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없이 쾌청하고 평온한 오후 세 시 바로 그 시간의 무게에 기대어 풀과 나무의 숲 오래 적막하더니 계절 따라 노루귀, 골무꽃은 분분히 피어 꽃가지 흔들고 하늘엔 삿갓구름 한가롭다.//(…)// 나는 나를 울고 있다.”(‘내 생애 단 한 번 내가 울고 있다’ 부분)
나를 위한 울음은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당도한 버거운 행복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그 고향은 찰나의 환각이기에 서럽다. 시인은 “꽃 피어 만발한 잎 피어 우거진 옛 그림 속에는 내가 들어 산다”고 노래하지만 그의 몸은 세속 도시의 한 가운데서 이리저리 시달리는 신세다. 그래서 절규할 수밖에 없다, 살고 싶다고.
“물싸리 가지 끝에 두세 송이 꽃 피는 초여름 산골 십 리 절반은 산오리나무 물오리나무 숲, 모든 것이 거기서는 고요하다.// 두메양귀비 네 장의 얇은 꽃잎 서로 겹쳐 유독 선명한 산골 십 리는 참나무 졸참나무 숲, 나는 살고 싶다”(‘두메나 산골’ 전문)
가지 못하는 ‘고향’도 서럽지만, 잡지 못하는 사람도 서글프다. 그렇지만 시인은 조용히 보낼 줄 알고, 진득하게 그리워하는 법을 안다.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빈집에 고이 간직하는 것이 그 길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 알면서도/ 나 혼자 꾸준히 생각하리다/ 내내 어여쁘소서// 한참을 잘못 든 길 한번쯤 되돌려 가고 싶은/ 한참을 위반한 삶 한번쯤 되돌려 살고 싶은/ 나 혼자 꾸준히 지켜보리다/ 내내 변치 마소서.”(‘K’ 전문)
시인은 가지 못하는 곳과 잡을 수 없는 사람은 ‘생과 사의 침묵처럼 이어져 있었다’고 노래한다. “어느 누군들 살아서는 그곳에 이르지 못하리/ 어느 누군들 죽어서는 이곳에 이르지 못하리.”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서 먼 길을 떠난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어느 곳에도 멈추지 않으며, 길을 잃어도 방황하지 않을 마음으로.
“오, 지독하게 낯선 나를 만나러 몸만 두고 떠나 십 리 절반쯤 길 위의 숲 깊고 그윽한 그늘을 드리우니 여기 그리고 지금은 적멸보궁, 나는 비로소 쉬임없이 걷고 있는 나를 오래도록 떨며 기다렸다.”(‘나는 이른봄애호랑나비 등을 타고 날았다’ 부분)
조용호 기자
jhoy@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