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닙니다. 정부가 바로 문제입니다.”
레이건 대통령 앞에는 당시 난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경제는 불황과 물가 상승이 동시에 진행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가상승률은 11.83%에 달하고 실업률도 7.1%를 기록하는 등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정부조직은 관료주의에 찌들었고 비대해져 있었다. 전임자 지미 카터 대통령의 정책 실패로 국론은 사분오열돼 있었다. 미국 외교관 52명이 억류된 이란 인질사건은 1년 넘게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국민들에게 참담함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은 드라마틱하게 진행됐다. 그가 정부조직에 대해 메스를 가할 것임을 예고한 연설을 시작한 지 30분 만에 444일 동안 억류됐던 인질들이 전원 풀려났다.
그러나 그에겐 또 다른 그림자가 엄습했다. 취임 69일 만인 3월30일 총격을 받았다. 워싱턴 힐튼호텔에서 연설을 마치고 나오는 레이건을 향해 존 힝클리 주니어가 권총을 발사했다. 겨드랑이를 통과한 총알이 폐를 뚫었다. 조지워싱턴 병원으로 긴급 호송되던 그는 부인 낸시 레이건을 보면서 농담을 했다.
“여보. 내가 허리 숙이는 것을 잊었어.”
수술대에 누운 그는 여전히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다.
“의사 선생. 당신이 공화당원이면 좋겠소.”
민주당원인 수술 집도의 조셉 지오다노는 “오늘은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공화당원입니다”라고 재치 있게 응수했다.
대통령의 유머를 전해 들은 국민은 열광했다. 70세 노령에도 불구하고 레이건은 곧 건강을 회복해 자신의 철학을 국정운영 과정에서 구현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로 불리는 경제회생 정책을 본격화한 것이다. 대규모 세금 감면을 단행했으며, 기업정책에서는 무간섭주의를 선언했다. 정부 지출을 축소하고 과도한 규제를 철폐했으며,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통화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국방비는 대폭 늘렸다. 그의 접근방식은 전임자와 달랐다. 레이건 행정부 초기에 국가안보회의(NSC) 선임위원을 지낸 헨리 R 나우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레이건은 전략을 단순화했다”면서 “군사력 강화와 경제 살리기 두 가지에 주력했다”고 말했다.
외치에서는 당시 군사 강대국인 소련과 대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내치에서는 국내 경제를 살려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떠안고 있었다. 레이건은 일부 기득권 세력과 이익단체들의 반발에 직면했지만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그의 취임 초 연방항공 관제사들이 불법 파업에 들어갔다. 레이건 대통령은 긴급회견을 통해 48시간 내에 업무에 복귀하지 않으면 구제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카터 행정부 때처럼 안하무인격이던 노조원 1만1345명은 결국 그해 8월 전원 파면됐다. 놀란 것은 노조뿐만이 아니었다. 레이건 재선 때는 상당수 민주당원들이 그를 지지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 때는 군사력을 지렛대 삼아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이끈 소련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해 냉전을 종식시켰다. 이 같은 국가 경쟁력 강화를 발판 삼아 미국은 1983년을 전환점으로 2차대전 이후 최장기인 15년간 경제호황기를 누렸다.
레이거노믹스에 대한 반론도 없지 않다. 1981부터 1985년까지 국방비 지출이 40% 증가하고 연방예산 적자폭이 커져 국가부채가 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20세기 초반이 루스벨트시대였다면, 20세기 후반은 레이건시대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존 슬로안 휴스턴대 교수는 “세금 감면, 지출 억제, 관료주의 축소, 규제 완화 등 간결한 메시지를 주문처럼 반복한 게 레이건 효과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레이건의 정치적 성공은 보수주의와 실용주의, 홍보전문가의 결합에 기인한다”면서 “영화배우 출신인 레이건은 신념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보수주의자들을 규합하면서도 실용주의와 타협하는 수사를 잘 구사했다”고 분석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가 2005년 3월 공동조사한 ‘대통령리더십’ 보고서에 따르면 레이건은 2차대전 이후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으로 꼽혔다. 전체 순위는 6위였다.
박윤식 조지워싱턴대 교수(국제경제학)는 “레이건 대통령은 에드윈 미즈 등 캘리포니아주지사 시절 함께 일했던 인물들을 대거 워싱턴에 끌고 온 덕분에 관료주의에 포위되지 않을 수 있었다”면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금언을 실천해 개혁을 달성할수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 전문가 필립 쉔베르크 박사는 레이건 대통령의 성공과 관련해 “국가지도자는 비전을 공유하고 자긍심을 지녀야 한다”며 “지도자는 사람을 공격하는 대신 이슈를 공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국민들로부터 정파를 떠난 높은 인기를 누렸고, 그 덕분에 ‘레이건 민주당원들’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1989년 퇴임 때는 지지율이 취임 초보다 12%포인트 높은 63%에 달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사건, 베트남전 패배, 워터게이트 사건 등 잇따른 악재로 좌절감을 맛본 미국민들은 레이건 신화를 잊지 못하고 있다.
레이거노믹스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MB(이명박)노믹스’가 과연 한국에서 또 다른 기적을 일궈낼지 미국 학계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워싱턴=한용걸 특파원
icykar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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