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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와 동고동락 70년… 종교에서 사회공헌 플랫폼으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화
◆프롤로그:70년의 여정이 남긴 것 2025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이 창립 71주년을 맞았다. 1954년 한국전쟁의 잔해가 채 가시지 않은 서울에서 출발한 이 조직은 70여
2025-12-23 11: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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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구원사로 읽는 선민(選民) 이야기 <1>‘독생자’로 시작된 구원사
◆독생자는 구원의 끝이 아니라 방향이었다
기독교 구원사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하나의 선언이 놓여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 이 문장은 신앙 고백인 동시에 인류 구원사가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구조적 진술이다.
기독교는 왜 수많은 예언자나 의인 가운데서 ‘독생자’라는 단 하나의 존재를 통해 구원의 문을 열었을까.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창조와 타락, 회복과 완성이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 왜 ‘하나’가 먼저여야 했는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유대 전통에서 메시아는 집단적 기대의 산물이었다. 다윗 왕조의 회복, 율법의 완성,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맥락 속에서 메시아는 ‘민족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이 기대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넘어선다. 그는 왕좌에 오르지 않았고, 군대를 이끌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아버지”를 말했으며, “아들”로 불렸다. 여기서 기독교 구원사는 정치적·역사적 차원에서 그 근원을 관계의 회복이라는 더 깊은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독생자’라는 표현의 핵심은 관계다. 독생자는 대체 불가능한 유일성을 뜻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그 단절을 건너갈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인식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다시 말해, 독생자는 하나님 편에도, 인간 편에도 동시에 설 수 있는 존재로 요청되었다. 기독교는 인간의 타락을 도덕적 실패라기보다 존재 질서의 붕괴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그 회복 역시 제도나 율법의 개선으로는 불가능하다. 구원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사건’이어야 했고, 그 사건은 한 인격 안에 응축되어야 했다. 그래서 구원사는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독생자가 곧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구원사는 독생자로 ‘시작’되었지, 독생자로 ‘완결’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십자가와 부활은 결정적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사도행전 1:11)는 약속을 남긴다. 이는 독생자 사건이 완성된 종결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다음 단계를 향해 열려 있는 서두였음을 암시한다.
예수 자신도 자신의 사역을 ‘완결’의 언어로만 말하지 않았다. 그는 혼인 잔치를 비유로 들었고, 신랑과 신부의 이미지를 사용했으며, 성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약속했다. 이는 구원사가 단독적 주체에 의해 종결되는 구조가 아님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다시 말해, 독생자는 구원사가 출발하기 위해 요청된 필수 조건이었다.
기독교가 독생자로 구원사를 시작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식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한 존재를 통해 모든 것을 거는 방식이었다. 동시에 이 선택은 구원사적 긴장을 남긴다. 왜 시작이 독생자였는가, 그리고 그 시작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독생자는 신비로 남고 구원사는 교리로만 굳어지기 쉽다.
이 질문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독생자가 구원의 끝이 아니라 방향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끝’이란 완결 내지 종결을 뜻한다. 예수로 구원은 이미 완전히 끝났고, 이제 남은 것은 개인의 믿음뿐이라는 이해다. 반면 ‘방향’이란 완결이 아니라 지향성이다. 예수 사건은 구원을 종결했다기보다 인류가 나아가야 할 구원의 길을 역사 속에 열어 보인 사건에 가깝다. 그래서 ‘끝’이라고 말할 때 신앙은 확신이 되지만 질문을 잃을 위험이 있고, ‘방향’이라고 말할 때 신앙은 역사 속 책임을 요구하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기독교 구원사는 ‘왜 그 시작이 홀로 완성되지 않았는가’라는 다음 단계의 사유를 우리에게 요청하기 시작한다.
2026-01-27 10: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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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보다 인성이 먼저”… 글로벌 평화·리더십 교육 모델 구축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한국 사회에서 종교적 배경을 지닌 교육기관은 오랜 기간 논쟁과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논쟁과 별개로, 어떤 학교들은 오랜 기간 축적된 교육 실험과 성과로 교육 현장에서 독자적 모델을 구축해 왔다. 가정연합 산하 교육기관 네트워크가 그 사례다.
