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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목장 조찬형 명인 "나무가 좋아 목공에 미쳐 살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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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11-24 13:53:00 수정 : 2006-11-24 13: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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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년을 오직 전통 창호 만들기에 쏟아 부은 소목장 조찬형(69) 명인. 그가 나무 다루는 모습을 보면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떠오르게 한다. 나뭇결을 따라 물 흐르듯 움직이는 그의 손길은 나무와 대화하는 것 같다. 그의 호가 목음(木音)인 것도 이런 연유인 듯하다. 나무와 웃고 운 세월이 그를 전통창호 분야 최고의 경지에 올려놓았다.
“창호는 집과 세상을 소통시킵니다. 사람으로 치면 입과 귀 역할을 하지요. 이처럼 중요한 창호를 만드는 과정도 정성과 땀의 연속입니다. 나무를 말리는 데 3년이 걸리고 동남풍에만 말려야 해요. 재목을 구분해 작업에 들어가도 전통 꽃살 창호의 경우 20일 넘게 걸립니다.”
가을 끝자락에 찾은 충절의 고장 충남 예산 가야산 기슭에 자리한 조 명인의 작업장 ‘옥계산방’. 단신이지만 허옇고 긴 수염 때문에 도인 같은 조 명인은 “나무를 좋아하지 않고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이 일에 매달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찬형 명인은 “최고의 목재인 춘양목에 장인의 혼과 정성이 담긴 창호는 1000년 이상의 내구성을 갖는다”며 전통창호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그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10평 남짓한 수작업실의 한쪽 벽면은 손때 묻은 대패, 톱, 끌과 이름 모를 연장 등 100여점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주문 물량뿐 아니라 후학들을 위한 창호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의 종착역에서 우리 전통 창호의 맥이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하루가 너무 짧은 것 같습니다. 작업장으로 창호를 배우러 오는 사람을 가르치랴 작품 만들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지경이에요.” 선천적으로 부지런하고 대충대충하지 못하는 꼼꼼한 성격을 지닌 그는 일을 맡았다 하면 끝장을 볼 정도로 매달린다.
조 명인은 이런 투철한 장인정신 덕에 문화재 수리 복원공사나 사찰 창호 교체 때는 단골로 불려 다녔다. 그의 손을 거친 굵직한 공사는 경복궁·창덕궁 복원공사,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 꽃살문 보수, 단양 구인사 조사전 창호 제작, 하동 쌍계사 법당 창호 보수, 영광 불감사, 영천 은혜사, 속리산 법주사 등 셀 수 없이 많다.
마모가 심해 모두가 힘들다고 여겼던 기림사 꽃살문 보수는 조 명인의 비법인 수지칠로 2개월 만에 성공리에 마쳤고 구인사에선 창호에다 옻칠을 한 뒤 순금을 덧씌워 전대미문의 황금문짝을 만들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는 1996년에 충남도 제18호 소목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는가 하면 97년에는 문화재수리 기능자 소목장 1788호로 등록됐다. 2001년에는 한양대 미대에서 1년간 초빙교수로 강의하기도 했다.
조 명인은 2001년에 국내에선 처음으로 전통창호 개인전시회를 인사동에서 열었고, 2003년 10월에는 세계 30개국에서 온 박물관장들이 그의 작업장을 직접 찾아와 견학하면서 한국 전통창호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통창호를 제대로 배우려면 최소한 10년이 걸려야 합니다. 쉽게 배워 돈 벌려고 한다면 이 길에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지요. 열정을 갖고 일에 미치지 않으면 진정한 장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가 목수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53년 16세 때다. 잘살던 집안이 아버지 대에 와서 가세가 극도로 기울어 초등학교도 끝내지 못하고 고향인 예산 덕산에 있는 친척의 공방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장롱이나 제사상을 부숴 상자를 만드는 등 목공에 소질을 보인 그는 고향에서 3년간 나무를 다루는 기초를 쌓은 뒤 56년 상경해 가구공장에서 고전가구와 사찰 창호 기술을 익혔다. 그 뒤 59년에는 인천에서 스승인 김건우씨로부터 6년간 전통창호 기술을 고스란히 전수받게 됐다.
“결혼한 30대부터 일감을 따라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지요. 당시는 지금처럼 교통도 발달하지 못했고 연장을 챙겨 한번 일 나가면 한두 달 집에 들어가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집에 있다가도 밤 늦은 시간에 일감이 있다고 연락오면 그곳으로 곧바로 달려가곤 했지요.”
가정은 자연히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1남4녀를 둔 가장이었지만 일이 있다면 전국을 유랑하듯 떠돌아 지금까지도 가족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남편의 유랑을 견디다 못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여러번 가출했으며, 이로 인해 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10년 전 세상을 떠났다. 조 명인이 뒤늦게 부인 곁으로 돌아와 7년 동안 정성을 들여 간병에 나섰지만 허사였다.
“연꽃·우담바라꽃살 문을 만들다 보면 불현듯 아내의 얼굴이 겹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생전의 잘못을 빌며 극락왕생하기를 기도하지요.”
자녀들도 어릴 때의 아픈 기억 때문에 아버지의 일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모두 대학까지 공부시켰지만 아버지의 가업을 잇고 싶어하는 자식이 없어 조 명인은 내심 섭섭하다고 한다.
“요즘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이들이 목수의 자식이라고 놀림을 많이 당했대요. 또 큰딸 대학진학 문제로 담임선생을 만났는데 ‘문짝을 짜서 어떻게 대학을 보내겠느냐’는 말을 들을 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픈 가족사를 살짝 털어놓는 그는 여생을 후학지도와 창호박물관 건립에 역점을 둘 계획이다.
지금까지 그가 기술을 전수한 제자는 전국에 걸쳐 15명에 불과하다. 일이 어려워 중도에 그만두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전통창호에 관심이 높아져 4명이 일을 배우고 있고 문의도 많아 다행이라는 그는 99년 옥계산방에다 20여평의 창호전시관을 꾸몄으나 너무 좁아 뒤쪽에다 500평 규모의 박물관 부지를 마련해 내년부터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는 이 박물관을 전통창호와 관련된 모든 것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문화 체험의 장뿐 아니라 후학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모델로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조상의 지혜가 담긴 전통창호의 맥을 잇기 위해서는 예부터 내려오던 문양과 기법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 명인은 “잊혀진 문양을 찾아 재현해 내는 데도 힘을 쏟을 것”이라며 장인의 혼과 열정을 내비쳤다.
글·사진=전성룡 기자
sych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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