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장 화제가 되는 남자는 바로 초식남(草食男)이다. 메트로섹슈얼, 위버섹슈얼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지점이 초식남(草食男)이라니 조금 슬프기까지 하다. 하긴 골드미스라는 멋진 단어가 지나간 자리를 슬그머니 차지한 것은 건어물녀가 아니던가. 이렇게 보면 초식남과 대칭점을 이루는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건어물녀가 아닌가 싶다.
초식남과 건어물녀
초식남(草食男) 또는 초식계 남자(일본어: 草食系男子(そうしょくけいだんし))는 일본의 여성 칼럼니스트 후카사와 마키(深澤?紀)가 명명한 용어이다. 신조어로 탄생한 이 단어는 기존의 '남성다움'(육식적)을 강하게 어필하지 않으면서, 주로 자신의 관심분야나 취미활동에는 적극적이나 이성과의 연애에는 소극적인 남성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건어물녀는 무엇일까. 건어물녀란 일본의 <호타루의 빛>이라는 만화에서 유래한 용어로 직장에서는 매우 세련되고 능력 있는 여성이지만 일이 끝나면 미팅이나 데이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 와서 편안한 트레이닝 복을 입고 머리를 대충 묶고 맥주와 오징어 등 건어물을 즐겨 먹는 여성을 지칭한다. 둘의 공통점은 밖에서 볼 때는 멋진 싱글남녀이지만 연애에 도통 관심이 없고 오히려 집에서 혼자 쉬는 것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이런 용어들이 나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이런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용어 자체는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졌지만, 이러한 현상이나 이러한 사람들은 한국에도 점차 늘어가고 있는 추세였다. 그러던 차에 일본의 히트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가 리메이크 되어 방송되고, <호타루의 빛>에 출연한 아야세 하루카가 곽재용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며 인지도가 순식간에 올라가면서 초식남이나 건어물녀라는 용어도 자연스럽게 일상에 스며들었다. 무엇보다 단어 자체가 지닌 투명하리만치 솔직담백한 매력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을 뿐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초식남, 건어물녀들의 심금을 제대로 건드린 것이다.
명탐정 홈즈는 초식남의 대표주자
연예인 중 초식남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인물은 이정재, 정우성, 장동건 등으로 그야말로 화려한 꽃미남들이다. 하지만 이들보다 훨씬 앞선 시대를 살아간 초식남 계의 왕 중 왕이 있으니 추리 소설 작가 코난 도일이 창조한 셜록 홈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엄청난 흡입력을 자랑하는 홈즈 시리즈를 읽다보면 박진감 넘치는 추리 과정 외에 셜록 홈즈와 왓슨 박사의 일상에도 조금씩 관심이 생긴다.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때, 홈즈의 생활은 그야말로 초식남 그 자체이다. 소설 속에서 홈즈는 빼어난 두뇌와 탐정으로써의 뛰어난 능력, 적당한 키에 약간 마른 몸매 청결함이 돋보이는 손과 얼굴까지 외모도 빠지지 않는 편이다. 또 금전적으로도 아무 불편을 격지 않는 그는 런던 거리의 가난한 소년들에게 적당한 용돈을 제공하며 정보를 얻기도 한다. 그리고 항상 지팡이와 모자까지 구비한 양복을 깔끔하게 입고 출근하여 청결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것은 딱 여기까지 뿐이다. 홈즈 캐릭터가 초식남임을 발견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보다 그가 싱글 생활을 충분히 즐거워하고 있는 점이다. 그는 결혼에 대한 압박을 전혀 받지 않은 채 자신의 생활을 진심으로 즐긴다.
겉으로 보이는 품위와 명예를 지키기 보다는 남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방식 또한 <결혼 못하는 남자>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런 홈즈를 닦달하는 잔소리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홈즈의 유일한 사적 친구인 왓슨은 홈즈의 단점을 마구 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며 로맨스가 철저하게 배제된 셜록 홈즈 시리즈의 숨은 여주인공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왓슨은 밖으로 도는 불규칙한 직업을 가진 홈즈를 정성껏 보살피는 ‘내조의 여왕’이다. 왓슨의 본업은 의사로 홈즈의 주치의이기도 하지만 그의 또 다른 직업은 작가이다. 그는 홈즈에게 사건이 생기면 빠짐없이 따라가 온갖 험난하고 위험천만한 일들을 함께 겪은 후 소설가 뺨치는 문장으로 이것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사건이 해결된 후 이 사건일지를 읽으며 쑥스러운 듯 애정이 듬뿍 담긴 비난을 던지는 것은 홈즈의 유일한 낙이라고 할 수 있다. 나란히 자리 잡은 사무실에서 거의 하루 종일 함께 지내는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 잘 아는 둘은 가벼운 다툼 한 번 없을 만큼 다정한 사이이다. 고급스러운 취미를 가진 홈즈는 때때로 왓슨이 가벼운 낮잠을 잘 때 바이얼린을 연주해 주기도 한다. 보통 연인들의 닭살 행각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멀쩡하고 유능하며 결혼 적령기의 두 남자의 일상이 이러니 두 사람 사이에 스캔들이 안 날 수가 없다. 홈즈와 왓슨은 실제로 오랜 세월 여성 팬들에게 수많은 환상과 영감을 제공해온 커플이기도 하다. 하지만 몇 편의 시리즈가 끝난 후, 왓슨은 홈즈에게 사건을 의뢰했던 여자 중 한 명과 결혼에 골인한다. 그러나 홈즈는 유부남이 된 왓슨 곁에서 계속 독신으로 지낸다.
추리소설의 팬들은 셜록 홈즈의 라이벌로 괴도 뤼팡을 꼽는다. 실제로 홈즈는 딱딱한 영국식 남자를 대표한다면 뤼팡은 낭만적인 프랑스 남자를 대표한다. 두 남자가 만나는 작품 <기암성>을 추리소설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뤼팡을 결코 초식남이 될 수 없다. 매혹적인 외모와 성적 매력으로 시리즈 마다 여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뤼팡은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를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육식계 남자이기 때문이다.
꽃미남 애호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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