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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불안한 미래 스스로 준비 ‘프레퍼족’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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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1-10 21:22:56 수정 : 2010-01-10 21: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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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재난 몸살 앓는 지구촌… ‘생존주의’ 뜬다
美蘇냉전·Y2K 장애·911테러 등 위기 때마다 부상
온난화 역풍·신종플루 등 위협에 대안 제시 ‘긍정적’
장면#1=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교외에 사는 리사 베드폴드는 전형적인 ‘사커맘(자녀의 방과후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중산층 주부)’이다. 부엌용품 판매업에 종사하며 짬짬이 시간을 내 두 자녀의 하교 후 활동을 챙긴다. 그런데 그가 운전하는 승용차 트렁크를 열면 긴장감이 감돈다. 구급약과 비상식량, 담요, 지혈대 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위급상황에서도 72시간 동안 생존할 준비가 돼 있는 상태다. 집안 침실에는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미리 싸놓은 여행가방과 현금이 침대 옆에 놓여 있다.

장면#2=덴마크 시사만화가 쿠르트 베스터가르트는 지난 1일 밤 현관문과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에 잠을 깼다. 도끼를 든 괴한이 집에 침입한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난 베스터가르트는 같이 사는 다섯살배기 손녀를 안고 황급히 ‘패닉룸’으로 뛰어들어갔다. 5년 전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마호메트) 풍자 만평을 그린 뒤 시작된 살해 위협 때문에 욕실을 개조해 만든 안전시설이었다. 괴한은 특수 제작된 패닉룸 문을 부수느라 안간힘을 썼고, 그동안 경찰이 출동해 그를 체포했다.

본인과 가족을 뜻하지 않은 위협으로부터 스스로 지키려는 생존주의자(Survivalist)들이 최근 늘어나고 있다. 테러와 자연재해, 세계 경제위기 등 개별 국가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곳곳에서 불거지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호소하는 현대인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최근 수년 새 생겨난 생존주의자는 불안한 미래를 준비한다는 뜻에서 자신들을 ‘프레퍼(preppers)’라고 부른다고 미 시사주간 뉴스위크가 최근 보도했다.

◇1950년대 핵대피시설                                         ◇1960년대 방공호
<뉴스위크 제공>
◆생존주의자의 부활=생존주의의 역사는 깊다. 생존주의 1세대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기였던 1950∼60년대가 정점이었다. 미·소 간 핵전쟁 위협이 고조되면서 많은 미국인이 집 앞마당에 방공호나 대피시설을 짓고 식량을 비축했다.

2세대는 세기말을 앞둔 1990년대가 최고조였다. 2000년 밀레니엄버그(Y2K)로 컴퓨터 전산 장애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전 세계가 혼돈의 상태로 빠질 것을 두려워한 많은 사람들이 집안에 비상식량 등을 준비했다. 심지어 미국 정부도 5000만달러를 들여 Y2K 위기센터를 설립했다. 새천년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2001년 전대미문의 9·11테러로 증폭됐다.

3세대 생존주의자인 프레퍼는 최근 등장했다. 지난 몇년 동안 미국을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인도네시아를 덮친 지진해일(쓰나미), 중국 쓰촨(四川) 대지진 등이 잇따랐다. 수십만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자연재해 앞에 강대국과 후진국의 구분은 없었다. 국제사회가 8년 이상 벌여온 ‘테러와의 전쟁’도 세계인을 테러 공포로 몰아넣었다.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내몰렸고, 신종인플루엔자A(H1N1·신종플루)가 세계적으로 대유행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사람이 대규모 재난·재해에 무기력한 국가 권력의 실상을 목도하면서 미래 재앙에 대한 국가의 대응 능력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스로 ‘준비’에 나섰다. 텍사스대학 인지·정신과학자인 아트 마크맨은 “많은 사람이 언론 보도와 인터넷 정보를 통해 대재앙이 다가온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1990년대 Y2K 대비                                              ◇2000년대 가정용 대피소
<뉴스위크 제공>
◆사회 불안의 척도=프레퍼들은 과거 생존주의자와는 차이를 보인다. 과거 생존주의자는 남성이 많았다. 대부분 교외로 나가 오두막 등을 짓고 야외생활을 했다. 총으로 무장하고 몇달치 식량을 잔뜩 비축해 두었다. 음모론에 귀를 기울이고 종말론을 설파했다. 이 때문에 반정부주의자 또는 괴짜로 취급받기도 했다.

프레퍼들은 다르다. 비상식량과 구급약 등을 준비하는 것은 전과 마찬가지지만 더 이상 외진 곳으로 숨지 않는다. 이들은 우선 과거 생존주의자가 만들어온 선입관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생존주의자’ 대신 ‘프레퍼’라고 스스로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들은 많은 정보를 취합해 위기 수준과 구호단체의 한계를 예측한다. 그리고 준비를 통해 위기 시 독자 생존 확률을 높인다.

프레퍼가 되는 이유도 다양하다. 음모론보다는 경제 위기나 신종플루의 습격과 같은 현실적인 위협을 우려한다. 유전자조작식품(GMO)의 폐해를 걱정하는 프레퍼가 있는가 하면, 인터넷 등에 자신의 신상정보가 노출되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도 있다. 미 프레퍼 네트워크 설립자인 톰 마틴은 “세상에는 너무 많은 변수와 잠재적인 재앙이 존재한다”면서 “프레퍼가 된다는 것은 그런 가능성에 대처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프레퍼 규모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하지만 프레퍼들은 최근 수십 년간 최고 규모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뉴욕시의 경우 2004년 여론조사에서는 18%의 시민이 ‘재난 준비를 고려 중’이라고 응답했지만, 최근에는 50%로 급증했다. 자가발전기와 랜턴, 라디오, 응급의약품 등 비상용품 관련 업계는 붐을 맞고 있다. 미 적십자사에는 자원봉사자가 밀려들어 2008년에만 16만명이 활동했다. 인터넷을 통한 프레퍼 교류도 활발하게 이뤄진다. 

◇2010년 현재 패닉룸(안전시설) 제작업체의 최신 모델
전문가들은 이처럼 생존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을 사회 불안의 척도로 본다. 사회학자 리처드 미첼은 “생존주의는 현대 생활의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이라고 설명했다. 지구온난화와 경제불안, 신종플루, 테러리즘같이 현대사회를 둘러싼 수많은 불안 요인이 시민들의 불안 심리를 자극해 생존주의자를 양산한다는 것이다.

◆프레퍼의 순기능=과거 생존주의자와 달리 프레퍼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허황된 공포보다는 실재하는 위기에 대처하려는 프레퍼는 대부분 정상적인 직업과 가정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과 섞여 사회 성원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한다.

프레퍼 홍보 인터넷 사이트 ‘왓이즈프레퍼’ 운영자 데이비드 힐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도심이나 부도심에 살면서 프레퍼를 자처한다. 이들 상당수는 지구온난화나 환경오염 같은 인류의 당면과제에 현명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도심 정원에서 작물을 키우는 법을 개발·전파하는 프레퍼도 있고, 태양열과 풍력 등 친환경 에너지 활용법을 장려하는 사람도 있다. GMO를 두려워하는 프레퍼들은 유기농 작물을 재배해 공급한다.

국가 기관과 구호단체도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개개인에 준비를 당부하는 상황이다. 미 적십자 대변인 조너선 아이켄은 “사람들이 필요할 때마다 구호기관들이 현장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며 “(재난 시) 구호단체가 도달하기까지 최소한 며칠 동안은 스스로 돌볼 준비를 해둬야 한다”고 말했다.

안석호 기자 sok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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