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양성’은 국가와 민족, 계급과 신분, 개인 욕망 등 다양한 층위의 대립과 갈등이 공존하는 광장 드라마입니다. 영화는 광장에서 시작해 광장으로 끝나죠.” ‘평양성’을 들고 돌아온 이준익 감독은 ‘영화에 여러 층위의 얘기를 담으려 한 것 같다’는 지적에 이같이 답했다. ‘평양성’은 나당연합군과 고구려 간의 전쟁을 그린 영화다. 그는 그러면서 “서양 역사나 전쟁에 대해선 굉장한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우리 ‘광장의 역사’는 소홀히 하지 않았느냐”며 “최근 ‘골방 문화’가 발전하고 있는데 우리 역사 속 광장 문화를 찾아 즐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양 광장의 역사는 ‘벤허’ ‘십계’ 등의 형태로 발전해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시리즈 등 판타지 사극까지 왔습니다. 우리도 역사 속 문화콘텐츠를 판타지 수준으로까지 진화시켜야죠.” 이 감독은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왕의 남자’(2005) 등을 통해 독특한 역사 해석과 풍자, 해학으로 사극 영역을 넓혀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솔직한 모습이 편하고 좋았다.

“삼한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통합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한반도라는 독립적인 민족문화가 형성됐기에 ‘황산벌’을 찍은 감독으로서 ‘평양성’을 찍지 않을 수 없었어요. ‘황산벌’에선 지역감정을 웃음으로 표현했다면 ‘평양성’에선 고구려를 등장시켜 남북관계를 웃음으로 접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정치 이데올로기를 넘어 문화적으로 접근해보고 싶었어요.”(이 감독이 2003년 연출한 ‘황산벌’은 나당연합군과 백제 간의 전투를 그린 영화로, 평단의 관심과 흥행에서 모두 성공을 거뒀다는 평이다.)
―영화에선 백제 출신 ‘거시기’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극에서 거시기는 민초를 상징하는 동시에 ‘전쟁 종결자’입니다. 전쟁이 본격화할 즈음 거시기는 ‘전쟁은 죽자고 하는 게 아니라 살자고 하는 것이여’라고 말하죠. 또 관객을 대변하는 인물이 바로 거시기입니다. 그는 오직 갑순이 한 명만 같이 살면 김유신 장군도 부럽지 않은 존재죠. 전쟁시대 영웅이 되지 못하는 일반인은 뭘 위안으로 살겠어요? 왕도 장군도 없고, 고구려 백제 신라도 없으면서, 소중한 가족이 평화롭게 살 수 있길 바라지 않겠어요? 거시기는 바로 그런 마음을 담고 있는 인물이죠.”
―‘황산벌’과 전체적으론 상당히 비슷해 보이는데.
“김유신 등 ‘황산벌’에 나왔던 인물이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오로지 상업적인 성공만 목표로 했다면 황산벌과 근접한 시기에 평양성을 제작해 흥행 바람을 이어갔어야 했겠죠. 하지만 8년이란 세월이 지나 연작을 만든 것은 이 소재가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한 강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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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를 무너뜨린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린 이준익 감독의 영화 ‘평양성’. 영화사 아침 제공 |
“‘평양성’이 갖고 있는 독특한 속성은 리얼리티와 난센스가 절묘하게 맞아 있다는 점이겠죠. 예를 들자면 벌 공격이나 투석기로 동물을 날려 보내는 등 난센스 방식을 썼음에도 심리적으론 리얼리티를 유지하고 있어요. 사실 ‘해리포터’시리즈나 ‘반지의 제왕’ 등도 마법 세계는 리얼리티와 거리가 멀지만 인물 감정이나 사연은 굉장히 사실적이잖아요? 저는 리얼리티와 비리얼리티가 사극이라는 공간에서 판타지하게 전개되는 게 미래 콘텐츠의 핵심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감독은 1987년 광고기획으로 영화계에 발을 디딘 후 ‘황산벌’ ‘왕의 남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등 여러 편의 장편 사극을 제작했다.

“최근 한국 영화는 스릴러, 멜로, 액션 등 전문화된 장르화가 이뤄지고 있지만 저는 총체극을 통해 역사를 보여주는 게 장기이니까 그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이죠. 역사학자들은 ‘자신의 역사를 멸시하거나 망각한 민족은 반드시 망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실제 우리가 서양교육을 많이 받다 보니 그리스 로마 신화 등에 대한 동경으로 물들어 있죠. 서양 지식에 대해선 열광하면서도 동시대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얼마나 문화 콘텐츠로 재생산하고 있느냐를 보면 다소 소홀한 측면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부문을 채우기 위해 사극을 찍는 것이죠. 1000년 전 사건사고나 인물을 그리면 오히려 세계관이 선명해지고 더 잘 바라볼 수 있는 장점도 있어요.”
―이 감독의 사극 웃음 코드는 매우 독특한데.

―차기작은.
“(‘평양성’ 흥행) 결과가 나와야 결정할 것입니다.(웃음) ‘매소성’은 찍지 않을 수 없겠지요.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한 다음 당나라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나당이 전쟁을 한 곳이 바로 철원지역 매소성이니까요. ‘황산벌’ 3부작이 완성되는 셈이죠.”
김용출 기자, 사진=송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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