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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광의 아프리카 예술기행]<19>죽음 최후의 만찬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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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5-06-24 10:48:00 수정 : 2005-06-24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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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는 상호보완적… 끝이 아닌 시작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의 관계는 흡사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죽음은 삶을 연속된 과정으로 유지시키고, 삶은 죽음을 다른 차원으로 전환시킨다. 죽음으로 인해 인간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연속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어제…. 일상의 반복 끝에 죽음이 찾아오지만, 죽음은 삶의 리듬을 파괴하지 않는다.

#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는
카메룬의 켄주(Kenzou)에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베르베라티(Berberati)로 가는 길은 아주 힘든 여정 중의 하나이다. 이십여 곳이 넘는 검문소를 통과하면서 군인들에게 매번 지불하는 돈은 둘째치고라도, 언제 올지 모르는 차를 마냥 기다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면 여행은 상당히 편안해질 수도 있다. 햇볕을 피해 주막에 들어가 졸아도 걱정이 없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길게 봐도 상관이 없다. 다만 짐을 관리하는 것은 철저히 자기 몫이다.
책을 보고 지도를 보고 아이들과 장난을 치고 마을청년들과 이야기를 해도 차는 오지 않는다. 언제 차가 오느냐고 하면 곧 온다고 한다. 버스가 안 다니냐고 물으니 대답이 제각각이다. 분명한 것은 차가 다닌다는 것이다. 아침 8시부터 기다린 차가 오후 4시를 넘어서도 오지 않는다. 너무 심심해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데, 무장한 군인들이 다가와 카메라를 빼앗더니 검문소로 가자고 했다. 깜빡했다. 국경에서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금기사항을 잠시 잊은 것이다.
# 그러나 시간은 스치듯 지나가고
짐을 뒤지기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사귄 마을 청년이 들어와 중재를 했다. 허사였다. 돈을 원하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특별하게 생긴 카메라와 이미지 저장정치를 보고 나에게 간첩이 아니냐고 다그치기 시작했고, 같이 있던 한국인 학생은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나도 당황했다. 순간 카메룬의 국경검문소 일이 떠올랐다. 혹시나 해서 가지고 간 영문증명서를 보이며 대학교수라는 신분을 밝히고 나서야 상황은 호전되기 시작했다.
검문소에 붙잡혀 있는 사이에 차가 도착한 모양이다. 짐을 가득 실은 트럭에는 이미 이십 명 정도가 타고 있었다. 마을에서 사귄 청년들은 자리를 만들어 주면서 올라오라고 하였다. 트럭의 난간에 걸터앉아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하니 문득 당나귀를 타고 안데스 산맥을 오를 때가 생각났다. 절벽 밑으로 떨어질까 봐 밧줄을 꼭 잡았던 두 손이 지금은 트럭에 동여맨 줄을 꼭 잡고서 비포장도로의 굴곡에 따라 몸을 흔들고 있었다.
줄을 놓칠까 봐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스치듯 지나가는 풍경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습성인가 보다. 아주 가끔 나타나는 집과 끝도 없이 펼쳐지는 숲 모두가 눈에 들어온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흙으로 만든 집과 대지가 구별되지 않는 것도 감동이고, 시멘트로 장식한 집 안마당의 무덤이 대지와 확연히 구별되는 것 역시 모두가 감동이다. 집이라는 하나의 공간에 산자와 죽은 자를 공유시키는 것은 마치 삶의 리듬을 다른 차원으로 전화시키는 드라마와도 같았다.

◇뱀머리를 연상시키는 가봉의 바코타(Bakota)족 조형물은 당시에 죽은 이를 기리는 것은 물론 그를 보살펴준 조상신과 토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 똑바로 세워진 상태로 바구니 안에 담겨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여러 개의 곡식 주머니가 있고 그 위에는 조개껍데기 화폐와 뱀이 좋아하는 닭털 등이 있었다.
〈갤러리아프리카로 소장〉
# 과거를 향한 시간에서 죽음은 완성되고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오늘이라는 샤샤(sasa)의 시간으로부터 어제라는 자마니(zamani)의 기간으로 서서히 옮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래서 사자(死者)는 그가 생전에 알고 지냈던 친구들이나 친척들 그리고 유족들에 의하여 살아있는 사자(living-dead)로 남게 되는 것이다. 짐바브웨의 은데벨레(Ndebele)족 사람들이 가장의 시신을 방문이나 대문으로 내보내지 않고, 벽과 울타리에 구멍을 뚫어 내보내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는 죽은 사람이 집안에서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다.
살아 있는 사자의 이름이 기억되는 한, 그는 죽었지만 정말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죽었지만 생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혼인을 중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혼인을 통하여 친인척을 늘리고 자신을 기억할 자손을 낳음으로써 자신의 영속성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혼인은 한 사람이 오랜 기간 여러 사람의 기억에 머무르게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다. 따라서 혼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에 정복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 있는 사자가 영원히 샤샤의 기간 안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하나둘 죽음을 맞이하여 아무도 남지 않게 되면, 비로소 살아 있는 사자는 샤샤의 지평에서 자마니의 공간으로 침잠함으로써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자는 잊혀짐이라는 또 하나의 죽음으로써 죽음의 과정을 완성하여 하나의 영이 되는 것이다. 영이 되는 것이야말로 인간 영혼의 마지막 단계로 개인적인 불사(不死)의 상태에서 집단적인 불사의 상태로 들어가는 신적 존재와도 같은 것이다.

◇가나의 기독교인들은 현실에서의 물질적 행복을 사후세계로 가져가려는 욕구가 참으로 강하다. 벤츠를 타던 사람은 벤츠 모양의 관에, 치킨 집으로 성공한 사람은 치킨 모양의 관에, 그리고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한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은 비행기관을 준비하는데 아주 긴 시간 돈과 정성을 모은다.
# 죽음은 삶의 의미를 확장하고
말리의 도곤(Dogon)족 신화에 나오는 레베(Lebe)는 죽음이 인간세계에 도입되기 전에 살았던 나이 많은 노인이었다. 어느 날 그는 지쳐버린 자신의 육체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최고신 암마(Amma)를 찾아가 죽음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레베는 죽었지만 그의 친척들은 그가 잠들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시체를 땅속에 묻어 두었다. 여러 해 뒤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무덤을 팠을 때 유골 대신에 뱀이 발견됐고, 그 뱀은 사람들을 따라갔다. 이후에 도곤족 사람들은 신화의 세계에서 죽음을 선택하여 다른 차원의 불멸성을 획득한 레베를 자신의 조상신으로 여기고 뱀을 숭배하게 되었다.
조상숭배의 이데아는 삶의 이상 즉 자마니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개인과 종족의 염원과 일치되면서 불멸성 그 이상의 무엇을 제시하게 된다. 그것은 한 종족의 축적된 지식과 기억 그리고 기원에 관한 것으로 삶을 다른 차원으로 전화시키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죽음을 삶으로써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감싸안으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죽음은 삶의 리듬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삶의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베르베라티 가는 길에 보았던 집 안마당의 무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은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갤러리아프리카로 대표,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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