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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책봉부터 사망까지 20년 동안 왕실 생활을 담은 소현세자의 동궁일기 원본. |
# 양녕대군의 비극
조선왕조의 왕위 계승은 장자 세습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태종 때까지 이 원칙은 단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피를 보는 왕위 계승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던 태종은 누구보다도 적장자가 왕위에 올라 나라의 기틀을 잡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 다행히 아들도 낳아, 태종은 첫째 아들 양녕대군(1394∼1462)을 1404년 8월 왕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1418년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어 경기도 광주로 추방됐다. 11세에 세자로 책봉된 지 14년 만의 일이다. 14년 동안 왕세자 신분에 있었던 양녕대군이 폐위된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양녕대군은 부왕인 태종과 성격이 맞지 않았다. 치밀하고 엄격한 성격의 태종에 비해 양녕은 호방하면서도 풍류를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글공부보다는 사냥이나 풍류에 관심이 많았다. 공부를 게을리 해 주변 사람들도 곤란을 겪었다. 1405년 10월 태종은 세자가 학업을 소홀히 한다며 세자를 대신하여 환관들에게 태(笞·매)를 치기까지 했다.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 선생들도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
심지어 궁궐에 건달패나 기생을 들인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태종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달밤에 궁궐 담을 넘어 무뢰배들과 비파를 타기도 하고 기생들을 궁궐에 불러들여 밤새도록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잡희(雜戱)를 즐겼다. 정종의 애첩이었던 기생과 사통하기도 했다. 비행이 이어지자 마침내 태종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는 절차를 취해, 1418년 양녕을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태종이 황희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폐위를 결정한 것은 양녕의 기행(奇行)이 큰 문제였지만, 셋째 아들 충녕에 대한 믿음이 큰 몫을 했다.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학문에 열중하는 충녕의 됨됨이를 믿었던 태종은 일찌감치 후계자로 충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풍류생활에 빠진 양녕이나 불교에 심취했던 둘째 효령에 비해 셋째 충녕은 태종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태종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왕의 자리는 장자라는 원칙보다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했고, 왕조가 굳건히 뿌리내리려면 충녕과 같은 능력 있는 왕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태종의 후계자 선택의 희생양이 되었던 양녕대군은 2인자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일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 소현세자, 그 의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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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 반대하는 부왕 인조와 정치적 이념이 달라 결국 후계자 자리에서 밀리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 |
1645년 소현세자가 9년 만의 오랜 인질 생활을 끝내고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2인자이자 차기 왕인 그의 귀국을 반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현세자에 대한 청나라의 호의적인 입장과 신뢰는 인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에게는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소현세자가 왕이 되면 인조와 서인 정권이 추진한 숭명반청(崇明反淸) 이념이 퇴색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조정 관료 대부분은 남한산성의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를 현실의 군사대국, 문화대국 청으로 보지 않고 여전히 오랑캐로 인식하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청의 과학기술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세자는 경계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인조는 청이 자신을 물러가게 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경계했다. 정통으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쿠데타로 집권한 왕으로서 본능적으로 왕위 유지에 집착하면서 아들까지도 경쟁자로 본 것은 아닐까?
귀국 직후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실록에도 독살설로 의혹을 살 만한 내용이 기록될 정도로 의문투성이의 죽음이었다. 특히 소현세자에게는 아들이 셋이나 있었으나, 인조는 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효종으로 즉위시켰다. 누가 보아도 효종의 즉위는 인조의 의도가 강하게 개입된 것이었다. 야사에 ‘소현세자가 청나라 물건을 가져와 인조에게 내놓자 인조가 벼루를 던져 세자가 죽었다’고 할 정도로,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는 이미 부자의 정을 끊게 했던 시점이었다.
소현세자의 죽음도 억울하지만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하자 세자빈 강씨는 가만있지 않았다. 그 상대가 시아버지인 인조였으나 세자빈은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찾아온 것 역시 죽음이었다. 세자빈 강씨는 인조 독살 혐의로 사약을 받았고, 세자의 아들들은 제주도로 유배됐다가 풍토병으로 죽었다. 2인자 소현세자, 그리고 그 가족은 처참하게 몰락했다.
