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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추억속 내 영화]어느 求道的 편력자의 삶… 타이론 파워의 ''면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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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2-23 18:55:00 수정 : 2007-02-23 18: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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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직전 한성도서주식회사란 출판사에서 영어 단편 대역 총서를 낸 적이 있다. 왼편에 원문이 있고 오른편에 번역문과 간단한 주석이 달린 아주 얄팍한 책이다. 그 중 한 권이 서머싯 몸의 ‘레드(Red)’였고 역자는 시인 김기림이었다. 고3 때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그것이 몸 작품과의 첫 대면이었다. 환도 직후 청계천 고서점에서 몸의 소설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싸구려 추리소설 나부랭이 가운데 그의 소설이 끼어있었다. 미군부대에서도 수요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재미도 있고 영어 공부에도 좋다 싶어서 눈에 띄는 대로 사 보았다. ‘면도날‘은 그 무렵 읽은 것이다.
30여 년이 지난 후 샌디에이고에서 케이블 TV로 영화 ‘면도날‘을 보았다. 몸 작품 중 영화화된 것이 꽤 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처음 보는 몸 원작의 영화였다. 원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문예영화 일반의 특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독일에서 생겨난 성장소설(Bildungsroman)에 대한 가장 간명한 정의는 토마스 만의 ‘모험소설의 내면화‘일 것이다. 소설에서는 래리라는 미국 청년의 구도적 정신 편력이 제1 주제라면 청년 주변의 지극한 물질 숭상의 속물적 삶에 대한 냉소적 관찰이 제2 주제를 이루고 있다. 영화에서는 제1 주제인 형성소설의 국면은 사상(捨象)되어 최소한으로 줄이고 제2주제가 전경화돼 있었다. 그래서 영화만 보아 가지고는 ‘면도날‘이란 표제 자체가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을 공산이 크다. 정신적 구도의 길은 면도날을 걷는 것처럼 어렵다는 뜻의 힌두교 경전 대목에서 제목을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면도는 수염 깎는 것을 가리키지만 면도칼의 준말이기도 하다.

‘면도날’은 일인칭 소설인데 영화에서도 서머싯 몸이 직접 등장하고 1919년 시카고에서 만난 한 청년에 대한 회상을 술회하는 형태로 전개된다. 순진하고 진지한 래리는 1차대전 때 항공병으로 참여했다가 동료의 죽음을 경험한다. 의도야 어찌됐건 동료의 죽음으로 자기는 살아난 셈이었고 그 이후 삶의 의미에 대한 자발적 탐구에 골똘하게 된다. 그는 친구 부친이 운영하는 증권회사의 취직 자리도 사절한다. 약혼자 이자벨은 ‘정상적’인 삶으로 나아가기를 설득하지만 그는 자기의 길을 가겠다며 굽히지 않는다. 이자벨은 파혼을 선언하고 공통의 친구인 백만장자의 아들 그레이와 결혼한다.
한편 래리의 소년기 여자 친구였던 소피도 결혼하고 래리는 편력의 길로 나선다. 탄광에 가서 갱부로 일하기도 하고 독일 농촌에서 농부 노릇을 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삶의 현장에서 연장자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유럽에서의 지리적, 정신적 편력 과정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그는 인도로 건너가 요가 승의 훈도를 받고 홀로 암자에 들어가 수련을 쌓는다. 그런 연후에 산정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홀연 깨달음과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된다. 10년 만에 파리에 들른 그는 우연히 이자벨 부부를 만나게 되는데 1929년의 대공황 때 파산하고 그 후유증으로 그레이는 신경증 환자가 돼 있었다. 래리는 인도에서 배운 정신요법으로 그레이의 두통을 고쳐준다.
한편 소피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이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그 충격으로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파리의 윤락가에서 살고 있다. 래리는 소피와의 결혼을 결심하고 그녀로 하여금 금주를 실천하게 한다. 이를 알게 된 이자벨은 소피를 초청하고 자리를 비워서 소피가 다시 술을 입에 대게 유도한다. 소피와의 결혼이 래리의 삶을 망친다는 논리지만 그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주 서약을 어긴 소피는 래리를 대할 염치가 없어 다시 윤락가로 도망가 버린다. 소피를 찾아 나선 래리는 그곳 단골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얼마 안 있어 소피의 피살체가 발견되어 그 뒤처리를 맡게 된다. 한편 이자벨은 외숙이 막대한 유산을 남겨주어 이전의 미국 생활로 돌아가고 래리도 돌아가서 택시기사라도 하며 살겠다고 말한다. 내면적으로 그는 마음의 평화를 얻어 흔들림이 없다.
이상이 줄거리의 요약이지만 많은 삽화가 곁들어져 있다. 이자벨의 외숙은 야무지고 노련한 속물의 표본으로서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큰 역할을 한다. 몸의 소설에서 여성은 대부분 부정적 인물로 묘사된다. 알코올중독증을 활용해서 소피를 래리와 이간시키고 급기야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자벨의 행태와 자기합리화는 작가의 냉소적 인간관과 여성관을 잘 드러내준다.
1946년에 제작된 이 흑백영화에는 타이론 파워(사진)가 주연으로 나온다. 당대의 미남배우로 통했던 그가 래리 역을 한다는 데서 영화의 한계가 예정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래전에 읽었지만 소설 장면 중 잊히지 않는 대목이 있다. 파혼할 무렵 ‘실제적’이 되라는 충고에 대해서 래리는 반문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모색하는 것처럼 실제적인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유종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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