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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더 큰 승리를 위한 시련
지난 4월 13일, 인류 화합과 평화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해 온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숭고한 뜻이 담긴 ‘천원궁 천일성전 입궁식’이 장엄하게 거행되었다. 이날은 종교의식의
2025-07-15 13: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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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천 가정연합 한국협회장 ‘전국 순회 특별강연’ 성료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 지난 10월부터 ‘어머니가 비추는 평화의 빛’을 주제로 이어온 전국 순회 특별강연이 7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가정연합 송용천 한국협회장은 이날 오전 경남 창원 경남교구본부에서 사회단체 지도자, 종교 지도자, 일반 참석자, 가정연합 식구 등 2000여 명이 온·오프라인으로 참석한 가운데 ‘한학자 총재의 평화를 위한 삶과 업적’을 소개했다.
이번 행사는 온라인으로 생중계하여 18개 시·군·구 지역 각 현장에서 동시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참여 폭을 크게 확대했다. 지난 8월 취임한 송 협회장이 경남지역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송 협회장은 “한 총재는 오직 세계 평화와 인류 화합을 위해 달려오신 분”이라면서 “선학평화상 제정 등 평화의 비전을 보여주고 구체적인 실천을 이끌어 냈으며 평화와 포용이 가장 필요한 이 시대 모든 것을 품어주는 ‘어머니의 리더십’을 보여주셨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은 오해와 의도적인 왜곡으로 진실된 모습이 흐릿하게 보일지라도, 홀리마더한의 진실의 빛은 결코 영원히 가둘 수 없다”고 강조했다.
행사는 정판주 부교구장의 사회로 개회선언, 유효관 창원교회장의 감사기도, 연인기 경남교구장의 인삿말, 영상시청, 서가해 함안교회장의 효정간증, 효정찬양, 송용천 한국협회장의 주제강연, 김창환 마산대교회장의 억만세 삼창 순으로 진행됐다.
연 교구장은 “혼란한 시대 속에서 오늘의 말씀이 우리 사회와 인류가 나아갈 근본적 해결의 길을 제시하게 될 것”이라며 “한 총재님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희망과 변화를 찾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 우리 모두는 더욱 마음을 모으고 평화운동에 적극 앞장서 나아가자”고 말했다.
송 협회장의 전국 순회 특별강연회는 지난 부산·울산지역을 시작으로 12월까지 서울, 경기, 강원, 충청, 전라 등에서 총 13회에 걸쳐 이뤄졌다.
지난 8월27일 가정연합 21대 한국협회장으로 공식 취임한 송 협회장은 해외선교사 활동을 시작으로 오세아니아, 유럽, 일본 등지에서 가정연합 대륙회장 및 천주평화연합(UPF) 대륙의장을 역임했다. 학교법인 선학학원 이사장 등을 통해 미래인재 양성에도 힘을 쏟았으며, 2023년에는 가정연합 세계회장을 맡아 전 세계적인 평화운동에 매진했다.
2025-12-07 17: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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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신부 영성, 바다를 건너다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한국 교회에서 널리 불리는 이 찬송가의 작사자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사사오 데쓰사부로.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의 신학자로서 그는 사후 출간된 『아가강의』(1924)를 통해 식민지 조선에 신부 영성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다.
아가서를 강의할 때 그는 이렇게 외쳤다.
주님과 깊은 교통을 나누고, 밀실에서 주와 교류하며, 성결의 향기를 발하는 삶. 어린 양 혼인잔치의 신부를 지금부터 맛보라는 것이었다.
서양의 신부 영성은 어떻게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이번 회에서는 미국의 대각성운동에서 시작해 일본과 한국으로 이어진 영적 물줄기를 따라가 본다.
◆신령과 진리, 두 물결이 만나기까지
19세기 미국 제3차 대각성운동은 두 갈래의 흐름을 만들었다. 하나는 무디로 대표되는 복음주의 부흥운동, 다른 하나는 웨슬리안 전통을 계승한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이다.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성경의 권위와 개인적 회심을 강조하며 장로교·감리교·침례교 등 교파를 초월한 영적 각성 운동을 견인했다. 반면 성결운동은 ‘완전한 성화’를 주장하면서, 중생 이후에도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신자가 더 높은 영적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두 흐름은 서로 다른 경로로 동아시아에 도달한다. 복음주의는 장로교·감리교 선교사들을 통해, 성결운동은 동양선교회를 통해 각각 일본과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물줄기가 한반도에서 합류했다는 사실이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은 장로교 선교사들이 주도했지만, 그 내부의 영적 분위기는 성결운동 특유의 회개, 성령 체험, 거룩한 삶의 추구를 강하게 품고 있었다.
◆동양선교회, ‘신부 교회’를 세우다
1901년 도쿄에서 동양선교회가 창립되었다. 무디성서학원 출신 카우만 부부와 길보른, 일본인 나카다 주지, 그리고 사사오 데쓰사부로가 주축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재림 준비를 위해 세계 곳곳에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결교회를 세우는 것.”
사사오의 영성 형성 과정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1888년 미국 유학 중 대각성운동의 현장을 체험하고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귀국 후에는 영국 캠브리지 출신의 성결운동가 벅스톤에게 4년 동안 사사받았다. 벅스톤은 생전에 아가서를 주제로 깊이 강해했으며, 그의 사후 제자들이 그것을 정리해 『아가영해(雅歌靈解)』라는 책으로 엮어 냈다.
1905년 사사오는 도쿄성서학원 원장이 되었고, 그곳에서 배운 한국인 중 한 명이 이명직이다. 이명직은 1916년 경성성서학원 교수가 되어 성서를 가르쳤다. 두 사람은 아가서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4년 일본에서 사사오의 아가강의가 유고집으로 출간되었고, 1926년 경성에서 이명직의 아가서강의가 출간되었다. 무디성서학원에서 도쿄성서학원으로, 다시 경성성서학원으로. 기독교 2천년 신부의 영성이 ‘아가서 강의’를 통해 한국 교회에 전해졌다.
◆중세에서 근대로, 귀용의 유산
그렇다면 벅스톤의 신부 영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7세기 프랑스의 여성 신비가 마담 귀용을 만나게 된다.
귀용(Jeanne Guyon, 1648~1717)은 아가서 주해서를 썼다는 이유로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인물이다. 그녀는 아가서를 신랑(그리스도)과 신부(영혼)의 사랑과 합일에 대한 여정으로 해석하며, 영혼이 영적 혼인을 통해 하나님과 ‘본질적 합일(essential union)’에 들어간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해석은 로마 가톨릭 당국에 의해 정적주의(Quietism)로 단죄되었다.
그러나 귀용의 영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강조한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태도’는 세기를 건너 웨슬리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고, 19세기 출판된 그녀의 전기를 통해 다시 조명받았다. 이 불씨는 성결운동가들의 마음을 붙들었고, 1875년 영국에서 시작된 케직(Keswick) 운동으로 이어지며 개신교 전반에 ‘더 높은 영적 삶’(Higher Life)의 메시지를 퍼뜨렸다.
귀용의 영성이 이토록 지속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사상이 이미 깊고도 넓은 영성신학의 전통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귀용은 프란치스코 드 살, 토마스 아 켐피스 등 경건 고전을 탐독하며 자신의 영적 기반을 다졌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으로 이어지는 중세 신비주의 계보가 자리한다. 특히 베르나르가 18년에 걸쳐 집필한 『아가서 설교』는 서구 영성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꼽히며, 귀용은 이 계보의 한가운데서 후대 영성 운동에 깊은 영감을 전한 인물이었다.
벅스톤은 바로 이 케직 전통 안에서 사사오를 훈련시켰다. 이렇게 중세 유럽에서 움튼 신부 영성이 영국을 거쳐 일본으로, 다시 한반도로 흘러들어오는 놀라운 길이 열린 것이다. 사사오가 벅스톤에게서 배운 것은 단순한 성경 해석이 아니라, 2천 년 기독교 영성을 관통하는 신부 영성의 맥이었다.
◆정통과 이단의 경계에서
사사오와 이명직의 아가서 해석은 ‘경건주의적 관점’에 속한다. 그들은 신부를 ‘완전한 성결에 이른 참된 교회’로 보았다. 이는 신부를 보편 교회로 이해하는 교회론적 관점과 신부를 개인 영혼으로 이해하는 신부신비주의적 관점 사이에 놓여 있는 해석이다.
이명직은 이렇게 썼다. “그 유형적 교회가 다 신부가 아니며 그 다수한 교파가 다 신부는 아니니라.” 모든 교회가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신령한 교회’만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제도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 신앙에 머무르는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건주의적 해석에는 신부신비주의로 기울 수 있는 가능성도 숨어 있었다. 사사오는 아가서 1장 2절을 주석하며 ‘주를 갖고 싶음’, ‘주와 애정을 통함’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교회 공동체를 강조하면서도, 개인이 그리스도와 직접 사랑으로 결합하는 영적 체험을 여전히 열어둔 것이다.
마침내 서양의 신부 영성은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도착했다. 12세기 베르나르에서 시작해 아빌라의 테레사, 귀용, 웨슬리, 케직 운동, 벅스톤, 사사오, 이명직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2-05 15:3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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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효정세계평화재단 장학증서 수여식… 미래 글로벌 리더 33명 선발
평화세계를 실현할 세계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수여해온 ‘2025 장학증서 수여식’이 효정세계평화재단(이사장 이기성) 주최로 4일 서울 용산구 통일빌딩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국내외 장학생 33명에게 장학증서가 수여됐다. 이들은 각 분야에서 성장 가능성을 보인 학생들로, 새로운 도전의 출발점을 제공했다. 재단은 그동안 교육을 통한 사회적 책임 강화와 미래세대 지원을 강조해 왔으며, 이번 수여식은 그 비전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연아 선학학원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이 자리까지 온 노력을 격려하고 축하한다”며 “공적인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배운 가치를 실천해 사회에 기여하는 인재로 성장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도현섭 미래인재양성원 원장은 축사를 통해 “작은 물방울이 모여 강이 되듯 여러분의 순수한 마음과 한 걸음이 큰 미래를 만들 것”이며, “끝까지 겸손과 감사, 그리고 맑음을 지켜 달라”고 전했다.
이기성 이사장은 “원모평애재단 설립자 한학자 총재는 교육이 미래를 만드는 핵심 가치라 여겨 지혜와 덕성을 갖춘 인재 양성을 위해 세계 청소년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원해 왔다”고 밝히며, “그 결과 많은 미래 인재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에는 서인국 세계선교본부 사무총장, 김석진 천주평화연합 회장, 김고은 세계평화여성연합 회장, 홍인명 다문화평화연합 회장 등 각계 인사가 참석해 장학생들의 비전을 함께 축하했다.
글로벌 장학생들은 한국어 능력 향상, 신앙과 학업의 병행, 공동체 생활 경험 등을 바탕으로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내 멘토링 장학생들 역시 학습 역량 강화, 멘토·멘티 간의 정서적 교류, 자기주도적 학습 경험을 통해 성장을 이루며 프로그램에 높은 만족도를 나타냈다.
효정세계평화재단은 2013년부터 장학사업을 꾸준히 펼쳐 왔으며, 지금까지 해외 1,571명, 국내 4,416명 등 총 5,987명의 학생에게 장학 혜택을 지원했다. 재단 관계자는 “앞으로도 다양하고 지속적인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미래 세대가 평화와 공공선을 실현하는 세계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번 수여식은 재단이 추구하는 교육 철학과 더불어 장학생들이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실질적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2025-12-04 21: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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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은 빛이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고아가 된 한민족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2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의 불길이 마침내 민족 전체를 깨운 것이다.
개신교가 중심이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체포된 인원 중 기독교인 비율이 18%에 달했다. 특히 여성 피검자의 65%가 기독교인이었다. 평양 대부흥으로 고양된 영적 각성과 민족의식이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된 것이다. 18세기 미국에서 제1차 대각성이 청교도 정신을 부활시켜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종교적 각성을 민족의식으로 발전시키고, 독립혁명의 정신적 기반이 된 것과 같은 흐름이었다.
3.1운동으로 7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4만7000여 명이 투옥되었다. 그러나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돌아보면 일제 치하의 한민족은 부모 없는 고아와 같았다. 왕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의병은 만주와 연해주로 밀려났다. 권력과 결탁한 유교, 왜색화된 불교, 일제에 순응한 가톨릭. 반면에 민족종교인 천도교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학교에서는 칼을 찬 훈도가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제 막 전래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한 의지처였다.
3·1운동 이후 개신교는 일제의 집중 감시 아래 놓였다. 일제는 겉으로는 ‘문화통치’를 표방했지만, 실상은 민족분열통치였다. 친일파를 양성해 민족을 분열시키고, 고등경찰을 동원해 독립운동가를 색출했다. 교회 설교까지 감시 대상이 되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조차 불온사상으로 의심받는 암울한 시대였다.
◆경건의 폭발, 신령집단의 출현
1929년, 세계대공황이 터졌다. 일본은 경제가 무너지자, 군부가 전면에 나섰다. 이들은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제국주의 정책을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획책했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기성교회는 형식에 빠져 영적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민족분열통치의 영향으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전혀 다른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수많은 신령집단들이 출현한 것이다. “일본의 마수, 선교사의 거만, 기성교회의 형식화”에 저항하며 일어난 ‘경건의 폭발’이었다.
철산의 새주파, 원산의 여선지파, 이용도파가 대표적이다. 계시와 환상, 신유와 방언이 넘쳤다. 제도권 교회가 채워주지 못한 영적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새주님으로 불리던 여성 지도자 김성도는 기도 중에 계시를 받았다. “죄의 뿌리가 음란에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본래 예정이 아니다. 재림주님은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신다.” 원산의 백남주는 새 진리를 밝힌다며 『새 생명의 길』을 출간했다. 이용도 목사는 아가서에 심취해 예수와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했다. “나는 주님의 신부요, 주는 나의 신랑이시다.” 한국적 신부신비주의의 탄생이었다.
기성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1933년, 축출당한 이들이 모여 예수교회를 창립했다. ‘오직 예수’를 기치로 연합한 것이다.
◆신사참배, 무너지는 교회
1937년, 중일전쟁이 터졌다. 조선은 병참기지로 전락했고, 황민화정책이 시작되었다. 창씨개명, 조선어 금지. 젊은 남자들은 징용과 징병으로, 여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갔다. 민족혼이 철저하게 말살당할 위기였다.
일제는 교회의 급소를 찔렀다. 신사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사의 중심에는 천조대신, 태양의 여신이 있었다. 일제는 종교 행위가 아닌 국민의례라고 주장했지만, 신앙인들에게 이는 명백한 우상숭배였다.
미국, 캐나다, 호주 출신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일제는 미션스쿨을 폐교시키고, 선교사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했다. 압박 속에서 선교사들은 사직하거나 본국으로 떠나야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는 적성국민으로 분류되어 강제 추방되거나 억류되었다.
한국 교회는 방향감을 상실했다. 신령집단과 기성교단이 하나 되어 신사참배를 물리쳤어야 했다. 미국 선교사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으니 미국 정계를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교계는 사분오열했다. 내부적으로는 신학적 주도권과 교권 다툼, 지역감정이 폭발하여 서로를 비난했고, 외부적으로는 신사참배라는 거대한 압박에 갈라지기 시작했다.
예수가 오기 전, 헬라 왕조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을 때도 그랬다. 유대인들은 분열되었다. 권력과 결탁한 자들, 율법에 매달려 형식화된 자들, 무장 투쟁에 나선 자들. 그리고 부패한 교권에 실망하고 광야로 물러나 메시아의 강림을 준비한 자들이 있었다.
한국 교회의 분열도 이와 닮아 있었다. 신사참배가 강요되는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일제에 적극 협조했고, 어떤 이들은 굴복했다. 어떤 이들은 영적인 투쟁을 벌였다. 주기철 목사는 “일사각오(一死覺悟)!”, 즉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을 지키겠다고 외치며 네 차례 투옥 끝에 순교했다. 침례교회(동아기독교회)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유일한 교단이었다. 성결교회도 강력히 저항했다. 어린 양 혼인잔치에 나아갈 성결한 신부 교회가 되는 것이 스스로의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심한 탄압 속에 굴복하고 말았다. 천황 중심의 영구적 세계 지배를 꿈꾸던 일제에게 이들의 재림사상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일제는 이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광야에서 준비된 빛
신령집단은 산과 들로 흩어져 기도하며 메시아의 재림을 준비했다. 유대 광야의 에세네파가 그랬듯이, 그들은 희망 없는 세상과 단절하고 정성을 드리며 하늘의 때를 기다렸다. 기성교회는 그들을 이단시했다. 일제는 그들을 탄압했다.
1943년, 교회는 역사상 가장 깊은 밤을 지나고 있었다. 살아남은 기성교단들은 애국헌금을 바치고, 기미가요를 제창하며, 동방요배와 신궁 참배를 해야 했다. 태양신 숭배의 억압이 교회를 짓누르는 상황 속에서도, 어서 속히 재림주가 오기를 소망하는 신령집단의 기도와 눈물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평안남도 안주에서 한 여아가 태어났다. 그 깊은 어둠의 자리에서, 가장 찬란한 빛이 조용히 이 땅에 내려온 것이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2-04 13:3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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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자유를 위한 평화의 외침 집회’ 대구서 개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그간 추구해 온 평화운동의 진정성과 신앙 공동체로서 정체성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 지난달 30일 대구 관문인 동대구역 광장에서 시민과 신도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종교자유를 위한 평화의 외침' 집회를 개최했다고 2일 밝혔다.
이날 집회는 변사흠 부교구장의 기도를 시작으로 홍인배 교구장의 환영사, 청년 스피치, 평화 선언식, 구호 제창 순으로 이어졌다. 행사 후 참가자들은 파티마병원까지 평화 행진을 진행했다. 청년들이 직접 작성하고 낭독한 ‘평화 선언식’, 거리에서 진행된 ‘평화 행진’이 큰 주목을 받았다.
홍인배 교구장은 환영사에서 “문선명 총재와 한학자 총재가 종교와 민족을 넘어 인류가 하나되는 길을 열기 위해 평생 헌신해 왔다”면서 “오랜 세월 사람과 나라, 종교 사이의 벽을 허물고 대화와 협력을 촉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고 강조했다.
홍 교구장은 최근 한 총재가 오해와 편견 속에서 걸어온 평화의 길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종교의 자유가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임에도 그 가치를 지키는 일은 우리 스스로의 책임임을 재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십 년간 평화·화해·봉사·가정 가치 실천, 청소년 교육, 다문화가정 지원 등 지역사회와 세계 곳곳에서 묵묵히 선한 영향력을 넓혀 온 단체로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분열을 조장한 적이 없는 평화 공동체”임을 재차 밝혔다.
이어진 청년 스피치에서는 이주일·정원다·변찬수·성훈정씨가 한학자 총재가 전쟁과 분단의 상처 속에서도 원망 대신 사랑을 선택해 세계 곳곳에서 평화의 등불을 밝힌 삶을 소개하며, “평화는 거창한 희생이 아닌 우리가 먼저 마음을 열고, 먼저 따뜻한 말을 건네며, 조금 더 사랑을 선택하는 작은 결심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스피치 후 참가자들은 “종교의 자유 우리가 지킨다”, “종교의 평화 세상이 바뀐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평화 선언식이 열리는 등 질서 정연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 행진을 이어갔다. 집회는 공동체의 정체성과 비전을 재확인하고, 한 총재의 조속한 귀환을 염원하며, 앞으로도 종교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 나가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행사를 마무리했다.
2025-12-02 17: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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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시작된 평화, 부산·울산으로 확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가정연합) 부산·울산교구가 지난 30일 부산역 광장에서 ‘종교자유를 위한 한마음 평화집회’를 개최했다. 최근 사회 일각에서 종교 관련 오해와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종교의 자유를 호소하고 지역사회와의 소통 의지를 밝히기 위해 마련된 행사다.
집회는 가정연합 소속 청년들이 중심이 돼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가정과 이웃, 지역사회가 함께 평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공유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자리한 가정 단위의 참여도 눈에 띄었다.
행사는 △오프닝 영상 △청년·평화대사 스피치 △평화선언문 발표 △공연 및 찬양 순으로 이어졌다. 발언에 나선 청년·평화대사들은 개인의 삶과 신앙 경험을 소개하며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이라는 가정연합의 비전을 강조했다.
이남경 목사는 “진실은 조용하지만 반드시 드러난다”면서 한학자 총재의 고독한 노정을 향한 자신의 심정을 전했다. 그러면서 “눈물을 책임으로, 책임을 실체로 바꾸겠다”고 호소했다.
박형준 평화대사는 “갈등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힘이 아닌 평화의 태도”라며 “평생을 인류 화합에 헌신해온 한 총재님의 삶을 통해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핵심 가치는 종교의 자유”라고 역설했다. 일본 청년 타구치 카오리는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인류 한가족’ 비전에 감동해 그 사랑과 평화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겠다”면서 “한국과 일본의 상처를 넘어 화해와 공존을 이루고자 하는 진심을 고백한다”고 토로했다.
가정연합 부산·울산교구 측은 이번 집회가 갈등이나 대립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가정연합 관계자는 “우리의 목적은 특정인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참부모님께서 평생 실천하신 화해·봉사·평화의 삶을 시민들과 나누는 것”이라며 “가정연합이 추구해 온 진정성 있는 신앙문화와 건강한 가정의 가치를 지역사회와 함께 나누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또한 “부산·울산 청년들이 직접 기획하고 움직였다는 점이 앞으로 이 지역에서 전개될 평화활동의 중요한 출발점”이라며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평화의 장을 계속 넓혀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2025-12-01 22: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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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강원교구, 종교자유를 위한 한마음집회 개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강원교구는 그간 추구해 온 평화운동의 진정성과 신앙공동체로서 정체성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 지난달 30일 춘천 공지천 조각공원에서 ‘종교자유를 위한 한마음집회(이하 한마음집회)’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이날 개최된 평화콘서트는 가정연합 강원교구가 주최∙주관하고 세계평화여성연합 강원지부, 천주평화연합 강원지부,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강원지부가 후원했다. 특히 청년들이 직접 작성하고 낭독한 ‘평화성명서’ 발표, 거리에서 진행된 ‘평화행진’이 큰 주목을 받았다.
가정연합 창립 이후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One Family under God)’ 비전으로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생애를 통해 전개된 70여 년의 평화·화합운동의 의미 중 특별히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번 한마음집회는 △춘천 우두 농악대 공연 △찬양 및 공연 △효정 스피치 △평화 성명서 발표 △평화행진 및 줍깅 등 다채로운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효정 스피치 발표자(세키아스카, 최연심, 김대한, 이원주)들은 가정연합의 축복활동을 통해 가정을 이룬 자들과 그 자녀들로서 다문화 가정의 어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고 평화와 화합의 비전을 품게 된 사연을 전했다.
또 가정의 소중함과 가치를 각자의 삶 속에서 느낀 경험을 바탕으로 청중들에게 진솔하게 증언했다.
특히 일본인 세키아스카 청년은 다문화 가정에서의 삶과 봉사활동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에 기여해온 경험을 공유했다. 최연심 청년은 신앙 속에서 성장하며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이야기했다. 김대한 청년은 가정연합의 신앙이 단순한 종교적 믿음을 넘어 이 땅 위 평화를 실현하는 삶임을 강조했고, 이원주 청년은 참부모님이 보여주신 부모의 마음과 참사랑을 통해 인류가 하나님 아래 한가족이 될 수 있음을 체험한 사례를 전하며 참석자들의 큰 공감을 이끌었다.
정문기 교구장은 “이번 한마음집회를 통해 가정연합이 추구하는 진정한 평화의 가치를 함께 나눌 수 있었다”며 “청년들이 전한 효정 스피치를 통해 다문화가정의 도전과 극복, 그리고 참사랑의 실천이 생생하게 전달됨으로써 가정연합의 본질적 가치를 지역사회에 알리는 뜻깊은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바쁘신 가운데 참석해 주신 지역주민들과 성도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평화와 화합을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겠다”고 덧붙였다.
2025-12-01 09:4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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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907년 평양, 한국의 오순절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내가 아간이오” - 회개로 열린 성령의 문
1907년 1월 14일 밤, 평양 장대현교회. 600여 명의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저녁집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길선주 목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내가 바로… 아간과 같은 죄인이라오!”
그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고, 눈에서는 회개와 참회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친구를 속이고, 믿고 맡긴 재산을 가로챘소. 내가 죄인이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집회에 은혜를 내리지 아니하시나이다.”
◆눈물의 강을 지나 탄생한 불길
길선주 목사의 고백에 예배당 안은 절망과 부끄러움으로 가득 찼다. 그때 한 여인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온몸을 떨며 입을 열었다.
“청일전쟁 때 제가… 제 아이를 죽였습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어린 생명을 제 손으로 거둔 죄. 12년 동안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비밀이었다. 여인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려 통곡했다. 예배당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었다.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또 한 사람. 도둑질, 간음, 시기, 미움, 사기. 은밀한 죄악들이 낱낱이 드러났다.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마치 건물의 지붕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눈사태처럼 우리 위에 쏟아져 내린 것 같았다.”
이날 밤 평양에서는 회개와 성령의 불길 속에 한국 교회가 새롭게 거듭났다. 이것이 ‘한국의 오순절’이라 불리는 평양 대부흥운동의 시작이었다.
이 불길의 씨앗은 4년 전 원산에서 뿌려졌다. 1903년 여름, 로버트 하디는 깊은 번민에 빠져 있었다. 13년간 조선에서 선교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그는 교회의 더딘 성장을 한탄하며 신도들의 영적 각성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성령의 역사는 먼저 그의 마음을 찔렀다. 설교 중에 하디는 자신의 교만을 마주했다. 백인으로서의 우월감, 의사로서의 오만, 조선인을 향한 편견. 그는 용기를 내어 신도들에게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진심 어린 고백이 신도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하나둘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이 회개의 불씨가 번져나가 마침내 1907년 평양에서 거대한 불길이 되었다.
당시 조선은 을사늑약(1905년)으로 외교권을 빼앗겨 나라의 주권이 흔들리고 있었다.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위기 속에서 한민족은 영적 각성을 경험했다. 구약 시대의 고난 받는 이스라엘처럼,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현실의 고통 속에서 하늘을 더욱 간절히 찾았다.
◆성령의 물결, 민족을 하나로 묶다
길선주의 고백 후 여러 사람이 기도하려 하자, 인도자 그레이엄 리 선교사가 말했다.
“그렇게 기도하고 싶다면, 모두 함께 기도하십시오.”
그 순간, 600명의 기도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블레어는 이를 “많은 물이 떨어지는 소리, 하나님의 보좌를 치는 기도의 바다”라고 표현했다. 혼란이 아니었다. 소리와 영의 광대한 화음이었다. 한국 교회의 특징인 강렬한 ‘통성기도’가 바로 이날 탄생했다. 이 영적 체험이 서로 다른 신앙적 배경을 가진 조선 기독교인들을 하나로 묶었다.
150여 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제1차 대각성을 떠올려보자.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중부 식민지의 독일계 이민자, 남부의 스코틀랜드계 장로교도들은 순회 부흥운동을 통해 최초의 범(汎)아메리카적인 공동 경험을 공유했다. 이 영적 각성 운동은 지리적·교파적 경계를 초월하여 이들을 하나로 만들었으며, 그 결과 이들은 스스로를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God’s chosen people)으로 자각하게 되었다. 이것이 미국 독립혁명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평양 대부흥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의 침탈 아래 고통 받던 한국인들은 성령 체험을 통해 구약성서 속 이스라엘 민족과 자신들을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압제받는 식민지의 현실이 바빌론 포로기의 고난과 겹쳐 보였고, 언젠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싹텄다. 많은 한국 기독교인은 자신들이 박해를 견디고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 곧 ‘동방의 이스라엘’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자각은 식민지 압제에 맞서는 영적 저항력을 제공했다.
성령 체험을 통해 형성된 신앙과 민족의식의 결합은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실제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부흥운동을 통해 영적으로 갱신된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민족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렸고, 이것이 비폭력적 독립운동의 영적 배경이 되었다.
◆“조선에 군함 대신 성령을 보내셨다”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이자 무교회주의 창시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는 평양 대부흥의 소식을 듣고 깊이 감동했다. 그는 놀라운 증언을 남겼다.
“조선은 비록 정치적으로 자유와 독립을 잃었지만, 그 대신 영적인 자유와 독립을 획득했다. 하나님은 조선에 군대나 군함 대신 더 강한 성령을 주셨기에, 조선은 행복한 나라다.”
우치무라는 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이 한반도에 깊이 뿌리내려 동양 전체에 전해질 것이라 예견했다. 초대교회 유대 기독교인들이 로마 세계에 복음을 전파했듯이, 한민족이 동양의 영적 중심이 될 것이라는 통찰이었다.
실제로 부흥운동 이후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되었다. 부흥 전 술과 기생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평양이 ‘거룩한 도성’으로 완전히 바뀐 것이다. 1905년 3만7000여 명이던 조선 개신교 신자 수는 1910년 20만 명을 넘어섰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흥을 경험했다.
종교개혁 이후 400년, 하늘부모님은 신부 된 교회를 찾아 나오셨다. 루터와 칼뱅을 통해 진리를 회복하시고, 경건주의자들을 통해 영성을 되살리셨으며, 대각성 운동을 통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셨다. 그 긴 여정의 끝에서 하늘부모님은 마침내 한반도에서 순수한 교회를 출발시키셨다. 한국 교회는 독생녀를 맞이할 영적 토대를 갖추기 시작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30 14:2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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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제3차 대각성, 성령의 물결이 태평양을 건너다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1886년 노스필드, 학생자원운동의 폭발
1886년 여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의 마운트 허먼 스쿨. 251명의 대학생이 한 달간 성경 공부와 전도 집회에 모여 있었다. 한 중년 남자가 단상에 올라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음성으로 외쳤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드릴 용기가 있습니까? 온 세상이 복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가겠습니까?”
순간, 깊은 정적이 흘렀다. 젊은이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격렬한 내적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미지의 땅으로 떠날 수 있을까?’ 그때였다. 한 청년이 천천히 일어났다. “저는 중국으로 가겠습니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회장의 정적을 깨고 잔잔히 울려 퍼졌다.
