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방송(대표 김문연) 히스토리채널은 아인슈타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아인슈타인’을 11일 오전 9시와 밤 8시 방송한다. 상대성 이론으로 대표되는 과학적 업적, 평화주의에 기초한 적극적인 반전 활동, 그리고 정열적인 사랑과 여성 편력 등을 통해 20세기 최고 과학자의 생애를 조망해 본다.
1879년 아인슈타인은 독일 북부에서 발전기 공장을 운영하는 유대인이었던 아버지 헤르만과 어머니 폴린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부모에게 지속적인 걱정을 안겨줬다. 태어날 때는 뒷머리가 너무 커서 기형아로 의심받았고, 뒷머리가 들어갈 무렵부터는 말을 하지 않아 벙어리가 아닌가 하는 걱정을 낳았다. 겨우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는 같은 말만 계속 되풀이하곤 했고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다. 아인슈타인은 학교를 싫어했고, 학교도 그를 우수한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퇴학을 권고받기도 했다. 한 그리스어 교사는 ‘너의 존재가 나의 학급의 존경심을 잃게 한다’고까지 했다.
1896년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공과대학에 입학해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하며 지적인 해방감을 맛봤다. 그리고 4살 연상인 세르비아 출신의 밀레바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물리학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며 서로를 깊이 사랑했지만 부모의 반대에 부딪쳤고 학위만 있을 뿐 직업도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1901년 밀레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입양시키고 만다.
1902년 스위스 특허청의 특허검사원으로 취직하고 나서야 밀레바와 결혼한 그는 연구에 몰두할 금전적 및 시간적 여유를 얻었고 일명 ‘기적의 해’인 1905년에는 상대성 이론에 관한 논문을 포함해 무려 4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하지만 연구에만 몰두하고 가족을 돌보지 않는 그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밀레바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1912년 베를린으로 출장을 떠난 아인슈타인은 이혼해서 두 딸과 살고 있었던 사촌 누이 엘사와 사랑에 빠진다. 1914년 그는 베를린 대학의 교수직 요청을 받게 되고 곧 받아들였다. 하지만 밀레바는 아이들을 데리고 스위스로 떠난다.
그해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평화주의를 표방한 그는 연구에만 몰두하다 과로로 쓰러졌으나 엘사의 간호로 건강을 회복했고, 1919년 엘사와 식을 올린다. 같은 해 일식 현상으로 상대성 이론이 입증되면서 학계의 스타로 떠오른 그는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지만 2차 세계 대전의 전운이 감돌면서 히틀러의 압제를 예감하고 1932년 미국행을 결심한다.
프린스턴 대학 이론물리 연구소에서 자유로이 연구하며 미국에 정착한 그는 유명 과학자였던 만큼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스스로도 그 인기를 즐겼다. 1935년 엘사가 병들자 아인슈타인은 20년 전 엘사가 그랬듯 그녀를 극진히 간호했지만 1936년 12월 20일 엘사는 17년의 결혼생활을 뒤로 한 채 60세의 일기를 마쳤다.
1939년 히틀러의 세력 확장에 두려움을 느낀 그는 평화주의를 포기하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경고서한을 보냈고 이 서한을 계기로 미국은 원자폭탄 개발 경쟁에 뛰어든다. 비록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아인슈타인은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에 환멸을 느꼈고 이후 대량살상무기 반대운동으로 여생을 보낸다.
냉전의 시작과 함께 FBI 국장 에드거 후버 및 매카시 의원 등 반공주의자들의 눈엣가시가 되어 반역 혐의를 받기도 하지만 끝내 정치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은 1955년 76세의 일기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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