의 행복’이라는 뜻이다. 몽골씨름 선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7살에 도일했다. 힘든 연습생 생활을 거쳐 1999년 정식 데뷔한 뒤 스모판에서 승승장구했다. 신장 184㎝, 몸무게 154㎏으로 스모판에서는 체구가 작은 편에 속했지만 화려한 기술로 신장 2m, 체중 200㎏이 넘는 거구들을 연달아 제압했다.
밀어내기 위주의 단순한 경기가 주류를 이뤘던 스모판에서 그는 한국 씨름에서나 볼 수 있는 들배지기나 뒤집기 같은 역동적이고 호쾌한 기술을 구사하며 은퇴 전까지 무려 25차례 우승했다.
하지만 그는 현역 내내 일본 언론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렸다. 2003년 이후 일본인 요코즈나가 완전히 사라진 스모판에서 ‘후진국’ 몽골 선수가 활개를 치는 모습이 곱게 보였을 리 없다. 언론들은 그가 승리할 때마다 두 주먹을 치켜올리며 포효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에 대해 요코즈나의 품격을 해쳤다고 비난했다. 패배자를 배려하지 않는 오만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승부조작과 음주, 여자관계, 후배 폭행, 꾀병 소동 등 그와 관련된 추문이 끊임없이 지면을 장식했다. 직설적 성격의 아사쇼류는 언론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흥분했고 그것이 또 다른 비판으로 이어졌다.
언론의 폭로가 사실인 것도 있지만 과장, 왜곡된 것들이 많았다. 은퇴의 발단이 된 음주폭행사건도 최근 뒤늦게 내막이 알려지면서 아사쇼류의 억울함이 부각되고 있다. 폭행을 당했다고 알려진 식당 주인은 언론 보도와 달리 일반 시민이 아니라 야쿠자 출신이며 먼저 아사쇼류에게 시비를 걸었고, 아사쇼류는 주먹을 사용하지 않고 완력으로 제압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만취해서 일반시민을 마구 때렸다’식의 보도는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아사쇼류는 최근 두달이나 지나 뒤늦게 몽골까지 찾아와 ‘왜 사건 당시 언론에 그런 사실을 밝히지 않았냐’는 한 언론의 질문에 “당시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냥 안고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재일동포들 중에는 아사쇼류를 보면서 재일동포 프로레슬러 역도산(力道山)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함경남도 출신인 역도산의 본명은 ‘김신락’이다. 기골이 장대한 장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938년 16살 때 지역 씨름대회에서 성인들을 꺾고 3등에 올랐다. 그의 소질을 높게 평가한 일본인 경찰관의 주선으로 18살 때 현해탄을 건넜다.
그는 타고난 소질과 노력으로 연습생에서 스모계의 3번째 등급인 세키와케까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스모협회의 태도가 달라졌다. 승급요건을 갖췄는데도 ‘품격이 떨어진다’는 등의 이유로 번번이 그를 승급에서 제외했다. 조선인이 너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흥행상 좋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다혈질인 역도산은 협회 사무실을 찾아가 집기를 때려부수며 거칠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마침내 그는 1950년 은퇴한 뒤 한동안 방황하다가 프로레슬링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올해로 역도산이 스모판을 떠난 지 딱 60년이 된다. 그런 해에 가난한 나라 몽골 출신의 아사쇼류가 스모판에서 ‘이지메’(집단 괴롭힘)로 내쳐지는 모습은 일본 스모, 아니 일본 사회가 겉으로는 외국인들을 받아들여 국제화된 듯 보이지만 내부에는 아직도 뿌리 깊은 폐쇄성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읽힌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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