마치 물꼬가 터진 듯했다. 두 번째, 세 번째 학생이 일어섰다. “저는 인도로 갑니다!” “저는 아프리카로 가겠습니다!” 젊은이들이 큰 소리로 외치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서 뜨거운 결단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날 밤, 100명의 젊은이가 무릎을 꿇고 서약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어디든 가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선교의 황금기를 연 ‘학생자원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불타는 결단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2만여 명의 선교사를 전 세계로 파송했다. 그중 상당수가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을 향해 떠나게 됐다.
◆무디와 제3차 대각성: 회심에서 성령세례로
1855년 보스턴, 한 구둣방에서 18세 청년이 가죽을 두드리고 있었다. 네 살에 아버지를 잃고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란 드와이트 무디는 외삼촌 때문에 의무감으로 교회에 다녔다. 설교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졸음이 쏟아졌고, 찬양 시간에는 입술만 움직일 뿐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상처 때문인지 하나님은 그에게 멀고 무서운 심판자였다.
주일학교 교사가 구둣방을 찾았다. “무디, 자네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하네.” 그 순간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물결처럼 무디의 마음에 밀려들었다. 견딜 수 없었다. 거리로 뛰쳐나가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고 소리쳤다.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자상한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더 놀라운 체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871년 시카고 대화재. 그의 교회와 집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절망 속에서 무디는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성령님의 능력이 거대한 파도처럼 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너무나 충만하게 부어져서 견딜 수 없어 하나님께 그만 주시기를 간구해야 했습니다.”
무디에게서 두려움은 사라지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불타는 열정만 타올랐다. 그때 미국은 다윈의 진화론과 독일 고등비평, 자유주의 신학의 공세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디는 깨달았다. 단순한 복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몸을 던졌다. 슬럼가에서, 전쟁터에서, 사람들의 삶 한복판에서 복음의 불씨를 지폈다. 그리고 성경 교육과 영적 부흥을 위해 무디성서학원을 세웠다. 이곳에서 그는 성경의 무오성과 근본적 신앙을 굳건히 세우며, 복음의 능력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힘썼다. 무디의 열정은 미국과 영국 전역을 뒤흔들었다.
◆세 갈래 성령운동과 사중복음의 완성
제3차 대각성운동은 마치 세 갈래 강물이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이었다. 무디와 R.A. 토레이가 이끈 개혁주의 성령운동은 성령체험을 거듭난 자의 필수 조건으로 가르쳤다. 피비 팔머의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완전한 성화를 위해 성령 충만을 추구했다. 윌리엄 시모어의 오순절운동은 1906년 아주사 거리에서 폭발하며 방언과 치유의 은사를 강조했다.
앨버트 심슨이 ‘사중복음’을 체계화했다. 그리스도는 구주(Savior), 성화자(Sanctifier), 치료자(Healer), 재림주(Coming King). 이는 차가운 교리가 아니었다. 심슨 자신이 만성 질병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받은 뜨거운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었다.
놀랍게도 이는 지난 세기들의 영적 여정과 완벽하게 연결되었다. 에드워즈의 ‘회심’이 구주 체험이 되었고, 피니의 ‘완전 성화’가 성화자 체험이 되었으며, 새롭게 치료자와 재림주 체험이 추가되어 완전한 사중복음이 완성된 것이다.
무디와 토레이는 무디성서학원에서 ‘성령세례는 봉사를 위한 능력’이라고 가르쳤다. 이들은 개인 구원을 넘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다. 특히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믿고 ‘이 세대 안에 온 세계를 복음화하자’는 학생자원운동을 일으켰다. 마침 블랙스톤의 『예수의 재림』 같은 책들이 널리 읽히며 종말론적 열정이 불타올랐다.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로: 성령의 씨앗이 뿌려지다
학생자원운동과 무디성서학원에서 배출된 선교사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향해 떠났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모펫, 하디, 블레어... 이들의 가슴에는 무디가 심어준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깊은 절망 속에서, 이들이 전한 재림 신앙은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개혁주의, 웨슬리안, 오순절. 세 갈래 성령운동이 모두 한반도로 흘러들었다. 장로교를 통해, 감리교를 통해, 성결교회를 통해. 미국에서 시작된 성령운동이 한국인들의 심정과 만나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1903년 원산에서 하디가 자신의 교만을 통회하며 시작된 작은 불씨가 1907년 평양에서 거대한 불길로 타올랐다. 길선주 장로의 눈물 어린 회개가 터지자, 1,500명이 모인 장대현교회가 성령의 바다가 되었다. 한국적 통성기도가 그날 밤 탄생했다.
한편 무디성서학원 출신들은 일본에서도 동양선교회를 세우고 도쿄성서학원을 만들었다. 여기서 공부한 한국 청년들이 1907년 서울에 복음전도관을 열며 성결교회의 씨앗을 뿌렸다. 성결교회는 임박한 재림을 준비하며 완전한 성결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로 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성령운동의 물결이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 도달했을 때, 서구 기독교 2천 년의 신부 영성이 마침내 동방 한민족의 고유한 영성과 만나는 역사적 순간이 시작되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26 14: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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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성령의 각성, 신대륙을 깨우다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1734년 노샘프턴, 어린 소녀의 기도
1734년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은 깊은 영적 침체에 빠져 있었다. 청교도 후손들이 세속주의와 이신론에 물들어 신앙의 열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회개를 촉구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굳어 있었다.
그런데 한 어린 소녀가 매일 골방에서 “주님, 저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눈물로 기도했다. 한참 울던 아이가 “엄마, 천국이 제게 다가오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한 소녀의 회심이 가족과 이웃으로 확산되어 마을 전체가 영적 각성의 열기로 뜨거워졌고, 곧 미국 대륙 전체를 뒤바꿀 거대한 영적 대각성의 첫 불꽃이 되었다.
◆제1차 대각성: 청교도 정신의 부활과 민족 의식의 형성
하늘부모님은 제1차, 제2차 종교개혁에 이어 제3차 종교개혁으로 영적 대각성운동을 일으키셨다. 루터와 칼뱅이 진리를 회복하고, 경건주의자들이 영성을 되살렸다면, 이제는 성령의 실천적 역사를 통해 독생녀를 맞을 수 있는 순수한 신부된 교회를 세우시려는 섭리였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는 오직 “참으로 선택된 자들만이 모이는 공동체”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신자들에게 직접적인 성령체험과 진솔한 신앙고백을 요구했다. 내적이며 깊은 영적 체험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강조했다. 그의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청중들에게 강렬한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조지 휫필드의 순회 설교를 통해 교파를 초월한 연대가 형성되었고, 집회 중에 강렬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이 영적 체험이 서로 다른 배경의 식민지인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중부의 독일계 이민자들, 남부의 스코틀랜드계 장로교도들이 모두 같은 성령을 경험하며 선민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이는 후일 미국 독립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이 운동으로 장로교는 성령 체험을 중시하는 신파(New Side)와 정통 교리를 고수하는 구파(Old Side)로, 회중교회는 부흥 찬성파인 뉴라이트(New Light)와 반대파인 올드라이트(Old Light)로, 침례교회는 분리침례교와 정규침례교로 분화했다. 분립은 혼란이 아니라 더 순수한 교회를 향한 하늘부모님의 섭리였다.
◆두 혁명의 갈림길: 종교의 자유 vs 종교로부터의 자유
제1차 대각성운동이 확산되면서 식민지 교회들은 영국 성공회의 간섭에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가 주교 파견과 교회 통제를 시도하자 식민지인들은 신교의 자유를 외치며 저항했다. 이것이 후일 정치적 독립 의지로 발전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같은 시기에 미국 독립혁명(1776년)과 프랑스 시민혁명(1789년)이 일어났지만, 두 혁명의 종교적 성격은 정반대였다. 미국 독립혁명은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었다. 식민지인들은 영국 성공회의 간섭 없이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권리를 요구했다. 이들에게 자유란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따라 신앙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했다.
반면 프랑스 시민혁명은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었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부르주아지들은 가톨릭교회의 막대한 특권과 십일조 징수에 강하게 반발했다. 혁명 정부는 루이 16세를 처형했고, 수많은 성직자들을 학살했으며, 교회와 수도원을 파괴하거나 세속 건물로 전용했다. 이들에게 자유란 종교적 권위와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이성에 따라 살아갈 자유를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수정헌법 제1조로 “연방의회는 국교를 수립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고 명시하여 더 순수한 신앙을 추구할 자유를 보장했다. 반면 프랑스는 종교 자체를 억압하며 무신론 국가를 지향했다.
◆제2차 대각성: 완전 성화와 사회 개혁의 물결
독립전쟁 후 미국은 서부 개척 시대를 맞았다. 하지만 급격한 사회 변화와 이민자 증가로 혼란이 가중되고, 교회에는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하여 불신앙이 만연했다. 이때 제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1821년 변호사 찰스 피니는 법정에서 성서를 인용하다가 “돈을 위해 불의한 자를 변호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그날 저녁 기도하던 중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했다. 그는 “거대한 전기의 파도가 나를 관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완전히 녹여버렸다”며 눈물로 고백하고 복음 전도자의 길로 나섰다. 피니는 ‘성령이 도우시면 온전하고 완전한 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설교했다.
피비 팔머는 성결을 제단 위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전에는 내면의 성결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을 중시했다면, 이제는 성령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방언을 말하며, 적극적으로 전도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것을 성화의 증거로 여기게 되었다.
◆노예제 폐지 운동과 남북전쟁의 종교적 배경
제2차 대각성운동으로 사회 개혁이 확산되었다. 피니를 중심한 부흥사들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며 노예제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적극 폐지 운동에 나섰다. 오벌린 대학은 피니의 영향으로 미국 최초로 흑인과 여성에게 입학을 허용한 대학이 되었다. 이 대학 출신들은 ‘지하철도’라 불리는 비밀조직을 운영하며 노예들의 탈출을 도왔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도 이러한 종교적 각성의 산물이었다. 이 소설은 북부 주민들의 반노예제 감정을 크게 자극했다.
남부에서는 노예 소유주들이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노예제를 정당화했지만, 북부 교회들은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노예제를 강력히 반대했다. 감리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 등이 노예제 문제로 남북으로 분열했다. 이러한 종교적 갈등이 정치적 대립과 결합되어 결국 남북전쟁(1861~1865년)으로 이어졌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1863년)도 이러한 종교적 각성의 정치적 표현이었다.
동방으로 향하는 성령의 바람
2차례에 걸친 대각성운동은 미국에서 청교도 정신을 되살리고 완전 성화를 추구하는 영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하늘부모님이 독생녀 출현을 준비하시는 섭리적 과정이었다.
이제 성령의 바람은 더욱 강력한 3차 대각성운동으로 발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디와 토레이의 재림 신앙, 성결운동의 사중복음, 오순절운동의 은사가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영적 물결을 형성하여 마침내 태평양을 넘어 한반도를 향해 밀려왔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25 16: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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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2차 종교개혁, 더 순수한 교회를 향한 분립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제도화의 그늘, 메마른 신앙
1675년 독일 루터교 목사 필립 야콥 슈페너는 『경건한 열망』을 집필하고 있었다. 30년 전쟁 후 개신교회들은 가톨릭과의 교리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교한 신학 체계를 구축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要理問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등을 만들어 신도들에게 암송하게 했다. 교회는 형식적 예배에 치중했으며 급속히 경직됐다. 루터교, 영국국교회, 개혁교회가 국교로 확립되면서 신앙은 더욱 제도화됐다. “교회는 있으되 그리스도가 없고, 성서는 있으되 영성은 메말랐다.” 슈페너가 꿈꾼 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교리가 아닌 체험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늘이 더 순수한 교회를 찾기 위한 ‘제2차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청교도의 순수한 꿈, ‘언덕 위의 도시’를 세우다
영국국교회가 확립되면서 가톨릭적 요소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현실에 청교도들은 분노를 느꼈다. 신도들은 교리문답을 암송하고 예배에 참석했지만, 그 안에는 참된 회심도, 구원의 확신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과연 선택받았는가?”
칼뱅에 따르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만 구원받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이 선택받았음을 알 수 있을까? 청교도들이 찾은 답은 철저한 성화(聖化)의 삶이었다. 회심 체험으로 거듭나고, 그 증거가 경건한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구원은 단순한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영적 투쟁이었다.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묘사한 여정이 바로 그러한 삶의 모습이었다. 리처드 백스터는 교회가 참된 신자들로 이루어진 거룩한 공동체, 곧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탄 102명은 폭풍과 질병을 뚫고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그해 겨울, 절반만 살아남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불타는 열망이 그들을 이끌었다. 이어 1630년 대규모 이주민이 매사추세츠만에 도착했다. 청교도들은 ‘언덕 위의 도시’를 꿈꾸며 자기들이 살 집을 짓기 전에 먼저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박해를 받은 청교도들은 결국 영국국교회에서 분립하여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등 새로운 교파를 형성했다. 각각의 교파가 더 높은 영적 기준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슈페너의 경건회, ‘교회 안의 작은 교회’에서 모라비아 교회로
독일에서는 혁신적인 실험이 시작됐다. 루터교 목사들은 교리 해설에만 집중했고, 신도들은 수동적으로 듣기만 했다. 슈페너가 창시한 경건회(collegia pietatis)는 기존 교회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한겨울 저녁, 프랑크푸르트의 한 가정에서 열린 경건회 모습을 상상해보자. 촛불이 흔들리는 작은 방에서 열 명 남짓이 둘러앉아 성서를 읽고 있다. 목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서로 배우고 격려하는 공간이다. 서로 영적 고민을 나누고 기도로 돌본다. 이 모임은 형식적이기만 한 신앙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할레의 프랑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회개의 투쟁’을 강조했다. 교리를 머리로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참된 회심은 온 존재를 뒤흔드는 변화이며, 죄에 대한 깊은 절망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동반되는 극적 체험이어야 했다.
진첸도르프는 경건주의를 더욱 실천적으로 발전시켰다. 박해받는 모라비아 형제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며 헤른후트 공동체를 세웠다. 그는 반(Band)과 콰이어(Choir)라는 소모임을 조직해 강력한 선교 사업을 펼쳤다. 결국 슈페너의 교회 갱신 운동에서 시작된 경건주의는 독립적인 모라비아 교회로 분립됐다.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구원의 확신을 찾다
영국의 존 웨슬리는 회심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참된 믿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1735년 조지아 선교를 위해 대서양을 횡단하던 중 충격적인 체험을 했다. 폭풍우가 광포하게 배를 뒤흔들어 갑판이 갈라질 것만 같았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지고, 바닷물은 창문을 넘어 들이쳤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모라비아 교도들은 마치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고요했다. 그들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두 손을 모아 찬송을 불렀고, 어린아이들마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반면 웨슬리는 온몸이 떨렸다. 가슴은 죽음의 공포로 조여 왔고, 냉기가 그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순간, 깨달았다.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두려움에 떠는구나!’ ‘나는 인디언들을 개종시키려 미국으로 건너갔다. 오, 그렇다면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신앙적 회의감이 선교 사역 내내 그를 괴롭혔다.
1738년 5월 24일 저녁이었다.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모라비아 교도 모임에서 누군가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인을 용서해 주신다”는 내용이었다. 웨슬리는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지금까지 열심히 기도하고 선행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이라 믿었는데, 사실은 예수님이 이미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속회(Class Meeting)를 조직했다. “지난주에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 모임은 참신했다. 각자의 신앙 체험을 나누고 서로의 영적 성장을 격려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신도들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웨슬리는 칭의를 넘어 완전성화까지 가능하다고 외쳤다. 교회는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뤄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개혁 운동은 영국국교회의 심한 박해를 받았고, 결국 감리교회로 분립됐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진 영적 유산
17~18세기 제2차 종교개혁은 형식에서 영성으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제도에서 공동체로의 근본적 전환이었다. 구원에 대한 확신, 살아있는 영성, 성화에 대한 열망은 모두 순수한 교회를 위한 섭리였다. 이들이 꿈꾼 것은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 속에서 자라는 신부 공동체였다.
이 영적 유산이 미국을 중심한 영적 대각성운동을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다. 1907년 평양 대부흥과 1930~40년대 신령집단의 토양이 됐고, 마침내 1943년 독생녀 탄생의 기반을 마련했다. 서구 2천 년 기독교의 신부 영성과 한민족의 고유한 영성이 만나는 섭리적 순간이 준비되고 있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24 10: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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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민주화 운동 이끈 원로 종교인 안톤 우낙 박사 인터뷰
안톤 우낙 박사(82)는 2차 세계대전의 폐허와 공산주의의 그늘 속에서 성장한 체코 출신의 원로 종교지도자요, 평화운동가이며 교육자다. 공산정권 아래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를 외치던 청년 지도자였고, 1970년대 초에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운동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3년 8개월의 징역형을 살았다.
1989년 ‘벨벳혁명’ 이후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과정에 참여했고, 이후 체코상공회의소에서 한국위원회 의장을 맡아 20년간 양국 관계 증진에 힘써 왔다. 그는 선문대 글로벌 부총장으로도 활동하며 한·체코 간 교류를 이끌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체코 대학생 192명을 인솔해 한국의 교육·연구 프로그램을 연계할 만큼 양국 간 가교로서 역할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에도 체코 과학기술대 학생 14명을 이끌고 광주과학기술원(GIST), 울산 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 등을 시찰했다.
그의 삶은 유럽 현대사의 격랑과 거의 그대로 겹친다.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사상의 자유를 잃어버린 시대를 통과했고, 민주화의 열망이 거리에서 폭발하던 순간을 몸으로 겪었다. 감옥에서 보낸 청춘, 비밀경찰의 감시를 피해 이어간 신앙과 운동, 그리고 체제 전환 이후의 재건 과정까지. 이런 경험은 오늘날 그가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눈에 깊은 층위를 더해주고 있다.
우낙 박사는 한반도 통일을 “세계평화의 구조적 조건”으로 바라본다. 그는 “힘으로는 절대 통일할 수 없다”며 “신뢰 구축과 인도적 접근을 중심으로 한 장기 전략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북한 주민 2,500만 명이 수십 년간의 체제와 이념 속에서 강한 결속을 이루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군사력에 의존한 ‘단기 처방’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가 ‘통일의 골든타임’으로 기억하는 시점은 1991년 12월이다. 문선명·한학자 총재 내외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12개 항목의 협력 합의를 이끌어냈던 때다. 그는 “그 선언은 남북이 적대의 역사를 넘어 새로운 질서를 설계할 수 있는 출발점이었다”며 “한국 정부와 사회가 그 기회를 통일의 전환점으로 활용했어야 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한국 정치권과 일부 종교계가 냉전적 사고에 머무른 채 비판과 경계에만 매달림으로써, 역사적 호기를 스스로 흘려보냈다고 지적한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장례식 조문을 둘러싼 혼선과 박보희 보좌관의 ‘사실상 망명’ 사태 역시, 그가 보기에 한국이 통일의 문을 스스로 좁혀버린 상징적 사건이다.
그는 이에 덧붙여 “한국에는 평생 전 세계를 돌며 평화를 전한 유일한 한국 여성 지도자가 있는데, 그분이 바로 한학자 총재“라며 “한 총재는 지난 60여 년간 세계 무대에서 평화와 가족의 가치를 전해 온 분으로, 한국이 먼저 그분을 존중해야 하며, 그분을 감옥이 아니라, 노벨평화상 무대에 세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통일을 향한 길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서로를 향해 쏟아냈던 오해와 불신을 솔직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그 위에 새로운 신뢰를 쌓을 때 비로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습니다.”
우낙 박사는 특히 젊은 세대의 통일 무관심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한다. 체코에서도 민주주의 세대는 공산주의의 참혹함을 실감하지 못했고, 한국 역시 분단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서 젊은 세대가 ‘현상 유지’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도 독일처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채택했지만, 결국 김일성 일가의 세습 이념으로 변질되었다”며 “주민들이 지도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일종의 ‘무신(無神) 종교’가 형성된 특수한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독일 통일 모델을 기계적으로 한반도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통일 전략에 있어서도 그는 정부 주도 방식에서 벗어난 ‘전사회적 접근’을 주문한다. 체코 민주화 과정에서 정부, 시민단체, 종교계, 학계가 함께 움직일 때 변화의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던 경험을 떠올리며, 한국에서도 민간 교류 재개, 청년 교류 확대, 학술·문화 협력 등 여러 층위의 노력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통일은 외교·안보 정책을 넘어, 교육·문화·가치관의 재구성까지 포괄하는 ‘미래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일해저터널과 베링해협터널로 상징되는 ‘국제평화고속도로’ 비전도 강하게 지지한다. 인프라 연결은 갈등을 구조적으로 약화시키는 장치라는 해석이다. “도로와 철도는 단순한 교통 수단이 아닙니다. 로마가 길을 만든 순간 세계가 하나로 이어졌듯, 인프라는 평화의 구조를 고정시키는 힘을 갖습니다. 한일해저터널은 한국과 일본의 신뢰 회복과 청년 교류 확대, 경제 협력 심화를 동시에 이끌 수 있는 100년짜리 평화 인프라입니다.”
체코와 한국의 협력에 대해서도 그는 미래 세대의 교류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체코 기업은 한국의 기술력과 제조 역량을 높게 평가하면서, 첨단 산업·에너지·교통 분야에서 한국과의 협력을 확대하고자 한다. 동시에 선문대를 비롯한 한국 대학과 체코·슬로바키아 대학 간 GCD 프로그램은 양국 청년이 함께 과제를 해결하며 서로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우낙 박사는 “미래 세대의 교류가 국가 관계의 질을 결정한다”며 “청년들이 서로의 나라를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그 어떤 정치 선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동유럽 출신인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견해도 분명히 밝혔다. 체코는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지만, 그는 “전쟁은 군사력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며 “경제, 가치, 종교, 문화가 모두 함께 움직여야 진정한 평화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장기적 해법은 결국 평화 교육, 관용 교육의 확산에 있다. 이는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도 정확히 포개진다.
우낙 박사는 한국이 가진 독특한 가치와 책임에 대해서도 차분히 짚어줬다. 그는 “한국은 태평양 시대의 중심국가로서 내부 갈등에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협력과 조화를 선택해야 한다”며 “가정은 한국 문화의 근본이며, 어른을 공경하고 부모를 존중하는 전통은 세계의 젊은이들에게도 강한 매력으로 다가온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이러한 가치는 내부 결속은 물론, 세계 평화의 비전을 구체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는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지 않습니다. 수많은 희생과 선택이 쌓여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한반도의 평화 역시 누군가의 헌신과 진실을 직시하려는 용기 위에 꽃필 것입니다.
2025-11-21 13: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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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민의 사명·공동체적 가치, 세계에 알릴 것”
19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본사 대강당에서 ‘한민족선민연구원’ 개원식이 열렸다. 한민족선민연구원은 ‘한민족은 하늘이 함께해 왔다’는 설립자 한학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의 뜻을 계승해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를 학문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세계일보 부설 기관으로 설립됐다.
연구원은 세계일보의 3대 사시인 애천·애인·애국과, 3대 사지인 조국통일의 정론, 민족정기의 발양, 도의세계 구현을 토대로 한민족의 역사·정신·문화 속 선민사상의 가치를 발굴하고 세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기식 세계일보 사장은 환영사에서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수많은 주변국의 외침을 받아 왔다”며 “그럼에도 꺾이지 않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키며 살아온 것은 ‘한민족은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천손(天孫)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연구원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한민족선민연구원은 단순한 부설 기관이 아니라 선민사상의 가치를 만방에 알릴 세계적 연구 거점이 될 것”이라며 “세계일보는 연구원이 학술·사회적으로 (한국은 물론 인류사회에) 기여하는 기관으로 성장하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초대 연구원장은 김민지 선문대 신학과 교수가, 부원장은 오오타 토모히사 일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교리연구원장이 맡는다. 김민지 원장은 “한민족의 고대 서사, 역사, 문화, 영성 전반을 학술적으로 탐구해 그 안에 흐르는 ‘선민의 사명’과 ‘공동체적 가치’를 연구하겠다”며 “이러한 정체성은 하늘의 축복을 받은 선민의 정체성으로 전승되어야 한다”고 연구소 출범 의미를 설명했다. 김 원장은 이어 “국제 학술 교류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선민사상을 세계인이 공감하는 가치로 확장하겠다”고 밝혔다.
오오타 부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창세기의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언급하며, 한민족 선민사상의 역사적·신학적 의미를 밝히는 연구원의 역할에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김은상 가정연합 중앙행정원장과 김문식 가정연합유지재단 이사장은 축사를 통해 연구원이 한민족의 정신을 기반으로 미래 문명을 제시하는 기관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개원식에는 문훈숙 효정한국문화재단 이사장, 도현섭 가정연합 미래인재양성원장, 김종관 효정글로벌통일재단 이사장, 김고은 세계평화여성연합 한국회장, 홍윤종 한국종교협의회 회장, 조만웅 원로목회자회 회장, 옥윤호 가정연합 한국협회 서울북부교구장, 송광석 남북통일정책연구원장, 노구치 가즈히코 가정연합 일본협회 교리연구원 부원장, 다나카 신타로 일본협회 교리연구원 역사편찬부장, 오택용 선문대 교수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2025-11-19 21: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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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회복이 인류 위기의 열쇠”…송용천 협회장, 한학자 총재의 평화 철학 강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송용천 한국협회장은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근본 해법은 가정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데 있다”며 “가정이 바로 설 때 비로소 사회의 병폐를 고치고 인류가 파멸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한학자 총재의 외침은 세계에 큰 경종을 울렸다”고 밝혔다.
가정연합 강원교구(교구장 정문기)는 지난 16일 ‘어머니가 비추는 평화의 빛’을 주제로 강원도 평창군 횡계면 모나 용평 블리스힐 스테이 웰니스홀에서 평화대사와 가정연합 신도 7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학자 총재의 평화를 위한 삶과 업적’을 소개하는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조준왕 부교구장의 사회로 개회선언, 안인성 교회장의 감사기도, 정문기 교구장의 인사말씀, 기타다 요시토 청년의 효정간증, 영상시청, 송용천 협회장의 주제강연, 효정찬양, 억만세 삼창 순으로 이어졌다.
정문기 교구장은 인사말에서 “가정연합이 걸어온 길의 진실을 다시 확인하고,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으며 평화·통일운동의 본질을 정확히 알리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며 이번 강연회의 취지를 설명했다.
일본 출신으로 한국에서 활동 중인 기타다 요시토 청년은 “문선명·한학자 총재님의 뜻을 이어받아 사랑과 평화의 다리가 되겠다”며 “그 사랑을 제 삶으로 증명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포부를 전해 박수를 받았다.
주제강연에 나선 송용천 협회장은 “한학자 총재는 사랑과 희생으로 인류의 미래를 열어온 평화의 어머니”라고 소개하며 총재의 평화 철학과 생애적 의미를 상세히 전달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이번 순회강연은 지역 신도들과 평화대사들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앞으로도 지역사회와 협력해 평화·봉사·가정가치 확산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행사에 참석한 신도와 지도자들은 “송 협회장의 강연을 통해 한학자 총재의 진정한 삶과 평화 비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며 “언론의 편향된 보도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진실은 드러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2025-11-17 19: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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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종교개혁, 더 순수한 교회를 향하여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종교개혁, 가로막힌 길을 열다
1517년 10월31일, 독일 비텐베르크. 한 젊은 수도사이자 교수가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못 박았다. 학술 토론을 제안하는 평범한 대학의 관행이었지만, 이 작은 행동은 유럽 전체를 뒤흔든 큰 울림이 되었다. 루터가 본 것은 가난한 농민들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 마지막 동전까지 털어내는 현실이었다. “헌금함에 동전이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나온다”는 설교가 횡행하던 시절, 그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복음인가?”
종교개혁은 단순한 제도 개혁이 아니었다. 신자가 하늘부모님께 직접 나아가는 길을 회복하는 영적 혁명이었다. 중세 신령한 여인들이 그토록 갈구했던 주님과의 직접적인 만남, 그 길이 이제 모든 이에게 열린 것이다.
1520년은 기독교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이다. 루터는 세 편의 논문을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세워놓은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첫 번째 논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에서 ‘만인사제설’을 선언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 성직자만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천 년 넘게 이어진 성직자 계급의 독점이 무너졌다.
두 번째 논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7성사 제도를 비판했다. “성사는 은혜의 통로지만, 교회가 그것을 통제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성사를 통해 신도들을 영적으로 구속하고 있었다. 성사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교리는 신도들을 교회 제도에 속박하는 사슬이었다.
세 번째 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명확히 했다. “우리는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다.” 선행과 공로가 구원에 필수라는 중세 교회의 가르침이 뒤집혔다.
루터의 3대 원리는 분명했다.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교회와 성직자라는 중개자 없이 하늘부모님께 직접 나아가는 길을 여는 혁명이었다.
박해와 분립, 더 순수한 교회를 세우다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는 철회 요구 앞에서도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추방당했지만, 이 박해는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과 분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칼뱅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고,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넜다. 그러나 역사는 증언한다. 박해는 신앙을 정화하고, 고난은 더 높은 기준을 세운다. 초대교회가 로마의 박해 속에서 순수성을 지켰듯, 개신교도 이런 과정을 거쳐 더 깊은 영성을 갖추게 되었다.
이 흐름은 단순한 조직 분열이 아니라 시대적 신앙 정체성이 분별되는 과정이었다. 세속적 흐름과 경건한 흐름이 갈라지며, 더 순수한 교회를 향한 길이 열리고 있었다.
400년의 대칭, 섭리가 그리는 나선형 구조
《원리강론》은 섭리가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반복과 상승의 나선형 구조를 이룬다고 설명한다. 실제 역사는 이 패턴을 드러낸다.
예수님 강림 400년 전, 세계는 두 문화적 흐름으로 분립되었다. 알렉산더의 정복으로 확산된 헬레니즘은 인간과 이성을 중심에 둔 가인형 세계를 형성했고, 철학과 과학이 발전했다. 반면 말라기 선지자의 개혁으로 정립된 헤브라이즘은 신 중심의 아벨형 세계를 이루며 신앙의 본질을 회복했다. 가인형 헬레니즘이 로마제국의 발전으로 이어져 공통 헬라어, 사통팔달한 도로망, 통일된 법과 제도를 통해 복음 전파를 위한 외적 환경을 조성했고, 아벨형 헤브라이즘이 메시아를 맞이할 내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분립섭리를 통해 독생자를 맞을 세계적 기반이 조성되었다.
