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이례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서려 있는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되고, 그곳의 유적을 발굴하고 있다. 지난해에도 서울 성곽과 이간수문(二間水門)이 발견되었지만, 이달 서울 성곽 일부가 온전하게 보존된 형태로 나타나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동대문운동장 터에서 발견된 서울 성곽의 모습은 서울이 성곽 도시임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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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문 일대 성벽. 제각기 달랐던 태조, 세종, 숙종, 1970년대 축조 양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이채롭다. |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10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새 도읍지가 된 한양에서는 궁궐 조성, 종묘·사직 정비와 함께 성곽 쌓는 일도 활발했다. 1396년 한양의 동서남북 네 곳 산줄기를 잇는 성곽이 완성되었다. 총 길이는 18㎞. 한양은 밖으로는 아차산(동)·덕양산(서)·관악산(남)·북한산(북)의 외사산(外四山)이 둘러싸고, 안으로는 낙산(동 125m)·인왕산(서 338m)·목멱산(남 265m)·북악산(북 342m)의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다. 서울 성곽은 바로 내사산을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태조와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아예 한양의 자연 조건을 활용하여 튼튼한 도성의 축조를 계획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처음 성곽을 축조한 상황을 담은 기록들이 자주 나타난다. 1395년(태조 4) 윤9월 10일 도성 터를 순시한 태조는 9월 13일 처음으로 도성 조축도감(造築都監)을 두면서,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를 정하게 하였다. 1396년 1월에는 경상·전라·강원도와 서북면의 안주 이남과 동북면의 함주 이남의 민정(民丁) 11만8070여명을 징발하여 처음으로 도성을 쌓게 했다. 이때 이미 성터를 측량하여 자호(字號)를 나누어 정하였는데, 천자문으로 일련번호를 매긴 점이 흥미롭다. 즉 백악의 동쪽에서 천자문의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백악의 서쪽으로 조자(弔字)에서 그치게 하였다. 땅의 척수는 총 5만9500척(尺)이었으며, 600척마다 한 자호를 붙여서 모두 97자가 되었다. 각 도민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천(天)자부터 일(日)자까지는 동북면, 월(月)자에서 한(寒)자까지는 강원도, 내(來)자에서 진(珍)자까지는 경상도, 이(李)자에서 용(龍)자까지는 전라도, 사(師)자에서 조(弔)자까지는 서북면이 맡게 하였다.
그런데 당시 천자문 순서대로 성곽 공사를 구획한 기록이 현재 성곽에도 그대로 새겨져 기록과 현장이 일치함을 볼 수 있다. 즉 성벽의 성돌 가운데 ‘곤자육백척(崑字六百尺)’의 경우 ‘곤’은 천자문 중 47번째 글자이니 백악산부터 600척×47=2만8200척 떨어진 곳임을 의미한다. 또한 성벽 중에 ‘흥해시면(興海始面)’이라고 새겨진 글자에서 경상도 흥해(현재의 포항시) 지역의 인부들이 공사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실록의 “천자문의 내(來)자에서 진(珍)자까지는 경상도가 맡았다”라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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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의 전경을 회화식으로 표현한 도성도. |
1396년 1월 9일 태조는 도성의 기초를 닦았으므로 백악과 오방 신에게 제사하였으며, 이후에도 자주 도성에 나가 성을 쌓는 역사를 둘러보았다. 공사는 여름에 잠시 중단하였다가 날씨가 좋은 가을에 속개하였다. 1396년 8월6일에는 경상·전라·강원도에서 축성 인부 7만9400명을 징발하였다. 결국 태조 때 축성 공사는 거의 1년 만에 완성을 보았다. 기간은 봄가을로 나누어 98일 동안 연 19만7470명이 동원된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한양의 도성 축조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태조를 도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은 정도전과 무학대사였다. 그런데 이들은 도성의 중심을 어디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달랐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정도전은 백악산(북악산)을 주산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무학대사는 인왕산 서남쪽에 위치한 선바위(바위의 모양이 부처님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인 이름)를 도성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하였으며, 그러면 자연히 인왕산이 주산이 되어야 했다. 정도전은 이에 반대하였다. 무엇보다 왕이 남면(南面: 남쪽을 바라봄)하려면 북악산을 주산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고, 그러면 자연히 선바위는 도성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양 도성은 정도전의 주장대로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였고, 북악의 앞 너른 터에는 왕조의 상징 경복궁이 조성되었다. 성곽 동서남북의 중심에는 4대문을 세웠다. 흥인지문(興仁之門·동), 돈의문(敦義文·서), 숭례문(崇禮門·남), 숙정문(肅靖門) 또는 소지문(昭智門·북)이 그것으로 조선의 국시(國是)인 인의예지의 유교 이념을 문 이름에 구현하였다. 4대문 사이에는 다시 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자하문)의 4소문을 완성하여 도성의 안과 밖을 교통하게 하였다.
#3 세종 시대 도성의 개축
태조 때 그 원형을 갖춘 한양 성곽들은 정종 즉위 후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1398년 이방원(태종)이 주도한 왕자의 난으로 즉위한 정종은 한양을 버리고 고려의 수도인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고, 성곽의 상당 부분도 파손되었다. 그러나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 후인 1405년 도읍은 다시 한양으로 옮겨졌고, 도읍의 완비와 함께 성곽 개축도 논의되었다. 1413년부터 성곽을 개축해야 한다는 건의가 잇따랐으나 구체적인 실천에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태조 이후 성곽 수축을 진두지휘한 인물은 세종이었다.
