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戰 선제골 숨은 공신, 마지막 ‘꿈의 무대’ 화려한 대미 예고

현대축구의 화두 중 하나는 스피드다. 공격수는 물론이고 미드필더와 수비수까지 스피드 없이는 살아남기 힘들다. 패스워크와 공수 전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탈리아 마법사’ 안드레아 피를로(35·유벤투스)에게 스피드는 먼 나라 얘기다. 피를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중원에서 느릿느릿 경기장을 누빈다. 아무렇게나 기른 듯한 긴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탓인지 설렁설렁 뛴다는 인상을 줄 정도다. 만 35세의 노장인 데다 시대를 역행하는 ‘느림’ 속에서도 피를로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경기의 핵심을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라운드 전체를 꿰뚫어 보는 시야와 자로 잰 듯한 패스다. 이 덕분인지 피를로를 보면 느린 게 아니라 우아해 보이기까지 한다.
피를로는 15일(한국시간) 잉글랜드와의 조별리그 D조 1차전에서 넓은 시야와 예리한 패스, 슈팅 등으로 경기를 지배하며 이탈리아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전반 35분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유벤투스)가 터뜨린 중거리 선제골 뒤에는 피를로의 숨은 공이 있었다. 오른쪽에서 마르코 베라티(파리 생제르맹)가 가운데로 내준 패스를 향해 수비수 한 명을 달고 달리던 피를로는 공을 받지 않고 다리 사이로 슬쩍 흘려보냈다. 피를로의 움직임에 집중하던 잉글랜드 수비진 사이에 틈이 벌어졌고, 그 사이로 마르키시오가 첫 골을 터뜨렸다. 자신의 동료 선수가 어느 곳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훤히 들여다보는 장악력과 상대 수비의 의도까지 읽어내는 센스가 돋보인 명장면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킬패스로 잉글랜드 수비진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데드볼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한 피를로는 후반 추가시간에 정확한 프리킥 슈팅으로 다시 한 번 강한 인상을 남겼다. 비록 크로스바를 맞아 골로는 연결되지 않았지만, 피를로의 장점이 다시 한 번 드러난 장면이었다.
이날의 ‘맨 오브 매치’는 후반 5분 결승 헤딩골을 터뜨린 발로텔리에게 돌아갔지만 경기를 지배한 것은 단연 피를로였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공식 리포트에 따르면 피를로는 이날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은 112차례 패스를 시도했고, 이 가운데 103차례 동료 선수에게 정확히 연결해 92%의 높은 성공률을 보였다.
일찌감치 브라질 월드컵이 국가대표로서 마지막 무대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 피를로는 이날의 활약으로 ‘꿈의 무대’에서 화려하게 대미를 장식할 것임을 예고했다.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했던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조별예선 탈락의 수모를 겪었던 이탈리아. 피를로의 존재 덕에 다시 한 번 날아오를지 주목된다.
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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