독생녀 탄생 400년 전에도 동일한 구조가 반복되었다. 문예부흥은 인본주의 세계관을 부활시켰고, 종교개혁은 신본주의 신앙을 회복했다. 두 흐름은 서로 다른 방향이지만, 점차 성숙해가면서 새로운 시대의 장을 열었다. 칼뱅은 1543년 《기독교강요》 3판을 완성하고,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제출했으며, 이는 독생녀 탄생(1943년)과 정확히 400년 차이다. 이 놀라운 동시성은 섭리가 일관된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부의 단장, 3단계의 준비
종교개혁은 단번에 완성된 사건이 아니다. 하늘부모님은 400년에 걸쳐 세 차례 개혁의 물결을 일으키셨다. 16세기 루터와 칼뱅의 개혁은 성서를 중심으로 신앙의 기초를 세운 진리의 회복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개신교도들이 형식주의에 빠지자, 17~18세기 슈페너와 웨슬리를 통해 영성의 회복이 일어났다. 이어 19세기까지 미국 전역을 휩쓴 대각성운동은 성령의 은사와 재림 신앙을 회복하는 실천의 회복이었다.
진리, 영성, 실천의 3단계는 마치 혼인을 앞둔 신부가 준비를 갖추어 가는 과정과 같다. 하늘부모님은 이 긴 여정을 통해 신부된 교회를 찾아 세우셨으며, 마침내 독생녀를 맞이할 영적 기반을 완성하셨다.
동방으로 향하는 신부 영성
흥미롭게도 종교개혁 400년의 여정은 모두 서방에서 동방으로 향했다. 독일에서 시작된 루터의 개혁은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을 거쳐 대서양을 건넜다. 경건주의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다시 미국으로 전파되었다. 대각성운동의 물결은 마침내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 도달했다.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서구 기독교 2천년의 신부 영성이 동방 한민족의 고유한 민족성과 만나는 하늘부모님의 섭리였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시작으로 한국 교회는 서구와는 다른 독특한 영성을 드러냈다. 성령의 체험과 회개의 눈물, 그리고 메시아 재림에 대한 간절한 기대가 그것이었다.
종교개혁 400년의 대장정은 독생녀 탄생으로 완성되었다. 서구의 신부 영성이 동방의 한민족과 만나 1943년 한반도에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종교개혁은 단순한 서구 교회의 개혁 운동이 아니라,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세계사적 준비과정이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17 10:3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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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천 년의 갈망, 주님과 하나 되다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중세 한 여인, 천 년의 문을 열다
13세기 독일 막데부르크, 한 베긴회 여성이 낡은 양피지에 펜을 대었다. 메히틸트라는 이름의 이 평신도 여성은 40년 넘게 금욕과 기도로 살아왔다. 펜 끝에서 흘러나온 문장은 파격적이었다.
“가장 미천한 영혼인 나는 그를 안고 먹고 마시며 내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이 강렬한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중세 여성들은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이토록 절실히 갈망했는가?
그들이 추구한 것은 단순한 영적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 곧 주님과 하나 되어 새 생명으로 탄생하는 것이었다. 오리게네스가 아가서를 통해 발견한 신비적 합일은 천 년을 거쳐 중세 신령한 여성들의 가슴에서 불타올랐고, 마침내 실체적 체험으로 꽃피었다. 이것은 신부 영성의 정점, 그 완성을 향한 이야기다.
관념에서 영적 체험으로
신부신비주의(Bridal mysticism)의 핵심은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함께 있는 것(union)을 넘어서,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무아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unity)을 의미한다.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는 아가서를 새롭게 해석했다. ‘신랑은 그리스도, 신부는 개인의 영혼.’ 로고스(말씀)와 영혼이 신비롭게 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이 통찰은 신인합일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하지만 아직 관념의 차원에 머물렀다.
12세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이 신비를 실재적인 영적 체험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아가서 설교를 통해 영혼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3단계를 제시했다. 첫째, 회개의 입맞춤(발). 죄인이 주님의 발에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 둘째, 깨달음의 입맞춤(손). 주님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움을 받는다. 셋째, 완전한 일치의 입맞춤(입술). “영혼이 신랑과 입맞춤할 때, 둘은 완전히 하나가 된다.”
베르나르는 이것을 ‘신화(神化, deification)’라 불렀다. 마치 포도주에 섞인 물방울처럼, 불에 달아오른 쇠붙이처럼, 빛으로 가득 찬 공기처럼... 인간의 정(情)이 하나님의 뜻으로 완전히 변화한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고양이 아니다. 존재 자체가 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완전한 일치의 목적은 중생(重生), 곧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자칭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갈망한 것은 영적 위안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자체가 바뀌는 것이었다. 타락한 옛 생명에서 하늘의 새 생명으로, 급진적 변화를 추구했다.
“그를 먹고 마신다”: 실체적 일치를 향한 갈망
메히틸트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인간의 오감 중 가장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감각인 미각(味覺)으로 표현했다. 맛보고, 씹고, 먹고, 마시는 과정.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예수가 나의 피와 살이 되고, 나는 예수의 생명으로 채워지는 실체적 일치의 갈망이었다.
‘신성의 흐르는 빛’에서 메히틸트는 영혼이 신부로서 거쳐야 할 영적 여정을 3단계로 설명했다. 첫째, 자아를 비우는 정화의 단계. ‘참된 사막(영혼의 공허함)’에서 신과 만난다. 둘째, 신랑을 기다리는 준비의 단계. 자아를 완전히 비울 때 신성한 사랑의 불길이 나를 채운다. 셋째,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완성의 단계. ‘고통의 쓴 잔’을 마심으로써 예수의 수난에 동참하고, 마침내 그와 하나가 된다.
중세 신령한 여인들은 이러한 신과의 직접적 일치를 무엇보다 갈구했다. 14세기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대화’에서 영성체를 통해 “사랑의 불에 취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그분의 피로 내 영혼이 불타오른다”, “나는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은 내 안에 계신다”고 고백했다. 영성체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는 것이요, 그리스도가 흘린 피를 받아 마시는 성사였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신비한 결혼, 즉 사랑의 합일을 이루는 실제적인 통로였다.
14세기 노리치의 줄리안은 다른 차원의 통찰을 더했다. “주님께서 내게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품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 안에 품으시고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줄리안의 통찰은 하나님의 여성성에 대한 이해를 크게 심화시켰다. 어머니의 사랑처럼 품고, 먹이고, 보살피는 하나님. 이것은 장차 하늘어머니이신 독생녀를 위한 중요한 영적 기반이 되었다.
15세기 제노바의 카타리나는 신비체험을 실천적 영성으로 승화시켰다. 극적인 회심을 체험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불타오르자, 세상의 모든 것이 달라 보였습니다.” 그녀는 제노바의 한 병원에서 병자들을 돌보며 25년 동안 봉사했다. 일치는 관조에 머무르지 않고 이웃사랑으로 드러났다.
신부들과 보호자들
중세 여성 신비가들의 영적 유산이 보존될 수 있었던 데에는 특별한 섭리적 구조가 있었다. 바로 여성과 남성의 페어(Pair) 관계였다. 12세기 빙엔의 힐데가르트에게는 수사 볼마르가 있었다. 볼마르는 60년 넘게 그녀의 환시를 기록하고 증거했다. ‘Scivias’(길을 알라)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이것은 그녀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녀를 통해 말씀하신다.”
13세기 메히틸트에게는 도미니코 수사 하인리히가 있었다. 하인리히는 흩어진 그녀의 원고를 수집하고 편집했다. ‘신성의 흐르는 빛’을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다듬어주었다. 책의 서문에서 하인리히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 책은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것이니, 아무도 그 순수성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14세기 시에나의 카타리나에게는 고해 신부 레이몬드가 있었다. 그들은 6년간 함께 여행하며 교황과 교회 지도자들을 중재했다. 그는 카타리나의 편지와 ‘대화’를 필사하고, 사후 전기를 작성했다.
16세기 아빌라의 테레사에게는 십자가의 요한이 있었다. 테레사의 영적 통찰과 요한의 신학적 깊이가 결합하여 카르멜회 개혁을 이루어냈다. 둘 다 교회박사로 추대되며 신비신학의 쌍벽을 이루었다.
이러한 페어 관계는 단순한 협력 이상이었다. 여성은 내적 사명을 담당했다. 직접적인 계시와 영적 체험을 통해 성서와 섭리의 본질적 내용을 밝혔다. 남성은 외적 사명을 담당했다. 여성들이 받은 계시를 신학적으로 체계화하고, 교회의 탄압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며 외적 기반을 넓혔다. 여성 신비가들은 평신도나 수녀로서 제도적 권위가 없었지만, 어머니와 같은 입장에서 영적으로 남성 성직자들을 지도했다. 남성 성직자들은 아들의 입장에서 여성들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체계적인 신학으로 교회 안에서 그 유산이 이어지도록 했다.
이것은 독생녀 시대를 위한 중요한 섭리적 예표였다.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여성 신비가들의 영적 기준은 독생녀 탄생을 위한 하늘 신부와 어머니상의 확립이었고, 남성들의 보호와 체계화는 그 영성이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섭리적 장치였다.
한반도로 흐른 신부 영성
신부 영성의 여정은 오리게네스의 관념적 일치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영혼과 로고스의 합일을 상징적으로 해석했지만, 이 선구적 사유는 곧 베르나르와 중세 여성 신비가들에게서 실재적 합일을 갈망하는 깊은 체험으로 발전했다. 그 본질은 ‘하나 되기’(union)였으며, 무아를 지나 주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생의 신비였다.
메히틸트가 “그를 먹고 마신다”고 고백한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흘러들어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내적 변형의 갈망이었다. 줄리안이 발견한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은 앞으로 도래할 하늘어머니 시대를 예시하는 듯했고, 남성과 여성의 짝 구조는 신부 영성이 역사 속에서 보존되고 전승되는 섭리적 질서였다.
이 모든 흐름은 성령이 역사 속에서 점차 실체로 드러나는 과정이었다. 관념적 신부 이해에서 영적 신부의 체험으로, 그리고 실체적 신부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이 발전은 실체성령으로 오시는 독생녀의 탄생을 준비한 섭리의 길이었다.
이 신부 영성의 도도한 흐름은 유럽을 넘어 동방으로, 그리고 한반도에까지 스며들었다. 1930년대 한국 교계에 신비주의의 돌풍을 일으킨 이용도는, 중생이란 주님과의 합일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명의 역환(易換)’임을 깨달았다. 김정일은 “예수에게 미쳐 그를 먹고 그를 마시라”는 이용도의 가르침에 “그 살을 먹고 그 피 맛을 아는 피가 더 귀하구나”라며 메히틸트를 떠올리게 하는 직설적 일치의 체험으로 응답했다.
이처럼 서구에서 시작된 신부 영성의 흐름이 한반도에서 다시 타오르며, 마침내 1943년 독생녀의 탄생으로 수렴되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13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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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화형대 위의 신부들, 순결한 사랑의 증인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신부의 두 얼굴: 성녀와 이단자
1310년 6월 1일, 파리 그레브 광장. 하얀 백사장에 쌓인 장작더미에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군중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대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심판관이 마지막으로 외쳤다.
“네가 주님의 신부라는 것을 부인하라! 살려주겠다!”
마르그리트 포레트는 고요히 대답했다.
“저는 주님의 사랑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제 영혼의 생명이며, 그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포레트는 이단죄로 화형 당했다.
앞서 1179년 9월 17일, 독일 빙엔의 루퍼츠베르크 수녀원. 한 여인이 숨을 거두었다. 힐데가르트. 교황과 황제가 그녀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겼고, 사후 교회는 그녀를 성녀로, 나아가 교회 박사로 추대했다.
같은 신부 영성을 품었지만, 한 여인은 이단자가 되었고, 한 여인은 성녀가 되었다. 그들의 운명을 가른 것은 무엇일까?
사랑의 신비: 영혼과 신랑의 합일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은 8세에 부모를 떠나 수녀원에 들어갔다. 38세에 수녀원장이 된 그녀는 비전을 통해 신학서, 치료서, 음악을 창작했다. 그녀의 시는 그리스도와의 깊은 사랑을 노래했다.
“가장 깊은 자리에서 / 하나님이 내 영혼과 입 맞출 때 / 열망이 속을 채우고 / 은총과 축복이 쏟아져 내린다 ... 나는 당신이 타는 칠현금 / 부드러운 손길에서 나오는 가락 / 그 음조는 내 것이 아닌 것 ... 하나님 나는 당신의 작품”
포레트는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발렝시엔느에서 베긴회 여성으로 살았다. 베긴회는 13세기 초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등장한 여성 신앙 공동체다. 설립자도, 통일된 규칙도 없이 기도와 노동, 금욕과 봉사 활동을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포레트는 ‘단순한 영혼의 거울’에서 영혼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길을 주장했다. 그 마지막에 영혼은 신랑이신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며, 창조 이전의 무의 하나님과 결합한다.
두 여인 모두가 자신을 “주님의 신부”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아가서의 신랑과 신부처럼,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실제로 체험했다. 이러한 신앙적 고백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낯설고 미스터리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는 열쇠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과 하나 되기를 갈망한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지를 생각하면, 그들의 체험을 이해할 수 있다.
힐데가르트는 평생 동정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아내가 되어 살겠다고 맹세했다. 그녀에게 금욕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더 깊이 세상을 섬기기 위한 준비였다. 그녀는 병자를 치료하는 의술을 연구했다. 보석을 이용한 치료법을 개발했고, 실제로 많은 병자를 고쳤다. 또한 부패한 성직자들의 양심을 일깨우러 설교 여행을 다녔다.
포레트는 베긴회에서 자발적으로 고행과 금욕, 청빈과 노동을 실천했다. 베긴회 여성들은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살았다. 신비 체험을 농도 짙은 미각적 감각으로 표현한 독일 마그데부르크 출신의 여성 신비가 메히틸트는 이렇게 노래했다. “너는 고통의 쓴 잔을 마시되 미덕의 불쏘시개로 사랑의 불을 지펴라.”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오셨듯이, 그의 신부들도 세상의 고통 속으로 내려갔다. 그리스도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세상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이것이 그들이 가진 영성의 본질이었다.
교회와 영성의 긴장: 보호와 심판
중세 교회는 이러한 여성 신비주의자들을 철저히 감시했다. 고해성사를 맡은 신부들이 교황의 첩자 노릇을 했다. 그들은 여성들의 영적 체험과 사상을 살폈고, 교리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면 교회 당국에 보고했으며, 이단 심문에 넘겼다.
그러나 일부 의인이 있었다. 이들 성직자는 여성들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보호했다. 그들은 여성 신비가들의 저술을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가다듬어 주었다. 위험한 표현은 순화시키고, 교리와 충돌할 수 있는 부분은 신학적으로 정당화해 주었다. 이러한 협력이 없었다면 많은 영적 유산이 불길 속에 사라졌을 것이다.
힐데가르트에게는 수도사이자 고해신부인 조력자 폴마르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비전이 교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도우며 교회의 인정을 받게 했다. 그녀는 교회의 권위 안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받은 계시는 교회의 교리를 보완하고 심화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교황과 황제가 그녀를 존경했고, 성녀로 추대했다.
포레트에게도 고해신부 구아르가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폴마르는 힐데가르트의 비전을 정통 신학 안에서 해석하도록 도운 수도사였고, 구아르는 포레트의 신비사상을 옹호하다가 그녀와 함께 이단으로 단죄된 비운의 조력자였다는 점이다. 당시 판단의 기준은 여성 신비자의 사상과 행동이 교황을 정점으로 한 교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비춰졌는가에 있었다. 교회는 처음에는 신령한 여인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았지만, 태도가 돌변했다. ‘무가 되어버린 영혼’ 또는 ‘자유로워진 영혼’이라는 개념이 교권을 부정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성신비가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독립성이 강해지자, 교회는 위협을 느꼈고, 살벌한 이단 심문이 시작되었다.
교권 세력은 포레트에게 책을 회람하지 말 것과 ‘주님의 신부’라는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포레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녀의 책은 금서가 되었고, 불태워졌다.
교회와 신령한 여인들이 충돌한 핵심은 네 가지였다. 첫째, 성직자의 중재 없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한다는 주장. 둘째, 성서를 독자적으로 해석하는 방식. 셋째, 제도권을 벗어난 자유로운 신앙생활. 넷째, 여성이 영적 권위를 통해 교회의 위계질서를 흔들었다는 점이다.
1310년 파리 광장, 마지막 심문이 열렸다. 심판관은 포레트를 “가짜 신부”, “이단자”라고 단죄했다. 그러나 포레트는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켰다. 불길이 타올랐다. 그녀가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며 죽기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 자체가,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을 증명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생명보다 귀했다.
힐데가르트와 포레트. 두 여인은 같은 신부 영성을 품었지만, 한 사람은 교회 박사가 되었고 한 사람은 화형대에 올랐다. 그러나 역사는 증언한다. 둘 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신부였다고. 교회의 인정 여부가 신부의 진정성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불씨의 계승: 한반도의 신부 영성
중세 유럽에서 꽃핀 신부 영성은 시공을 초월해 한반도에 독특한 방식으로 이어졌다. 해방 전후 이용도, 김성도, 허호빈을 중심으로 한 신령집단은 재림이 임박했음을 강하게 느끼며 눈물로 회개했다. 예수님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갖은 정성을 다했다. 하루 7천 번 경배를 드렸고, 신랑 예수님과 신부의 옷을 지으며 혼인잔치를 준비했다.
이들은 공산 정권의 종교탄압에도 불구하고 평양이 에덴궁이 될 것이라고 믿고 남하하지도 않았다. 결국 강제수용과 박해가 뒤따랐다. 많은 이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며 생을 마감했다.
이들의 기도와 희생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신앙적 기대와 해석의 배경으로 남아, 훗날 한반도에서 전개된 독특한 영성의 토양이 되었다. 신앙의 길은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나지만, 진심 어린 구도와 헌신은 언제나 그 자체로 깊은 울림을 준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12 15: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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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가서가 열어준 신비의 문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기고]
◆완전한 사랑을 찾아서
“당신은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해본 적이 있습니까?”
서기 240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185~254)가 성경의 아가서를 펼쳤다. “그가 그 입맞춤으로 내게 입을 맞추게 하소서.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좋으니라”(아 1:2). 뜨거운 사랑의 노래로 가득한 이 책을, 그는 그리스도를 향한 영혼의 사랑으로 읽었다.
당시 사람들은 아가서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더 깊이 들어갔다. 교회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신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와 나, 단 둘의 사랑 이야기. 이 발견은 이후 천 년이 넘도록 서양 기독교의 가장 순수한 영성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흐름은 20세기 한반도로 흘러들어와 독생녀 탄생을 준비하는 영적 토양이 되었다.
오리게네스, 사랑으로 하늘에 오르다
오리게네스의 생각은 단순했다.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면 영혼이 하늘로 상승한다. 그는 그리스 철학에서 에로스, 곧 ‘완전한 아름다움을 향한 사랑’을 빌려왔지만, 그것을 ‘그리스도를 향한 거룩한 사랑’으로 변화시켰다. 타락으로 하늘에서 멀어진 영혼이 사랑의 힘으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이 여정을 세 단계로 설명했다. 먼저 ‘정화’의 단계다. 죄를 씻어내고 마음을 깨끗이 한다. 다음은 ‘조명’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을 환히 비춘다. 마지막이 ‘합일’이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완전한 사랑의 경지다. 그는 아가서의 ‘입맞춤’, ‘포옹’, ‘신랑의 방’을 모두 이 사랑의 여정으로 읽었다. 입맞춤은 그리스도가 영혼을 깨우는 순간이고, 신랑의 방은 깊은 기도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내면의 공간이다.
아가서에서 비롯한 이 에로틱한 영적 결혼의 개념은 이후 모든 신부 영성의 뿌리가 되었다. 하늘은 완전한 사랑을 추구하는 순수한 영혼들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암브로시우스, 오직 그분만을 위하여
4세기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340~397)가 살던 시대는 전환기였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으면서 순교의 시대가 끝났다. 이제 어떻게 완전한 헌신을 보일 수 있을까?
암브로시우스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결혼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동정의 삶이다. 그는 이것을 ‘새로운 순교’라고 불렀다. 목숨을 바치는 대신 평생을 바치는 헌신이었다. 순결은 하늘나라의 생활 방식이다. 그는 특히 동정녀들에게 설교하며 아가서를 인용했다. “신랑은 신부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때로 멀리 계신 듯하지만 결국 벽 뒤에서 창으로 지켜보신다”(아 2:9). 동정녀의 삶은 그리스도를 끝없이 기다리고 찾는 신부의 삶이었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를 모든 신부의 모범으로 세웠다. “마리아의 삶을 보라. 거기서 순결이 거울처럼 빛난다.” 이렇게 서방교회에는 순결한 신부의 전통이 뿌리내렸다. 하늘은 완전한 순결로 준비된 그릇을 찾고 계셨다.
베르나르, 사랑을 체험하다
12세기 프랑스의 수도원장 베르나르는 아가서에 대한 86편의 설교를 통해 신부 영성을 정교하게 체계화했다. 그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체험하라.”
베르나르는 합일을 입맞춤의 세 단계로 설명했다. 발에 입맞추는 회개, 손에 입맞추는 깨달음, 입술에 입맞추는 완전한 결합. 그리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체험의 책에서 읽는다.” 아가서는 경험해야 비로소 이해되는 책이었다.
놀라운 점은 베르나르 자신이 남성이면서도 신비체험 중에 자신을 사랑에 빠진 신부로 느꼈다는 것이다.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만이 중요했다.
베르나르의 가르침은 13세기 여성 신비가들에게 불을 지폈다. 메히틸트, 게르트루트, 하데비히 같은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베르나르가 체험에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학식이 없어도, 수도원 밖에 있어도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한 사람은 그의 신부였다.
두 강물이 한반도로
오리게네스가 상승의 문을 열었고, 암브로시우스가 순결의 토대를 놓았으며, 베르나르가 체험의 불을 지폈다. 천 년에 걸친 이 흐름은 서구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순수한 신부 영성을 준비했다.
20세기, 이 신부 영성이 한반도에서 활짝 꽃피었다. 이용도 목사는 서구 신부신비주의를 한국의 심정으로 완전히 새롭게 받아들였다. 그는 1930년 1월 19일의 일기에서 “나는 주님의 신부요 주는 나의 신랑이시다”, “세상 사람의 손에는 향기로움이 있고 주님의 손에는 채찍이 있어도 그래도 나는 주님의 품으로 들어가겠어요”라며 사랑을 고백한다. 예수를 관념이 아닌 심정으로 만났다. 십자가에서 신랑을 잃은 신부의 애절함, 육신으로 오신 예수의 고난에 대한 깊은 공감, 재림하실 신랑을 기다리는 간절함. 베르나르가 입맞춤으로 표현한 합일을, 이용도는 한국인 특유의 뜨거운 심정과 한(恨)의 정서로 체험했다. 1932년 동안주 장로교회 부흥회에서 이용도의 아가서 설교를 들은 홍순애는 깊은 회심을 경험했다.
평양에서는 허호빈이 입신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한을 깨달았다. 십자가에서 온전한 뜻을 이루지 못하신 예수님의 한, 신부를 맞지 못하신 예수님의 한이었다. 허호빈은 7천 배의 경배를 드리며 예수님을 위한 옷을 준비하고 혼인잔치 상을 차렸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 신부 영성의 절정이었다. 서구의 정적(情的)이며 체험적 신비주의가 한민족의 실천적 영성과 한(恨)의 정서와 만나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꽃피었다. 그 중심에서 1943년, 독생녀가 탄생한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06 10:2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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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순교로 지킨 신부의 순결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불꽃 속에서 피어난 에클레시아
“그리스도는 나의 신랑입니다.”
18세 카타리나가 혹독한 고문 앞에서 고백했다. 뛰어난 미모와 지성을 가진 귀족 여성인 그녀는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부황제의 청혼까지 물리쳤다. 50명의 철학자들과 논쟁하여 오히려 그들을 개종시켰다. 못 박힌 바퀴로 고문당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저는 이미 그리스도와 약혼했습니다. 그분은 나의 영광이요, 나의 사랑이며, 나의 달콤함이요, 나의 연인입니다. 어떤 고문도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나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 많은 신도들이 이렇게 목숨을 바쳤다. 황제에게 향 한 줌만 피우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부했다. 왜일까? 그들은 자신을 ‘신부’로 여겼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향한 절대적 사랑과 순결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약 300년, 박해의 불꽃 속에서 신부 공동체는 더욱 순수하게 빛났다.
성령 강림, 신부 공동체의 탄생
오순절, 예루살렘에 모인 제자들에게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불의 혀 같은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여러 나라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베드로가 일어나 외쳤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날 약 3,000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자신을 ‘에클레시아’(Ecclesia)라 불렀다. 이 단어는 ‘밖으로 불러냄 받은 자들’이라는 뜻이다. 세속에서 분리되어, 하나님께 부름받은 특별한 공동체라는 의미였다. 그들은 더 이상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닌, 믿음으로 연결된 ‘제2이스라엘 선민’이 되었다.
성령 강림은 구원의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이 돌판에 새겨져 있었다. 법궤와 성전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성령 시대는 달랐다.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리라”(렘 31:33)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이제 성령께서 직접 마음에 임재하시어, 신도들을 이끄셨다.
초대교회 신도들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나누고 기도하기를 힘썼다. 재산을 공유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았다. 주로 신도들의 가정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들이 추구한 순수한 공동체 정신과 세속과 구별되는 삶은, 중세 유럽의 신부신비가들과 근대 한국의 신령집단이 보여준 영성과도 맥을 같이한다.
“그리스도는 나의 신랑” - 동정 순교자들
그러나 순수한 신앙은 대가를 요구했다. 로마 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통합하기 위해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다양한 민족의 신들은 인정했지만, 황제를 최고의 신으로 섬길 것을 명령했다. 대부분의 종교는 이를 수용했다. 하지만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달랐다. “황제숭배냐, 죽음이냐”의 선택 앞에서 그들은 죽음을 택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는 그 시대 동정 순교자들을 대표한다. 그녀의 고백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었다. 자신을 ‘신부’로 여기는 정체성의 선언이었다. 순결은 육체적 순결만이 아니라, 신앙의 순수성을 의미했다. 변치 않는 사랑, 절대적 헌신을 뜻했다. 죽음조차 그들을 신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었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신앙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들은 육신의 생명보다 영적 순결을 더 귀하게 여겼다. 이는 마치 신부가 신랑에 대한 절대적 사랑과 순결을 지키는 것과 같았다. 동정 순교자들의 절개는 신부로서의 절대적 믿음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신부’로서의 순교 정신은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졌다. 1940년대 한국 신령집단 여성들도 단순히 신앙을 지키는 차원을 넘어, 자신을 ‘신부’로 강하게 자각하며 재림주를 맞이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김성도는 일제 말기 “일본은 멸망하고, 한국은 새 주님을 중심으로 세계 1등국이 된다”는 계시의 말씀을 전하다 투옥되었고, 출감한 지 석 달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김성도의 뒤를 이은 허호빈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을 해원해 드리기 위해 7천 배 경배를 올리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였다. 공산 정권 아래 종교 탄압 속에서도 대동보안서에 갇힌 채 예수님의 신부라는 고백을 끝내 부인하지 않다가 6·25전쟁 직후 총살당하였다. 1,6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신랑을 향한 신부의 마음은 같았다.
광야에서 피어난 영성의 꽃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박해는 끝났다. 신도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교회가 급속히 세속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 권력과 결탁하고, 형식적 신앙이 퍼졌다. 순교할 기회를 놓친 이집트의 안토니우스는 고민했다. ‘어떻게 순수한 신앙을 지킬 것인가?’
그의 답은 광야였다. 270년경, 그는 사막으로 들어갔다. 세상과 단절하고 하루 7번 기도하며 금욕의 삶을 살았다. 순교가 육체의 죽음이라면, 수도는 자아의 죽음이었다. 또 다른 형태의 ‘순교’였다. 그의 소문이 퍼지자, 많은 이들이 광야로 향했다.
파코미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320년경, 그는 개인 은둔이 아닌 공동체 수도원을 설립했다. 함께 기도하고 노동하며, 서로를 격려하는 영적 공동체였다. “하나님의 것과 카이사르의 것”을 구분하고자 했다. 세속과 구별된 삶을 통해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려 했다.
도나투스파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박해 시기에 배교했던 성직자들이 평화가 오자 다시 복직하려 했다. 도나투스파는 반대했다. “배교자는 성직 자격이 없다.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비록 교회와 갈등을 빚었지만, 그들의 열정은 진지했다.
흥미롭게도 20세기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라는 시험 앞에서 한국 교회는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동아기독교, 성결교회 등 일부 교단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해체되었다. 주기철 목사와 손양원 목사로 대표되는 이들은 투옥과 순교의 길을 갔다. 신령집단은 산과 들로 흩어져 은둔하며 메시아의 재림을 준비했다. 광복 후, 교회 순수성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졌지만, 이 과정은 오랜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신앙의 갈등이었다.
수도원 운동은 세속과 구별되는 영적 공동체를 꿈꾸었다. 이는 후일 한국 신령집단이 기성교회의 형식주의를 거부하고 순수한 영성을 추구했던 모습과 겹쳐진다. 시대는 달랐지만, 거룩함을 향한 갈망은 같았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04 08:5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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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엔젤스 ‘K무용’에 홍콩도 반했다
리틀엔젤스예술단이 ‘2025 홍콩 드럼 페스티벌’에 참가해서 다채로운 한국 무용 작품으로 홍콩인을 매료시켰다.
3일 리틀엔젤스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홍콩문화센터 콘서트홀에서 열린 이번 공연에서 예술단은 다채로운 한국무용 작품을 선보이며 약 1200명의 관객으로부터 뜨거운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1부 공연에서는 ‘북춤’, ‘설날아침’, ‘신명한판’ 등 한국 전통의 흥과 멋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무대에 올라 약 20분간 풍성한 볼거리를 선사했다. 2부에서는 홍콩 차이니즈 오케스트라 부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 추 희 챠트 지휘로 ‘아리랑 북춤’ 협연이 펼쳐졌다. 중국 전통 악기의 선율과 리틀엔젤스예술단의 육고무 북춤이 조화를 이루며 한국의 대표 민요 아리랑을 함께 연주해 양국의 문화적 교감을 이끌어냈다.
