親러 반군 땐 러 입지 상당히 위축

미국 외교전문 포린폴리시(FP)는 이날 말레이시아 여객기를 누가, 어떤 이유에서 격추했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 사태 추이도 크게 바뀔 것이라고 전망했다. 동부반군이 말레이 여객기를 정부군 수송기로 오인해 러시아로부터 지원받은 미사일로 격추했다면 러시아로서는 고립무원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드미트리 트레닌 카네기재단 모스크바센터장은 뉴욕타임스(NYT)에 “반군이 러시아제 미사일을 쐈다는 증거가 나오면 서구뿐 아니라 (그간 소극적 입장이었던) 독일 및 아시아 국가들이 태도를 바꿔 러시아 제재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로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고강도 대러 제재에 맞서 상대적으로 온건 입장을 보였던 독일과 중국이 강경 쪽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게 뼈아프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18일 “이번 사태로 큰 충격을 받았다”며 즉각적이고 독립적인 진상 조사를 촉구했다. 중국 정부도 “경악을 금치 못한다”며 철저한 원인 규명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지난 3월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이후 동부 도네츠크·루간스크주 친러 성향 분리독립 세력에 무기 등을 지원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았다. 서방이 “우크라이나 주권과 영토가 침해됐다”며 수차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측근 및 국영 기업 대표들에 대한 여행제한 및 자산동결 등 제재에 나선 이유다. 그간 우크라이나 사태에 소극적 개입 입장을 견지하던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도 자국민 피해 등을 이유로 러시아산 에너지 금수조치 등 고강도 추가 제재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만약 동부 반군이 의도적으로 민간 항공기를 격추시켰다면 러시아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워싱턴 소재 싱크탱크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새무얼 차랍 선임연구원은 “푸틴은 제3국 민간인까지 테러대상으로 삼는 극단주의 세력을 방조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전했다. 하지만 이번 참사의 책임 주체를 밝히는 데 꽤 많은 시일이 걸리는 데다 “조사 결과 반군 소행으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러시아는 전략요충지인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NYT는 전망했다.
하지만 여객기 공격 주체가 우크라이나 정부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친러 성향의 국제문제 전문가인 세르게이 마르코프는 NYT에 “우크라 정부가 미국 등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군사개입을 유도하기 위해 이번 일을 벌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18일 우크라 정부와 반군이 휴전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국민은 걱정스럽고 비통한 심정으로 이번 격추 사건을 지켜보고 있다”며 “(동부에서 싸우는) 모든 당사자는 가능한 한 빨리 직접 만나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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