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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언 소설가 |
등단 직후 지금까지 줄곧 직장 생활을 해오고 있는 나는 같은 회사의 동료들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당신은 소설가 같지가 않아.” “당신 같은 소설가는 처음 봐.” 그들은 아마도 내게서 광기나 이재(異才), 혹은 기행 따위를 기대했던 것 같다. 으레, 그런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소설가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그들의 선입견을 나는 조금도 나무라거나 탓하고 싶지 않다. 문단 모임에 가보면 기행이나 광기를 부리는 글쟁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니, 그들의 선입견이 아주 그르다고 할 수도 없다. 오히려 나는 내게서 광기나 기행 등을 바라는 직장 동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에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나는 그들에게 누구보다도 평범하고 온건한 동료의 모습을 보여줬으니 말이다.
이런 사례가 있었다는 것도 말해야겠다. 등단 이후 취업하려고 이력서를 쓸 때, 소설가로 등단했다는 사실을 기재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는 것. 어떤 경우, 소설가로 등단했다는 사실은 직무 수행능력의 심각한 결여와 동의어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설가와 시인을 오로지 소설가와 시인이라는 이유로 채용 대상에서 배제시켰다는 어떤 출판사의 대표를 나는 알고 있다. 아! 선배 소설가들이 도대체 직장에서 무슨 짓들을 했기에…. 아마 그들은 지각과 조퇴와 결근의 단골이거나 혹은 스트라이크의 주범들이었겠지.
소설가들이 틀에 얽매인 생활을 잘 견디지 못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들에게 이 사회는 대개 한심하거나 따분하거나 기괴하거나 공포스러운 대상일 뿐이다. 그런 복잡한 번민을 떨치기 위해 그들은 소설을 쓰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 세계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건, 그것은 그들만의 해방구가 된다. 그들은 그런 해방구를 갖는 대신 세속적인 안락과 풍요를 포기한다.
내가 느끼고 경험한 소설가의 영혼은 변덕스런 초봄의 날씨와 같아서, 어느 경우에는 어떤 불한당보다도 포악해지고, 어떤 경우에는 가브리엘 천사처럼 순해지기도 한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말이다. 만약 당신의 친구나 직장 동료 중에 소설가가 있다면, 그에게서는 친구로서의 온건한 역할과 신의에 대한 기대는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현명하다. 소설가의 내부에는 음울한 지옥과 성스런 천국, 순수와 음탕, 하늘을 찌를 듯한 자존과 온몸을 갈기갈기 찢는 자폐가 다 들어 있다. 그들은 그것 사이에 놓인 아찔한 간극을 바라보며 괴로워하고 신음하며 바닥을 뒹군다. 소설은 그들이 아우성치며 바닥을 뒹굴 때 떨어지는 빛나는 결정, 반짝이는 비늘과 같은 것이다. 당신 옆에서 그가 매일 출근하는 것은, 오로지 비굴을 감내할 정도로 폭압적인 생존에 차마 저항할 용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김도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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