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말하면 도심의 찌든 일상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는 부러움만 일겠지만, 기실 세속의 욕망을 버리고 변방에서 홀로 살아가는 일이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고독한 수행의 길이기도 하다. 그가 5년 만에 새로 펴낸 다섯 번째 시집 ‘적막’(창비)에는 그 적막한 삶의 무늬가 도처에 새겨져 있다. 시인의 고백처럼 나이가 들면서 자주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되고, 이전 시집들에서도 단골로 등장하던 자연과 교감하는 시에도 관조와 깨달음의 깊이가 배어든 연륜이 느껴진다.
“풍란의 뿌리를 만진 적이 있다/ 바람 속에 고스란히 드리운 풍란의 그것은/ 육식 짐승의 뼈처럼 희고 딱딱했다/ 나무등걸, 아니면 어느 절벽의 바위를 건너왔을까/ 가끔 내 전생이 궁금하기도 했다/ (중략)/ 풍란의 뿌리로 인해 세상은 조금 더 멀어져 갔지만/ 풍란으로 인해 얻은 것이 있다/ 한 평 땅이 없으면 어떠랴 길이 아닌들/ 나 이미 오래 흘러왔으므로”(‘풍란’ 부분).
시인은 바람 속에 고스란히 뿌리를 드러낸 ‘풍란’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언제나 길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 이어져 왔으나/ 들끓는 길 밖에 몸을 부린 지 오래”다. 몸을 부린 집이라는 것도 “비닐봉지들 나뒹굴며 공중제비를 도는 집/ 작은 새가 날아왔다 쫓기듯 솟아오르는 집”이요, “지치고 지쳐서 이제 비틀거리는 집”(‘낡은 집’)이다. 그동안 그리움도 삭이고 삭여서 맑은 눈동자 속 깊숙이 넣어버렸지만, 오래 길 위를 떠돌다 보니 울컥 솟구치는 그리움을 완전히 막아낼 도리는 없다. 시인은 화살나무를 보면서 고백한다.
“그리움이란 저렇게 제 몸의 살을 낱낱이 찢어/ 갈기 세운 채 달려가고 싶은 것이다/ 그대의 품 안 붉은 과녁을 향해 꽂혀 들고 싶은 것이다/ 화살나무,/ 온몸이 화살이 되었으나 움직일 수 없는 나무가 있다”(‘화살나무’ 전문).
그리운 이의 품 안으로 달려가 꽂히고 싶지만 움직일 수 없으니 애통하다. 그러나 달려가지 못해도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따뜻해질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네/ 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 문밖은 이내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이름 부르는 일’ 전문).
그리운 것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다만 바라보는 생으로만 이어온 시인도 이제는 보낼 것을 보내야 한다고 서글픈 목소리를 낸다. 이름을 부르는 일이야 언제든 어디서나 가능하겠지만 “한해가 저물고 이루는 황혼의 날들/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안다/ 안녕 내 사랑, 부디 잘 있어라”(‘먼 강물의 편지’)고 되뇐다. 그렇다고 시인이 마냥 주저앉아 허전한 독백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세월이 빚어낸 절창 하나 건져냈으니 세월도 헛되지 않았고 시업의 길 또한 빛난다. 그 절창, 이렇게 흐른다.
“칼을 들고 목각을 해보고서야 알았다/ 나무가 몸 안에 서로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 촘촘히 햇빛을 모아 짜 넣던 시간들이 한 몸을 이루며/ 이쪽과 저쪽 밀고 당기고 뒤틀어가며 엇갈려서/ 오랜 나날 비틀려야만 비로소 곱고/ 단단한 무늬가 만들어진다는 것/ 제 살을 온통 통과하며/ 상처가 새겨질 때에야 보여주기 시작했다”(‘각’ 전문).
글 조용호, 사진 지차수 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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