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교수 자리 울타리를 벗어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관계나 정계로 가면서도 교수 자리는 버리지 못하는 게 우리의 실정이다. 그에게는 허울만 멀쩡한 교수 자리는 의미 없었다. 캠퍼스를 벗어난 이후 그는 홀가분해했다. 그리고 변해갔다. 자연과 사람이 합일된 상태로 도시건축물이나 공업단지는 들어올 자리가 없다는 예전 주장도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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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조 교수는 풍수는 당시의 상황에 맞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논한 옛사람의 지혜라고 여긴다. 그는 “풍수에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의 삶이므로 자연과 사람이 친화하는 최고의 방법을 찾는 게 진정한 풍수의 길”이라며 “내가 편하게 여기는 곳이 최고의 명당”이라고 설명한다. 송원영 기자 |
설과 정월대보름으로 연결되는 명절을 앞두고 그를 만났다. 신도림역 인근에 자리한 그의 집은 아파트다. 배산임수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연친화적인 거주지에 사는 게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풍수 전문가에는 안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굳이 질문은 하지 않았다. 2006년 ‘도시풍수’를 내놓고 “단칸방에서도 명당을 찾을 수 있다”고 했던 그를 아는 까닭이었다. ‘도시 풍수’의 부제는 ‘도시, 집, 사람을 위한 명당이야기’였다. 사람 사는 곳이 바로 풍수의 대상이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땅 못지않게 그 위에 의지해 사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아파트이지만 1층이어서 창문과 아파트 정원이 그대로 연결됐다. 62평인 아파트의 거실은 난초와 식물이 가득했다. 거실 가운데에서 그는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기자의 방문을 받자 거실에 있던 구순인 그의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갔다. “형님이 가족여행을 떠난 동안 어머니를 모시고 있어요. 나이가 들면 밖에 나가는 게 투쟁인 상황에서 어머니에게 집은 명당이지요. 그중에 ‘어머니의 방’은 최고의 방일 것이고요.”
거실에 경찰간부로 보이는 아들과 앳된 딸의 사진이 걸려 있다. “지방대 나온 아들이 3년만 투자해 달라고 하더니, 경찰 간부시험에 합격했어요. 딸은 공무원 잘 다니다가 저 하고 싶은 공부하고 싶다면서 대학원에 갔고요. 아이들이 하겠다는 대로 하는 편입니다.”
자녀는 풍수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어땠을까. “아버지는 풍수를 혐오했어요. 72세에 돌아가셨는데 당신이 개간하던 땅에 묻혔어요. 정북향이어서 지관들이 와서 절대로 묏자리를 쓰면 큰일난다고 했지만, 우리 형제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전 뜻을 따랐어요. 평생 자신이 일군 땅을 좋아하셨으니, 그런 땅에서 편안해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아들은 “아버지가 서울대에서 잘렸으니 집안에 큰일이 난 것”이라고 했지만, 최 교수는 “서울대는 스스로 나온 것”이라고 반박했다. 아버지의 산소가 자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라는 응대인 셈이다. 그는 서울대를 그만둔 것은 애초에 결정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전북대에서 서울대로 옮길 때에도 그리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서울대 교수의 내놓은 발언 파장을 염려했고, 저를 잘 아는 어느 교수도 (제가) 서울대에서 버텨내기 힘들 것이라고 조언했고…. 그런데 지금은 주중대사로 있는 류우익 당시 서울대 교수가 대학 선배였는데, 왜 서울대로 안 오느냐며 강권하다시피 했지요. 서울에 계시던 어머니도 올라오라고 했고요.”