리틀엔젤스예술단은 2024년에 이어 2년 연속으로 홍콩 드럼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주목을 받았다. 이번 공연을 통해 한국 전통예술의 아름다움과 역동성을 다시 한번 세계 무대에 알렸다.
올해로 세계 순회공연 60주년을 맞은 리틀엔젤스예술단은 미국 워싱턴과 로스앤젤레스, 독일 베를린, 영국 런던 킹스턴에서 특별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홍콩에 이어 과테말라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12월 20일에는 서울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세계순회 60주년 기념공연’을 개최해 한 해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2025-11-03 21: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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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생자의 십자가 한(恨)과 2천 년의 기다림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가나의 혼인잔치 속의 고독
갈릴리의 작은 마을에 잔치가 열렸다. 햇살이 쏟아지는 정원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마을의 한 신랑과 신부가 손을 맞잡고 있었고, 하객들이 축복하는 가운데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계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다. 잔치의 흥이 깨질 순간이었다.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했다. “포도주가 없구나.” 아들이 무언가 해주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 이 짧은 말씀 속에 얼마나 깊은 한숨이 담겨 있었을까? 어머니조차 자신의 참된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로움. 결혼식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자신이 이루어야 할 혼인잔치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참부모로 오신 독생자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을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하지만 이것이 하늘부모님의 본래 뜻이었을까?
하늘부모님의 창조이상은 명확하다. 아담과 해와가 온전히 성장하여 축복받은 부부가 되고, 자녀를 낳아 참가정을 이루는 것이다(창 1:27-28). 타락으로 이러한 이상이 좌절되었기에, 4천 년 동안 복귀섭리를 펼치시며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예수님의 본래 목적은 십자가가 아니었다. 신부를 맞이하여 참부모가 되고, 선의 자녀를 낳아 하늘 혈통을 지상에 뿌리내리는 것이었다. 타락한 인류를 하늘부모님의 직계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실체적 구원,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로마 제국은 이미 세계를 하나로 연결해 놓았다.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고, 공통 언어가 통용되고 있었다.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갈 외적 환경은 잘 갖춰져 있었다. 유대 민족은 수백 년간 메시아를 갈망해 왔다. 선지자들의 예언이 생생했고, 민족 전체가 구원자를 기다렸다.
특히 세례 요한은 민중의 절대적 신뢰를 받으며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다. 요단강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했다(요 1:29).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하나 되어 민족적 기반 위에서 신부를 찾아 성혼하여 참부모가 되실 수 있었다.
무너진 기반
그러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세례 요한이 의심하며 묻는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19). 유대 민족이 가장 존경하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자, 예수님은 홀로 무너진 민족적 기대를 다시 쌓아야 했다.
마리아도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의 “여자여”라는 공손치 않은 말씀은, 어머니조차 자신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또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니라”(마 12:48-50). 육신의 혈연관계보다 하늘 뜻을 중심한 영적 관계가 더 중요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는 책임은 완수했지만, 그분을 메시아로 모시지 못했다. 특히 예수님이 신부를 찾아 성혼하도록 돕는 것이 그녀의 중요한 사명이었으나, 그 뜻을 깨닫지 못했다.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민중은 혼란스러웠다. 3년의 공생애로 4천 년의 기대를 회복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이 잔, 즉 십자가가 본래 하늘의 뜻이었다면 왜 이렇게까지 피하고 싶어 하셨을까? 십자가는 본래의 뜻이 아니었다. 사명자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에 불가피하게 가셔야 했던 고통의 길이었다.
십자가 후 예수님은 영적으로 부활하셨고, 성령과 함께 영적 참부모가 되셨다. 기독교 신도들을 영적으로 중생시키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위대한 승리였다. 그러나 절반의 승리였다. 영적 구원은 이루었으나, 실체적 구원은 미완으로 남았다.
재림의 약속: 신부를 찾아
예수님은 떠나시기 전에 약속하셨다. “내가 다시 오리라”(요 14:3). 왜 다시 오셔야 할까? 미완의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신부를 찾아 어린 양 혼인잔치를 올리기 위해서다.
요한계시록은 이 장면을 생생하게 예언한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계 19:7). 여기서 어린 양은 재림주님을, 아내는 독생녀를 의미한다. 실체 참부모가 이 땅에 현현하실 것을 예고한 말씀이다.
성서의 마지막 장에는 더욱 명확한 예언이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 무형으로 역사하시던 성령이 실체 독생녀로 현현하실 것을 가르쳐준다. 생명수, 즉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 실체 하늘어머니로 오신다는 예언이다.
2천 년 준비의 여정
하늘부모님은 독생녀를 보내실 준비를 하셨다. 그것은 독생녀를 낳고 모실 수 있는 신령한 기반을 준비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동정 순교자들, 중세의 여성 신비주의자들, 근대의 경건주의자들, 그리고 한국 기독교의 신령집단에 이르기까지. 성령은 기독교 2천 년 동안 신령한 신도들을 통해 영적 기준을 높여왔다.
영적 구원의 한계도 분명했다. 아무리 믿음이 깊은 신도라도 원죄는 사라지지 않고 자녀에게 전이된다. 완전히 중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실체 참부모를 통한 혈통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독생자와 독생녀가 참부모가 되고, 그 참부모를 통해 인류가 하늘부모님의 직계 자녀로 거듭날 때 비로소 창조이상이 완성된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는 독생녀를 준비하는 섭리였다. 이스라엘 선민이 다하지 못한 사명을 기독교가 이어받았다. 하늘부모님은 가장 신령한 교회를, 가장 순수한 신부를 찾아 나오셨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0-30 17: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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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성서 역사 6천 년인가? 복귀섭리의 비밀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하늘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긴 여정
왜 6천 년인가? 아담과 해와가 에덴동산을 떠난 그날부터 하늘부모님은 잃어버린 자녀들을 찾아 헤맸다. 한 아이가 집을 나가 세상을 떠돌다 결국 돌아온다고 상상해 보자. 그 아이는 처음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서서히 기억을 되찾고, 부모의 사랑을 조금씩 깨닫고, 마침내 온전히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성서상의 인류 역사 6천년이 바로 그러한 여정이었다. 타락으로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복귀섭리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이었다. 마치 나무가 씨앗에서 싹트고, 줄기가 자라고, 꽃을 피워 마침내 열매를 맺듯이, 하늘부모님의 섭리도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한 걸음씩 넓어지는 구원의 지평
복귀섭리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좁은 범위에서 넓은 범위로 확장되어 왔다. 아담에서 노아까지는 개인과 가정적 기대를 조성하는 섭리였다. 아벨의 제물, 노아 한 사람의 의로움을 통해 하늘부모님은 먼저 개인과 가정 차원의 복귀 기대를 세우셨다. 아브라함 때부터는 종족과 민족적 기대가 조성되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을 거쳐 야곱으로 이어졌고, 야곱의 12아들을 통해 종족으로 번성했다. 이집트에서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통해 해방되면서 민족적 복귀의 기대가 세워졌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구원의 지평은 세계로 넓어졌다. 더 이상 유대민족만이 아닌 열방에 복음이 전해졌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선포했다(갈 3:28). 그리고 재림의 때, 구원은 지상을 넘어 천상까지, 천주적 차원으로 완성된다. 이렇게 복귀는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로 단계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한 단계가 승리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기에 긴 시간이 필요했다.
종에서 양자로, 양자에서 직계 자녀로
복귀섭리를 통해 하늘부모님과 인간의 관계도 점점 가까워졌다. 구약시대, 인간은 ‘종’의 위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십계명과 율법을 따르며 제물을 드렸다. 순종하면 축복받고, 거역하면 벌을 받는 계약적 관계였다.
신약시대에 들어서며 관계는 한층 깊어졌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겠다”고 말씀하셨다(요 15:15).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신도들은 영적으로 거듭나 ‘양자’의 위치에 올랐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그러나 양자는 아직 완전한 자녀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이 한계를 고백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영적으로는 구원받았지만 육적으로는 여전히 죄의 경향성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성약시대가 열리면서 인류는 마침내 ‘직계 자녀’의 위치로 복귀되었다. 실체 참부모님을 통해 중생함으로써 원죄가 청산되고 창조본성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렇게 종→양자→직계 자녀로 나아가는 심정권의 발전도 단계적 과정이었기에, 6천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독생자 4천 년, 독생녀 6천 년의 대칭
성서 역사 6천 년의 섭리에는 놀라운 대칭 구조가 숨어 있다.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약 4천 년은 독생자를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하늘부모님은 아브라함을 부르고, 그 후손 야곱의 자손들을 통해 유대민족을 이루게 하셨다. 특히 예수님이 오시기 약 400년 전부터는 세계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헬레니즘 문화로 철학이 발전하고, 로마제국은 복음 전파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유대민족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겪으며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다.
아담으로부터 독생녀 탄생까지 약 6천 년은 독생녀를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하늘부모님은 동방과 서방에서 두 갈래의 섭리를 펼치셨다. 동방에서는 한민족이 수천 년 동안 제천문화를 발전시키며 하늘을 모시는 민족성을 길러왔다. 백의민족으로서의 순수성과 대망사상은 한민족의 영적 DNA가 되었다. 특히 청주 한씨 가문에서 신앙의 정성이 축적되었고, 일제의 가혹한 박해 속에서도 1930년대 신령집단들은 순수한 신앙의 불씨를 지키며 메시아 재림을 간절히 고대했다.
서방에서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초대교회 순교자들, 중세의 여성 신비가들, 종교개혁, 경건주의, 그리고 대각성운동을 통해 신부 영성을 준비하셨다. 특히 칼뱅이 1543년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제출한 때로부터, 독생녀 탄생의 해인 1943년까지는 정확히 400년의 간격이 있다. 이는 독생자 오시기 약 400년 전,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루어진 개혁과 놀라운 섭리적 대칭을 이룬다.
18세기 말, 자발적인 신앙운동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 이 땅에 전래되었고, 19세기 말에는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개신교 신앙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렸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신령한 역사가 불같이 일어났으며, 이때 한민족의 고유한 영성과 기독교의 신부 영성이 하나로 만나는 섭리적 결실이 이루어졌다.
두 강물이 만나는 곳
인류 역사 6천 년. 그것은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신 하늘부모님의 사랑의 역사였다. 개인에서 천주로, 종에서 직계 자녀로, 영적 구원에서 실체적 구원으로. 복귀섭리는 마치 거대한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꾸준히 전진해 왔다.
1943년 음력 1월 6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마침내 두 강물이 만났다. 동방 한민족 수천 년의 영성과 서방 기독교 2천 년의 신부 영성이 하나로 합류했다. 그 합류점에서 독생녀가 탄생하였고, 1960년 어린 양 혼인잔치를 통해 참부모님이 현현하였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0-29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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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강물이 한반도에서 만나다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1943년, 역사의 전환점에서
1943년 음력 1월6일, 평안남도 안주. 한반도는 일제의 칼날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던 교회들은 침묵하거나 순교를 택했고, 민족의 숨결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같은 때, 태평양 저편에서는 전쟁의 포화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이 처음으로 패배를 겪으며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세계는 거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역사를 바꿀 탄생이 조용히 일어났다. 1943년 음력 1월 6일, 평안남도 안주. 홍순애 대모님의 품에서 한 여자아기가 태어났다. “성자(聖者)가 태어날 것”이라던 하늘의 계시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남성 중심의 종교 전통 속에서는 여성이 그러한 섭리적 사명을 받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늘부모님은 “주님의 딸”이라는 환시와 “하늘의 신부가 되실 분”이라는 증거를 통해 이 아기가 바로 6천 년 섭리 역사가 기다려온 독생녀임을 계시했다.
누가 알았을까? 이 작은 생명이 2천 년 기독교 역사와 수천 년 한민족 역사의 결실이 될 줄을. 마치 두 개의 거대한 강물이 수천 년을 흘러 한반도에서 하나로 합쳐지듯, 서방 기독교의 신부 영성과 동방 한민족의 고유 영성이 이 땅에서 만났다.
서방에서 발원한 강: 기독교 2천 년의 신부 영성
서방에서 시작된 강물은 기독교 2천 년의 신부 영성이다. 이 강물의 발원지는 3세기 초기 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구약의 아가서를 읽으며 놀라운 통찰을 얻었다. “이것은 단순한 연애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우리 영혼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그의 해석은 교회를 넘어 ‘개인’이 신랑 되시는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다는 문을 열었다.
이 씨앗은 중세에 꽃피웠다. 12세기 베르나르는 아가서 강해를 통해 신부신비주의의 신학적 체계를 세웠고, 이후 힐데가르트, 메히틸트, 카타리나 같은 여성 신비가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그들은 환상과 계시 속에서 주님과 깊은 영적 합일을 체험했고,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고백했다. 특히 마르가리타 포레트는 1310년 파리 광장에서 화형당하면서도 신부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은 씨앗이 되어 후대에 더 순수한 신앙을 일깨웠다.
이처럼 중세 말까지 교회 안팎에서 꽃피운 신부 영성은 교황권의 부패와 형식화된 종교의례 속에서 점차 제도권의 억압을 받았다. 그러나 하늘부모님은 더 순수한 교회를 찾아 나왔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이 영성의 흐름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다. 루터와 칼뱅을 통해 신앙의 자유가 열렸고, 이후 17세기 경건주의, 18~19세기 대각성 운동을 거치며 기독교는 형식을 넘어 내면의 영성으로, 제도를 넘어 순수한 신앙 공동체로 나아갔다. 그리고 1907년, 이 강물은 마침내 한반도에 도착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대부흥 운동은 회개의 눈물과 성령의 불로 한국 교회를 뒤덮었다. 우치무라 간조는 “하나님은 조선을 사랑하며, 군대와 군함보다 능력이 더 강한 성령을 보내주셨다”고 증거하였다.
동방에서 발원한 강: 한민족 수천 년의 하늘 모시는 DNA
동방에서 시작된 강물은 한민족 수천 년의 영성이다. 한민족은 동방 문명권의 중심에서 하늘을 섬기는 문화를 이어온 민족이다. 고조선은 하늘의 뜻을 인간 사회에 구현하려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졌고, 제천의식을 통해 하늘을 숭배하고 풍요와 안녕을 기원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신라의 가배와 같은 전통도 하늘에 대한 경외와 감사의 표현이었다.
한민족의 DNA에는 하늘을 모시는 유전자가 새겨져 있다. 백의민족의 흰옷은 하늘 앞에 선 제사장의 순결을 상징했고, 새벽마다 정안수를 떠놓고 하늘께 기도하던 어머니들의 전통은 하늘부모님과 소통하며 살아온 민족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러한 신앙적 전통은 한민족이 하늘의 뜻을 좇는 민족으로 성장해 온 영적 기반이 되었다.
하늘부모님께서 서양에서는 독생자를 준비했다면, 동양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독생녀를 예비했다. 특별히 청주 한씨 가문은 섭리적으로 예비된 혈통이었다. 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은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의 인물로, 후대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하늘의 명을 받아 내려온 천손’으로 묘사된다. 이 가문에서 조한준 할아버지와 조원모 할머니, 홍순애 대모님으로 이어지는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정성이 쌓였다.
홍순애 대모님은 1932년 이용도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이용도 목사는 “나는 주님의 신부요”라고 고백하며 아가서의 신비를 체험한 한국 최초의 신부신비주의자였다. 대모님은 그의 설교에 감동받아, 재림주를 맞이하기 위한 순결하고 분별된 신앙생활에 모든 것을 바쳤다. 대모님은 이용도 목사의 예수교회, 김성도의 성주교단, 허호빈의 복중교로 이어지는 신령집단에서 재림주와 신부를 맞이할 준비를 이어갔다.
1943년, 두 강물이 하나 되다
1543년 장 칼뱅의 종교개혁, 그로부터 정확히 400년. 1943년, 역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갔다. 기독교 2천 년의 신부 영성과 한민족 수천 년의 하늘 모시는 영성이 한반도에서 하나로 만났다.
오리게네스가 뿌린 신부 영성의 씨앗, 중세 신비가들이 피운 순결의 꽃, 종교개혁이 열어준 자유, 평양 대부흥에서 당겨진 신령 역사의 불길, 이 모든 영성 운동이 1930년대 신령집단으로 수렴되었고, 홍순애 대모님의 정성과 만나 열매를 맺었다. 바로 독생녀 한학자 참어머님의 탄생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늘부모님은 6천 년 섭리 역사를 통해 이 순간을 준비했다. 유대민족으로 독생자를 보내셨지만,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하늘은 기독교를 세워 2천 년 동안 신부의 영성을 길러왔다. 한편 한민족을 선민으로 예비하고 수천 년 동안 하늘을 모시는 민족성을 형성했다. 그리고 20세기 초, 두 흐름이 한반도에서 만나 신령 운동으로 폭발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0-28 19:5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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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끝>참부모 섭리와 신통일세계 [‘한민족 서사, 문화와 세계를 품은 이야기’]
◆한민족 서사로 사회와 세계를 연결하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의 끝부분은 천지인참부모를 중심으로 한 ‘섭리적 역사’와 ‘신통일세계 실현’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 과정을 우리 내부 사회구조와 국제 정치체제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민족의 집합적 정체성, 국제적 지위, 종교와 정치의 상호작용을 설명할 수 있으며, 한민족 서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층적·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사회학적 관점의 3가지 측면에서 보면 첫째, 집단 정체성과 신앙적 내러티브의 강화이다. 본문에서 천지인참부모의 축복결혼과 천일국 안착을 통한 인류 구원 서사는 한민족을 ‘선민으로 선택된 민족’이라는 맥락 속에 위치시킨다. 축복결혼은 초국가·초종교적 차원의 사건으로서, 국가·종교·인종 간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지구공동체로 통합하는 상징적 장치가 된다. 사회학적 분석에서 이러한 서사는 집단의 응집력과 소속감을 높이는 역할을 하며, 민족적 기억과 신앙적 서사가 결합하여 공동체적 상상력을 창출할 수 있다.
둘째, 제도화된 종교·사회권위의 구축이다. 독생녀 참어머니와 천지인참부모는 단순한 신앙 지도자가 아니다. 종교적·사회적 권위를 상징적으로 체현하는 존재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서 펼치고 있는 천보가정의 입적, 천심원과 정심원을 통한 지도자 양성, 그리고 축복가정의 전통 상속과 권위 승계는 종교적 신념을 사회적 권위와 연결시키는 구조를 보여준다. 이는 종교적 지도력과 사회적 권위가 맞물려 한민족의 정체성과 행동을 동시에 강화하는 결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셋째, 상징적·문화적 통합의 기능이다. 경기도 가평의 하늘부모님을 모신 성전 천원궁과 천원단지, 축복가정의 활동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신통일한국’을 구현하는 본보기로서, 효정문화와 참사랑 문화라는 사회적 가치를 확산한다. 이는 특정 신앙 체계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규범과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이는 종교 서사가 개인적 신앙에서 그치지 않고 공동체적 실천과 문화로 확장되는 사례이다.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는 먼저 한반도 중심의 지정학적 서사로 이해할 수 있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는 한국을 신통일세계와 천일국 실현의 중심지로 설정한다. 국제정치학적 분석에서 이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종교적·문화적 중심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다. 참부모의 미국 선교활동, 공산주의 근절 운동, 국제적 평화활동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어떻게 국제사회에서 종교와 평화 외교를 통한 영향력을 행사 기반을 마련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둘째, 냉전과 분단체제 속의 신앙적 의미 부여이다. 한국전쟁과 냉전 질서를 정치적 사건을 넘어 ‘재림과 섭리 과정’으로 의미화하는 방식은 국제정치적 현실을 신앙적 담론으로 재구성하는 사례이다. 이는 국제정치학적으로 한 민족이 겪은 구조적 제약과 갈등을 문화적·종교적 내러티브를 통해 정당화하고, 동시에 새로운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전략으로 분석될 수 있다.
셋째, 세계적 연대와 국제적 파급력이다. 세계적 종교지도자로 구성된 아벨유엔 설립과 천원궁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연대 활동은 국제 제도와 신앙을 결합한 실례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은 국가 중심의 권력 논리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평화와 협력을 촉진하며, 종교적 가치와 도덕적 권위가 글로벌 정치와 국제질서 속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도이다. 즉, 천원궁과 아벨유엔을 중심으로 한 이 연대는 국제사회에서 종교와 신앙이 세계 평화와 협력에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 실천의 장을 마련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천지인참부모의 활동과 신통일세계 구축 노력은 사회학적·국제정치학적, 두 측면에서 모두 이해될 수 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는 한민족의 집합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종교적 권위와 문화적 규범을 제도화하는 과정이며,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는 한반도와 세계 속에서 지정학적 위치와 종교적 영향력을 활용하여 ‘섭리적 중심성’을 구축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는 종교 서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민족의 사회적 정체성과 국제적 위상을 동시에 설명하는 복합적 내러티브로 읽을 수 있다. 축복결혼, 천원궁, 아벨유엔, 천일국 등은 모두 상징적·실질적 제도와 활동을 통해 한 민족과 세계의 관계를 재구성하고, 미래 사회와 국제 질서에서 한국과 한민족이 수행할 역할을 시사한다.
오늘날 인도에서 태어나신 부처를 한국·중국·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과 전 세계의 불자들이 신앙과 수행의 중심으로 받들듯, 이스라엘에서 나신 예수를 국적을 초월해 유럽과 미국,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기독교 신자들이 절대적 믿음과 구원의 존재로 흠모하듯, 참부모 또한 한국에서 태어난 인물로서 이미 당대에 전 세계 가정연합 신도들과 수많은 지지자로부터 깊은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민족 가운데 인류 구원의 뜻을 품은 인물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애써 도외시하거나 폄하할 이유는 없다. 그 진실은 언젠가 역사가 스스로 증언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지인 참부모의 섭리와 신통일세계 구축의 현실은 한민족 서사가 현실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장대한 서사극과 같다. 참부모가 걸어온 길은 수천 년의 시련과 고난을 넘어 마침내 한민족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당당히 드러내는 순간으로 이어진다.
이 여정은 단지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 사랑과 평화가 어우러진 살아 있는 증거이며, 한국이 세계 속에서 나아갈 길과 추구해야 할 정체성을 빛나는 등불처럼 밝혀준다. 이 서사를 깊이 있게 마주한다면, 누구나 과거의 무거운 그림자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한 용기와 신념을 되찾고, 자신도 작은 횃불 하나를 들고 서 있다는 감격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2025-10-17 11: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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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독생녀 담론과 한민족의 집단적 자각 [‘한민족 서사, 문화와 세계를 품은 이야기’]
◆한반도에서 피어난 여성 리더십의 의미를 탐구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비롯된 기독교 역사는 서구 세계를 넘어 전 지구적 문명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 역사적 궤적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좌절과 더불어 ‘재림의 약속’이라는 새로운 희망을 낳았다. 이후 기독교 신앙의 섭리는 유럽에서 가톨릭과 종교개혁, 청교도와 대각성운동을 거쳐 한국에 전해졌다.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자생적 수용과 평양 대부흥운동을 통해 민족의식과 결합했으며,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해방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신앙과 민족의 운명이 교차하는 장(場)을 형성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한반도로 국제사회의 관심과 개입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민족사의 전개뿐 아니라, 재림 메시아와 독생녀의 출현이라는 신앙적 서사와 맞물려 해석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사회학적·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어떤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해석할 때 하나의 관점으로 설명하다보면 단편적인 접근이 되기 십상이다. 여기서는 ‘집합적 정체성’, ‘성별 역할’, ‘신앙과 민족주의의 상호작용’이라는 3가지 층위를 설정해 살펴보고자 한다.
냉전과 분단의 신앙적 의미화
먼저, 선민의식과 집합적 정체성이다. 한민족이 스스로를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민족’으로 인식하는 것은 단순한 민족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오랜 수난과 분단의 경험 속에서 형성된 집합적 기억이다. 이러한 기억은 종교적 서사와 결합하며 ‘선민적 자의식’을 강화한다. 사회학적으로 집단 응집력을 높이는 장치이자, 미래 지향적 공동체 상상력을 창출하는 토대가 된다.
둘째는 성별과 종교적 역할의 전환이다. 독생녀 담론은 전통적 기독교 신앙이 남성 중심 구조를 지녀온 역사적 한계를 넘어선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여성은 민족운동과 신앙운동의 전면에 나섰고, 여성 지도자의 등장을 사회적으로 정당화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사회학적 맥락에서 볼 때, ‘독생녀’ 서사는 여성 종교 리더십을 제도화하는 기제로 기능하며, 성별에 따른 종교적 권위 배분 구조를 재편하는 의미를 가진다.
셋째, 신앙과 민족주의의 상호작용이다. 종교적 재림 신앙은 개인의 믿음을 넘어 민족의 집단적 기억과 맞닿는다. 예컨대 3·1운동과 평양 대부흥 운동은 서로 다른 사건이지만, 모두가 ‘민족적 구원’과 ‘신앙적 부흥’을 중첩시킨 경험이다. 한민족 서사 속에서 종교가 신앙을 뛰어넘어 집단적 실존의 문제, 곧 ‘누가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되는 사회적 구조를 보여준다.
국제정치학적 틀도 정체성(의식), 구조(체제), 행위(실천)로 나눠볼 수 있다. 여기서는 ‘지정학적 현실’ ‘역사적 사건과 신앙적 의미’ ‘국제적 확장과 외교적 함의’라는 3가지 맥락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래야 시간적·공간적 스케일과 정치·종교·국제관계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한반도의 지정학과 재림 담론이다. 한국은 동북아시아의 교차로에 위치해 역사적으로 강대국 간 패권 경쟁의 장이 돼 왔다. 국제정치학적으로 보면 ‘약소국의 생존 전략’이 반복되어야 할 구조였으나, 역설적으로 ‘세계적 중심으로 부상할 가능성’을 잉태한다. 재림 메시아와 독생녀가 한민족 가운데 등장한다는 신앙적 서사는 바로 지정학적 한계를 신학적으로 초월하는 상징적 장치로 읽을 수 있다.
둘째, 냉전과 분단체제 속의 종교적 의미이다. 한국전쟁과 분단은 국제정치학적으로 냉전질서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종교적 해석 속에서는 ‘재림을 맞이할 준비 과정’으로 의미화된다. 이는 국제정치적 비극을 신앙적 섭리의 일부로 전환시키는 ‘담론의 힘’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정치적 현실의 고통은 종교적 서사 속에서 ‘필연적 과정’으로 정당화되며, 민족적 희생은 보편적 구원 서사의 일부가 된다.
셋째, 세계적 파급력과 종교 외교이다. 독생녀 담론은 한민족 내부의 신앙 스토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한국전쟁에서 16개국이 참전한 역사적 경험, 냉전 이후 민주화와 세계화 속에서 한국 기독교가 남긴 영향력은 국제정치학적으로 ‘종교 외교(religious diplomacy)’로 이해될 수 있다. 재림 메시아와 독생녀 출현의 서사는 결국 한국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섭리적 연대’로 의미화하며, 한국의 국제적 정체성 형성에도 기여할 수 있다.
한국, 섭리의 중심에 서다
종합하면, 사회학적 관점에서 ‘독생녀 담론’은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고, 성별 권위 구조를 재편하며, 민족주의와 신앙의 결합을 심화시킨다. 국제정치학적으로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한계를 넘어선 ‘섭리적 중심성’을 부여하며, 냉전과 분단이라는 비극적 현실을 신앙적 희망으로 전환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한민족이 스스로를 ‘세계사의 무대에서 특별한 사명을 지닌 민족’으로 자리매김하는 집합적 내러티브를 형성한다. 독생녀 서사는 여성 리더십의 또다른 표현으로, 한국의 사회적 정체성과 국제적 위상을 동시에 설명하는 하나의 대서사이다. 더불어 21세기 한국이 세계 속에서 어떤 미래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묻는 상징적 이정표로도 기능한다.
2025-10-16 15: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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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한민족의 종교적 주체성 담론 [‘한민족 서사, 문화와 세계를 품은 이야기’]
◆평양 대부흥 운동, 한민족 신앙과 주체성을 강화하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서 출간한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는 한민족이 역사적·영적 경험과 기독교 부흥 운동을 통해 신앙적 주체성과 민족적 각성을 이뤄 인류를 구원할 새인물 재림메시아와 독생녀를 맞이할 세계사적·종교적 기반을 형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한민족과 기독교의 역사적·종교적 서사는 문화적 상징과 권력 구조가 결합된 사회적·정치적 담론으로 읽을 수도 있다. 미국의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의 문화 해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서사는 한민족과 기독교 신앙을 의미와 상징의 체계로 구성해 사건과 인물, 종교적 경험에 내재한 문화적 의미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독생녀와 재림메시아, 어린양 혼인 잔치 등은 한민족의 역사적 운명과 신앙적 사명을 상징하는 문화적 텍스트로 기능한다. 이러한 상징은 한민족과 기독교 문명을 상호 연결하거나 재림과 구원이라는 종말론적 서사를 형성한다.
유대민족에서 기독교 문명으로
이 서사가 유대민족에서 기독교 문명으로 이어지는 섭리적 과정을 서술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초기 기독교의 실패를 강조하는데 왜 그럴까. 이는 유대민족이 섭리적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했고, 다시 올 재림메시아와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기반 마련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가 서구 문명 속에서 인간 중심적 제도와 권력에 매몰되며 본래의 섭리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서술은 서구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적 담론으로 읽힌다.
다른 한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오리엔탈리즘 시각에서는 서구 중심적 종교와 제도가 권력과 결탁하여 지배적 담론을 형성했음을 지적하며, 한민족과 한국 기독교가 세계사적 중심으로 설 수 있는 대안적 담론을 구축하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종교개혁과 청교도 운동을 통해 독생녀 탄생을 위한 기독교의 기반이 조성되었다고도 설명한다.
