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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자 이화여대 교수는 “그림은 끊임없는 나의 존재에 대한 확인이다.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내 마음속 깊이 감추어져 있는 내면의 이야기들을 선과 면, 곡선의 형태를 빌려 표현한다”고 말했다. |
최근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전통 화조도에서 현대적인 추상으로 바뀌게 된 계기에 대해 “인기 작가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었다. 전통에 얽매이기보다는 현대적인 작품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1976년 대통령상 수상 이후엔 화조도를 그려 달라는 주문 전화가 하루에도 10여통씩 왔어요. 한국인들은 화려한 색채와 꽃 그림을 좋아하잖아요. 하지만 어느 순간 이렇게 새와 꽃만 계속 그리다가는 작가로서 망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1989년쯤 구상에서 추상으로 바뀌게 됐다. “하고 싶은 걸 하다 보니 추상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넘어갔어요. 사실 인기 있는 건 화조도예요. 돈을 벌 욕심이 있었으면 많이 벌 수 있었지요. 아직도 간간이 제 화조도를 찾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까요. 또 미술평론가들은 전통 화조도를 이어나갈 사람이 없다며 저보고 계속 그리라고 주문하기도 해요. 화조도는 새마다 포즈와 털이 다 다르고 일일이 관찰을 해야 하는 등 무척 어려운 작업이에요. 아무나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많아요.”
하지만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은 나를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가 화조도 이후 주목한 건 한지였다. 그는 “한지로 태고의 오랜 삭힘과 잊고 있었던 우리의 내음을 찾고자 한다”며 “한지를 통해 단순한 재료로서의 의미를 뛰어넘어 재질과 표면구조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가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한지의 매력에 대해 “한지는 부드러우면서 투박하고, 따뜻하고 예민하며, 화려하지 않으면서 멋스럽고, 질기고 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전엔 한지를 이용한 두툼한 백색 부조를 선보였다면, 최근 몇년 사이에는 흑백의 섬세하고 간결한 조화가 돋보이는 부조 작업을 해오고 있다. 한지를 바탕으로 그 위에 한지로 도형을 세운 뒤 먹으로 칠한 것이다. 선으로 이뤄진 도형은 휘어지고 미끈하게 뻗어나간다. 도형과 선은 네모난 화면 바깥으로 튀어나가기도 한다. 그는 “내 안의 울부짖음, 해방 욕구,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를 나타낸 것이다. 형식에 갇히기 싫다”고 말했다.
그는 한지와 함께 먹에 대한 애정도 드러냈다. “먹의 색깔을 참 좋아해요. 먹색은 무궁무진해서 12가지 이상의 색깔이 있어요. 또 먹은 문인화와 곧은 선비 정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저도 먹의 그런 정신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한지의 백색과 먹의 검은색이 모던하게 조화를 이루는 그의 신작들은 다음달 9일까지 서울 견지동 동산방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볼 수 있다. 2003년 금호미술관에서 대형 작품을 중심으로 개인전을 연 뒤 6년 만이다. 그는 “지난 5년간 꾸준히 작업을 해왔다”며 “초대전과 그룹전이 끊이지 않아 조금씩 작품을 내놨지만 아껴온 작품들을 이번에 전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40여년간 몸담았던 이화여대에서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그는 “지난 5년간은 하루하루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작업에만 몰두해왔다”고 말했다. “27세 때부터 당뇨병을 앓았어요. 게다가 지난 몇년간 너무 작업에 빠지다 보니 2년 전엔 목 디스크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도 왔었어요. 하지만 끝까지 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충 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미지를 생각하고 있어요.”
글·사진=김지희 기자 kimpossibl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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