1421년(세종 3) 12월 10일 세종은 우의정 정탁을 도성 수축 책임자로 임명하고. 전국에서 32만2460명의 역군을 동원하여 무너진 곳 2만8487척을 수축하였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태조 때처럼 전국에서 정부(丁夫)를 징발하였다. 경기 2만188명, 충청 5만6112명, 강원 2만1200명, 경상 8만7368명, 평안 4만3392명, 함길 5208명으로 총 32만2400명이었다. 기술자에 해당하는 공장(工匠)은 2211명이, 군사를 거느린 경력과 수령이 모두 115명이 역사에 참여하였다.
1422년 1월 14일 세종은 목멱산과 백악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축성을 알렸다. 공사가 완성된 것은 1422년 2월 23일이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자. “도성의 역사를 마쳤다. 성을 돌로 쌓았는데, 험한 지역은 높이가 16척이요, 그다음으로 높은 곳이 20척이요, 평지는 높이가 23척이었다. 수문(水門) 2칸을 더 설치하여 막힌 것을 통하게 하고, 서전문(西箭門)을 막고 돈의문을 설치하였다. 성의 안팎에 모두 너비가 15척이나 되는 길을 내어 순심(巡審)하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사용된 쇠가 10만6199근이요, 석회(石灰)가 9610석이었다. 그 사용하고 남은 쇠를 거두어 각도의 세공(歲貢)에 충당하였다.”(‘세종실록’ 세종 4년 2월23일)
이처럼 세종은 태조의 성과를 이어받아 32만여명을 동원하여 서울 성곽의 공사를 마쳤다.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명이 채 되지 못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전국에서 엄청난 인력이 성곽 공사에 동원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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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 에드바르트 마이어가 1890년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숭례문과 그 일대 성곽 사진. 애초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이 좁은 옹성 형태로 축조됐음을 보여주는 이 사진은 서울 성곽이 적군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
태조 때 처음 축성하고, 세종 때 수축 작업을 통해 서울을 지키는 대표적인 공간이 되었던 서울 성곽. 그러나 16세기 이후 성곽은 서울 방어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적이 파죽지세로 서울로 진격하자 국왕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하였다. 1636년의 병자호란 때도 인조 일행은 피난하여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에 맞서 항전한 역사를 살펴보면 서울 성곽이 방어처로서 전혀 그 기능을 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성곽을 군사방어처로 활용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시 실천한 왕은 숙종이었다. 숙종은 북한산성, 강화도, 남한산성 등 서울을 둘러싼 주변 지역의 방어를 공고히 하는 한편, 대대적인 서울 성곽 수축 작업을 지시하였다. 1704년(숙종 30)부터 1709년(숙종 35)까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삼군영에서는 각 군영이 방어하고 있던 구역의 성곽을 수축하였다. 이때 쌓은 돌은 태조 때나 세종 때에 비해 훨씬 규격화된 돌이었다. 현재 서울 성곽의 일부 지역에는 세 시기에 쌓은 돌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곳이 있다. 태조 때 축조된 성곽은 규격이 일정하지 않고 다양한 크기의 깬 돌을 사용해 별다른 규칙 없이 쌓은 모양이다. 세종 때는 비교적 일정한 규격의 돌을 사용하였는데, 아래쪽은 크고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로 성벽의 돌이 작아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숙종 때는 네모 나게 다듬은 돌을 사용하였다. 규격화된 돌을 사용하면 성이 파손되었을 때 이를 보수하기에 편리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정조가 화성 축성 때 규격화된 벽돌을 사용한 것과도 비슷한 이치이다. 숙종 때 수축 작업을 통해 그 틀을 완성한 서울 성곽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수도 한양을 방어하는 주요한 군사시설이자 도성 백성들의 교통을 통제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숭례문 등 4개 대문과 광희문 등 4개 소문은 밤 10시경 인정(人定: 성문을 닫음) 종소리가 28번 울리고, 새벽 4시경 파루(罷漏: 성문을 염) 종소리가 33번 울리며 문을 닫고 열었다.
#5 옛 모습 찾아가는 서울성곽
그러나 근대 제국주의 침략기에 서울 성곽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1899년 서울 시내에 전차가 개통되면서 도심 주변의 성곽은 대부분 헐렸다. 일제는 도시계획이라는 미명 하에 도성 출입문인 돈의문, 소의문, 혜화문 등을 파괴하였다. 파괴의 회오리 속에서 숭례문과 흥인지문, 창의문이 남았지만 주변 성곽은 모두 헐려 고립된 섬의 모습만을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성곽 일부는 주택가의 축대나 담장으로 떨어져 나갔다. 1973년부터 서울 성곽과 문루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광희문은 1975년, 숙정문은 1976년, 혜화문은 1995년에 복원하였지만, 돈의문과 서소문은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1993년 인왕산이 개방되면서 인왕산을 따라 축성된 서울 성곽의 모습을 직접 접하게 되었고, 2006년에 들어와서는 1968년 1·21사태의 여파로 그 출입이 금지되었던 숙정문 일대 서울 성곽 길도 개방되고 있다. 점차 서울 성곽이 우리 품으로 돌아오는 흐름이다. 일부 성곽 길이 끊어진 곳이 있지만 이제 마음만 먹으면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 일대에 조성된 서울 성곽 전체를 답사할 수가 있다. 서울 성곽을 둘러보면서 세계적으로 성장한 도시 서울과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의 자취를 찾아보기를 권한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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