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동주 시인·소설가 |
16세기 중엽까지 약 100여년 동안 무로마치막부 정권은 무사들의 사치와 방종으로 번민한 시대였다. 혼돈의 핵심에는 차문화가 도사리고 있었다. 무사들은 사치스런 차회를 열고 무사의 정신과 정치의 목적을 오직 쾌락과 낭비에 두는 것처럼 부패해 갔다. 당시 일본 정치권력은 무사들이 400년 넘게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사정권 자체를 개혁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개혁의 방법이었다.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고 뿌리 깊은 무사정권의 병폐를 치유해야만 했다. 개혁의 대상이 권력과 칼을 장악하고 있는 무사집단이었기에 자칫 실패하면 엄청난 재앙이 초래될 터였다.
개혁정책을 마련해 실현한 사람은 대덕사의 존경받는 스님이자 다도의 주춧돌을 놓은 무라타 주코, 철저한 비폭력으로 무사들의 차문화를 소리없이 바꾸어 놓은 사카이항구 소가죽장사 출신인 다케노 조오, 대륙문화의 흉내내기로 자신감을 잃어버린 일본 차인들에게 소박하고 자연스런 조선 서민문화를 받아들이도록 가르쳐 마침내 다도를 확립한 센노 리큐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승려, 대중예술가, 순수예술가였다. 이 세 사람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맹자·순자 등 중국사상과 원효의 화엄사상, 조선의 가난한 서민들이 사는 두칸 오막살이 초가집 구조였다.
개혁을 완성시킨 최후의 수단은 저 유명한 이도다완(井戶茶宛)으로 이름 붙여진 조선시대의 그릇이었다. 이 개혁을 이뤄낸 구체적 수단이 ‘다도’였기에 일본 다도는 곧 무사정권의 정치철학 핵심이며, 이도다완은 무사정권이 일본과 일본인이 행복해질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터득하도록 해준 지극히 평범한 조선의 흙으로 만든 그릇이었다.
우리가 맨 먼저 방문한 곳은 무로마치막부의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때 완성된 긴카쿠지(金閣寺), 건물 벽에 옷칠을 한 뒤 순금의 금박을 입혀 장식한 차실이었다. 1994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을 만큼 일본이 자랑하는 문화재다. 이 경내에는 열여덟 군데의 명소가 있다. 그 가운데 내 발길을 붙드는 곳은 안민타쿠(安民澤)라는 작은 연못이었다. 안민타쿠는 경내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 긴카쿠지 앞의 아름다운 교코지(鏡湖池)에 물을 공급하는 수원지이기도 하며, 차실에 쓰는 찻물을 길러 오는 여러 곳의 샘터와도 이어져 있었다. 안내원은 안민타쿠를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연못’으로 풀이한다고 말한다.
나는 순자(荀子)의 왕제(王制) 한 대목을 생각했다. “임금은 배이고 서민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어엎기도 한다”는 내용. ‘서경’ 소고(召誥)는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또는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 세상에는 백성보다 더 암험한 것은 없다”는 구절. 맹자(孟子) 만장(萬章)은 “하늘의 보심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을 따르고, 하늘의 들으심은 우리 백성이 듣는 것을 따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신라시대 화랑들에게 명상과 차를 가르친 경덕왕 때 스님 충담사가 왕에게 지어 바친 노래인 안민가(安民歌)가 떠올랐다. 왕이 왕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면 백성이 마침내 편안할 수 있다는 이 노래는 맹자, 순자 등 유교이념의 영향을 받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유교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누가 이를 부정하겠는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그의 부하들에게 백성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권력자들에게는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모든 권력은 권력자 자신의 무덤이 된다는 것을, 이 금빛나는 차실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다도의 향기로 묻혀냈었다.
정동주 소설가ㆍ동다헌 시자(侍者)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