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허브] 한·미 소고기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진 4월 18일, 축산업계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정부가 미국산 소고기를 연령·부위 제한 없이 사실상 모두 수입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르면 이달 말 광우병 안전장치가 풀린 값싼 미국 소고기가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올 판이다. 이날 장이 선 전북 장수·장계서 암송아지는 183만원에서 174만원으로, 수송아지는 196만원에서 187만원으로 하루만에 4.9%, 4.6%씩 하락했다.
축산업계와 시민단체, 야당에선 “협상이 아닌 조공”, “퍼주기”, “굴욕 외교의 산물”이라며 반발했다. 전국한우협회는 “4월 18일은 국민 먹거리 주권을 포기한 국치일”이라고 성토했다. 이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소 키우는 분들은 숫자가 적으니까 보상하면 되지만 우리 도시민들이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고기를 먹는 것은 그렇다”며 “질 좋은 고기를 들여와서 일반 시민들이 값싸고 좋은 고기를 먹는 것”이라고 협상 결과를 설명했다.
그러나 여론은 축산 농가를 재물로 바치고 국민의 건강주권까지 내준 ‘대책 없는 소고기 개방’이라며 분노하고 있다. 급기야 정부·여당은 4월 21일 ‘우리 축산농가 살리기 대책’을 내놓고 진화에 나섰지만 이마저도 시행을 눈앞에 둔 내용을 재탕한 졸속대책이란 비난을 사고 있다. 미국산 소고기 협상, 정부 축산대책의 문제점 등을 짚어봤다.

“국민 건강주권 마저 내주다니…”
광우병 발병해도 수입 중단 못해…정부지원은 기존 대책 재탕
‘광우병 차단 고삐’ 풀린 미국 소고기
이번 소고기 협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도축 소의 월령 '30개월' 기준이 무의미해진 데 있다. 연령과 부위에 관계없이 모든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허용했다는 뜻이다. 이는 미국의 요구대로 먼저 '30개월 미만 소'는 편도, 소장 끝부분을 제외한 모든 부위, '30개월 이상 소'는 광우병 우려가 큰 특정위험물질(SRM) 7개 부위(편도, 소장 끝, 뇌, 눈, 머리뼈, 등뼈, 등뼈 속 신경)를 제거하면 수입을 허용토록 한 국제수역사무국(OIE) 권고 지침에 따른 것이다. 30개월 미만이라는 연령 기준은 검역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 광우병은 대부분 30개월 이상 소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협상에서 30개월 이상 소의 수입도 미국이 '동물사료 금지조치 강화'를 관보에 공표하는 시점부터 허용된다. 더구나 최근 미국에서 도축되는 소의 99%가 24개월 미만인 것으로 조사돼 국내 시장은 미국산 소고기에 무제한 개방된 것이나 다름없다.
축산업계나 관련단체에서는 "실효성 없는 30개월 미만 단서 조항도 한심하지만 광우병 위험에 처해 있는 등뼈와 꼬리, 내장 등 부산물까지 들여온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미국이 광우병 발병의 주요 원인인 육골본 사료 관련법 개선에 관한 입법 예고만 하고 실제로 시행하지 않아도 우리 정부는 무조건 30개월 이상 소고기 수입도 허용해야 한다.
또한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병해도 수입이나 검역을 즉각 중단할 수 없게 한 점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번에 합의한 위생조건에서는 광우병이 발병하면 미국이 자체 역학조사를 먼저 실시해 그 결과만을 통보한다. 그리고 미국의 광우병 위험에 대한 OIE의 광우병위험통제국 지위에 반하는 상황일 경우에만 수입을 중단할 수 있어 역학조사 기간 동안 광우병에 걸린 소가 도축돼 한국에 수입될 수 있는 허점을 남겼다.