인조의 뒤를 이어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면서 청을 물리쳐야 한다는 ‘북벌(北伐)’이 국시(國是)로 자리 잡게 되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의 인질 생활 속에서 습득하고 추구했던 새로운 과학기술과 문명의 수용, 즉 북학의 꿈은 그의 죽음과 함께 묻혀 버리고 말았다.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갔던 2인자에게 다가왔던 불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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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초상화.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
# 뒤주에 갇혀 죽은 비운의 세자
첫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잃고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더없이 귀한 아들이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불행히도 세자는 성격부터 영조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자는 말이 없고 행동이 날래지 못해 성격이 세심하고 민첩했던 영조를 늘 답답하고 화나게 하였다. 또 세자는 커가면서 공부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고 칼싸움이나 말타기 같은 놀이에만 열중하여 학문에 정진해 주기를 바라는 영조의 기대를 저버렸다.
부자 사이는 세자가 15세이던 1749년(영조 25) 대리청정하면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벌어졌다. 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혐의를 받았던 영조는 자신이 왕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찍부터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거나 정사를 대신 돌보게 하는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를 취하였으며 결국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경륜이 부족한 세자가 국정 운영에 미숙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데 영조는 사사건건 세자를 꾸중하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1752년에는 세자가 멋대로 일을 처리하였다고 영조가 진노하자 세자는 홍역에 걸린 몸으로 3일 동안이나 눈 속에 꿇어앉아 죄를 빌어야 했고, 영조가 왕위를 넘기겠다며 창의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이번엔 이마에 피가 나도록 엎드려 사죄해야 했다.
영조의 질책이 심해지면서 세자는 부왕에 대해 큰 공포심을 갖게 되었고 주색에 탐닉하는 등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영조가 국가에 내린 금주령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술을 마셨으며 여자를 데려다 살림을 차린 일도 있었다. 세자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질 즈음 나경언의 고변 사건이 터졌다. 나경언이 세자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을 투서하면서 세자의 비행을 10여 조목에 걸쳐 나열하였다. 세자가 자기 대신 내관을 방에 앉혀 놓고 20일 동안 평양을 몰래 다녀온 것이 발각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세자는 나경언의 고변이 거짓이라며 맞섰다. 나경언은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였지만 이 사건은 영조와 세자를 영원히 갈라서게 하는 계기가 됐다.
1762년(영조 38) 윤 5월 12일 오후 세자를 창경궁 휘령전(현재의 문정전)으로 나오도록 하라는 영조의 명이 떨어졌다. 영조는 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며 자결할 것을 명했다. 세자는 옷소매를 찢어 목을 묶는 동작을 취했지만, 세자 시강원의 관원을 비롯한 신하들이 제지했다. 사도세자는 결국 영조가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운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영조는 조선시대 최장수 왕(83세)이자 최장기 집권(52년)을 한 왕이었다.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에도 영조는 14년을 더 살았다. 세습으로 왕위가 이어지던 시절 왕의 장수는 장기집권의 최고 비결이었다. 영조의 이례적인 장수가 결국은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비극을 낳은 근본적인 원인은 아닐까? 영조의 후계자가 소현세자의 경우와는 달리 손자인 정조에게로 이어진 점도 이러한 추론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2인자가 최고 자리에 오르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전두환을 이어 대통령에 오른 노태우 정도가 2인자에서 비교적 쉽게 1인자에 오른 경우였고, 다른 인물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최고 자리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2인자였던 김종필은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시절을 거치면서도 2인자의 위치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견제 속에서 2인자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4월 9일 총선을 치르고 나면 2인자 후보군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2인자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1인자 위치에 오르는 과정이나, 국회의원 출신이 연이어 대통령 자리에 오를 것인지를 전망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다음에 계속〉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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