경복초등학교, 선화예술중·고등학교, 청심국제중·고등학교, 선정중·고등학교, 선문대학교, 선학 UP대학원대학교 등으로 구성된 이 교육 네트워크는 반세기 넘게 ‘인성·평화·리더십·국제 감각’을 공통된 교육 철학으로 유지해 왔다. 내부 집계에 따르면 이들 기관은 현재까지 약 3만 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부 졸업생들은 정치·외교·과학·문화예술·국제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교육은 경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준비
가정연합 계열 교육기관의 교육 철학은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평화를 위한 인간교육’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된다. 전쟁과 분단의 경험 속에서 출발한 이 철학은 학업 성취 중심 교육보다는 도덕성, 사회적 책임, 타문화 이해 능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커리큘럼이 설계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교육 전문가들은 이 철학이 이후 일본과 미국, 아시아 개발도상국 등으로 교육기관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국제화 전략과 결합했다고 분석한다. 이로 인해 해당 교육 네트워크는 한국적 교육 가치와 국제 교육 기준이 결합된 사례로 일부 학술 연구에서 언급되고 있다.
교육 평가 전문가들은 이들 학교의 공통 요소로 △외국어 교육 비중 확대 △예술·체육·과학·봉사 활동의 병행 강화 △국제교류 및 해외 현장 체험 시스템 구축 △학업 성취도보다 정서적·사회적 성숙을 주요 교육 목표로 설정한 점 등을 꼽는다.
인성이 먼저다
가장 논쟁적인 지점은 인성교육과 가시적 성과 간의 관계다. 일부 교육 평론가들은 “평화·리더십·봉사라는 교육 목표가 다소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학생들의 진로 선택과 국제적 역량 형성으로 이어진 구체적 사례들이 축적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선화예술중·고등학교의 경우 국제 콩쿠르 수상자 배출, 해외 공연 활동, 국제 예술 교류 프로그램 참여 등을 통해 문화예술계에서 일정 수준의 인지도를 확보해 왔다. 또한, 선학 UP대학원대학교의 모델 UN 프로그램, 선문대학교의 국제기구 인턴십 연계 과정, 청심국제중·고교의 의무화된 해외 봉사·교류 프로그램 등은 인성 중심 교육이 국제 활동 경험과 진로 설계로 연결되는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된다.
교육적 성과인가, 종교 네트워크 확장인가
반면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일부 학계와 언론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종교 기반 교육 철학이 충분히 개방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평화·통일 담론이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지 않는가
-국제 캠퍼스 운영과 인재 양성 프로그램이 일반적인 글로벌 교육 산업과 본질적으로 다른가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평가 중 하나는 “해당 교육 네트워크는 축소되거나 소멸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제도화·체계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들 학교에서 근무하거나 강의를 맡아온 비(非)통일교 출신 교사·교수들 가운데서는 “수업과 학교 운영 전반에서 종교적 색채가 전면에 드러난다고 느끼기 어렵다”, “일반 사립학교의 교육 과정과 큰 차이를 체감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반세기 교육 실험, 그 이후는
교육 전문가들은 가정연합 계열 학교들을 특정 종교의 부속 기관으로만 보기보다, 한국 사립교육 실험사의 한 사례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평화·리더십 교육 모델은 AI 기술 확산, 국제 이주 증가, 다문화 사회 전환이라는 환경 변화 속에서 향후 한국 교육의 하나의 대안 모델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한 교육학자는 “가정연합 교육기관의 반세기에 걸친 교육 실천은 이미 완결된 성과라기보다는 현재도 진행 중인 장기 실험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이 실험은 교육·인성·국제 역량을 결합한 하나의 교육 모델로서, 이미 한국 사회와 교육 현장에서 분석과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향후 한국 교육 담론 속에서 그 성격과 가능성이 보다 분명하게 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2026-01-26 17: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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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가치관·인성 갖춘 인재 양성이 우리의 목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선학학원 본관에서 만난 문연아 이사장의 얼굴에는 교육자로서의 확고한 신념과 따뜻한 온기가 묻어났다. 2023년 7월 학교법인 선학학원 제12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선문대학교를 비롯해 8개 교육기관을 이끌며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사회 전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투자”라는 철학을 일관되게 실천해 왔다.