우리 정부의 이러한 협상 결과는 가까이 있는 일본의 경우와 비교된다. 2006년 일본은 광우병 파동으로 금지된 미국산 소고기 수입 재개를 결정할 때 전국에서 10번에 걸쳐 공청회 열었다. 또 일본의 검역전문가들은 OIE보다 높은 수준의 위험평가 기준을 요구하고 미국산 소고기 개방 관련 정보를 인터넷으로 공개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일본에 20개월 미만 소에서 SRM을 제거한 소고기만을 수출하고 있다. 일본은 또 내부적으로 2001년부터 축산업자에게 광우병대책 보상금으로 1520억엔, 소고기 안정화 대책 298억엔, 식품안전위원회 설립 742억엔 등 모두 4000억엔을 투자했다. 신뢰할만한 광우병 차단 장치로 국민을 설득하고 자국의 축산업을 지켜내고 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은 이번에 합의한 위생조건(안)이 20일 동안의 입법예고를 거쳐 발효되는 즉시 재개된다. 지난해 10월 이후 검역 대기 중인 5300톤가량의 물량이 이르면 5월 중 시중에 유통된다. LA 갈비와 소꼬리 등 뼈있는 소고기도 6월에는 통관을 마친다.
한우협회 장기선 부장은 "올해 8만톤, 2010년엔 약 20만톤 규모의 미국 소고기가 수입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산 소고기 가격은 한우의 절반 또는 3분의 1 수준이다. 저렴한 미국산 소고기가 본격 유통되면 한우 뿐 아니라 돼지나 닭도 덩달아 약 10% 이상 가격이 폭락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울 것 없는 ‘땜질식 처방’
정부가 미국산 소고기 개방에 대비해 내놓은 축산업 발전대책은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땜질식 처방'이란 원성을 사고 있다.
이번 정부대책의 골자는 유통과정에서 미국산 소고기의 한우 둔갑을 막기 위한 원산지 단속 강화, 한우 품질고급화로 마리당 최대 20만원의 보조금 지급, 도살 때 가격 1% 이하를 지자체에 내는 도축세 폐지, 생산성 향상을 위한 축사시설 현대화에 10년간 1조5000억원 지원 등이다.
문제는 항목별 지원방안을 살펴보면 새로울 게 없는 기존 대책의 재탕이라는 데 있다. 원산지 단속 강화를 위해 감시 인력을 400명에서 1000여명까지 늘리겠다고 했지만 신규 채용이 아닌 농산물품질관리원 인력을 재배치하는 방식이어서 업무 가중 등으로 단속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도축세 폐지는 지자체 세수 감소가 문제시 되고 그나마 돌아가는 혜택도 도축 업자를 위한 것이지 축산농가와는 무관하다.
한우 전두수 인증제를 실시하고 암소가 5마리 이상의 새끼를 낳을 경우 장려금을 지원하고 1등급 이상 한우에 두당 10~20만원의 품질고급화 장려금을 새로 지급하기로 한 방안에 대해서도 농가에서는"한우 중 암소 비중이 수소에 비해 적은데다 새끼 5마리를 낳는 소는 거의 전무하다"며 "정책 수혜자는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따라서 다산 장려금 수혜 농가 기준을 5마리에서 3마리로 확대해야 한다는 게 축산농가의 요구다.
정부는 이밖에도 한우 원산지 표기제를 기존 300㎡ 규모 이상의 음식점에서 100㎡로 확대하고 9월부터 소매점에서 판매되는 삼겹살과 목심의 등급표시를 의무화하고 대상 부위도 늘리기로 했다. 시가의 60%까지 지원하는 소 브루셀라병 살처분 보상금 기준가격은 올 7월부터 80%까지 상향 조정했다.
2010년부터 닭고기와 오리고기도 포장을 해야만 유통이 허용된다. 또 2009년부터는 유기·무항생제 축산물을 생산하는 농가에는 직불금을 지급하고 2000년 이후 중단된 돼지고기 대일 수출도 돼지열병 청정화 등 질병문제 해결 후 올해 말 제주지역 돼지부터 재개한다.
심은연 기자 eys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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