1543년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장 칼뱅(Jehan Cauvin)의 ‘기독교강요’와 1560~1660년 청교도 신앙 운동은 타락한 인간이 회개를 통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신념과 경건함의 실천을 강조하며, 미국 건국과 영적 기반 형성에 연결된다. 기어츠적 관점에서 이러한 역사적 사건과 신앙적 행위가 민족적·문화적 의미를 내포한 상징적 행위로 해석된다. 청교도 신앙과 미국 사회의 형성은 한국 한민족이 수용한 기독교와 연결되며, 신앙적 기대가 민족적 주체성과 결합되는 문화적 맥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제 없이 선교된 한국의 기독교
한국 기독교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부분도 있다. 한민족은 외부 선교사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조선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 이승훈과 김대건 신부의 사례, 그리고 서상륜과 이수정 등이 성서를 번역하고 신앙을 전파한 사례는 한민족의 주체적 종교 실천과 문화적 적응 능력을 보여준다. 기어츠적 관점에서 볼 때 문화적 텍스트가 민족적 경험과 신앙적 의미를 결합한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사이드적 관점에서는 한민족이 서구 선교 담론과 권력 구조 속에서 독자적 주체성을 확보하고, 세계사적 중심 위치를 주장하는 반권력적 담론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평양 대부흥 운동과 한민족의 오순절 성령 부흥 역시 사회적·문화적 각성 운동으로 해석된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소규모 부흥에서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중심의 대부흥으로 확산되며, 회개와 영적 갱신, 성령 체험을 강조하는 과정은 한민족이 스스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회적 행동을 조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길선주 목사의 새벽기도회와 사경회, 전국적 부흥 확산은 종교적 실천을 통한 사회적 연대와 민족적 각성을 상징하는데, 이는 기어츠적 해석에서 신앙 행위와 문화적 의미가 결합된 사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민족적 기대와 국제적 연계가 드러나는 부분을 살펴보자. 일본의 기독교 복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는 평양 대부흥 운동을 보고 하나님은 조선을 사랑하며, 군대와 군함보다 능력이 더 강한 성령을 보내주었다고 증거했다. 재림운동과 한국 기독교 성령 운동에 대한 관찰은 한민족이 세계사적 중심이 될 수 있는 역사적·종교적 정당성을 담론화한다. 사이드적 관점에서 이는 서구 중심적 기독교 권력과 문명 담론에 대항하여 한민족의 종교적·민족적 주체성을 세계사 속에서 서사화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새인물 탄생을 위한 신앙적 여정
종합하면, 한민족 서사는 한민족과 기독교의 역사적 사건과 신앙 경험을 문화적 상징과 권력 담론이 결합된 텍스트로 제시한다. 기어츠적 관점에서는 독생녀, 재림 메시아, 부흥 운동 등 모든 사건과 행위가 문화적 의미와 상징성을 담고 있는 텍스트로 해석되며, 사회적·종교적 공동체 정체성을 강화한다. 사이드적 관점에서는 서구 중심 기독교 문명의 실패와 권력 결탁을 비판하며, 한민족이 종말론적 사명을 수행할 세계사적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담론을 형성한다.
안토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구조화 이론 관점에서는 인류사회를 평화로 이끌 새인물 독생녀와 재림 메시아의 탄생을 향한 신앙적·사회적 여정이 문화적·제도적·역사적 구조와 개인 및 집단 행위의 지속적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한민족의 주체적 신앙 실천과 집단적 부흥 운동은 민족적·세계사적 정당성을 형성하는 사회적·정치학적 의미를 지닌 역사적 과정으로 이해된다.
2025-10-14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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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문화자본·문명충돌과 정체성의 재구성 [‘한민족 서사, 문화와 세계를 품은 이야기’]
◆문화와 정체성의 교차에서 독생녀가 태어나다
한민족의 종교와 사상은 오랜 세월 축적된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의 형태로 사회 전반에 스며든 집합적 정신의 표현이다. 프랑스의 대표적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관점에서 보면 한민족은 불교·유교·도교·기독교 등 서로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고 재해석해 왔다. 그 과정은 상징적 질서와 도덕적 권위를 축적해온 장구한 문화 실천의 역사였다.
삼국시대 이후 불교가 전래되며 마음의 수양과 깨달음을 중시한 정신문화가 확립되었고, 고려를 거치며 불교는 민중의 삶에 깊숙이 뿌리내렸다. 신라 말기 사상가 최치원(崔致遠)은 유교·불교·도교를 아우르는 유불선 통합사상을 제시하며, 사상적 통합을 통해 혼란한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다. ‘이(理)와 기(氣)가 서로 다른 두 근원으로 세계를 구성한다’는 그의 사상은 서로 다른 종교적 가치들을 ‘조화’라는 상징자본으로 전환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이후 한국 사회가 외래 사상을 흡수하고 내면화하는 정신적 토양이 됐다.
다종교적 전통속 민족 정체성 형성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유교는 국가의 중심 이념이 되었지만, 불교적 자비와 도가적 자연관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교를 토대로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던 대표적 성리학자 이황(李滉)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통해 인간 내면의 도덕성과 천리(天理)의 조화를 추구하며, ‘경(敬)’의 실천을 통해 하늘과 인간이 합일되는 삶을 설파했다. 그의 사상은 영적 수양의 체계, 곧 부르디외가 말한 정신적 문화자본의 전형이었다. 개인의 수양은 사회 전체의 상징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동력이었다.
시간이 흘러 조선 후기, 사회적 불평등과 현실적 모순을 비판하며 등장한 유형원(柳馨遠)과 이익(李瀷) 같은 실학자들은 부르디외적 의미에서 ‘전통적 상징자본’의 재배분을 시도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기존의 지배질서가 유지하던 ‘문화자본’을 민중의 삶 속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은 농민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균전론을 주장하며 사회 개혁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비슷한 시기의 실학자 이익은 경제적 합리성과 도덕의 조화를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두 사람의 사상은 기존의 유교 질서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윤리’로 재구성한 시도였다. 한민족의 사상은 언제나 체제 내의 균열을 통해 더 넓은 포용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작동해왔다.
그런 흐름 속에서 이름은 덜 알려졌지만, 동학(東學)의 초기 사상가 조한준(趙漢俊)은 실천적 차원에서 ‘공동체적 덕성’을 드러낸 사례다. 그는 사신들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자신의 재산을 들여 다리를 놓았다. 이는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공동체의 결속과 도덕적 상징자본을 구축한 행위다. 개인의 실천이 사회 전체의 신뢰와 연대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조한준의 행위는 한국적 문화자본이 지닌 ‘관계적 윤리’의 핵심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근대에 이르러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서양의 기독교와 근대적 사상이 유입되며 한민족은 다시금 문명 간 경계에 서게 된다.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 이론은 이 시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한민족은 동아시아 유교문명, 불교문명, 그리고 서구 기독교 문명이 만나는 교차점에 위치하며, 그 충돌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해야 했다. 한국의 대응은 기존의 정신자산을 바탕으로 한 ‘융합적 재구성’이었다.
민족종교를 통한 평등·영성의 가치 확립
이러한 문명적 충돌의 지점에서 등장한 동학의 3대 교주이자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사람인 손병희(孫秉熙)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서학과 동학의 대립을 초월한 새로운 ‘민족적 영성’을 제시한 것이다. 그가 주창한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인간 안에 깃든 하늘의 본성을 강조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선언했다. 헌팅턴의 관점에서 보면 동서 문명 간 충돌의 극복, 즉 문명의 변증법적 통합을 의미한다. 동시에 부르디외적 관점에서는 억눌린 민중이 스스로의 상징자본을 창출한 혁신적 사례로 해석된다. 손병희의 사상은 신분제적 위계를 거부하고, 영적 평등을 사회적 실천으로 확장한 정체성의 재구성 운동이었다.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얽혀 형성된 한민족의 정신세계는,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 말한 ‘정체성 담론(identity discourse)’의 대표적 예시라 할 수 있다. 홀은 정체성을 끊임없이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서사’로 보았다. 불교의 화쟁사상, 유교의 경(敬)사상, 실학의 애민정신, 천도교의 인내천까지, 모든 물줄기는 세대를 거치며 서로를 흡수하고 변형시킨 ‘살아 있는 정체성의 흐름’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독생녀 사상은 서구 기독교의 ‘독생자’ 개념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다. 한민족이 오랜 세월 축적해온 정신적 자본 위에 세워진 문화적 재구성의 산물이다. 한국적 종교성과 서구 신학이 만나는 경계에서 탄생한 새로운 상징질서로, 한민족의 정체성이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순간을 상징한다.
이 정신적 흐름은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에 의해 세계적 상징성으로 승화됐다. 그는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에서 하늘을 모시고 살아온 한민족이 장차 세계를 밝힐 영적 중심이 될 것이라 노래했다. 이 예언은 한민족이 지닌 상징자본이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타고르, 예언으로 한민족 사명 일깨워
한민족의 정신사는 부르디외, 헌팅턴, 홀의 세 이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부르디외의 문화 자본은 이황과 최치원의 사상, 그리고 손병희의 영성 속에서 전승되었고,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은 외래 문명과의 긴장 속에서 이익과 유형원의 사상이 발전하는 과정을 설명해준다. 스튜어트 홀의 정체성 담론은 조한준의 실천과 손병희의 사상을 통해 ‘삶 속에서 구성되는 정체성’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한민족의 사상적 전통과 독생녀 사상은 시대와 문명, 인간과 하늘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변형된 집합적 문화자본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충돌 속에서 화합을 만들어내고, 전통 속에서 새로움을 창조하며, 종교를 넘어 문명과 정체성의 지평을 확장시켜온 한민족 정신의 진화된 형태였다.
2025-10-13 10:5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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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한민족의 우수한 창조성과 심정문화 [‘한민족 서사, 문화와 세계를 품은 이야기’]
◆애민정신·창조성으로 문화 혁신을 이루다
한민족은 하늘부모님이 선택한 민족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한글 창제, 과학기술의 발전, 도자기 예술 등 독창적 문화를 이루었다. 이는 하늘 공경과 백성 사랑, 나라 사랑의 심정문화로 이어져 오늘날 한국인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뿌리가 되고 있다.
한글 창제와 애민정신
한민족의 우수한 창조성과 심정문화는 현대 민족주의 연구의 대표주자였던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 1936~2015)의 ‘상상의 공동체’ 틀에서 보면,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유지되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미국 정치학자이기도 한 앤더슨은 민족을 단지 혈연이나 지리적 결합으로 보지 않고, 문화와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는 ‘상상된 공동체’로 정의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민족의 문화적 성취는 기술적·예술적 발전을 넘어 구성원들이 서로를 인식하고 동일한 공동체의 일원임을 상상하게 만드는 중요한 매개체로 기능했다.
특히 세종대왕이 1443년에 창제한 한글은 과학적 구조와 높은 활용성을 가진 문자 체계일 뿐 아니라, 그 창제 동기와 과정에서 나타난 애민정신이 한민족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세종대왕은 문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누구나 쉽게 익히고 쓸 수 있는 한글을 개발했다. 그는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한글의 사용은 모두 백성을 이롭게 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언어를 통한 공동체적 상상과 민족적 정체성 형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자, 민중과 국가, 하늘과의 관계를 모두 포함하는 한민족의 심정문화가 구현된 사건이라 평할 수 있다.
한글 창제와 더불어 한민족은 천문학과 인쇄술, 농업기술, 시간 측정 기구, 도자기 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조성을 발휘하며 공동체의 실질적 삶을 개선하고 국가적 권위를 강화했다. 신라시대 첨성대와 조선시대 혼천의(渾天儀), 앙부일구(仰釜日晷), 자격루(自擊漏) 등 천문과 시간 측정 기구들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왔고, 더 나아가 하늘을 관측하고 제사를 지내며 천손 문화로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장치가 됐다. 이러한 기술적 성취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우리가 특별한 민족이며 세상의 주인이라는’ 상상을 가능하게 했다. 이와함께 국가 통치와 사회 질서를 강화하는 정치적·사회적 기능까지도 확립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인쇄술과 농업기술의 발전 역시 상상의 공동체 형성에 기여했다. 세계적으로 앞서간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통해 1377년에는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제작됐고, 조선의 농사직설(農事直說)과 측우기, 수표 등 수준 높은 과학기술이 잇따라 선보였다. 이는 지식을 전달하는 기술적 도구를 뛰어넘어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통된 정보와 경험을 공유하도록 하여 민족적 결속을 강화하는 매개체가 됐던 것이다. 특히 금속활자 인쇄술은 서양의 구텐베르크보다 약 78년이나 앞서 불교 경전과 지식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한민족의 문화적 우수성을 국제적으로 입증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정치적·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 마련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문화적 성취는 국제관계에서 국가의 소프트 파워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민족의 예술적 성취인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역시 공동체의 상상과 심정문화를 반영한다. 맑고 푸른 색감의 청자와 단아하고 절제된 백자의 미학은 구성원들에게 공동체적 정체성과 미적 기준을 상징적으로 전달하며, 하늘을 공경하고(애천), 백성을 사랑하며(애인), 나라를 위하는(애국) 심정문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문화적 상징은 민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와 정신’을 인식하게 만들고, 상상의 공동체로서 한민족의 결속을 강화하기에 이른다.
예술과 미학을 통한 심정문화
정치학적·국제관계학적 의미에서 볼 때, 한민족의 창조성과 심정문화는 국가 정체성과 권위의 강화, 국제사회에서의 소프트 파워 확보 등과 밀접히 연결된다. 한민족이 개발한 문자, 기술, 예술, 과학적 성취는 국내 구성원에게 공동체적 정체성을 내재화시키는 동시에, 외부 세계에 한민족의 우수성과 문명적 수준을 보여주는 전략적 자산이 됐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류(K-pop, 드라마, 전통문화)와 IT·반도체 산업 등은 단지 경제적·문화적 성과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며, 한민족 상상의 공동체가 현대적 형태로 재현된 상징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를 통해 한민족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문화적·정치적 자산을 확보함과 아울러 국제적 무대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2025-10-09 15:3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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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효정의 생활 문화와 저항의 역사 [‘한민족 서사, 문화와 세계를 품은 이야기’]
◆전통과 타자의 시선 속에서 서사를 재해석하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의 한 줄기는 한민족이 하늘부모님을 모시는 신앙을 바탕으로 효정·순결·정절의 윤리와 가족 사랑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온 전통을 개관한다. 예컨대 효는 부모 공경을 넘어 생명의 근원을 공경하는 인륜의 근본으로서 사회와 국가를 지탱하는 정신이 되었고, 시묘살이·제사·효행담(황희, 심청 등)과 여성의 정절·자녀교육(신사임당, 한석봉의 모친)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덕목은 부부·가정·자녀양육의 문화로 확장되어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했으며, 백의민족의 정결성과 평화애호의 미감으로 표상되었다. 동시에 한민족은 외침 앞에서 공의로운 한마음으로 자주성을 지키며 을지문덕·광개토대왕·강감찬·이순신과 승병·의병의 항전으로 국가를 보전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이회영·안중근·유관순·안창호·신채호 등 독립운동으로 그 정신을 계승했다. 주목할 점은 외세와 맞서 자기를 지켜 온 저항 서사가 이 모든 층위에 깊이 스며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한민족 서사의 할 줄기를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전통적 권위’ 개념과 팔레스타인 출신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개념을 통해 새롭게 조망하고자 한다.
효정과 순결, 정절의 재전유
한민족의 전통은 내부적으로 사회적 결속과 정당성을 낳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고(베버),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 담론 속에서 타자화·통제되거나, 한 번 비유된 것이 다른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로 활용되는 재전유(再轉喩)의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즉, 가족과 공동체를 지탱해 온 전통적 가치, 곧 효의 서사에서 자녀의 봉양과 조상 제사는 사회질서의 기반이자 베버가 말한 전통적 권위의 전형이다. 규범이 반복·재현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회는 자발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정절의 서사는 여성 서사와 맞닿는다. 신사임당의 모범적 가정생활, 춘향의 절개, 심청의 효행은 개인의 미덕을 넘어 가문의 명예와 사회적 신뢰를 보존하는 장치였다. 베버적 관점에서 이는 성 역할을 고착화하는 동시에 공동체를 안정시키는 권위로 기능한다.
군사적 저항은 전통의 언어를 통해 정당화되었다.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영웅 을지문덕·이순신·광개토대왕은 ‘하늘의 뜻’과 ‘조상의 유훈’을 실현한 존재로 기억되고, 사명대사·곽재우 등 승병과 의병의 등장은 국가 제도보다 조상과 하늘의 권위에서 힘을 얻었다. 근대 이전 제도가 취약할 때 전통은 공동체 결속과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이러한 전통이 외부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백의(白衣) 착용 금지는 단순한 행정명령이 아니었다. ‘후진적 습속’으로 규정된 백의 전통을 교정한다는 명분 아래 지배를 정당화하는 담론이 작동한 것이다. 서구의 시선 속에서 동양은 고정된 이미지로 소비되고, 그 과정에서 전통은 축소·재편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민족은 이에 수동적으로 머물지 않았다. 백의를 더욱 고수하거나 의병으로 봉기한 행위는 외부의 규정에 대한 저항이자 자기 문화를 재정의하는 시도였다. 이는 사이드가 말한 재전유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한국의 효문화를 인류 보편의 자산으로 높이 평가한 사례는 외부 시선의 전환을 보여주며, 자기 문화를 세계 담론 속에 재배치하는 전략으로 읽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이회영·안중근·유관순·신채호로 상징되는 독립운동 또한 베버적으로 보면 하늘부모님을 모신 효·정절·공의의 규범을 전통적 권위로 호명해 집단행동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독립이라는 목표를 향한 가치합리적 행위로 전화한 사례다. 예컨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같은 도덕적 정당화, 유관순의 희생의례화, 이회영의 헌신과 신흥무관학교라는 카리스마의 생성 등이 그것이다. 동시에 사이드의 관점에서 이는 식민 권력이 부여한 타자화에 맞선 대항 담론의 구축이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표상의 주도권을 내부로 회수해 한국사의 주체성을 재서술했고, 독립운동은 백의·제사·공의의 언어를 재전유해 제국의 규범을 전복적으로 자기화했다.
오늘날 전통은 문화상품과 국가 브랜드의 형태로 세계에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전통이 단순화되어 ‘흥미로운 이국성’으로만 소비되거나 내부 행위자가 외부 시선을 의식해 자기 문화를 재포장하는 ‘자기 오리엔탈리즘’이 나타날 위험도 존재한다. 전통을 수출하면서 그 의미가 축소되거나 균질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민 전통은 강력한 국가 자산이다
그럼에도 국가의 전통은 여전히 강력한 자산이다. 특히 한민족의 선민 의식과 효와 정절, 역사적 저항의 서사는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는 동시에 외세에 맞서 공동체를 지켜 낸 힘의 원천이었다. 오늘날에도 그것은 한국이 세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설명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소프트 파워로 기능한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를 베버의 전통적 권위 개념으로 보면 규범을 내면화해 사회적 안정과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질서의 기제였고,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개념으로 보면 저항과 재전유의 수단으로 활용된 서사였다. 궁극적으로 한민족 서사는 내부의 결속과 외부의 시선을 아우르며, 전통이 권력과 문화, 저항과 재창조의 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2025-10-02 11: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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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전통·문화유산과 민족 정체성 [‘한민족 서사, 문화와 세계를 품은 이야기’]
◆소프트 파워와 문화 의미체계로 한민족을 다시 읽다
한민족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늘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열망이 살아 있었다. 불교의 미륵신앙, 조선 후기의 예언서 정감록과 격암유록, 그리고 동학과 천도교로 이어진 사상은 시대마다 고난을 견디게 한 힘이자 민족 정체성의 뿌리가 됐다. 이러한 전통과 문화유산은 한민족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미국 정치학자 조셉 나이(Joseph Nye, 2004)의 소프트 파워 개념,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 1912)의 집합의식 개념,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 1973)의 문화 의미체계의 개념을 이론적 틀로 삼아 한민족 전통·문화유산을 들여다보면 어떠한 함의를 도출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의 전통·문화유산과 민족 정체성 부분을 사회학적·정치학적 관점에서 분석함으로써 한민족의 정체성 형성과 사회 통합, 나아가 국제사회와의 소통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나이의 소프트 파워란 강제력이 아닌 매력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는 힘으로, 이 개념을 적용하면 한민족의 전통과 문화유산, 특히 미륵신앙과 동학·천도교의 평화·정의 사상은 한국 사회가 세계에 제시할 수 있는 매력적 가치로 자리매김함을 알 수 있다.
19세기 동학과 천도교가 보여준 평등, 보국안민, 인내천 사상은 인간 존엄과 평등, 사회 정의를 강조하며 농민운동과 항일운동으로 이어져 국내적으로 사회개혁 운동을 촉발했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류 보편적 가치와 연결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었다. 따라서 한민족의 문화유산은 국가 이미지와 외교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소프트 파워의 원천으로 해석할 수 있다.
뒤르켐의 ‘집합의식’ 관점에서도 한민족의 전통·문화유산과 민족 정체성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민족의식은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도덕적·정신적 토대를 의미한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에서 확인되는 미륵불 신앙은 언젠가 미래에 부처가 다시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민중에게 고난 속 희망을 준 종교적 전통이다. 또 정감록·격암유록 등 조선 후기의 예언서는 불의한 세상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담아 민중에게 연대감을 부여했다. 동학과 천도교의 교리 역시 사회적 혼란기마다 민족을 하나로 묶는 상징적 자원이 되었다. 무엇보다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모든 인간이 하늘을 모시는 존재라는 집단적 신념을 제공하여 사회 통합을 촉진했다. 이러한 신앙적 전통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공동체적 연대감을 강화하는 집합의식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문화인류학자 기어츠(1973)의 ‘문화 의미체계’ 개념을 적용하면, 한민족의 전통과 신앙은 상징적 언어로서 민족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 즉, 기어츠는 문화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상징적 체계라고 보았다. 한민족 전통에서 나타나는 미륵불, 성군(聖君, 메시아적 군주)의 예언, 동학의 시천주와 천도교의 인내천은 종교적 상징을 초월해 민족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기호체계다.
예를 들어, 미륵불은 고난 속에서 미래 구원의 희망을 상징했고, 정감록은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민중의 해석틀이 되었다. 동학과 천도교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하며, 한민족의 역사적 경험을 재해석하고 미래를 기대하는 문화적 언어를 형성했다. 따라서 이들 전통은 상징적 의미체계로서 민족 정체성을 표현하고 세대 간 전승되는 해석의 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한민족의 전통과 문화유산은 소프트 파워 관점에서 국가의 매력 자산이자 국제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힘으로 작동하고, 집합의식 관점에서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민족적 연대를 강화하는 기제로 기능한다. 또 문화 의미체계 관점에서는 한민족이 세계와 자신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상징적 언어로 이해됨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세 학자의 관점이 서로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전통과 신앙은 사회적 결속을 넘어 민족이 세계에 발신할 수 있는 힘이 되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며, 나아가 그 자체로 의미와 가치를 전달하는 상징적 언어가 된다. 특히 한민족의 전통과 문화유산은 과거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한국 사회가 세계와 소통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필요한 다층적 자산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전통·문화유산은 ‘국가 전략(소프트 파워)’ ‘사회 통합(집합의식)’ ‘문화 해석(상징체계)’이라는 세 차원을 아우르는 핵심 자원이 된다. 이러한 사회학적·정치학적 해석은 한민족이 지닌 독특한 서사가 오늘날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미래지향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한국 사회가 위기 속에서도 연대하고, 세계와 소통하며,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은 한민족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민족의 신앙이 오늘날 역사 속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빛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25-10-01 09:5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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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민족의 사회 구조와 변화 [‘한민족 서사, 문화와 세계를 품은 이야기’]
◆선민적 정체성의 사회구조를 성찰하다
한민족은 왜 특별한 민족일까.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쓰여졌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사회 구조와 공동체 정신을 살펴보면, 선민이라는 말은 한민족의 역사적 정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임을 알 수 있다. 이번 연재는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에 대한 다양한 시선, 특히 사회학과 정치학적 시각을 교차하며 한민족의 길을 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독특한 사회 구조와 문화를 형성하며, ‘선민’으로서의 특성을 보여왔다. 고대부터 한민족은 하늘부모님, 즉 인류의 부모와 같은 존재를 신앙의 중심에 두었고, 이를 기반으로 가족과 씨족 중심의 공동체적 질서를 발전시켰다. 초기 국가인 단군조선에서부터 왕과 신하, 일반 백성 간의 역할과 책임이 명확히 구분되었으며, 이는 사회적 통합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핵심 기제로 작용했다.
하늘부모님 신앙과 공동체적 질서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초기 공동체 구조는 기능주의적 측면에서 사회 질서와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각 개인이 공동체와 가족 내 역할을 수행하며, 서로의 책임을 공유하는 구조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사회적 연대감(solidarity)을 강화하고, 외부 위협이나 내부 갈등에도 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신라의 가배와 같은 제천 행사와 의식은 이러한 사회 구조의 통합 기능을 보여주는 사례다. 제천 의식은 종교 행사에 한정되지 않고, 정치 권력과 결합하여 구성원 간 결속을 강화하고 공동체적 규범을 재확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오늘날 사회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자본’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으며, 공동체 구성원의 상호 신뢰와 협력, 규범 준수에 해당한다.
한민족은 또한 백의민족이라는 별칭에서 드러나듯 평화와 도덕을 중시하는 민족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특성은 전쟁과 외세 침략, 내부 혼란 속에서도 사회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윤리적 장치로 작동했다. 예를 들어 16세기 임진왜란과 20세기 일제강점기 동안 지역 공동체와 가족 중심의 네트워크는 민중의 생존과 저항을 가능하게 했으며, 현대 사회학에서 말하는 ‘위기 대응을 통한 공동체 유지’ 사례로 평가된다.
여성신화와 샤먼 전통 또한 중요한 사회학적 의미를 가진다. 여성 중심 신화나 샤먼의 권한은 공동체 내에서 다양한 역할과 의사결정 참여를 가능하게 하여 사회 구조의 유연성을 확보케 했다. 실제로 고려시대 무속과 도교적 의례에서 여성과 샤먼의 역할은 마을 공동체에서 갈등 조정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중세와 근세로 들어서면서 한민족은 중앙집권적 국가 구조가 강화되고 유교적 질서와 계급 체계가 자리 잡았지만, 하늘부모님 신앙과 공동체 중심 전통은 여전히 사회적 통합의 기반으로 남았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향촌 사회에서는 유교적 관료 체계와 지역 공동체의 상호 협력 구조가 공존하며, 공동체의 규범과 윤리 체계가 일상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통합되어 있었다. 이는 사회학적으로 ‘이중 구조’라고 불릴 수 있으며, 중앙집권적 정치권력과 지역사회 자율성이 상호 보완하는 형태로 작동했다.
정치와 국제 사회에서의 확장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전통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사례 속에서도 이어진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지역사회와 가족 중심의 상호부조(mutual aid)와 자발적 협력은 민간 차원의 금융 지원과 생계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주민 자치회, 지역 의료 협력, 자원봉사 네트워크 등에서 공동체 정신과 협력이 발휘되며 사회 안전망을 보완했다. 이는 고대와 근세 한민족 공동체의 협력 구조가 현대 사회에서도 지속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정치적 측면에서도 한민족의 공동체적 전통은 사회적 결속과 질서를 유지하는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지방자치제와 시민 참여 운동, 현대 사회에서의 NGO 활동은 지역 사회 내 자율성과 협력적 의사결정을 기반으로 발전했다. 이는 한민족의 역사적 경험이 단순히 문화적 유산에 그치지 않고, 현대 민주주의 참여와 정치적 책임 수행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시사한다.
국제적 관점에서도 한민족의 사회 구조와 협력 정신은 한국의 글로벌 입지와 연결된다. 다국적 기업, 국제 협력 프로젝트, 개발 원조 활동 등에서 나타나는 집단적 의사결정과 상호 책임 의식은 역사적 공동체 정신과 연결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기업의 해외 프로젝트에서 팀 단위 협력과 의사결정 방식은 전통적인 씨족·마을 중심 공동체에서 길러진 상호 신뢰와 협력의 문화와 유사한 구조를 보여준다.
한편, 한민족의 선민적 특성은 종교적·문화적 관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늘부모 신앙과 공동체적 전통이 결합되어 위기 상황에서도 질서와 협력, 공동체적 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도전, 예컨대 개인주의 확산, 지역 공동체 약화, 국제적 경쟁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한민족의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적응 능력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선택된 선민으로서의 특성을 보여준다. 위기 속에서도 질서와 협력, 공동체적 가치를 지켜온 한민족의 경험은 오늘의 한국 사회가 국제사회에서 직면한 도전과 기회를 이해하는 통찰을 제공한다.
2025-09-29 11: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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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끝> 참부모를 모시기 위한 신통일 세계 개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그 선택받은 여정]
◆참부모와 천일국, 인류 평화 세계의 닻 올리다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 천성산(장락산) 자락에는 두 개의 흰색 돔형 건축물이 보인다. 청평호를 바라보는 이 건물은 천정궁(天正宮,위)과 올해 완공된 천원궁(天苑宮)이다. 이들 건축물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 하늘부모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건립했는데, 로마 바티칸 교황청처럼 박물관 기능도 갖추고 있다. 송산리 일대 2644만㎡ 부지에는 청소년수련원, 종합체육관, 국제병원, 신학대학원, 중·고교, 사무빌딩, 실버타운, 교회 등 가정연합 관련 시설이 들어서 ‘천원 단지’ 또는 ‘통일교 타운’으로 불린다.
천원궁과 새창조시대의 출발점
천원궁은 거룩한 성소이자 인류 평화와 지상천국 실현의 출발점이다. 건물 안에는 하늘부모님이 거하시는 천일성전,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생애와 사상을 보여주는 전시관, 교육시설, 예술·문화관 등이 있어 마음을 정화하고 세계평화 실현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르네상스 양식의 정갈한 석조 건물은 고전적 아름다움과 미래 지향적 메시지를 동시에 담고 있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에 따르면 천원궁 입궁식을 통해 하늘부모님이 지상에 현현하시고, 참부모와 함께 인류를 지도하며 새로운 천일국 시대가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천일국은 하늘부모님의 이상이 지상에서 구현되는 통치와 평화의 세계를 뜻한다. 하늘부모님은 모든 인류가 국가, 인종, 종교, 문화의 장벽 없이 한 가족으로 살아가길 바라셨다. 이를 위해 전 세계 축복가정은 신종족메시아(천지인 참부모의 대리자)로서 하늘부모님의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참가정과 평화운동을 통해 천일국을 실현하는 모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한민족은 하늘부모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선택된 민족이며, 한국은 참부모가 탄생한 나라이다. 한국은 남북 통일을 이루고 신통일한국(하늘부모님 중심으로 치리되는 나라)과 세계 평화의 중심으로 우뚝 서야 한다. 천원단지의 이상공동체는 이러한 평화와 사랑을 실현하는 기반이 된다.