건학이념을 실천하다
“그동안 선학학원은 애천, 애인, 애국의 건학이념을 바탕으로 소통과 화합을 통한 공동체 정신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구성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도록 소통, 화합, 겸손으로 학교 발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문 이사장은 취임사에서 밝힌 이 약속을 하루도 잊지 않고 실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생각하는 교육의 핵심은 선학학원의 건학이념과 맥을 같이한다. 하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동체를 생각하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인재 양성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학업 성취도가 높은 학생이 아니라, 올바른 가치관과 인성을 갖춘 인재를 키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교육의 본질
“요즘 많은 교육기관이 성과와 실적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학생 한 명 한 명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키워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문 이사장은 인터뷰 내내 ‘사람’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선문대학교, 선화예술고등학교, 선정고등학교, 선정국제관광고등학교, 선정중학교, 선화예술중학교, 경복초등학교, 선화유치원 등 8개 교육기관을 운영하는 선학학원은 설립 초기부터 ‘전인교육’을 교육 철학의 근간으로 삼아왔다.
문 이사장은 “학업 성취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학생들이 바른 인성과 사회적 책임감을 갖추는 것”이라며, “우리 학원을 거쳐간 학생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면서도 이웃과 사회를 생각하는 리더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는 건학이념인 애인, 즉 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의 구체적 실천이기도 하다.
미래를 준비하는 혁신적 교육 환경
급변하는 시대에 발맞춰 선학학원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문 이사장은 최근 도입한 스마트 교육 시스템과 창의융합 교육 프로그램에 대해 자부심을 드러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갈 우리 학생들에게는 암기식 교육이 아닌, 스스로 사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AI 기반 맞춤형 학습 시스템을 도입했고, 학생들이 실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 수업을 확대했습니다.”
특히 그는 교원 역량 강화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갖춰도 결국 교육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교원입니다. 우리는 교원들이 최신 교육 트렌드를 학습하고 전문성을 높일 수 있도록 정기적인 연수와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주체인 교원들이 성장해야 학생들도 성장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소통과 화합, 공동체 정신의 실천
문 이사장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핵심 가치는 ‘소통’이다. “교육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 교직원, 학부모, 그리고 지역사회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함께 호흡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지시나 명령이 아닌, 진정한 소통과 화합을 통해 모두가 행복한 교육 환경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선학학원은 정기적인 간담회와 소통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학생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교원들의 고충을 함께 해결하며, 학부모들과 긴밀히 협력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열린 자세로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리더십의 덕목도 바로 겸손입니다.”
글로벌 인재 양성을 위한 비전
문 이사장은 선학학원이 글로벌 인재 양성의 요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선문대학교를 중심으로 해외 우수 교육기관과의 교류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글로벌 시대에 걸맞은 역량을 갖추면서도 우리의 가치와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균형 잡힌 인재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특히, 선화예술고등학교와 선정국제관광고등학교 등 특성화된 교육기관을 통해 학생들의 다양한 재능과 적성을 발견하고 키워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 “모든 학생이 같은 길을 걸을 필요는 없습니다. 각자의 재능과 꿈에 맞는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교육자로서의 소명
문 이사장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제게 교육은 직업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한 명의 학생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 일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천, 애인, 애국의 정신으로 하늘과 사람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인재들을 키워내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그는 교육이 개인의 노력만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학생과 교사, 학부모, 직원, 지역사회가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의 과정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했다. 애천·애인·애국의 정신을 근간으로 선학학원이 그려가는 교육의 미래가 우리 사회 전체의 밝은 내일로 이어지길 기원한다.
2026-01-26 17: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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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넘어 이어지는 평화 교육 ‘청년 플랫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급변하는 국제 질서와 사회 구조 속에서 ‘다음 세대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논의돼 온 핵심 의제다. 정치적 양극화, 세대 간 갈등, 국제 분쟁과 전쟁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청년이 어떤 가치와 역량을 갖춰야 하는가는 전 세계 교육계가 공통으로 마주한 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조직 중 하나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과의 가치적 연대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단법인 세계평화청년학생연합(이하 YSP)과 국제 NGO인 IAYSP다. 이들 단체는 수십 년에 걸쳐 평화·인성·리더십 교육과 국제 청년 연대를 목표로 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교육 철학의 뿌리: ‘통일·가정·평화 그리고 인성’
가정연합의 청년 교육 철학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정리된다. 첫째는 인성 중심 교육(Character Education)이다. 정직, 책임,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 의식을 핵심 가치로 삼아 윤리적 성숙을 교육의 중심 요소로 둔다.
