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는 정신병자와 ‘미친 사람’은 동의어로, 환자는 집안의 수치요 부끄러운 병으로 치부되었다. 이웃이 행여 알세라 쉬쉬하게 마련이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보지 못하기 일쑤다. 마귀나 악령이 씌었다고 종교단체의 기도원 등에 내맡겨져 치료라는 이름의 고문보다 더한 고통이나 비인간적 대우를 받기가 예사다.
병원에서조차 그들의 광기를 우려하여 병실을 쇠창살로 가리고 출입구는 철제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교도소 아닌 교도소 생활을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신병동에서의 폭력과 야만성은 악명 높다. 폭력적 상황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 하에 환자에게 투여되는 진정제 계통의 약품은 환자를 졸리게 하고 축 처지게 한다. 환자는 치유되기도 하지만 식물인간 내지는 죽음의 늪으로 빠져들어간다.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오래 전의 영화는 정신병원의 야수성과 잔인성, 비인간성을 사실감 있게 고발하고 있다.
이번에 불이 난 병원을 비롯해 우리의 정신병원은 거개가 인권사각지대에 머물고 있다. 일반병원의 병실에 붙어 있는 환자의 권리장전은 사문서나 다름없다. 가족이나 보호자조차 정신병원을 환자를 입원시키기보다는 내팽개치거나 버려두는 곳쯤으로 인식하는 판국에 병원 탓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 사회는 거대한 정신병동이라고 진단했다. 사회병리현상이 날로 심화되는 현실에서 우리 모두가 정신병동의 문고리를 붙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병자는 미쳤다는 단선적 사고에서 벗어나 그들의 인권을 찾아주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정신병원을 ‘상상력이 가득 찬 시인이 사는 집’이라고 한 반어적 정의가 문득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지구가 돌고 있어 어지럽다. 지구에서 내리고 싶다’ 한 이는 이 땅의 시인이었다.
조병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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