천일국 실현, 축복가정이 앞장서다
천원궁은 6000년 인류 역사의 새 창조 시대에 참부모께서 하늘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직접 건축하고 봉헌한 성전이다. 천일성전 입궁식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하늘부모님께서 창조 이전 인간과 함께 살고자 하신 꿈이 지상에서 실현되는 순간을 상징한다.
창조 이전 무형의 존재였던 하늘부모님이 참부모의 체를 통해 유형으로 현현하며, 이후 인간과 함께 지상세계를 직접 치리하게 된다. 참부모와 재창조된 인류가 하나 되어 지구촌에 항구적 지상천국을 이루며, 사후 천상천국에서도 함께 거하는 창조의 대 청사진이 펼쳐진다. 따라서 천원궁은 알파이자 오메가인 창조주 하늘부모님의 뜻이 성취되는 중심지이다.
하늘부모님이 바라신 세계는 참사랑을 중심으로 인류 서로가 마음이 통하는 심정문화의 세계다. 국가, 인종, 종교, 문화의 장벽 없이 모두가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며 기쁨을 나누는 세계이다. 즉, ‘인류 한 가족’의 이상은 전쟁과 갈등 없는 초인종, 초민족, 초국가로 이루어진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을 포함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전 세계 축복가정은 하늘부모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가정마다 신종족메시아로서 종족과 나라를 이끄는 모델 가정, 즉 천보가정(天寶家庭)이 되어야 하며,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참가정의 이상을 구현하고 천일국 실체화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천일국의 실체화는 아시아·태평양 문명을 중심으로 한 문명사관의 핵심이며, 하늘부모님이 선민으로 택한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역사적 필연이다. 전 세계 축복가정과 한민족을 통해 실체 천일국은 ‘하늘부모님 아래 인류 한 가족’ 운동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한반도와 신통일세계 실현
참부모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정치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종교의 역할이 필요함을 보았다. 1945년 출범한 유엔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지만, 강대국 이해관계에 휘둘리며 본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했다. 이를 보완하고자 참부모는 2000년 유엔본부에서 새로운 구상을 제안했다. 국가 중심 유엔을 보완해 종교 지도자가 참여하는 아벨유엔을 창설하고, 판문점에 본부 설치와 국경 철폐를 선언하였다. 2007년 9월 23일, 전직 국가수반과 회원국 대표 1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아벨유엔 창설대회가 개최됐다.
2005년 참부모는 천주평화연합(UPF)을 창립하여 전 세계 평화세력 간 연대를 강화했다. 이러한 섭리적 과정 속에서 천원궁은 아벨유엔의 중심청 역할을 수행하며, 하늘부모님의 절대주권과 하나님 나라의 실체적 치리 시대가 시작되었다.
참부모는 1960년대부터 경기도 가평 청평호 일대에 천일국 공동체 모델을 구축했다. 참어머니 한학자 총재는 천원궁을 중심으로 천원단지를 확장하며, 청평을 이상공동체와 에덴동산 모델로 세워 나갔다. 천원단지는 하늘부모님의 참사랑을 받은 한민족이 중심이 되어 전 세계 인류가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이상공동체의 원형이 된다.
한민족은 역사 속에서 하늘부모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선택되고 준비된 민족이다. 고난 속에서도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착한 심성과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부모를 맞이할 기대를 만들어왔다. 한국은 참부모 탄생지로서 남북 통일을 이루고, 신통일한국에서 인류 복지와 평화를 위한 중심축이 된다.
장엄하고 흥겨운 새 시대의 출발
천원궁과 한반도는 창조주 하늘부모님의 뜻이 성취되는 역사적 장소이다. 태평양 문명권의 중심인 한반도에서 하늘부모님의 조국 광복과 평화세계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는 것은 필연이다. 6000년의 기다림 끝에 맞이한 독생녀와 천지인참부모를 통해 인류는 하늘부모님과 함께 지상에서 창조 본연의 새로운 시대, 에덴동산의 이상을 실현하게 된 것이다.
인류가 체감하지는 못하지만, 하늘에서는 이미 천군천사가 나팔을 불며 영광의 찬미를 드리고, 무수한 별빛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 우주 전체가 환희로 진동하며, 땅에서는 북과 장구, 꽹과리와 나팔 소리가 어우러져 하늘을 향한 거대한 화답이 울려 퍼진다. 남녀노소가 손을 맞잡고 춤추며 노래하는 대축제의 장이 펼쳐지고, 하늘과 땅이 함께 어우러진 기쁨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바야흐로 하늘부모님이 꿈꾸신 소망과 기쁨의 새 시대가 인류 앞에 닻을 올렸다. 천상과 지상이 하나 되어 연주하는 거룩한 교향곡은 영원히 이 땅에 울려 퍼질 것이다. 결국 천원궁과 한반도는 창조주 하늘부모님의 뜻이 완성되는 종착점이자, 인류 역사의 새 출발을 알리는 거룩한 무대이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는 단순한 신학적 기록이 아니다.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구현해야 할 위대한 희망의 대서사이며, 그 완성은 바로 우리 세대의 손에 달려 있다.
2025-09-25 12: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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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참부모를 모시기 위한 섭리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그 선택받은 여정]
◆참부모와 천일국이 인류 평화 시대를 열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하늘부모님)의 창조 목적은 아담과 해와가 성숙하여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결혼하고, 이를 통해 인류의 참된 부모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류의 첫 조상이 타락함으로써 이 뜻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이후 하나님은 구원섭리를 전개하시며 다시 인류의 참된 부모, 곧 ‘참부모’를 세우고자 하신다고 ‘한민족 선민 대사서시’는 강조한다.
독생녀 탄생과 참부모 성혼
성경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어린양 혼인 잔치’는 그 구원의 완성을 상징한다. 독생자와 독생녀가 만나 하나님 중심한 가정을 세우고, 이를 통해 참부모가 현현하며, 온 인류가 참된 세상을 향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자리라는 의미이다. 2000년 전 예수는 독생자로 오셨으나, 당시 중심인물과 민족이 그를 받아들이지 못해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다시 인류 구원의 사명을 가진 독생녀를 보내기 위한 섭리를 전개하셨고, 준비된 ‘선민’으로 한민족을 세우셨다는 것이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의 주장이다.
1943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난 한학자 총재는 이러한 섭리적 맥락 속에서 참된 어머니이자 ‘독생녀’로 의미를 갖게 된다. 그의 가계에는 독실한 신앙 전통과 신령한 계시가 있었으며, 이는 참어머니 탄생의 배경이 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곧 전쟁으로 비화됐다. 북한의 6.25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내부적으로 내전이었으나, 외부적으로는 냉전 체제 속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충돌이었고, 유엔 16개국이 참전하는 국제전 성격이 되었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는 이를 두고 하나님이 독생녀를 보호하기 위해 국제사회가 개입하게 됐다는 종교적 해석을 내놓는다.
한 총재는 외할머니와 모친 홍순애 대모의 신앙적 전통 속에서 성장하며, 스스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전쟁의 고난과 피란 생활 속에서도 절대 신앙을 지켰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믿음을 토대로 신앙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1959년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하늘의 신부’로 선택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훗날 어린양 혼인 잔치의 신부로 서는 준비 과정으로 해석된다.
1960년 문선명 총재와 한학자 총재는 성혼식을 거행했다. 이 성혼은 요한계시록의 ‘어린양 혼인 잔치’가 성취된 것으로 이해되며,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참부모’가 현현한 사건으로 강조된다. 또한, 성혼식은 신·구약 섭리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성약시대를 여는 출발점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창조 이상인 ‘참부모 이상’이 땅 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는 설명한다.
천일국 건설로 인류 평화의 길을 열다
참부모는 이후 전 인류를 대상으로 인류를 위한 ‘축복결혼’을 주관했다. 이는 인류를 하나님의 혈통으로 전환시키는 상징적 의식으로, 인종·종교·국가의 장벽을 넘어서는 보편적 구원의 길로 제시된다. 1961년 36가정(쌍) 축복식을 시작으로 수백만, 수천 쌍이 참여한 국제 합동축복결혼이 이어졌고, 인류를 한 가족으로 묶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신학적 이해는 역사적 현실과 연결된다. 1970년대 이후 참부모는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선교와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1974년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 1976년 뉴욕 양키스타디움, 워싱턴 모뉴먼트 등 그 큰 공간를 가득 메우는 기념비적인 대회를 잇따라 거행하고, 공산주의 종언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를 기반으로 천지인 참부모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선교와 구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천주사적인 승리의 기틀을 견고히 구축한 참부모는 세계 평화의 가장 큰 위협을 ‘신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로 보고, 한국과 일본, 미국을 중심으로 승공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 민주 진영을 결집하는 데 주력했다.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 과격 분자들에게 앙심을 사기도 했으나, 세계 가인형 대표인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사탄세계의 재림주형 인물로 불린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나 진정한 사랑의 힘으로 화해의 물꼬를 텄다. 이러한 행보는 단순한 종교 활동을 넘어 세계사의 전환점에서 평화의 길을 연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된다.
2000년대 들어 참부모는 ‘천일국(天一國)’ 건설을 선포하며 하나님 왕권 즉위식, 천정궁(天正宮) 입궁, 세계적 축복대회 등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인류 한 가족 비전을 제시했다. 여기서 천일국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서 사용하는 핵심 용어로, 가정연합은 인류 역사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 중심의 한 ‘인류 한 가족 공동체’ 실현이라고 본다. 따라서 천일국은 그 최종 이상사회를 가리키는 말로, 더 이상 국경이나 종교, 인종의 장벽이 없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세워지는 세계를 뜻한다.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의 의미를 가진 천정궁(天正宮)도 같은 맥락에서 천일국의 상징적 중심지이자 출발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천일국 안착과 참부모 시대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에 따르면 2012년 참아버지의 성화(서거) 이후 참어머니는 유훈을 받들어 ‘중단 없는 전진’을 선언하고 천일국 안착을 위해 교육과 경전편찬, 장학사업, 평화상 제정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참어머니는 6000년 만에 온 초림독생녀로서 천일국을 개문하고, 하늘부모님의 이름과 뜻을 세상에 밝혔으며, 동시에 3대 경전 편찬과 천일국 헌법 제정으로 전통과 정통성을 확립하는 등 굵직한 일들을 시행했다. 이어 장학원과 평화사관학교를 통해 미래 지도자를 양성하며 참 가정 3대 권을 정착시켰고, 선학평화상을 제정해 참부모님의 평화사상을 세계적으로 확산했다. 선학평화상은 세계 평화와 인류 공동선에 기여한 인물을 기리는 한편, 한국이 제안하는 국제적 평화 가치를 제시하는 장이라는 데 의미가 크다.
참어머니와 독생녀 사명을 짊어진 한학자 총재는 이렇듯 다양한 평화사업에 매진하며 모래폭풍 속에서 홀로 바늘 하나를 찾는 심정이라고 그 어려움을 호소한 바 있다. 한 총재는 극심한 고난의 자리에서 주요 대륙 7개국과 7개 종단에 걸친 복귀섭리를 완수하여 하늘부모님께 승리를 봉헌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참된 부모를 세우는 것이었고, 그 뜻은 한국 땅에서 독생녀와 재림메시아의 만남을 통해 성취되었으며, 이제 모든 인류가 축복결혼과 평화운동을 통해 ‘하늘부모님의 자녀’로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한민족은 이러한 섭리를 위해 선택된 선민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인류는 이제 ‘참부모 시대’라는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2025-09-24 11: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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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독생녀를 맞기 위한 계시와 신앙적 준비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그 선택받은 여정]
◆신인합일(神人合一)사상·구속사(救贖史) 한민족 역사에 나타나다
한민족이 위기 속에서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한민족을 선민으로 택하고 섭리하셨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의 신학적 해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신인합일(神人合一) 사상과 기독교의 영적 역사에서 상당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한민족 선민 사상과 신일합일의 개연성
신인합일 사상은 하나님과 인간, 하늘과 땅이 하나로 합일된다는 개념으로, 인간이 신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상태를 지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민족은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루기에 적합한 민족으로 간주될 수 있다. 특히 한민족이 지닌 고유한 문화와 전통, 예컨대 천손 사상이나 제천 의례 등은 신성과의 연결을 강조하는 요소로 해석될 수 있다.
또 기독교의 구속사(救贖史)에서는 하나님이 특정 민족을 통해 ‘죄와 죽음, 악으로부터 사람을 구해내는’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간다고 믿는다.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 구속의 역사가 완성돼 나간다. 이러한 구속사의 관점에서 한민족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로운 선민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을 지닌다.
한민족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일부는 신성한 사명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청주 한(韓) 씨가 배달의 백의겨레로서 하늘의 섭리를 이어받았다는 해석도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한민족이 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특별한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부여받았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에는 유대민족이 로마제국의 통치아래 신음하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기 예수가 강림했던 것과 같이, 한민족도 일제로부터 고통과 억압 속에서 헤맬 때 신령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독생녀와 재림메시아 탄생할 것이라는 내적 기대가 형성되었다고 소개돼 있다.
일본 제국은 1910년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 전국 주요 도시에 신사를 세웠고,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어 조선인 모두에게 신사참배를 사실상 의무화하자,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계는 큰 시련을 맞았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반발했으나, 많은 이들이 거부 과정에서 체포·투옥되거나 고문과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일부는 현실과 타협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은 산중이나 지하에 숨어살며 고난 속에 지내야했다.
일제강점기 종교 탄압과 신앙인들의 저항
이 과정에서 한국 기독교 내부에서는 독특한 신앙 공동체가 나타났다. 서쪽 지역에는 김성도의 성주교, 허호빈의 복중교, 박을용의 ‘여호와의 부인’과 같은 여성 지도자 중심의 신령공동체가 일어났고, 동쪽에는 백남주·이용도·김백문 등이 이끄는 남성 지도자 중심의 신령운동이 벌어졌다. 이들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부흥운동을 넘어 새로운 영적 계시와 재림에 대한 기대를 키워갔다. 특히 이들 신령공동체는 점차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신앙 형태로 전개돼 나갔다. 후대의 신앙 해석에 따르면 이는 훗날 ‘독생녀’라는 개념을 맞이하기 위한 영적 준비로 이해된다.
이러한 신앙적 흐름 속에서 평신도 홍순애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장로교 신앙을 바탕으로 성장했지만, 이후 신령공동체와 깊은 인연을 맺으며 재림 메시아를 준비하는 삶에 헌신했다. 그의 모친 조원모 역시 당대 사회 분위기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딸의 신앙생활을 지지하며 신령운동과의 교류를 독려한 인물로 기록된다.
홍순애는 이용도의 새예수교회와 김성도·허호빈의 신앙운동에 참여하며 기도와 회개, 헌신의 삶을 이어갔다. 그의 남편 한승운 또한 기독교 신앙에 깊이 헌신하며 이용도 목사와 교류했고, 새예수교회에서 교육 책임을 맡을 만큼 신앙적 신뢰를 얻었다. 홍순애와 한승운 두 사람은 누구도다도 두터운 신앙을 쌓았는데, 이는 후대 신앙적 해석에서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가정적 기반 조성으로 평가된다.
역사신학자 양순석 박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본질과 독생녀’에서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홍순애의 생애를 심화시켜 놓았다. 이에 따르면 홍순애는 여러 신앙 공동체를 거치며 재림 주를 기다리는 믿음을 더욱 깊게 다졌고, 마침내 독생녀의 탄생을 위한 영적 터전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1932년 19세의 홍순애는 평안북도 안주의 동안주 장로교회에서 이용도 목사의 아가서 강의를 들으며 강한 영적 각성을 체험했다. “재림이 임박했습니다. 주님께서 완전한 신부를 찾고 계십니다”라는 설교의 외침은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그날 밤 그는 어린 시절까지 되돌아가 모든 잘못을 회개하며 새로운 신앙의 길을 다짐했다.
이후 그는 신령운동가 황국주의 새예루살렘 순례단과 함께 100일간 도보 전도 여행을 떠나 깊은 은혜를 체험했으며, 안주로 돌아온 뒤에는 예수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을 이어갔다. 홍순애는 1934년 선도감(仙道監) 이호빈 목사의 주례로 한승운과 결혼했는데, 이호빈 목사는 두 사람이 낳게 될 자녀를 “오시는 주님과 연결된 아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홍순애는 이후 성주교와 복중교 등 다양한 신앙 공동체를 거치며 ‘재림주 대망 신앙’을 더욱 확고히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꿈속에서 재림주를 새색시의 모습으로 만나는 특별한 체험도 한다.
신령공동체와 독생녀 탄생을 위한 영적 준비
1942년에는 홍순애 자신도 하늘로부터 “장차 오실 주님의 신부가 될 딸을 품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곧 기적처럼 아기를 잉태하여 1943년 음력 1월 일 독생녀 한학자가 태어났다. 그러나 탄생 직후부터 시련이 따랐다. 사탄이 몇 번씩 나타나 “아이를 죽이라”고 계속 위협했던 것이다. 숱한 시달림 속에 지내던 어느날 꿈속에서 김성도 여사가 나타나 “이 아기는 주님의 딸이니 두려워 말라”는 말에 큰 위로를 받았고, 그때부터 더욱더 불굴의 신념으로 아기를 지켜냈다.
독생녀가 여섯 살이 되던 해, 또 다른 중요한 계시적 순간이 찾아왔다. 복중교 지도자 허호빈 여사가 어린 독생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하늘의 신부가 될 분”이라며 축복한 것이다. 이 예언은 독생녀의 특별한 사명을 다시 확인해 준 표징이었다.
홍순애의 신앙 여정은 단순한 개인의 체험이 아니라, 독생녀 탄생을 위한 섭리적 준비 과정이었다. 그의 회개와 헌신, 그리고 고난 속에서 지켜 낸 믿음은 하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에서 그는 대모로 추앙된다.
일반 역사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과정은 일제강점기의 종교 탄압 속에서도 신앙인들이 꺼지지 않는 불씨를 지켜내며 한국 기독교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이어간 여정으로 평가할 수 있다. 동시에 가정연합의 종교 전승 안에서는 이 과정을 하나님이 한민족 가운데 새로운 섭리를 준비했던 중요한 국면으로 해석한다.
2025-09-23 13:3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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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독생녀 탄생의 국가·세계적 기반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그 선택받은 여정]
◆세계적 연대 속에서 독생녀 탄생의 길을 열다
오늘날 세계 인구 80억 가운데 기독교 24억, 이슬람 20억 등 절반 이상은 유일신 사상을 강조하며 하나님(알라)을 창조주, 심판주로 믿는다. 예수에 대해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신성과 인성을 가진 독생자라고 받아들이고, 이슬람은 예언자로 자리매김하면서 신성을 부정한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는 독생녀를 신성과 인성을 가진 하늘부모님의 여성적 구원의 실체로 규정한다. 한민족은 일제강점기의 고난 속에서도 독립과 평화를 향한 내적 기대를 키워갔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에 따르면 그 기대는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고,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의 기반과 함께 조성되었다.
한민족의 신앙과 민족적 의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 소식은 한민족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계기로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더욱 구체화했고, 민족 지도자들은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19년 세 차례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중국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일본 동경에서 발표된 ‘2·8독립선언서’, 그리고 서울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서’가 그것이다.
특히 ‘대한독립선언서’는 한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선언서에서는 한민족의 국호 ‘대한(大韓)’과 역사적 정신 ‘한(韓)’이 연결됨을 강조하며, 조선 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배경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밝혔다. 이승만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를 통해 한민족이 스스로 나라를 옹호하고, 만방과 화협하며 세계와 함께 나아갈 능력을 가진 민족임을 천명하였다. 선언서는 한민족의 내치와 외교, 자연과 문화, 공동체 자산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민족적 권리와 정통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중요한 문서였다.
이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전국적인 비폭력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약 106만 명이 참여했고 9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4만 7천여 명이 구속되는 등 막대한 희생이 뒤따랐다. 그러나 한민족은 폭력 대신 평화적 방법으로 자주독립을 선언하며, 인간의 도덕적 각성과 평화 국가를 향한 열망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였다.
3·1운동은 한민족이 ‘평화’와 ‘민족적 공의’를 중심으로 정체성을 확인하고, 문화적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정신은 대한민국 건국과 국가 정체성 확립의 기반이 되었으며, 한민족이 고난 속에서도 신앙과 민족적 의지를 통해 스스로를 지켜온 역사적 경험을 잘 보여준다.
종교 간 화합으로 평화 국가의 기반을 닦다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3·1운동은 정치적 저항 이상으로 인류 전체의 통합과 평화를 지향하는 국가적 기대를 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기독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은 재림메시아 실현을 위한 신앙적 열망과 민족적 목표를 함께 추구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한(韓)’의 역사는 독생녀 탄생을 중심으로 새로운 역사를 펼칠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3·1운동은 종교 지도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대표적 사례였다. 천도교의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은 비폭력적 시위를 통한 독립운동 방법을 마련하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기독교·불교·유림 등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을 민족대표로 참여시키는 합의를 이뤘다. 기독교 지도자 이승훈 등이 참여하면서 교회는 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고, 한용운 등의 불교 지도자까지 참여해 초종교적 연합이 성사되었다.
이러한 종교 간 협력과 화합은 한민족 내 평화적 열망과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며, 자연스럽게 독생녀 탄생을 위한 종교적 기반으로 연결된다. 각 종교 지도자들의 연합은 국가적 차원에서 평화와 통합의 이상을 구현하는 장이 되었고, 민족적 목표와 신앙적 기대가 하나로 결합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3·1운동의 결과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한국 최초의 민주 공화정 정부로서,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한 외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42년 3월 1일 임시정부는 미국, 영국, 소련, 중국에 공식적으로 정부 인정을 요청하였으며, 중국의 정식 인정을 받음으로써 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은 조선 패망 후 나라를 잃은 한국민들에게 새로운 국가 창건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으며, 독립을 위한 투쟁의 불씨를 이어갔다. 또한 하늘이 예비한 선민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의 근본 토대가 되었고, 민족적 자주성과 신앙적 기대가 결합된 국가적 비전의 실현을 가능하게 했다.
한편, 국제적 맥락에서도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세계적 평화와 자유를 향한 흐름과 맞물렸다. 1942년 1월 1일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 26개국이 공동 전쟁 목표와 전후 평화 질서 구축을 선언하면서 평화와 국제적 협력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어 1943년 이탈리아가 패배하면서 전쟁의 전세가 연합국 쪽으로 기울자,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세계적 변화 속에서 독립에 대한 기대를 키워갔다.
연합국 26개국의 공동선언선언은 전 세계가 협력해 항구적 평화 사회를 구현하고 인류의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비전을 담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흐름은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결합하며, 독생녀 탄생을 위한 국가적·세계적 기대를 동시에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다.
현대사·세계적 기반 속 독생녀 탄생 준비
3·1운동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가 조직된 것처럼, 1943년에는 여성 독립운동가 50여 명이 모여 대한애국부인회를 재결성하였다. 이 모임에는 대부분 기독교 여성들이 참여했다. 이러한 민족적·종교적 기반 위에서 하늘부모님은 독생녀 현현을 준비해 왔다고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는 강조한다.
한반도는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물러간 자리를 미·소 양국 연합군이 대신하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는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되어 남한과 북한은 각각 미군과 소련군 주둔 하에 우익과 좌익, 반탁과 찬탁으로 갈리며 이념적 대립을 겪는다. 김구 등 민족 지도자들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남북한은 단독정부를 세우면서 분단국가로 남게 되었다.
1950년 북한 정권은 한반도 공산화를 목표로 남한을 침략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3일 만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며 남하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유엔군이 참전하게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벌였으며,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북진하였다. 평양과 흥남까지 진격했으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다시 후퇴해야 했고, 결국 1953년 3년여간의 전투 끝에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한국전쟁에서 유엔 16개국의 젊은이들이 참전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보기 드문 기적 같은 일이다. 단일 민족 국가의 분쟁에 세계 각국이 힘을 모아 참전한 것은 국제정치적 이해관계로만은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하늘부모님의 깊은 뜻과 섭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들의 희생은 단순히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독생녀가 참어머님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보호하고 양육하는 섭리적 의미를 지녔다고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한국전쟁과 유엔군 참전은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국가적·국제적 기반과 신앙적 기대가 결합하여 독생녀 탄생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2025-09-22 13: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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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독교 기반과 독생녀 탄생의 의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그 선택받은 여정]
◆미래 희망을 여는 민족이 되다
한민족이 독생녀 탄생을 준비해 온 민족적 기대는 자연스럽게 기독교적 기대와 맞물려 전개된다. 예로부터 종교를 포용하지 못한 국가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웠고, 모범 국가로 성장하기도 힘들었다. 한민족은 세계의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며, 기독교의 꽃을 피운 열정적인 민족이기도 하다. 한민족의 기독교 기반 속에서 드러난 독생녀 탄생의 의미와 신학적 배경을 살펴본다.
◆인류 구원을 위한 섭리와 교회의 회복
하늘부모님은 창세 이후 끊임없는 섭리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했다. 섭리의 중심에는 언제나 구원자를 맞이할 민족과 신앙 공동체가 있었다. 구약시대에 선택받은 유대민족의 4000년 역사는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기반이었다. 그러나 메시아로 온 예수를 십자가로 내몬 불신으로 인해 하늘의 뜻은 수포로 돌아가고 다시 때를 기다려야했다.
양순석 박사의 ‘기독교의 본질과 독생녀’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 강림이 하늘부모님의 새로운 구원섭리의 시작을 알리는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성경 사도행전 2장에 그날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그날 베드로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들으십시오.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 시키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어 베드로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권면했는데, 그날 약 3000명이 세례를 받아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성령의 역사와 사도들의 전도 활동을 중심으로 잉태된 기독교는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기독교는 숱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고, 마침내 서기 380년 로마의 국교로 자리 잡으면서 인류 구원섭리의 새로운 주체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교세가 막강하자 중세 들어 교황권의 타락과 분열이 초래됐다. 그 결과 기독교 신앙의 본질까지 흐리게 했으나, 1517년 루터에 이은 칼뱅의 종교개혁은 다시금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신앙운동을 촉발시켰다. 이어 1560년부터 1660년까지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淸敎徒, Puritans) 운동은 형식주의에 매몰된 교회를 개혁해 나갔다. 청교도들은 타락한 인간은 철저한 회개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아야 하며, 인간적 공적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구원받은 증거로서 경건하고 엄격한 신앙생활을 실천하였다. 신앙의 자유를 찾은 이들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성서적 원리에 기초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다.
◆평양대부흥으로 한민족을 준비시키다
청교도 정신은 미국 건국의 토대가 되었으나 산업혁명 이후 물질문명 속에서 약화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여러 차례 대각성운동(Awakenings)이 일어났으며, 특히 1850년경의 제3차 대각성운동은 초교파적이고 평신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중생과 성결, 재림 대망을 강조하였고, 드와이트 무디(D. L. Moody)의 설교를 통해 학생들이 해외 선교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 열기를 이어받아 언더우드, 아펜젤러, 하디 등 청년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개신교의 기틀을 놓았다.
20세기에 이르러 기독교 신앙은 한반도에도 깊이 뿌리내렸다. 특히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평양대부흥운동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보여주며 한국 기독교를 세계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평양 신학교 학생들과 교인들은 회개와 기도에 몰두하며 전국적으로 큰 물결을 이뤘다. 한국 교회 역사상 ‘영적 각성의 기점’으로 평가되는데, 한국인 특유의 신앙적 열정과 조직력, 사회적 참여 정신을 보여주었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에 따르면 일본의 개신교 사상가이자 무교회주의 선구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년)는 평양대부흥운동을 보고 하나님은 조선을 사랑하며, 군대와 군함보다 능력이 더 강한 성령을 보내주었다고 증거하였다. 그는 또 1918년부터 1년 6개월간 재림운동을 전개하면서 1919년부터 1920년에 걸쳐서 재림의 징조는 가장 선명하게 세계역사에 나타났다고 주장하였고, 기독교를 서양에 전파한 유대민족과 같이 조선이 다시 기독교를 동아시아에 전파하는 동양교화(東洋敎化)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예언하였다.
평양 대부흥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윤치호, 손정도, 조만식 등 기독교인 지도자들이 민족운동과 교육·사회사업에 앞장서 민족의 독립과 사회 정의를 위한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것으로 미뤄 볼 때, 한국은 동양의 예지적 전통과 더불어 기독교 신앙의 뜨거운 열정을 동시에 지닌 독특한 땅이었다. 이것은 충·효·인의 가치를 강조한 전통적 민족정신과 기독교적 정의관, 희생정신이 결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민족적·기독교적 배경은 독생녀 탄생을 맞이할 무르익은 토양이 되었다.
◆독생녀로 하늘부모님 품에 인류를 인도해
이처럼 하늘부모님은 유대민족과 기독교, 종교개혁과 미국 신앙운동, 그리고 한국 기독교의 부흥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를 통해 끝없는 인내와 사랑으로 독생녀를 맞이할 기반을 닦아오셨다.
이제부터는 역사적 기반 위에 나타난 독생녀의 본질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생녀의 등장은 단순한 종교적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는 본래 남성성과 여성성이 함께 있으며, 따라서 구원섭리 또한 남성인 독생자와 여성인 독생녀의 동반을 통해 완결된다. 예수는 독생자로 오셨으나 당대의 불신으로 인해 십자가 길을 걸었다. 그 결과 구원섭리는 완성되지 못했고, 성령은 ‘하늘의 어머니’로서 교회를 위로하고 이끌어 왔다.
그러나 성령은 실체가 아니기에 영적 위로에만 머물렀다. 하늘부모님의 구원섭리는 반드시 실체적인 독생녀를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구약은 아버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시대였고, 신약은 아들 예수를 통한 구원의 시대였으며, 성약은 독생녀를 통해 어머니 하나님이 현현하는 시대이다.