둘째는 평화 중심 사고(Peace Formation) 교육이다. 경쟁 중심 사고보다 상생과 협력, 갈등 해결 역량을 갖춘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한다. 셋째는 리더십 기반 실천 교육(Leadership & Service-Based Learning)으로, 지식 습득보다 사회적 책임을 행동으로 구현하는 것을 강조한다.
교육 연구자들은 이러한 접근이 학력·성취 중심의 기존 교육 모델과 달리 정서·가치·공동체 감각을 중시하는 ‘비인지형(Non-Cognitive) 교육 모델’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비인지형 교육은 지식 암기나 문제 해결 능력 같은 인지 역량을 넘어 성품·태도·감정 조절·행동 양식을 함께 개발하는 교육 방식으로, 최근 글로벌 교육 담론에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YSP와 IAYSP의 조직적 특징
YSP와 IAYSP는 단순한 학생 동아리 성격을 넘어 국제 교류·봉사·윤리 교육·사회 혁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청년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요 활동 구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시아·아프리카·남미·유럽 등 약 70여 개국을 아우르는 글로벌 캠퍼스 네트워크를 운영한다. 둘째, 국제 봉사 활동과 청년 외교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일부 프로젝트는 국제기구·정부·비정부기구(NGO)와 협력해 추진된다. 셋째, 가치·리더십 교육 워크숍을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토론과 프로젝트 수행을 중심으로 한 PBL(Project-Based Learning, 프로젝트 기반 학습)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교육 전문가들은 이러한 구조를 신앙 기반의 보편적 가치(Faith-Based Value)를 바탕으로 출범하여 현재는 국제 사회 활동형 NGO 모델로 진화한 사례로 분석한다.
‘10만 청년 평화 리더 양성 프로젝트’
최근 가장 주목받는 사업은 ‘10만 청년 평화 리더 양성 프로젝트’다. 이 프로그램은 단순 참여형 캠페인이 아니라, 단계별 교육 시스템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참가자를 자원봉사자 수준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화형 리더’로 육성하는 데 있다. 외부 전문가들은 이 사업의 의미를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한다. 하나는 청년이 주도하는 국제 교류·토론·평화 활동의 장을 제공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활동 성과가 국제 인증이나 정책 기여 등 정량적 지표로 검증될 필요가 있다는 과제가 병존한다는 점이다.
“평화는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프로젝트”
가정연합의 평화 철학을 공유하는 협력 기구들과 YSP·IAYSP의 청년 프로그램은 현재 진행형이며, 보편적 가치 교육을 넘어 실체적인 글로벌 시민 리더십 플랫폼으로 도약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평화를 말하는 것은 쉽지만, 평화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청년을 길러내는 일은 가장 어렵고 동시에 가장 의미 있는 과제”라고 평가한다. 이 같은 시도가 21세기 청년 교육 모델의 하나의 대안으로 자리 잡을지, 혹은 하나의 단체 활동 사례로 남을지는 향후 축적될 성과와 검증 결과가 말해줄 것으로 보인다.
2026-01-26 17: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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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정책으로 책임지겠다’…사회적 신뢰 회복 전면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은 26일 전국 목회자·공직자·신도들이 온·오프라인으로 참여한 가운데 ‘가정연합 성장위원회 정책과제 발표회’를 개최하고, 6개 분과(위원회)별 정책 로드맵을 공개했다. 이번 발표회는 지난 1월 7일 진행된 ‘사회적 신뢰 회복을 위한 준법 실천 선언식’의 후속 조치다.
송용천 한국협회장은 인사말에서 가정연합이 처한 현실을 위기 국면으로 진단하며 강도 높은 자기 개혁을 주문했다. 송 협회장은 “거짓이 없고 투명한 시대로 접어들었음에도 우리의 시스템은 여전히 과거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다”며, 이번 쇄신을 “과거를 탓하기 위한 개혁이 아니라 하늘 앞에 책임을 세우는 자기개혁”으로 규정했다.
