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파독 광부들이 1967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된 동백림 사건에서 '간첩' 혐의를 받고 강제소환되기도 했다. 사진은 국내 광산에서 채탄작업중인 광산노동자들.(국정홍보처 국가기록사진관 소장)
▶‘간첩’으로 내몰린 파독 광부들
파독 광부 사회도 동백림 사건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앙정보부는 1967년 7월3일~9월22일까지 파독 광부 박성옥, 김진택을 간첩 혐의로 기소하고,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7월22일~8월2일까지 기소하면서 김진택을 제외하고 박성옥과 대신 김성칠을 간첩으로 기소했다. 결국 파독 광부 3명이 중앙정보부 또는 검찰에 의해 ‘간첩’혐의를 받은 것이다.
먼저 1967년 7월13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프랑크푸르트대학 이론물리학 연구원인 정규명-강혜순씨 부부와 함께 한국인 파독 광부 1차2진이던 박성옥과 1차3진이던 김성칠의 혐의 내용을 담은 제4차 발표를 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내용을 요약하면, 파독광부 1차2진이던 박성옥은 정규명씨 등에 포섭돼 돈(공작금)을 받았고, 동베를린 소재 북한대사관에서 다섯 차례 간첩교육을 받았으며, 북한 평양에도 한차례 불법적으로 다녀왔고, 북한 노동당에 가입한 뒤 김성칠 등을 포섭해 교양했다는 것이다.
또 같은 날 발표된 김성칠의 경우 박성옥의 포섭으로 주독북한대사관에서 수차례 북측 인사를 접촉하며 사상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1967년 7월16일. 제7차 발표에서 김형욱 부장은 또다른 파독광부 김진택의 간첩혐의를 발표했다. 김 부장의 발표내용을 요약하면, 강원도 평창 출신으로 평창농고를 졸업, 군복무를 마치고 평창군청 임시직원으로 있다가 1964년 10월 파독한 김진택도 월북한 숙부의 안부를 알아보기 위해 주독북한대사관과 접촉, 북측 인사를 수차례 접촉하며 사상교육을 받고 북측을 찬양고무했다는 것이다.
박성옥 등 파독광부들은 정말 간첩이었을까. 결론부터 얘기한다면, 그들은 북한대사관에 가고,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금품을 수수하는 등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간첩행위를 한 간첩은 아니었다는 판단이다.
실제 4심 5심을 거치는 동안 국가보안법 제2조, 형법 98조상의 간첩죄를 적용받은 사람은 박성옥, 김성칠, 김진택을 포함해 단 한명도 없었다. 중앙정보부와 검찰의 기소혐의처럼 간첩죄가 적용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간첩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2006년 1월26일 발표된 국정원의 과거사위원회(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1967년 동백림사건’ 조사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상기 최종심 결과가 반영하듯이 중앙정보부는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했고, 이에 대해서는 일부 수사관 등도 “실제 간첩활동이 없는 간첩사건으로 여타 공안사건과 성격상 차이가 있다”는 의견을 개진
-이00(수사관): “동백림 사건은 무지막지한 사건이 아닌 무난한 간첩사건으로 서독 등 해외 유학생들이 북한에 가서 간첩교육을 받고 공작금을 수수한 것은 사실이나 실질적으로 간첩활동을 한 사실은 없었음”
-이00(수사관): “대다수 피의자들이 이념적으로 사회주의를 신봉하거나 김일성을 찬양하지는 않았으며 구체적인 간첩활동이 없는 단순한 사건임”...
-이수길(독일연행자): “사건의 본질은 돈을 받고 동백림 및 북한을 왕래하고 돈 받은 대가로 다른 사람을 소개시켰던 것이 팩트로써 간첩 사건이라고 볼 수는 없음.”(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 ‘1967년 동백림사건’, 47~48쪽)
그렇다면 그들은 왜 실정법을 어겼을까? 박성옥과 김성칠, 김진택 모두 북측에 있거나 실종된 친인척을 만나기 위해 북한대사관과 접촉을 하면서 실정법을 위반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그들 또한 남북 분단에 따른 또다른 피해자인 셈이었다.
박성옥은 사전 허락없이 동베를린의 주독북한대사관을 찾아가 북측 인사를 만나고 북한에 한차례 다녀오는 등 북측과 접촉한 이유에 대해선 6·25전쟁의 와중에 행방불명된 형들(큰형과 중형)의 소식이 궁금했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이적행위’나 ‘간첩행위’를 목적으로 한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두 형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동생으로서 실종된 두 형의 행방을 알려는 것은 당연한 도리 아닌가. 북한대사관측에 이것을 첫 번째로 요구했다.”
박성옥은 주독북한대사관과 접촉한 한참 뒤에 북한대사관측으로부터 두 형의 생사를 확인받았으며 특히 형들이 북한에 살고 있다고 전해들었다. 그리고 북한측에서 “한번 기회가 있으면 (북한에) 가셔야죠”라고 제안해 이에 응했다는 게 그의 해명이다.
그래서 박성옥은 형을 만나기 위해 서독 하노버에서 비행기를 타고 평양에 도착, 모처에서 둘째형을 만났다고 밝혔다. 형제는 서로 살아온 얘기를 하며 밤이 새는 줄도 몰랐다. 화제는 단연 6·25전쟁이었다. 박성옥은 이때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 6․25전쟁에 참여한 둘째형과 하마터면 총부리를 겨눌 뻔한 걸 알고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즉, 둘째 형은 약간의 시차만 있었을 뿐, 국군(해병대)이었던 박성옥이 후퇴했던 한강-포항 등의 이동경로를 따라 남하했던 것이다.
김성칠이 북측과 접촉하게 된 계기도 박성옥과 비슷했다. 6·25전쟁의 와중에 행방불명이 된 작은 아버지의 소식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아버지는 초대 대법원장이던 추강 김용무씨. 변호사로서 일제하에서 보성전문학교 교장과 이사장 등을 지냈고 미군정 시절 대법원장, 한국민주당 문교부장, 2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전쟁 중인 1951년 9월12일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다.
1935년 전남 무안군 현경면에서 태어난 김성칠은 1948년 3월 현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함평중학교를 거쳐 1954년 3월 함평농고를 졸업했다. 이후 2년간 가사에 종사하다가 1956년 10월부터 약 3년간 함평군 서기로 근무했으며 1960년 3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서기보로 임명되어 근무하기도 했다.
1964년 5월 하사로 제대한 그는 그해 11월26일 독일 땅을 밟게 된다. 도르트문트 광산에서 일했지만, 얼마 후 근무조건이 나은 카스트롭-라욱셀로 옮겨 근무했다.
김성칠은 광산 노동을 그만 둔 뒤 식당과 식품점, 여행사 등을 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한다. 지금은 딸과 함께 뒤셀도르프시 인근에서 버섯재배 등을 하며 살고 있다.
김진택의 경우도 다른 두 사람과 엇비슷했다. 김진택은 작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아무런 연결자도 없이 혼자 동베를린 북한대사관과 접촉했다고 한다.
***자료제공 또는 문의=파독 광부와 간호사님과 관련한 사진, 자료 등이 있으시다면 저의 이메일(kimgija@segye.com)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가능하다면, 소중하게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파일 용량이 많을 경우에는 알집으로 압축해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6-4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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