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감독의 지시에 이어 흥겨운 스윙 리듬이 홀 안을 메우자 검은색 상하의를 말쑥하게 차려입고 실크햇을 쓴 남자 댄서 4명이 플로어로 뛰어나와 빠른 몸동작으로 흥겨운 춤을 선보인다. 시선이 집중될 무렵 홀연히 남장 여인이 등장한다. 허리와 무릎을 비틀고 팔과 다리를 시원스레 내저으며 예사롭지 않는 춤실력으로 금세 무대를 장악하는 여인은 바로 김혜수.
경기 파주 헤이리 아트서비스 세트장. 정 감독의 새 영화 ‘모던보이’(제작 KnJ 엔터테인먼트)의 막바지 촬영이 한창이다. 100여개의 주홍빛 전구가 매달린 천장, 나무로 깐 바닥과 붉은 벽돌 벽, 고풍스러운 유럽식 테이블과 의자, 500여병의 옛 양주병 등이 1937년 경성(서울)의 비밀댄스홀 ‘문화구락부’를 재현하고 있다. 무대 옆에는 5인조 밴드가 자리하고 콧수염을 기른 남자들과 웨이브 머리를 한 드레스 차림의 여자들이 손님을 안내한다. ‘모던보이’는 조선총독부 서기관 이해명(박해일)이 일본인 검사이자 친구 신스케(이한)의 도움으로 조난실(김혜수)과 만나면서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사연을 그린 시대극. 순제작비만 78억원이 투입된 대작이다.
18일 촬영분은 이해명이 댄서이자 디자이너, 가수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정체불명의 조난실이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다 첫눈에 반하는 대목. 4분가량 쓰일 장면이지만 극 전체를 끌어가는 단초가 되는 만큼 제작진은 6차례나 테스트 촬영을 할 정도로 공을 들인다. 관객의 눈과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아야 할 승부처이기 때문이다. “혜수씨가 이 장면을 위해 5개월 동안 춤 연습을 했다”고 스태프들이 귀띔한다.
정 감독은 “손님들은 그대로 앉아서 술을 마시거나 얘기를 나누라”고 지시할 뿐 김혜수와 댄서들에게는 별 말이 없다. 이들의 감각과 느낌을 믿기 때문이다. 다음 컷은 2층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이해명이 조난실을 보고 ‘저 여자에게 운명을 걸겠다’고 다짐하면서 곡선형 층계를 내려오는 장면. 8대 2 가르마에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박해일이 1층 무대 쪽에 시선을 꽂은 채 넋 잃은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디지만 눈빛과 표정은 그대로다.
정 감독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홀을 울린다. “오∼케이.”
6월 말 촬영을 시작한 ‘모던보이’는 이달 안에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을 거쳐 내년 초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파주=김신성 기자
# 정지우 감독, 연출의 변
1930년대는 우리에게 ‘친일’이나 ‘독립운동’, ‘가난’과 ‘억압’이란 단어들로 기억되는 색바랜 흑백사진 같은 시절이다. 그러나 다른 얼굴도 가지고 있었다. 서구 문물이 급속히 유입되면서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고 전차와 자동차가 도심을 달리며 유행가, 패션, 영화, 잡지 등이 트렌드를 이룬 ‘조선 땅 최초의 현대화’가 시작된 때이기도 했다. 이때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등장했다. 봉건적 틀에서 벗어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갖 서구의 것들로 바꾸길 원한 탓에 비난과 부러움을 동시에 받았던 문제의 신세대들. ‘모던보이’는 봉건과 현대, 동양과 서양, 조선과 일본, 민족적 대의와 개인의 행복, 절망과 쾌락 등 양극단의 것들이 충돌하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대 배경인 37년에는 이미 식민지 상황이 고착화되어 ‘독립’ 운운하지 않게 되고 소수이지만 경제적인 생활을 누리기 시작한 때다. 하지만 미래가 없기 때문에 답답한 가운데 암울하면서도 퇴폐적이었던 시기. 이를 흥미롭게 느꼈다. 그 시대를 해석하고 고민하고 성찰해서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오늘 현실이 행복하길 바라는 남자가 불우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까 궁금했고, 그가 인식을 조금씩 넓혀가는 과정을 통해 주제를 전하고자 했다. 또 경성역 맞은편이나 동대문 가는 길 등 우리가 옛 사진에서도 보지 못한 장소들을 마음껏 돌아다녀 본다는 기분으로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해 찍었다.
# 출연배우들의 말·말·말
◇김혜수=시나리오가 매력적이었다. ‘해피엔드’ ‘사랑니’ 등의 정 감독이 연출한다. 여기에 독특한 ‘시대성’까지. 이쯤 되면 출연을 마다할 여배우가 있겠는가. 내 춤은 보기엔 근사하지만 따라하기엔 너무 힘들다. 전문가들이 내 몸에 맞도록 동작을 짜주었다. 배우가 아니었다면 이처럼 특별한 레슨을 받아볼 수 있었겠는가.
◇박해일=지정된 헤어스타일을 보고선 ‘이게 마지막 영화가 될 수도 있겠구나’란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하하. ‘지금 시각으로 그 시대에 뛰어들어가면 어떨까’를 생각하면서 배역을 연기한다. 내면에 다양한 모습을 갖춘 캐릭터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다.
◇이한=일본말을 익혔다. 또 일본인들이 조선말 하는 스타일, 특유의 발음이나 억양 등을 연습하느라 애먹었다.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많이 보면서 분위기를 느끼려고 노력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