특히 권위주의적 운영 방식에서 벗어나 데이터에 기반한 투명한 공유, 집단지성 중심의 현장 혁신을 핵심 원칙으로 제시하며, 조직 전반의 ‘환골탈태’를 요구했다.
이날 발표회에서 성장위원회 산하 6개 분과는 구체적 정책 과제를 제시했다. 기존의 관행·경험 중심 운영에서 벗어나 시스템·데이터·참여 중심 구조로 전환하겠다는 방침이다.
각 분과는 △청년 공직자 양성과 경제적 자립 지원, 의사결정 참여 확대(청년미래위원회) △지역사회 봉사와 공익 사업의 체계화를 통해 사회적 신뢰 회복(사회화위원회) △행정·전도 영역에 인공지능 기술을 도입해 데이터 분석 기반 맞춤 전략과 AI 챗봇을 활용한 스마트 목회 환경 구축(AI혁신위원회) △가가호호 순회 돌봄 시스템, 생애주기별 교육과 투명 행정(축복가정위원회) △데이터 기반 현장 맞춤형 전도 전략과 ‘성장 플랫폼’ 구축(전도교육위원회) △참부모론과 천일국 이념 학술 체계 정립을 통한 내부 신앙 강화(학술위원회) 등을 제시했다.
가정연합은 분과별 정책을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지속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어 제도와 시스템 차원에서 정착시킨다는 방침이다.
앞서 가정연합은 준법 실천 선언식에서 ISO 국제표준 기반의 감시체계를 도입해 상호 견제와 투명 경영을 강화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2026-01-26 16: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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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모평애장학원, ‘습관’ 주제 청소년 겨울 멘토링 캠프 개최
청소년들의 습관 형성과 성장을 돕기 위한 학습·진로·소통 중심의 맞춤형 멘토링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25일 원모평애장학원에 따르면 지난 17일부터 23일까지 6박 7일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청심국제청소년수련원에서 ‘2026년 겨울 티앤토(TE&TO) 멘토링 학습캠프’를 운영했다.
이번 캠프에는 대학생 멘토 17명과 중·고등학생 멘티 26명, 스텝을 포함해 총 49명이 참여했으며, ‘TE&TO 함께 만드는 습관, 성장하는 우리’를 슬로건으로 학습과 진로, 소통을 아우르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캠프의 핵심 주제는 ‘습관’으로, 참가자들이 일상 속 실천을 통해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학습 코칭은 멘토와 멘티를 1대2 또는 1대3으로 매칭해 영어와 수학 중심으로 진행됐으며, 1대1 진로 상담, 멘토 TED, 3대1 미니 TED 프로그램을 통해 멘티들이 자신의 진로와 고민을 구체적으로 탐색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이와 함께 추리게임, 체육대회, 화동회 등 공동체 프로그램을 통해 멘토와 멘티 간 자연스러운 소통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캠프 기간에는 미래세대의 인성과 가치관 형성을 위한 신앙교육과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강의, 단체 철야 정성 등도 함께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자신을 돌아보고 신앙과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김영석 원모평애장학원 사무총장은 “티앤토 캠프에서 형성된 좋은 습관과 사랑의 경험이 개인의 성장에 머무르지 않고 가정과 지역사회로 확산돼 ‘행복바이러스’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폐회식 영상에서는 6박 7일간의 활동을 담은 스케치 영상과 함께 모든 멘토와 멘티가 참여한 ‘좋은 습관’ 인터뷰가 상영돼 캠프의 여정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후 소감 발표에서는 대학생 스텝 1명과 멘티 2명, 멘토 3명이 참여해 각자의 성장과 나눔의 경험을 공유했다.