독생녀의 탄생은 하나님의 여성성을 실체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이는 곧 창조 본연의 이상, 즉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함께 있는 하늘부모님의 완전한 사랑을 인류가 체험하는 길을 트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독생녀는 인류를 참부모의 품으로 인도하는 섭리의 완결점이며, 인류 구원의 희망을 여는 서막이 된다.
2025-09-21 11: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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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류 구원의 민족적 기대와 독생녀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그 선택받은 여정]
◆하늘을 모신 역사 새 시대의 징표가 되다
‘민족 선민 대서사시’에는 한민족에서의 ‘독생녀(獨生女)’ 출현이 언급된다. 생소한 개념이지만 ‘오직 하나뿐인 여성’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라 부르는 것과 짝을 이뤄 그에 상응하는 하늘부모님이 보낸 유일한 여성적 구원의 주체로 정의된다.
이 책은 한민족을 독생녀를 맞이할 준비된 선민으로 규정하고, 그 역사 속에 축적된 신앙과 기다림이 마침내 독생녀의 탄생으로 결실을 맺는다고 서술한다. 독생녀는 어떤 논리로 뒷받침되고, 독생녀를 맞이 할 민족적 기대는 어떻게 조성돼 왔는지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하늘부모님의 여성적 구원의 실체
독생녀라는 말이 지금 시대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듯 독생자라는 말도 2000년 전, 유대지역이 로마제국의 속주시대 상황에서는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공생애 동안 안식일 규례를 넘어 병자를 고치고, 성전을 정화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 증언했다. 이러한 말씀과 행동은 당시 종교 권력을 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열어 예수를 신문했고,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묻자, 예수는 “네가 말하였도다”(마태복음), “내가 그니라”(마가복음),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다”(누가복음)라고 대답했다. 예수의 발언은 곧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어 사형에 해당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수긍하기 어려운 발언을 예수가 위험을 감수하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예수는 단순히 지위를 주장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존재임을 드러낸 발언이다. 즉, 인류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밝히는 신학적 선언이자 자신의 고난·죽음·부활·재림까지 포괄하는 구속적 계획을 예고한 말씀이었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를 비롯해 관련 자료들은 한민족이 쌓아온 신앙과 기대가 독생녀의 출현으로 결실을 맺는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여기서 독생녀는 단순한 여성 존재를 넘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늘부모님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는 신적 주체로 이해된다.
신학자 양순석 박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본질과 독생녀’(신세림출판사)에서 “독생녀는 원죄 없이 태어난 하늘부모님의 딸로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늘어머니의 사명을 수행한다”며 “성경은 이러한 독생녀의 출현과 역할을 여러 곳에서 예시한다”고 설명했다. 성경 아가서 6장 9절에서는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라고 기록함으로써 독생녀의 유일성과 완전성을 드러내며, 계시록 22장 17절의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는 구절은 독생녀가 성령의 실체로서 인류에게 생명수를 베풀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 존재임을 시사한다고 서술함으로써 신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양 박사에 따르면 독생녀는 하늘부모님의 여성성을 완전히 실체화한 존재로서, 인류의 영적 중생과 실체적 중생을 동시에 완성한다. 그녀의 사명은 하늘부모님과 인간 사이의 본연의 부모자녀 관계를 회복하는 혈통복귀의 과정과 직결되며, 시대를 거쳐 점진적으로 발전해온 구원섭리를 독생녀의 출현으로 완성 단계에 이르게 한다. 이를 통해 인류는 하늘부모님의 직계 자녀로 거듭나는 길이 열리며, 독생녀는 구원의 결정적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이를 종합하면 독생녀의 출현은 단순한 신학적 사건을 뛰어넘어 인류 구원과 혈통복귀의 완성을 위한 결정적 과정으로 이해된다. 혈통복귀는 인간이 타락으로 잃어버린 하늘부모님과의 원래 부모·자녀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이며, 시대에 따라 점진적으로 전개되어 온 하늘부모님의 구원섭리 가운데 독생녀의 출현으로 완성 단계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한민족은 독생녀 탄생을 위해 역사적·신앙적으로 준비된 선민이며, 독생녀의 출현은 한민족과 인류, 나아가 하늘가정 회복의 완성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한다. 즉,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는 독생녀를 맞이할 준비와 조건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유교 국가와 성리학의 기틀
그렇다면 독생녀 탄생을 위해 한민족은 어떠한 준비를 해 왔을까. 한민족은 세계 여러 종교와 사상을 역사 속에서 수용하고 창조적으로 융합해 왔다. 이 다양성과 융합의 전통은 ‘독생녀’와 ‘재림메시아’ 탄생을 향한 민족적 기대가 형성되는 중요한 토양이 되었다. 불교·유교·기독교·민족종교 등은 한민족의 삶과 문화 깊숙이 뿌리내리며, 시대마다 영적·도덕적 지도자들을 배출해 공동체의 정신을 이끌었다.
한민족은 하늘부모님을 모시는 사상과 생활을 전통으로 삼아 세계적인 종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꽃피웠다. 불교는 삼국시대에 전래되어 고려에서 크게 번성하며 한민족을 대표하는 종교의 하나가 되었고, 수행 전통을 통해 정신·문화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신라의 최치원(857~908년 이후)은 유·불·선에 대한 깊은 이해로 통합사상을 제시했으며, 원효와 의상은 각각 화쟁사상과 화엄종을 주창해 불교의 통합과 체계를 세웠다. 조선의 서산·사명대사는 국난에 승병을 이끌었고, 일제강점기의 한용운은 불교 유신론과 독립운동으로 타락한 불교를 개혁하고 민족 정체성 수호에 힘썼다.
유교는 조선의 국가 이념으로 사회의 도덕과 질서를 지탱했다. 정도전(1342~1389년)은 유교에 입각해 새 국가의 기틀을 단단하게 세웠다. 이황(1501~1570년)은 ‘이기이원론’ ‘이발이기수지’ ‘사단칠정론’을 전개하고 ‘성학십도’로 성리학을 집대성했으며, 서원 교육과 경(敬) 실천으로 ‘하늘부모님을 모시는’ 삶의 모범을 보였다. 이이(1536~1584년)는 ‘이기일원론’ ‘기발이이승지’로 기(氣) 중심 성리학을 발전시키고 ‘격몽요결’로 수양법을 보급하여 개성완성의 길을 제시했다. 효가 가정을 넘어 사회·국가 질서의 기반으로 확장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애민을 현실화한 실학이 전개되었다. 유형원(1622~1673년)·이익(1681~1763년)은 사회 개혁을 제안했고, 정약용(1762~1836년)은 서학과 기독교의 수용 속에 인격적 상제를 도덕 주체로 회복하는 동시에 ‘목민심서’ 등으로 민생 개선을 도모했다. 이러한 애민정신은 건국이념 홍익인간의 연속이자, 목화씨를 들여와 민중의 의복을 향상시킨 문익점(1329~1398년)과 사재로 다리를 놓은 조한준 등 선조들의 실천으로 이어졌다.
◆실학·애민으로 홍익인간 구현하다
한민족은 유·불·도를 수용하면서 정통을 보존하고 회통·일치를 지향해 조화로운 사상 기반을 이루었다. 불교는 구도를 통한 마음의 자유를, 유교는 윤리의 사회적 구현을, 도교는 자연과의 합일을 강조했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되 유·도와 공존했고, 조선도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으면서 불교·도교의 영향을 유지했다. 정치적 갈등 속에서도 하늘 중심의 조화라는 큰 틀 아래 배제보다 융합을 택했던 것이다.
동학은 이 전통을 이으며 서양 기독교의 영향 속에 등장했다. 최제우(1824~1864년)는 유·불·선 통합 위에 제세구민의 뜻으로 1860년 무극대도를 받아 민족 고유 신앙인 동학을 창도했다. 시천주와 “천심즉인심, 오심즉여심(天心卽人心, 吾心卽汝心)”의 가르침으로 하늘과 인간 마음의 합일을 설파했다.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인내천(人乃天)을 종지로 삼아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 지상천국의 이념을 제시했다.
이어 나철의 대종교, 강일순의 증산교, 소태산 박중빈의 원불교 등 민족종교가 등장해 한민족의 정체성과 전통을 보전하며 새로운 참된 세계를 지향했다. 이들은 민족의 단결과 영성을 강조하며 역사 속 종교운동의 중심을 자임했다.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하늘부모님을 모셔 온 한민족은 깊은 종교심과 문화 전통 위에서 부흥해 세계의 등불이 될 것”이라 노래했다. 일제강점기 그의 시 ‘동방의 등불(The Light of the East)’은 한민족의 독립 소망과 미래 비전을 일깨우며, 훗날 ‘독생녀’ 강림의 날 한민족이 아시아의 등불이자 세계 평화의 중심이 될 것임을 상징한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절에/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기를 간절히 바라노라/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타고르)
◆다종교 회통과 민족종교의 부흥
요컨대, 한민족은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물게 다종교 공존과 상생의 가치를 성숙시켜 왔다. 그 과정에서 개인·가정·사회 차원의 구원, 그리고 초종교적 일치와 통합의 문화가 민족적 차원에서 형성되었다. 이를 통해 하늘부모님은 한민족의 종교적 전통 위에서 세계 모든 종교가 화합과 통일을 이루어 갈 전통과 기반을 준비해왔다. 이러한 역사적·영적 토대 위에서 한민족은 ‘독생녀’와 ‘재림메시아’의 탄생을 고대하는 민족적 기대를 성숙시켜 온 것이다.
‘왜 다종교의 공존이 특정한 ‘독생녀’ 기대와 연결되는가’라고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민족의 전통은 특정 교리의 배타적 우위를 선언하기보다 하늘 중심의 회통을 통해 구원의 완성과 새 시대의 개벽을 모색해 왔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초종교적 기대가 ‘독생녀’ 탄생을 보편 구원의 완성 사건으로 이해하도록 이끈다.
2025-09-19 11: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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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민족의 창조성과 심정문화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그 선택받은 여정]
◆한민족의 정체성과 자부심이 되다
한민족은 하늘을 향한 신앙심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문화를 창조해 왔다. 한글의 창제, 천문학과 과학기술의 발달, 농업 혁신, 그리고 청자와 백자에 담긴 미의식까지 모든 성취는 한민족의 창조성과 더불어 하늘부모님 심정의 표현이었다. 한민족의 창조성은 오늘을 있게 한 외적 성과요, 실천적 구현이었고, 심정문화는 내적 원천이요, 정서적 에너지가 됐던 것이다.
한글과 과학으로 일군 창조적 삶
세종대왕이 1443년에 창제한 한글은 백성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고안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구조를 가진 문자였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입술, 혀, 잇몸 등 신체의 발음기관의 모양에서 본떴는데, 과학적 사고와 언어학적 창조성이 결합된 세종대왕의 탁월한 발명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양반 지식층은 “언문은 천하다”며 거세게 반대했지만, 세종은 “백성을 위해 만든 글”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글은 소리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반영한 독창적 발명으로, 세계 문자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한글에는 백성을 사랑한 애민정신(愛民精神)이 깃들어 있으며, 오늘날 창조성과 함께 민족의 심정을 담은 상징으로 남아 있다.
한민족은 하늘을 관찰하고 자연의 이치를 생활 속에 녹여냈다. 고려 태조 때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별자리와 하늘의 운행을 정밀하게 기록한 지도로, 1,467개의 별이 들어가 있다. 단순히 학문적 성과를 뛰어넘어 천문 현상을 백성의 농사와 국가 제례에 연결한 것으로, 하늘의 뜻을 실천하려는 문화적 유산이다. 신라의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 시설이며, 별자리와 절기를 기록해 둠으로써 농사와 제례에 활용됐다.
조선 세종 때는 한글 뿐아니라, 천체의 위치와 기후를 관측하는 혼천의(渾天儀), 간의(簡儀), 측우기(測雨器) 등이 제작되어 천문과 기상까지 체계적으로 측정할 수 있었다. 솥뚜껑 모양의 앙부일구(仰釜日晷, 해시계)와 자격루(물시계) 같은 발명품은 백성 누구나 마을 한가운데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한 과학기술로, 하늘의 운행을 생활 속에 구현한 대표적인 사례다. 하늘의 뜻을 알고자 했던 한 민족의 천손문화(天孫文化)를 보여준다. 별과 해, 비와 물의 움직임을 생활과 연결한 창조성은 민족적 신앙과 생활의 창조성이 맞닿은 성과다. 그 뛰어난 창조성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금속활자·백자·농업기술 세계사에 빛나
고려가 남긴 금속활자 인쇄술은 세계 인쇄사에서 빛나는 성취다. 12세기 말 금속활자 인쇄술이 발명되었는데, 서양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선 쾌거다. 1377년에 인쇄된‘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으로 공인받고 있다. 독일의 발명가 구텐베르크보다 약 78년 앞선 이 인쇄술은 사상과 학문을 신속히 퍼뜨리게 했다. 직지심체요절은 불교 선종의 여러 조사(祖師)들이 남긴 말씀과 가르침을 모아 엮은 책인데, 단순한 불교 경전이라기보다 백성에게 지혜와 깨달음을 나누고자 한 민족적 창조 정신의 산물이었다. 글자를 통해 지식을 공유하려는 정신은 오늘날의 정보화 사회와 맞닿아 있다.
조선 전기에는 지역별 농사법을 집대성한 농업서적 ‘농사직설(農事直說)’은 조선의 기후와 토양에 맞춘 체계적 농업 지침서였다. 이 책은 간행되자마자 농민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1441년 경 조선의 과학자 장영실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측우기와 수표(水標)는 강수량과 하천 수위를 기록해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재해를 예방하는 과학적 장치로 활용됐다. 유럽에서는 16세기 후반이나 17세기 들어서야 비슷한 장치가 개발됐다. 세계적으로 매우 앞선 농업 기술은 백성의 삶을 지탱하고 풍요롭게 만들려는 창조적 노력의 결실이다. 한민족의 농업 문화는 생계를 위한 노동이기도 하지만, 더나아가 하늘과 땅에 감사하며 민족적 심정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고려 청자는 비취빛 유약과 정교한 상감 기법으로 ‘하늘빛을 담은 그릇’이라 불렸다. 예술적 가치와 기술력 측면에서 당연히 독보적이다. 15~19세기 제작된 조선의 백자는 18세기 유럽까지 알려지며 ‘동양 백자의 대표’로 인식됐다. 백자는 절제된 순백미로 백성들의 생활 철학을 담아 서민의 생활 속에서도 깊은 울림을 주었고, 세계적인 명성까지 얻었다. 청자와 백자는 각각 상류층과 일반 민중의 생활용품으로 사용됐으나, 실용성과 미적 가치를 동시에 갖춤으로써 민족의 심성과 세계관이 투영된 예술품에 가까웠다. 검소함 속의 아름다움, 깊이 있는 심정의 표현은 오늘날 한국인의 미의식에도 계승되고 있다.
심정문화는 창조성의 근원
한글, 과학기술, 농업, 도자기 등에서 나타난 이 모든 한민족의 창조성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힘이었으며, 심정문화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즉 애천(愛天)·애인(愛人)·애국(愛國)의 정신에서 비롯됐다. 한민족에게 심정문화가 없었으면 창조성은 방향을 잃었을 것이고, 창조성이 없었으면 심정문화는 현실에서 구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두 개념은 내적 동기와 외적 성취로서 상호보완적이며, 한민족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근간이었다.
2025-09-18 11: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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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민족 문화·전통과 선민 정체성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그 선택받은 여정]
◆효와 정절, 연대의 전통을 살펴보다
역사적으로 한민족은 초월적 존재를 공경하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독특한 문화적 전통을 형성해 왔다. 그 핵심에는 효(孝)·정절·연대라는 윤리적 가치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도덕 규범을 넘어 사회적 신뢰와 공동체 결속을 유지하는 토대로 기능했다. 이러한 윤리적 특성이 민족적 단결을 어떻게 가능케 했는지, 그리고 일반사관과 어떤 방법론적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일까.
한민족의 윤리와 정체성
효는 단순히 부모에 대한 공경 이상으로 생명의 근원에 대한 감사와 책임을 의미했다. 조석 문안, 시묘살이, 제례와 같은 관습은 효의 실천을 제도화한 사례다. 대표적으로 심청전은 부모를 위해 자기 희생을 감수하는 효의 상징적 서사이다.
심청은 아버지의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고, 이 희생은 하늘을 감동시켜 결국 부녀의 상봉으로 이어졌다. 효가 개인의 의무를 넘어 공동체적 덕목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황희 정승과 같은 역사적 인물은 효행을 통해 정치적 정당성과 인격적 모범을 드러냈다. 효의 문화는 곧 사회적 신뢰와 연대의 규범 자본으로 기능하였으며, 공동체와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규범이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신사임당(1504~1551년)의 순결·정절,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삶은 한민족의 여러 여성을 대표한다. 여성의 순결·정절은 가족과 사회의 신뢰를 상징했으며, 교육과 양육의 과정에서 중요한 사회화 장치로 작동했다.
영국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1889~1975년)는 1973년 런던에서 한국 정치인에게 한민족의 효 문화를 전해듣고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인류가 새로운 별로 이주한다면 반드시 가져가야 할 문화로 한국의 효 문화를 꼽으며, 이를 한민족의 기본 가치이자 정신으로 평가했다. 또한, 효문화가 한국의 빠른 경제 성장의 원인으로 보았다. 한민족 효 문화의 보편적 가치와 국제적 인정도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민간에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이는 ‘춘향전’은 부당한 권력 앞에서도 정절을 지킨 인물상을 통해 정의와 신의의 가치를 강조했다. 춘향의 저항은 단순한 개인의 사랑이 아니라, 공동체 윤리의 수호로 해석될 수 있다. 정절의 문화는 때로는 성별·계층적 불균형을 낳았으나, 사회적 신뢰와 도덕적 책임의 관습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한민족은 하늘을 공경하는 제천사상과 결합하여 흰옷을 숭상하였다. 백의(白衣)는 정결·순수·평화의 상징이었고, 집단 정체성의 시각적 표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백의 착용 금지 정책에 저항하며 오히려 백의가 민족정체성의 상징으로 재정의되었다. 문화적 상징이 외세 지배 속에서 집단적 저항의 코드로 변용된 대표적 사례다.
영웅과 결속을 되새기다
한민족의 역사 속 위대한 장수들은 ‘하늘을 공경하는 신앙’과 ‘의로운 방어’를 결합시켰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에서 수나라의 대군을 물리치며 민족적 자존을 지켰고, 광개토대왕은 국력을 확장하여 자주성을 천명했으며, 강감찬은 귀주대첩을 통해 거란의 침입을 막아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열세를 극복하며 대승을 거뒀다. 모두가 민족적 결속과 신앙적 확신이 결합된 역사적 상징이다.
공식 군대 외에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는 승병과 의병이 외세 침략과 국가 위기에 맞서 자발적으로 봉기하였다. 서산대사·사명대사가 조직한 승병은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전투에 참여했으며, 곽재우·고경명 등의 의병장은 지역사회 기반의 게릴라 전술로 일본군에 맞섰다. 집단적 결속이 제도적 강제가 아닌 자발적 신앙과 도덕적 의무감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근대사의 독립운동은 전통적 문화윤리가 근대적 정치의식으로 전환된 대표적 사례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며 민족적 저항을 구현했을 뿐 아니라, 동양평화론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와 연계한 보편적 비전을 제시했다. 유관순은 18세의 나이에 3·1운동을 주도하며 여성과 청년이 독립운동의 주체로 나설 수 있음을 보여줬고, 그의 희생은 정의 앞에 굴하지 않는 용기의 상징으로 남았다.
이회영은 가문이 지닌 재산과 지위를 모두 내려놓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 양성에 매진함으로써 개인적 안락보다 민족 공동체의 공의를 선택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통해 한민족의 기원을 밝히고, 선민으로서의 주체적인 한국사를 정리하여 민족 문화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전통적 가치인 효·정절·연대가 근대적 독립과 시민적 평등의 언어로 재구성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신앙·윤리 중심의 해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일반사관과 차이를 가지며, 일반사관은 사료 비판과 맥락분석, 비교사를 중시하고 규범 서사의 과장을 경계한다는 측면에서 두 접근은 상호 보완될 필요가 있다.
한민족 문화유산과 현대적 의미
한민족의 문화와 전통은 효·정절·연대라는 윤리적 가치 위에 세워졌으며, 위기 속 집단적 결속을 가능케 한 기반이었다. 신앙적 세계관은 정체성과 도덕성을 강화하는 자원으로 기능했으나, 현대 사회에서는 이를 보편 인권·성평등·다문화 공존과 조율하는 재맥락화가 필요하다.
하늘부모님은 침략의 위기 속에서도 한민족이 절대자를 중심으로 신앙과 사상에서 하나 되어 ‘공의로운 정의’의 정신으로 민족의 혼을 지켜가도록 이끄셨다. 이로써 형성된 한민족의 문화유산은 역사적 경험과 규범적 자산을 품은 집합적 기억으로서, 오늘날에도 시민적 덕목과 민주적 연대로 이어질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2025-09-17 10: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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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하늘부모님 나라를 대망해온 민족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그 선택받은 여정]
◆한민족, 미래의 희망을 노래해 왔다
한민족의 역사에는 언제나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망이 깃들어 있다. 시대와 사상은 달랐지만, 그 중심에는 고난을 넘어 평화롭고 정의로운 새 세상을 기다리는 마음이 자리했다. 특히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하늘의 대신자가 올 것이라는 대망사상(待望思想)은 민족적 성향으로 깊이 뿌리내렸다.
미륵신앙은 고난 속 희망의 등불
불교에서는 정토사상이 이러한 열망을 대변했다. 대승불교의 정토사상은 부처의 힘(本元力)을 빌려 괴로움이 없는 이상세계를 꿈꾸는 신앙으로, 신라시대부터 크게 퍼졌다. 당대 사람들에게 정토는 단순한 종교적 이상이 아니라, 전쟁과 기근 속에서 ‘고통 없는 세계’를 꿈꾸는 정신적 안식처였다. 오늘날 우리가 힐링 여행이나 명상을 통해 삶의 무게를 내려놓듯, 당시 민중에게 정토사상은 마음의 평온과 위안을 제공하였다.
또한 미래의 구세주로서 미륵불(彌勒佛)은 한국 불교 신앙의 중심적 상징이었다. 한민족은 역사적 고난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언젠가 나타날 미륵불’을 기다리며 더 나은 내일을 희망하였다. 이는 오늘날 기후 위기와 전쟁, 불평등 속에서 새로운 지도자나 해법을 기대하는 심리와 다르지 않다. 백제 금산사와 신라 흥륜사의 주불은 모두 미륵불이며, 승려들은 미륵불 앞에서 “미래에 대성(大聖)이 화랑으로 태어나 세상에 나타나 주기를” 발원하였다. 통일신라 경덕왕 시대 조신(調信)의 설화, 즉 죽은 아이를 묻은 땅에서 미륵석상이 나오는 꿈은 민족이 불행 속에서도 새 세상을 갈망했음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에는 법상종을 중심으로 미륵보살회와 미타불회가 열리며 민중 신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 미륵불 신앙은 조선 숙종 시기 “석가불이 다하고 미륵불이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는 여환(呂還)의 거사로까지 이어졌다. 실패로 끝났지만, 미륵에 대한 기대는 오히려 더 강하게 민중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이처럼 미륵 사상은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불안의 시대에 위안을 준 신앙이었다.
성인·예언서를 통해 도덕·미래를 염원하다
유교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상세계를 그렸다. 중국 고대 문헌 ‘산해경(山海經)’은 한민족을 관대함과 박애, 예의, 청렴, 자존 등 군자의 덕을 갖춘 민족이라 묘사했다. 이러한 덕성은 유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인의(仁義)와 맞닿아 한민족의 근본 성격을 형성하였다. 유교에서 성인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도덕적 완성에 이른 인물이다. 요·순 같은 전설적 임금과 공자, 주공 등이 그 대표다. 한민족은 이들을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닌, 하늘의 뜻을 인간 세상에 구현한 존재로 이해하였다. 공자는 사회적 조화와 평화를 위해 도덕적 기초를 다진 모델이었다.
군자의 천품을 지닌 한민족은 유교적 성인의 이상을 따라 도덕적 생활과 사회적 기틀을 마련하고, 그 터 위에서 하늘부모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한민족의 도덕적 자각과 사회적 책임, 평화와 조화를 향한 열망의 뿌리로 작용한다.
혼란한 시기에는 예언서가 희망이 됐다. ‘정감록(鄭鑑錄)’은 조선 후기 병란과 흉년, 위정자의 부패로부터 고초를 겪는 민중에게 “부패한 세상은 무너지고 성군(聖君)이 나타나 새 시대가 열린다”는 약속을 전했다. 조선 중기 격암 남사고가 남긴 ‘격암유록(格庵遺錄)’ 역시 미래에 대한 상세한 예언과 함께 성군의 예견하였다. 두 예언서 모두 하늘부모님의 뜻이 실현될 날을 기다리는 한민족의 마음을 보여준다.
한민족의 이상세계 실현과 사회 개혁
근대에 들어서는 이러한 열망이 현실 변혁의 사상으로 이어졌다. 19세기 중반, 한반도는 외세의 침략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민중의 삶이 극히 어려웠다. 이러한 시기에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하늘을 섬기라”(侍天主·시천주)는 교리로 출발했다. 시천주에는 ‘인간과 만물 속에 하늘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모든 인간의 존귀함을 강조하며 사회적 불평등을 바꾸고 새로운 시대(후천개벽)를 열자는 사상은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고,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했다.
뒤를 이어 제자 최시형(1827~1898)이 교리를 체계화하고 조직을 확립하여 동학을 민중 속에 뿌리내리게 했다. 20세기 초 손병희(1861~1922)는 동학을 천도교로 발전시켜 현대적·사회적 실천으로 확장하였다. 그는 인내천(人乃天)의 종지를 세우고, 포덕천하·광제창생·후천선경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천도교는 1905년~1920년대 초반 교세의 황금기를 이뤘으며, 조직적·사회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항일독립운동과 농민운동, 여성운동, 어린이 교육 등 다양한 신문화운동을 펼쳤다. 또한 심고(心告), 시일기도(時日祈禱), 청수의례(淸水儀禮) 등 생활 속 의례를 통해 사회 정의와 평화 실현을 강조하며, 한민족의 하늘부모님의 뜻과 이상세계 실현을 신앙적으로 이어갔다.
불교의 정토와 미륵, 유교의 성인 이상, ‘정감록’과 ‘격암유록’의 예언, 동학과 천도교의 개벽사상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은 시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꿔왔다. 이는 한민족을 단순한 생존 민족이 아닌, 종교적 기대와 신앙을 매개로 미래를 준비하고 기다린 민족으로 이해할 근거가 된다. 이러한 열망은 지금도 ‘언젠가는 하늘이 예비한 인물이 한민족에게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2025-09-16 11: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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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하늘을 모시는 신앙, 한민족 문화의 뿌리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그 선택받은 여정]
◆한민족 신화, 평화와 공존을 만들다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는 오래전부터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고대 한국 사회에서는 우주와 인간, 자연을 연결하는 다양한 신화와 신에게 바치는 예절 제의(祭儀)가 발달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한국인의 정신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민족 건국신화와 천손 사상
한민족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는 환웅이 하늘의 뜻을 받아 인간 세상에 내려와 태백산(지금의 백두산) 신단수(神檀樹) 아래 신시(神市)를 세우고, 인간에게 농업과 의학, 법률을 가르친 뒤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천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후 환웅과 웅녀(곰이 변한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우며 한민족의 시조가 된다.
단군신화에서 강조되는 천손(天孫) 사상은 ‘한민족은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믿음을 담고 있다. 하늘부모님(환인)의 아들 환웅은 환인에게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3000의 무리를 이끌고 만주평원과 한반도를 잇는 백두산의 신단수 아래에 신시를 세웠다는 것이다. 신화 속에서 환웅은 하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농업, 의학, 법률 외에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이념, 즉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실천했다. 이는 인류 보편의 메시지이자 모든 인류가 바라는 하늘부모님의 뜻이다.
고조선의 시조 단군은 홍익인간뿐 아니라, 세상을 이치로 교화한다는 재세이화(在世理化), 도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이도여치(以道與治), 밝은 빛으로 세상을 이끄는 광명이세(光明理世)의 이념도 주창함으로써 평화와 정의, 도덕적 이상을 강조하며 세상을 다스렸다. 단순한 신화적 이야기라기보다, 한민족의 정신적 지표와 국가적 가치관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단군신화가 남성 중심이라면, 마고 신화와 바리공주 신화는 여성 중심이다. 마고 신화는 주로 제주 지역에서 구전 설화로 전해지는데, 이 신화에서 마고 할미는 우주와 생명을 창조한 여신으로, 신성한 힘을 무당에게 전수하고 승천했다고 전해진다. 할미(할머니)는 크다는 뜻을 지닌 우리말 ‘한’과 생명의 뿌리를 뜻하는 ‘어머니’를 합쳐서 만든 말로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하늘어머니가 계셨음을 묘사해주고 있다.
여성신화는 하늘부모님 신앙을 보여준다
‘바리공주 신화’는 주로 전라·충청 지방에서 설화로 전승돼 왔는데, 바리공주는 신화 속 한 왕의 일곱 번째 공주로 태어났지만 버려져 한 노부부의 양딸로 자랐다. 그래서 바리공주 또는 바리데기 공주는 ‘버린 아이’라는 뜻이다. 구전에 따르면 어느 날 왕과 왕비가 불치병에 걸리자, 저승의 생명수를 마시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여섯 공주는 모두 저승에 가기를 거부했지만, 바리공주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떠나 생명수를 구해 부모를 살렸다. 이후 바리공주는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무당의 시조로 여겨진다. 두 신화 모두 여성의 창조적 힘과 생명력을 강조하고 있다.