서울대 사직은 동양의 풍수가 갖는 특성이 영향을 미친 점은 분명히 있다. 서양의 지리학은 계량화가 가능하지만 풍수는 철저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풍수가 돌쇠에게는 들어맞지만, 먹쇠에게는 안 맞을 수 있어서다. 객관화할 수 없는 것을 수치로 객관적으로 설명하라는 학계 분위기에 자유스러운 사상을 지녔던 그가 힘들어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영어를 잘 못하는데, 영어를 무작정 요구하는 분위기도 싫었다고 고백했다.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전화가 걸려왔다. 대개는 방송 출연을 요청하는 전화로 보였다. “방송에 잘 안 나가요. 나가서 내 생각을 말하는 것에 큰 흥미를 못 느끼고, 대인기피증은 여전해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대인기피증이 심해서 땅과 자연을 바라보는 게 더 각별했던 것은 아닐까. 다른 질문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그가 땅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면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말도 길어졌다. “땅도 사람 대하는 것과 똑같아요. 동일인이라도 대하는 사람에 따라 관계가 달라지듯, 땅도 사람에 따라 의미가 제각각입니다. 이 땅은 이 사람을 만나면 좋지만, 저 사람을 만나면 안 된다는 말이 가능하지요. 왜 일이 안 풀리면 땅에 책임을 떠넘기는 줄 모르겠어요. 목수가 연장 탓하고, 배우가 무대 탓하면 좋아보이질 않잖아요.”
그는 중국의 풍수는 발복을 빌었지만, 도선국사 이전의 신라시대까지만 해도 우리 풍수에는 발복 신앙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음택풍수가 점차 세를 확대하면서, 우리 땅이 병들었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그는 아픈 사람의 몸에 침을 뜨듯이, 병든 땅을 고쳐주자고 제안한다. 그의 제안은 ‘치유의 풍수’로 고쳐 부를 수 있다. 대신 풍수를 신비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단언한다. “청주공항이 들어설 때 인근에 ‘비상리’라는 마을이 있다고 흥분했어요. 오래전에 공항이 들어올 운명을 지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곳은 새들이 많이 모여 뜨고 사라진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에요. 공항과 하등 상관이 없는 이름인데, 사람들이 신비롭게 믿고 싶었던 것이지요.”
명절에 즈음해서인지 조상의 산소에 대한 생각도 풀어놓았다. 그는 “자손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이장을 해도 좋다”면서 “풍수도 사람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통으로 이어져 오던 풍수사상과 궤를 달리하면 다른 풍수대가들의 비판을 받을 수 있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풍수도 결국 사람 편하게 하자는 것이고 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령 환경심리학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조상의 산소를 방문하면서 명당에 대해서도 생각하지만, 조상의 고마움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독자적인 영역을 벗어나 주변 학문과 접변하면서 가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건축과 환경, 조경 분야를 중심으로 풍수가 논의되고 토론되는 현상도 그런 흐름의 일부다.
이제 한국에서 시골은 거의 사라졌다는 그는 “명당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라고 재차 강조했다. 사람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풍수대가로서 자신의 묏자리는 봐 두었을까. “우리 형제자매는 모두 할아버지 묘지 옆에 수목장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어요. 풍수가 결국 사람과 자손을 포함한 세상을 이롭게 하자는 것인데, 세상을 떠나면서 남은 이들에게 이롭기에는 수목장만 한 게 없을 거예요.”
bali@segye.com
■최창조 교수는…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1950년 서울 출생. 서울대 지리학과와 서울대 대학원 지리학과 졸업. 국토개발연구원 주임 연구원을 거쳐 청주사범대 지리학과 교수와 전북대 지리학과 교수를 지냈다. 1992년 서울대를 사직하고, 전국 각지를 둘러보았다. 배산임수의 전통 풍수는 의미가 약해졌다며, 도시 속에서 명당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저서
‘최창조의 새로운 풍수이론’ ‘도시 풍수’ ‘한국의 자생풍수‘ ‘한국의 풍수지리’ ‘좋은 땅은 어디를 말함인가’ ‘땅의 눈물, 땅의 희망’ ‘닭이 봉황 되다’ 등.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1950년 서울 출생. 서울대 지리학과와 서울대 대학원 지리학과 졸업. 국토개발연구원 주임 연구원을 거쳐 청주사범대 지리학과 교수와 전북대 지리학과 교수를 지냈다. 1992년 서울대를 사직하고, 전국 각지를 둘러보았다. 배산임수의 전통 풍수는 의미가 약해졌다며, 도시 속에서 명당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저서
‘최창조의 새로운 풍수이론’ ‘도시 풍수’ ‘한국의 자생풍수‘ ‘한국의 풍수지리’ ‘좋은 땅은 어디를 말함인가’ ‘땅의 눈물, 땅의 희망’ ‘닭이 봉황 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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