캠프는 조별 마지막 나눔을 진행한 뒤 마무리됐다.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멘토와 멘티가 나눈 따뜻한 사랑과 행복의 경험은 캠프 이후에도 각자의 가정과 지역사회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2026-01-25 14:4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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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통해 ‘돕는 사람’과 ‘도움받는 사람’이 하나로… 선순환 정착”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자원봉사애원 사무실에서 김고은 이사장을 만났다. 사단법인 자원봉사애원은 1994년 사회단체로 활동을 시작해 1996년 사단법인으로 등록된 공익법인이다. 약 30년간 문화예술복지를 중심으로 한 나눔과 아동·청소년 지원,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공헌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현재 회원 130여 명, 연간 평균 자원봉사자 700여 명이 활동하는 중견 시민단체로 성장했다. 김 이사장은 인터뷰에서 30년 가까이 이어온 봉사 활동의 성과를 돌아보며 지속 가능한 나눔 문화를 위해 비전을 제시했다.
이웃과 함께 걸어온 30년의 여정
애원은 ‘사랑의 정원(愛苑)’이라는 이름처럼 어려운 이웃의 마음을 보듬고 공감하며 사랑 가득한 사회를 만드는 취지로 설립됐다. 김 이사장은 “나눔을 실천하는 행위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이 연결이 쌓일 때 공동체는 변화한다”고 전했다. 애원의 초기 활동은 문화예술의 접근이 어려운 장애인·독거노인을 위한 ‘방문 공연 서비스’로 출발했다. 분기별로 20명의 애원문화예술단이 시설을 방문하는 작은 실천이었지만, 장애인 여행 지원, 공연배달 서비스, 자선공연, 장애인을 위한 음악회 등으로 확대됐다. 특히 장애인의 예술 지원이 보편화 되지 않았던 2000년대 초반, 장애인을 위한 ‘꿈씨음악회’를 개최하며 장애예술인과 비장애예술인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했다. 김 이사장은 “문화예술은 세대와 계층, 장애의 유무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힘이 있다”며 “애원은 예술을 통해 ‘돕는 사람’과 ‘도움받는 사람’이라는 경계를 허무는 ‘선순환 구조가 애원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애원의 활동은 문화예술복지로 특화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소외계층 아동·청소년을 초대하는 연말 자선 공연 ‘꿈과 사랑의 크리스마스 축제’는 애원의 대표 사업이다. 1997년부터 시작된 자선공연은 2025년에도 제28회를 맞아 성공적으로 개최되었으며, 현재까지 누적 관객수 38,000여 명이 참여했다. 장애 음악인과 오케스트라가 협연하는 ‘꿈씨음악회’는 2005년부터 지난 20년간 194명의 꿈씨연주자를 배출했다. 또한, 공연배달사업과 티켓 나눔을 통해 소외계층에게 예술 향유의 기회를 꾸준히 제공하며 음악과 예술을 매개로 연대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보건복지부 산하 공익법인으로서 자원봉사애원이 지역사회 복지 증진과 문화적 가치 확산에 기여해 온 역할을 잘 보여준다.
네 가지 핵심가치: L.O.V.E.
현재 애원은 지역사회 연계 봉사, 소외계층 문화예술지원, 취약계층 지원을 핵심 사업으로 운영한다. 이 모든 활동의 중심에는 애원의 네 가지 핵심가치인 ‘L.O.V.E.’가 있다. 김 이사장은 “우리는 먼저 듣는 것(Listen)에서 봉사가 시작된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의 작은 신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늘 귀를 열어두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열린 마음(Open Mind)이 없으면 봉사는 시혜가 되기 쉽다”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진짜 만남이 시작된다”고 덧붙였다. 또한 “도움을 받는 분들도 똑같이 존엄한 삶의 주체”라며 “그래서 애원은 상대를 가치 있는 존재로 존중하는 것(Value Other)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공감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며 “실행(Execute)이 애원의 봉사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단계”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가치는 기업·단체·개인과 수혜자를 연결하는 ‘꿈씨브릿지’ 사업을 통해 실제 현장에서 구현되고 있다. 애원은 이를 통해 봉사자 연계, 후원물품 전달, 긴급 지원 등을 적재적소에 연결하며 도움의 사각지대를 줄여가고 있다.