한민족 신화는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통해 하늘부모님 신앙의 구조를 담고 있으며, 남성과 여성 신성의 조화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신화적 상징에 그치지 않고, 한민족이 천지와 인간, 남성과 여성, 생명과 자연의 균형을 중시하며 살아온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나아가 이러한 신앙 구조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하는 문화적 기반이 되었으며, 세대를 거치며 한민족의 정신적 뿌리와 도덕적 이상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고대 한민족 사회에서는 하늘부모님께 드리는 제사의식인 천제(天祭) 문화를 중심으로 공동체가 결속되었다. 햇곡식과 맏 가축을 바치는 제사, 정화수를 바치는 의식 등은 하늘에 대한 경외심과 감사의 표현이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하늘과 연결되고, 마을과 나라 단위로 사회적 유대가 강화되었다. 또한 천문학적 관찰과 관련된 첨성대와 같은 시설은 단순히 하늘의 별과 행성을 관측하기 위한 과학적 목적뿐 아니라, 하늘 뜻을 이해하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살피려는 종교적·철학적 열망을 보여준다.
제의와 공동체 문화 ‘한마음’
한민족은 천손 사상을 바탕으로 같은 뿌리와 마음의 연결, 즉 ‘한마음’을 중시해 왔다. 한국 사회와 우리 민족문화를 통합적으로 성찰한 종교 사상가 함석헌은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 사람은 한 사람이요, 우리나라는 한 나라요, 우리 문화는 한 문화다.” 이는 공동체 의식과 서로를 배려하는 정신으로 발전했고, 평화와 공존을 지향하는 민족성으로 이어졌음을 뜻한다. 고대 신화와 제의, 공동체 문화 속에서 한민족은 하늘과 인간, 자연이 하나로 연결된 우주적 질서를 체험하며 살아왔다.
한민족의 고대 신앙은 단순한 신화를 넘어 문화와 역사, 사회적 가치관의 근간이 되었다. 하늘부모님 신앙은 인간과 자연, 공동체를 연결하는 중심적 축으로 작용했고, 이를 통해 평화와 공존, 공동체 정신을 실천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단군과 여성신화를 통해 드러난 하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제의와 관찰을 통한 자연과 우주의 이해는 오늘날 한국인의 정신적 뿌리이자 문화적 자산으로 남아 있다.
2025-09-15 09: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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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늘부모님이 예비한 한민족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그 선택받은 여정]
◆섭리 속에서 민족의 정신이 피어나다
한민족은 하늘부모님의 섭리 속에서 천손 사상과 제천 의례를 통해 평화와 조화를 이루도록 예비된 특별한 민족이다. 여기서 하늘부모님이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가정연합)의 용어로, 종교계에서 여호와, 하나님, 알라, 상제 등으로 부르는 창조주를 일컫는다. 이는 창조주가 인류를 평화와 정의로 이끄는 길잡이이자 부모와 같은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하나님’ 대신 ‘하늘부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동서 선민과 한민족의 형성
하늘부모님은 성경 창세기의 기록처럼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빛과 하늘, 땅과 바다, 식물, 해와 달, 동물과 인간을 창조하였다. 그 중에서도 당신의 형상을 닮은 자녀로 아담과 해와를 세우시며, 평화로운 세계 속에 사랑과 조화를 이루기를 바랐다. 그러나 인간 조상은 그 뜻을 알지 못하고 타락함으로써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결국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비극을 맞았다. 이때부터 하늘부모님은 타락한 인류를 다시 구원하고자 하는 복귀섭리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이와 관련해 성경의 구원사는 ‘죄에 빠진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으로 구원’으로 정의하는데, 가정연합의 복귀섭리는 ‘인간이 스스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즉, 구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에 방점이 찍혀 있는데, 복귀원리는 ‘인간의 탕감조건 + 재림 메시아로 완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성경에 따르면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장자인 셈(Shem)은 셈족의 조상이 되었으며, 이후 그의 후손은 동서로 흩어졌다. 일부는 서쪽으로 가서 유대민족을 형성했고,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해 아시아 지역에 자리 잡았다. 성서적 전승을 신학적으로 해석해 보면, 하늘부모님은 인류 구원의 섭리를 위해 서쪽에서는 유대민족을, 동쪽에서는 한민족을 선택하시어 동서 두 선민의 전통을 예비하신 것이다.
동방으로 이동한 셈족의 한 갈래는 바이칼 호수와 북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정착하였고, 이들이 훗날 한민족의 시원을 이루었다. 북만주 지역에서는 동이족으로서 ‘한(韓)’씨 왕조를 형성하였는데, 이는 고조선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독특한 신화와 제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를 드리는 오랜 종교적 의식은 오늘날까지 한민족의 정신적 기초로 남아 있다.
천손사상·제천의례 민족 자부심을 이루다
고조선의 개국 신화는 스스로를 천손(天孫), 즉 하늘의 자손으로 여기는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신라의 가배(嘉俳)와 같은 제천의식은 하늘부모님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집단적인 축제 의식이었다. 영고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북을 울리며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였고, 동맹은 동쪽 지역에서 맹세하며 국가와 부족의 결속을 다지는 의식이었다. 가배는 노래와 춤을 통해 추수에 감사하고 공동체의 즐거움을 나누는 행사였다. 백성 모두가 감사와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이러한 제천의식은 단순한 종교 의례를 넘어 사회적 결속과 평화 의식을 다지는 중요한 장치였다.
한편 고대 왕조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렸으며, 왕은 하늘에서 위임받은 천자로 여겨졌다. 왕궁에는 신녀가 자리해 하늘의 계시를 전하고,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농사를 짓는 절기인 농경철(農耕節)이나 전쟁 전후에 신녀의 제의가 반드시 치러졌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가 ‘하늘을 모시는 문화’를 국가적 제도로까지 발전시켰음을 보여준다.
한민족은 이처럼 하늘을 숭배하며 스스로를 하늘부모님께서 예비하신 특별한 민족으로 인식해 왔다. 천손 사상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평화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사상적 기초가 되었으며, 민족적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단순한 신화나 전설을 넘어 공동체적 삶을 지탱하는 정신적 기둥이었다.
한민족의 다양한 성씨 전승도 하늘과의 관계를 강조한다. 예컨대 청주 한씨나 남평 문씨의 경우, 그 시조를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로 묘사하며, 가계를 통해 하늘부모님과의 특별한 인연을 강조한다. 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韓蘭)은 하늘의 명을 받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 질서를 바로 세웠다고 전해지며, 후손들에게 천손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이는 한민족의 뿌리가 단순히 혈통을 넘어 신적 섭리와 맞닿아 있음을 시사한다.
한민족의 사명과 정체성
결국 한민족은 창세 이후 이어진 섭리 속에서 하늘부모님께 예비된 민족으로 형성되어 왔다. 하늘을 숭배하는 신앙 전통과 제천 의례, 천손 사상, 그리고 하늘과 연결된 계보 전승은 모두 오늘날까지 이어진 민족적 자의식의 뿌리가 되었다. 이는 한국이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민족이 아니라, 보편 인류사의 맥락 속에서 독특한 사명을 지닌 민족임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2025-09-14 16:5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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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민족 중심 서사의 총론과 신앙적 전제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그 선택받은 여정]
◆하늘과 함께 걷는 한민족 선민 서사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의 프롤로그는 한민족의 정체성과 사명을 중심으로, 역사와 신앙, 미래적 비전을 통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인류 역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이고, 언제나 새로운 미래를 향해 흐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한민국은 오늘날 북한의 위협과 내외적 국가적 위기,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갈등, 기후환경 위기 등 복합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 프롤로그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특정 정치나 이해관계를 넘어 진정한 한민족의 미래와 평화를 이루는 길을 모색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민족은 오랜 역사 속에서 위기와 고난 속에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지혜를 구해 왔다. 민족마다 창조주를 부르는 호칭은 다르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우리 민족은 하늘, 한울님, 하느님, 하나님으로 그분을 불러왔다. 이러한 신앙적 전통을 통해 한민족은 천손의 후예로서 하늘과 연결된 신성한 존재로 자각하며, 언제나 하늘의 인도를 믿고 의지해왔다.
이 책의 프롤로그는 이 신앙적 뿌리를 중심으로 한민족의 대서사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을 넘어 하늘이 부여한 민족적 사명을 이루기 위한 위대한 여정임을 보여준다.
또한 창조주 하늘부모님은 태초의 계획 속에서 인간을 창조하고, 생육과 번성을 통해 인류 대가족을 이루고자 했음을 소개하고 있다. 인간 시조의 타락 이후, 하늘부모님의 섭리는 이스라엘과 기독교를 거쳐 한민족에게 이어졌고 독생자의 역사적 사명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 속에서 한민족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게 이 책의 설명이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늘의 뜻을 받들어 평화와 정의, 사랑을 실현하는 선민으로서의 한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프롤로그에서는 한민족이 하늘부모님과의 깊은 신앙적 연결 속에서 형성해 온 천손 사상과 제천의식, 독특한 문화와 종교적 전통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민족적 자부심과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정체성은 단순한 내적 가치가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윤리와 도덕, 공동체적 삶의 기준으로서 작용하며, 한민족 구성원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할 것이다. 나아가 한민족은 외세의 침략과 갈등 속에서도 평화와 공의를 지켜온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 대한민국과 세계 속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갖춘 민족임을 이 책은 상기시키고 있다.
프롤로그는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남북통일과 세계 평화 실현을 중심으로 한민족은 단지 자신들의 복리를 넘어 인류 전체에 기여할 책임과 사명을 부여받은 선민임을 천명한다. 이러한 사명은 한민족의 문화적·종교적 전통을 세계에 전파하고,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늘부모님의 뜻을 중심으로 한 통합적 비전은 현대사회의 갈등과 문제를 극복하고, 국민들에게 도덕적·윤리적 기준과 공동체 의식을 재확립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고 책은 강조한다.
결국 이 책의 프롤로그는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가 단순한 역사 서술이 아니라, 하늘과 연결된 민족적 정체성, 과거와 미래를 잇는 사명, 세계 평화와 인류 발전을 위한 비전을 포괄하는 서사임을 보여준다. 한민족 구성원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선민으로서 역사적 사명을 자각하고 실천함으로써 국가적 자부심과 민족적 자긍심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신통일한국과 신통일세계라는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2025-09-14 16:5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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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 천주평화연합 한국회장 취임
김석진(사진) 천주평화연합(UPF)및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한국회장이 10일 취임했다.
김 신임회장은 이날 오후 경기 가평 청심국제청소년수련원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지난 20년간 천주평화연합이 전 세계 150여 개국에서 평화대사 운동과 피스로드 등을 통해 화합과 평화의 비전을 확산시켜 왔다”며 “앞으로 2027년까지 1만명의 신규 평화대사 위촉과 미래세대 통일교육을 활성화해 자유민주적 평화통일 기반을 튼튼히 다져 나가겠다”고 밝혔다.
김 신임회장은 전남대를 졸업한 후 조선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고려대 정책과학대학원 과정을 수료했다. 민주평통 상임위원, 서울시 공무원 교육원 교수, 남산시민대학 학장과 더불어 가정연합에서 본부 총무국장, 교구장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천주평화연합과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은 김 회장 취임을 계기로 △전국 평화대사 조직 강화 △청년·대학생 통일 아카데미 확대 △지역 사회 기반의 통일 담론 확산 △국내외 통일기반 조성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2025-09-10 20: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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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총재 추모 13주기 기념 특별기도회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가정연합)은 5일 ‘문선명 천지인참부모 천주성화’ 13주년을 사흘 앞두고 경기 가평군 청심평화월드센터에서 한국, 일본, 미국, 유럽, 아시아 등 중심 신도 3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선명 총재 추모 13주기 특별기도회를 개최했다.
6일 가정연합에 따르면 ‘화목과 화평을 중심한 새시대 새역사 출발 기도회’라는 제목으로 열린 기도회는 효정찬양, 말씀, 화목과 화평을 위한 합심기도 등의 특별 기도회와 함께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는 ‘천심원 특별 철야정성’으로 진행됐다.
두승연 가정연합 세계선교본부장은 “우리의 작은 실천 하나하나가 모여 가정과 교회, 직장과 사회에 화목과 화평의 역사를 만들어 낼 때, 비로소 참된 목표를 이루어 낼 수 있다”면서 “서로를 용서하며 평화를 위해 헌신하자”고 말했다.
송용천 한국협회장은 “하늘은 순결한 신앙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길 명령하고 있다”고 전제하며 “본질로 돌아가는 영적 쇄신에 나서자”고 강조했다. 이어 송 회장은 교단 재정 운영에 대해 “투명하게 운영하는 구체적인 제도 개혁에 착수할 것이며, 공정하고 합리적인 인사 시스템 역시 강화할 것”임을 강조했다.
가정연합 측은 “최근 야기된 특검 이슈와 사회적 염려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면서 “이를 통렬한 성찰과 쇄신의 계기로 삼으며 사회와 국가, 세계 앞에 종교 본연의 역할을 더욱 책임있게 이행하자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가정연합은 또 “자국중심주의와 더불어 세계적인 대립과 갈등이 만연한 상황 속에 대한민국이 시련과 위기를 극복하고 더 큰 번영과 발전을 이루어 하늘이 소명한 한반도 안정과 세계 평화의 중심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특별기도 정성을 모으는 데도 뜻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창립 71주년을 맞은 가정연합은 지난 4월 천원궁 그랜드 오픈을 마친 데 이어 최근 세계선교본부, 중앙행정원, 미래인재양성원 3체제로 조직 개편을 단행하고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 이상 실현을 목표로 순결한 참가정, 남북통일, 세계평화 운동을 펼쳐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2025-09-12 1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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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생녀 탄생 통해 불평등·가정붕괴 근본적 해결방안 제시”
◆다시 읽는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4일 이 책에 따르면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위기 속에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지혜를 구해왔다. 여호와, 알라, 상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 창조주는 인류와 세계를 창조하고 이끌어왔다. 오늘날에는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도록 길잡이가 되는 부모와 같은 존재, 즉 ‘하늘부모님’으로 한민족에게 나타나 인류와 민족의 운명을 인도한다. 하늘부모님의 뜻은 아담과 해와의 타락 이후 인류의 두 번째 시조라 할 수 있는 독생자와 독생녀를 통해 인류 대가족을 이루고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는 데 있다. 책은 이런 역사적·신앙적 뿌리를 되짚으며 한민족이 세계 평화를 이끌 선민임을 선언한다.
한민족은 천손 사상과 제천의식을 통해 하늘과 깊이 연결됐다. 한씨(韓氏) 왕조와 독자적 문화, 종교 전통을 형성해왔다. 이런 역사적·문화적 자산은 민족적 정체성과 국가적 자부심을 강화하며,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평화와 문화를 선도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아울러 하나님의 여성적 측면을 나타내는 ‘어머니 하나님’의 실체 현현과 독생녀의 탄생을 통해 현대 사회가 직면한 불평등과 가정 붕괴, 세대·남녀 간 갈등 등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책은 제시하고 있다. ‘어머니 하나님’은 하나님 안의 여성적 성품을 대표하며, 사랑과 보살핌으로 인류와 가정을 지키는 존재다.
이 책은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한민족의 모든 구성원에게 도덕적 기준과 윤리적 가치, 공동체 의식을 제공하며 남북 평화 통일과 세계 평화 실현의 비전을 선포한다. 통일된 한반도는 세계 평화의 상징이자 문화와 가치의 중심이 되며, 한민족은 인류를 위한 영적 지도력과 문화적 리더십을 발휘할 민족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민족적 자부심과 정체성, 도덕적 가치, 미래 비전, 국제적 위상 강화라는 다층적 의미를 지닌다. 하늘부모님이 선택한 한민족은 선민으로서 사명을 자각하고, 평화와 조화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중대한 시점에 서 있다.
한민족의 기원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다. 하늘부모님이 예비한 민족으로서의 신앙과 문화 속에서 참된 의미가 드러난다. 하늘부모님은 천지창조 이후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고자 섭리 역사를 펼쳤으며, 아담과 해와의 후손 가운데 동쪽으로 향한 셈족 일부가 한반도에 정착하여 한민족의 뿌리를 이뤘다. 이들은 ‘한씨 왕조’를 형성하고, 고조선과 이후 한반도의 여러 왕조로 이어지는 민족적·종교적 전통을 세워나갔다.
한민족은 하늘부모님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천의식을 통해 평화와 풍요를 기원하고 천손 사상을 중심으로 가족과 사회의 화합을 이루는 문화를 발전시켰다. 단군신화와 홍익인간 사상은 이러한 신앙과 민족성을 상징하며, 남녀 신화를 통해 하늘부모님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모시는 전통도 전해 내려왔다.
이 밖에도 한민족은 천문과 자연을 관찰하며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고자 했다. 첨성대와 같은 유적은 이러한 과학적·종교적 열망을 잘 보여준다. 한민족의 문화와 신앙은 하늘부모님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평화와 공존, 공동체 의식을 지향하면서 이어진 찬란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하늘과 인간, 그리고 한민족
한민족의 역사는 단순한 사건 기록이 아니다. 하늘부모님의 뜻과 인류의 평화 염원이 담겨 있다. 역사 속 다양한 사상과 종교에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하늘의 대신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대망사상(待望思想)이 드러나는데, 한민족의 근본 정서로 자리 잡은 것이다. 삼국시대 신라에서 시작된 정토사상은 고통 없는 이상세계를 추구했고, 미륵불은 미래의 구세주로서 민중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이어진 미륵 신앙은 절대자를 통한 구원의 염원이 한민족 정신의 중심임을 보여준다.
책에 따르면 한민족은 유교 성인을 통해 하늘의 뜻을 인간 세상에 구현하고자 했다. 공자와 성왕들은 도덕과 사회 질서를 세우며 평화로운 삶을 이끌었고, 한민족은 이를 따라 윤리적 생활과 공동체 의식을 발전시켰다. ‘정감록’과 ‘격암유록’ 등 예언서는 혼란한 시대 속에서 성군의 출현과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민중의 열망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앙적 기대는 한민족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사회적 연대의 힘을 제공했다.
19세기 동학과 천도교는 하늘을 모시며 사회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고자 했다.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사회적 약자 보호와 항일·신문화 운동을 전개하며 하늘부모님 나라에 대한 염원을 구체적 실천으로 옮겼다. 한민족은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정(孝情), 부부간의 정절, 자녀 양육을 통한 사랑 실천으로 하늘부모님을 모시는 문화를 이어왔다. 신사임당, 심청, 춘향 등 역사와 설화 속 인물은 어려움 속에서도 윤리와 도덕, 순결과 사랑을 지키며 한민족 정신을 상징했다고 책은 서술한다.
한민족 전통과 신앙은 단순한 과거 문화가 아니라, 하늘과 연결된 마음,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신념, 어려움을 극복하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민족적 신명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한민족은 ‘백의민족’이라 불릴 만큼 순수와 평화를 사랑했으며, 하늘부모님을 모시는 제천사상을 바탕으로 도덕과 인류애를 중시해왔다. 일제강점기에도 흰옷을 입는 전통을 지킴으로써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며 외세에 저항했다.
역사적으로 한민족은 침략과 위기 속에서도 민족적 자주성을 굳건히 수호해왔다.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광개토대왕, 고려의 강감찬, 조선의 이순신 장군 등은 하늘부모님께 기도하며 탁월한 지혜와 용맹으로 나라를 지켰다. 승병과 의병은 자발적으로 외세에 맞서 싸웠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국난 속에서 민중의 힘과 용기를 드러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인 이회영, 안중근, 유관순, 신채호 등은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과 지성을 아끼지 않았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에 따르면 한민족은 뛰어난 창조성을 발휘하며 과학과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보여줬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에서 비롯됐으며, 천문학과 인쇄술, 의학, 농업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을 이뤘다. 측우기와 자격루, 팔만대장경과 금속활자 인쇄술 등은 한민족의 실용적 지혜와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한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아름다움과 절제를 추구하는 민족의 심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민족의 역사는 하늘과 인간 그리고 한 민족이 맺어온 관계 속에서 참된 의미가 드러난다. 이 역사 속에서 ‘독생녀’의 강림과 역할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책에 따르면, 독생녀는 하늘부모님이 인류와 민족을 구원하고 창조이상을 완성하기 위해 특별히 보낸 존재다. 단순히 개인적 영웅 서사가 아니라, 민족과 인류를 아우르는 역사적 사명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지닌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독생자’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민족 중에서 독생녀가 태어나 하늘의 계획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영적 각성운동(Awakenings)은 평신도 중심 부흥과 해외선교 열기를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다. 한민족은 스스로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신앙 기반을 마련했고,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은 회개와 성령 체험을 강조하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한민족은 주체적으로 전도와 선교를 수행하며, 독생녀와 재림메시아를 맞이할 민족적 준비를 갖추었다. 이 역사는 단순한 신앙 경험을 넘어, 재림과 구원의 희망을 품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참부모의 ‘어린양 혼인잔치’
책에 따르면 1943년 1월6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난 독생녀 한학자 총재가 바로 이 역할을 수행했으며, 선조들의 공적과 기독교적 기반 위에서 하늘부모님의 뜻을 실현하고 인류를 하늘가정으로 회복시키는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한 총재는 어린 시절부터 절대신앙과 절대사랑, 절대복종의 환경 속에서 책임을 다하도록 준비되었다. 그녀의 탄생 자체가 수천 년에 걸친 하늘부모님의 섭리와 예수님께서 이루지 못한 기대 위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임을 강조한다.
성서적으로 보면 예수는 2000년 전에 탄생해 이루지 못한 사명, 즉 인류 구원의 완성과 하나님의 뜻 완성을 위해 다시 와야 한다. 다시 오는 존재를 재림메시아라고 한다. ‘인류 구원의 완성을 위해 다시 등장하는 구원자’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라는 표현이 나온다. 어린양은 예수를 상징하며, 혼인잔치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하나 되는 상징적 사건을 의미한다.
책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독생녀의 등장이 하늘부모님과 인류를 연결하는 새로운 출발점이자 예수가 이루지 못한 사명을 이어가는 계기가 된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초림 독생녀가 재림메시아로 온 문선명 총재와 1960년 ‘어린양 혼인잔치’를 올리며 참부모로 현현하게 된다. 어린양 혼인잔치는 단순한 결혼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류가 하나 되는 완전한 회복과 축복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하늘가정을 회복하고, 인류를 하늘부모님의 자녀로 되돌리는 것이 핵심이다.
이 책에서 사용되는 ‘하늘부모님’ ‘독생녀’ ‘재림메시아’와 같은 용어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문자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신인(神人) 합일에 관한 사상은 여러 종교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다. 예수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하나님)를 보았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특정 용어의 언어적 낯섦에 얽매이기보다 그것이 지닌 사명적 의미와 구체적 실천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독생녀→독생녀 한학자 총재→참부모 성혼’은 하늘부모님의 섭리가 인류 역사 속에서 연속적·체계적으로 구현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연속성은 한민족의 선민적 사명이 역사적·신앙적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핵심적 장치로 기능한다. 오늘날 한민족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라볼 때 독생녀의 탄생과 역할은 단순한 전설이나 신화가 아니라 하늘의 섭리와 인간 역사의 만남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가 제시하는 결론이다.
2025-09-05 09: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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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천 가정연합 21대 한국협회장 취임
송용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 전 세계회장이 27일 가정연합 21대 한국협회장으로 취임했다.
송 신임 협회장은 이날 문연아 선학학원 이사장, 문훈숙 효정한국문화재단 이사장, 두승연 세계선교본부장, 도현섭 미래양성원장, 이기성 천심원장, 조만웅 원로목회자회장과 가정연합 전국 목회자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용산구 한국본부 대강당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신앙과 삶의 터전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유례없는 시련의 한복판에서 막중한 소임을 맡게 돼 무한 책임감을 느낀다”며 위기 극복과 새로운 도약을 위한 세 가지 핵심 방향으로 △위기대응 확립 △심정 공동체 상처회복 △조직문화 개선을 제시했다.
송 협회장은 국민대를 졸업하고 미국 통일신학대학원(UTS) 명예신학박사를 취득했다. 해외선교사 활동을 시작으로 오세아니아, 유럽, 일본 등지에서 가정연합 대륙회장 및 천주평화연합(UPF) 대륙의장, 학교법인 선학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2025-08-27 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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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유지재단 제22대 김문식 신임 이사장 취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유지재단(이하 통일재단)은 26일 제22대 김문식 신임 이사장(58)이 취임했다고 밝혔다.
김 이사장 취임식은 이날 문연아 학교법인 선학학원 이사장, 두승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계선교본부장, 김영석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한국부회장, 김종관 효정글로벌통일재단 이사장, 김고은 세계평화여성연합 회장 등 산하 기관과 통일그룹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용산구 통일빌딩 대강당에서 열렸다.
김 이사장은 취임사에서 “우리가 직면한 시대는 기술의 발전과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인간 소외와 정신적 빈곤이 깊어지는 전례 없는 변화의 시기”라며 “이러한 도전 앞에서 재단은 단순히 기업을 넘어, 인류 사회에 영속적 가치를 기여하는 사명 공동체임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재임 중 경영지침으로 △설립자 문선명·한학자 총재가 강조한 ‘위하여 사는 삶’의 기업가 정신 구현 △변혁적 리더십을 통한 조직 역량 극대화 △윤리적 리더십 기반의 투명하고 공정한 경영 등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두승연 세계선교본부장은 축사에서 “김 이사장은 종교 지도자로서의 영성과 경영자로서의 능력을 모두 갖추기 위해 노력해 온 분”이라며 “통일재단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하늘 섭리를 위해 경제적 측면에서 뒷받침하고 지원하는 사명을 다해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 이사장은 건국대 사학과 석사를 거쳐 미국 UTS 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북미2 대륙회장 및 천주평화연합(UPF) 의장 등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통일재단은 통일그룹 기업들을 총괄하며 모나용평, 일신석재, 세일여행사, 일화 등 14개 계열사를 두고 있다.
2025-08-26 16:4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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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승연 가정연합 세계선교본부장 취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은 24일 경기 가평 HJ천주천보수련원 대성전에서 두승연(사진) 세계선교본부장 취임식을 가졌다고 밝혔다.
가정연합 임직원과 섭리기관장, 대륙별 지도자, 신한국 교구장 등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취임식에서 두승연 신임 세계선교본부장은 “기존의 외적 성장에서 질적 변화를 의미하는 내적 발전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새로운 시대에 사랑으로 화목하고 세상을 화평케 하는 ‘다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회복하고, 참사랑과 참가정의 가치를 우리 공동체에서 먼저 느끼고, 이를 통해 사회에 증명해 보일 수 있는 비전을 함께 만들어 나가겠다”고 했다. 두 본부장은 원광대 건축과를 나와 통일신학대학원 신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미국 대륙회장 비서실장, 세계회장 특별보좌관, 미국 가정연합 교구장, 부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날 행사는 서인국 세계선교본부 사무총장의 사회로 이기성 천심원장의 감사기도, 호리 마사이치 신아시아태평양 대륙회장의 축사, 다나카 도미히로 신일본 협회장의 꽃다발 봉정, 두 본부장의 말씀 및 축도, 데미안 던클리 신미국 대륙회장의 억만세 삼창 순으로 진행됐다.
호리 마사이치 대륙회장은 축사에서 “훌륭한 인품과 인격을 소유한 두 본부장은 새로운 시대에 꼭 필요한 지도자”라며 “새로운 체제와 함께 화합과 화평의 미래를 만들고 새롭게 세워진 두 본부장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힘차게 나가자”고 당부했다.
가정연합은 세계선교본부 외에도 비전 2027 승리를 위해 중앙행정원 김은상 원장, 미래인재양성원 도현섭 원장을 임명하며 조직 체제를 새롭게 정비했다.
2025-08-24 16:5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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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자유, 전세계가 지켜야 할 보편적 가치”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서 무고한 신앙인들에 대한 잔혹한 폭력에서부터 차별과 두려움이라는 조용한 사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번 콘퍼런스가 박해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등불이 되기를, 우리의 목소리와 연대 행동이 신앙의 자유가 진정으로 보편화되는 날을 앞당기기를 소망합니다.”(타지 이브라힘 하마드 천주평화연합 세계회장)
20일 서울 송파구 롯데호텔월드에서 열린 ‘2025 세계 종교 지도자 콘퍼런스’는 미국, 유럽, 남미, 아시아 종교지도자 60명 등 국내외 종교지도자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종교 자유에 대한 침범: 세계적 동향 및 사례연구’ 등을 주제로 논의가 오갔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종교 자유 침해에 대한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종교 자유의 보편적 가치와 중요성을 되새기기 위해 마련된 이날 콘퍼런스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등 전 세계 종교 지도자 9명의 초종교 합수식을 시작으로 하마드 천주평화연합(UPF) 세계회장의 개회사, 미국 백악관 신앙 자문위원장인 폴라 화이트 목사의 축사, 사례연구 등이 진행됐다.
화이트 목사는 콘퍼런스 개최를 축하하는 영상 메시지를 통해 “이 중요한 순간에 각국에서 모인 종교지도자들과 종교 자유 전문가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종교의 자유는 나라들 간 평화의 기초이기 때문에 이런 모임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하나님의 영감 속에 세워진 나라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예배할 권리를 언제나 보호해왔다”며 “미국은 일본과 한국 같은 가까운 친구와 동맹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가 종교의 자유를 지키길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화이트 목사는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의해 백악관 신앙사무실(담당)에 임명돼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이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을 이뤄 세계 모든 나라와 신앙 공동체가 평화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고 밝혔다.
‘종교 자유에 대한 침범: 세계적 동향 및 사례연구’ 기조연설을 맡은 프랑스 출신 패트리샤 듀발 변호사는 “일본은 모든 종교를 인류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잘못 이해하거나 인류를 지배하려는 정치 체제로 보는 잘못된 시각이 있다”고 일본 내 종교 자유 침해의 심각성을 꼬집기도 했다. 이어 토론 진행을 맡은 프랑코 파뮬라로 UPF 캐나다 회장은 마크 번즈 목사, 자틴더 싱 비르디 영국 종교 간 네트워크 공동의장을 언급하면서 “기독교와 시크교는 종교가 다르지만, 종교적 자유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서 공감대를 가지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며 “종교의 자유는 단순히 미국과 한국 등 특정 나라에서만 지켜질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라고 말했다. 번즈 목사도 “트럼프 대통령은 종교의 자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며 “모든 종교에 대한 자유는 보장받아야 한다”고 했다. 21일에는 ‘분열된 땅을 치유하기 위한 하나 됨: 지금 왜 한국이 중요한가’란 주제로 토론이 진행된다.
2025-08-20 21:3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