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시론은 조선 세종 때 황희 정승에게서 그 전형을 찾아 볼 수 있다. 두 계집종이 싸우자 한 명씩 만나본 황희는 각각 “네 얘기가 옳다”고 말했다. 곁에서 듣던 부인이 “왜 시비를 가려주지 않느냐”고 타박하자 황희는 “당신 얘기도 옳소!”라고 했다. 그럼 황희는 매번 이렇게 행동했을까. 아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발해 두문동에 들어가는 결기를 보였다가 조선조정에 참여하는 결단을 내렸다. 사람 됨됨이가 바른 인물 천거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김종서 장군을 끝까지 밀어 6진 개척으로 북방 영토를 넓히는 공적을 쌓게 했던 것이다.
사실 100% 긍정적이고, 100% 부정적인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양시·양비론 모두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모호한 태도는 기회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도양단을 요구함이다. 하지만 승리자의 웃음 뒤편에서 패배자의 상처가 클 수밖에 없다. 갈등이 많은 사회, 게다가 중재할 수 있는 존경받는 어른이 부재한 사회일수록 ‘단칼’을 선호하기도 한다.
위작 논란에 휩싸였던 박수근 화백의 유화 ‘빨래터’(20호·2007년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45억2000만원에 낙찰)가 진품으로 추정되고, 위작 의혹을 제기한 미술잡지의 주장도 정당하다는 법원 판결이 그제 나왔다. 양시론이다. 이에 앞서 헌법재판소는 지난달 29일 국회의 미디어법 처리와 관련해 절차상 문제가 있지만 가결 선포는 유효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또한 양시론의 범주에 든다고 하겠다. ‘빨래터’는 양쪽이 수긍해 조용한데, 미디어법과 관련해 정치권에선 날선 파열음만 들린다. 싸움판에서 발을 뺀 헌재의 ‘묘수’에 정치권은 막말 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아무래도 국민의 회초리가 필요할 성싶다.
황종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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