애원은 외부 회계감사를 통해 재정 투명성까지 확보하며 단체에 대한 신뢰를 꾸준히 쌓아왔다. 김 이사장은 “작은 단체일수록 투명성은 선택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운영 원칙은 지구촌 아동 복지를 위한 ‘꿈씨저금통’ 프로젝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동전 모금과 계수 봉사를 통해 후원의 과정을 공개하고, 나눔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주며, 2025년에도 시민 참여형 모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새로운 도전: 예술과 청소년 자원봉사의 결합
애원은 현재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공연배달 오나리(오늘은 나도 리틀엔젤스)’다. 예술단 소속인 청소년 자원봉사자와 장애인 시설에 직접 찾아가 배리어프리(Barrier-free) 공연을 펼쳐 사회통합을 촉진했다. 비장애인 자원봉사자에게 예술을 통한 봉사와 나눔의 기회를 제공하고, 장애인 참여자들에게는 평소 경험하지 못했던 전통예술을 체험하는 한국무용 체험교실을 지원했다.
2025년 처음으로 실시된 해당 프로그램은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지난해 12월, 행정안전부와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가 주관한 ‘대한민국 봉사와 나눔 우수사례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김 이사장은 “이 상은 애원이 추구해 온 봉사의 방향이 사회적으로 공감받았다는 의미”라며 소회를 밝혔다.
애원이 그리는 미래
김 이사장이 그리는 애원의 미래는 이웃 섬김이 일상적 문화로 자리 잡도록 하는 일이다. 애원은 기업과 학교를 연계한 봉사 교육과 참여 확산에도 힘을 쏟고 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사회에 섬김 문화가 정착돼 “애원이 필요 없는 사회”라고 말한다.
인터뷰 말미에 김 이사장은 자원봉사를 “연결”이라고 정의했다. 봉사는 타인을 돕는 행위인 동시에 자신을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봉사를 스펙이 아닌 ‘자기 발견의 시간’으로 경험해보길 권했다.
김 이사장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봉사는 거창한 계획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의 모습 그대로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가 사회를 바꾼다.”
2026-01-19 16: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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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공동체 바탕 사회통합 실천… ‘이웃과 동행’ 뿌리내리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1954년 한국에서 출발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은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사회 통합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그 신념은 구호에 그치지 않고, 오랜 세월 지역사회 현장에서 묵묵한 실천으로 이어졌다. 가정연합의 지역사회 봉사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곁을 떠나지 않은 지속적인 동행에 가깝다. 1980년대부터 체계화된 ‘이웃사랑 실천’ 활동은 30년 넘게 이어지면서 자원봉사 애원과 효정봉사단, 신내종합사회복지관 운영 등으로 확장돼 탄탄한 돌봄의 네트워크를 이루며 지역 주민의 일상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 진정성과 시간이 빛어낸 신뢰는 오늘도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안전한 울타리가 되고 있다.
1980년대 이전에는 농촌계몽과 영농지원, 의료봉사 등 지역 단위의 봉사활동에 주력하며 사회공헌의 기반을 마련했다. 최근에는 의료·교육 봉사의 확장과 재난 구호 활동을 추가하며 사회적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한국 사회의 복지 사각지대를 메우고,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대응하는 데 기여하고 있으며, 또한 국내외 네트워크를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주민들의 일상생활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자원봉사 애원은 1994년 사단법인으로 등록된 이후 30년간 문화예술을 통한 나눔과 아동·청소년 지원, 소외계층 돕기를 중심으로 활동해 왔다. 무료 급식소 ‘애원의 집’을 운영하며 18개 봉사단을 통해 지역 주민 지원을 이어가고 있으며, 코로나19 이후 중단됐던 캄보디아 의료·교육 봉사를 재개했다. 이 활동은 보건복지부 산하 공익법인으로서 역할을 강조하는 사례로, 복지 안전망 확충에 기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제적 확장을 통해 캄보디아 현지에서 학교 건립과 의료 클리닉 운영을 추진하며, 현지 주민들의 생활 수준 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정연합이 전국 단위로 운영하는 효정봉사단은 환경정화, 노인 돌봄, 취약계층 지원 등을 실천하는 핵심 조직이다. 가평효정봉사단은 출범 3년 만에 1천회 이상의 봉사활동을 기록하며 지역 활성화에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광주광역시 효정봉사단은 2021년 출범 이후 방역 봉사와 환경 정리 활동을 통해 주민 안전에 기여했으며, 춘천효정봉사단은 공지천 조각공원에서 다문화 가정 지원 사례를 공유하며 소통의 장을 마련했다. 김제시 효정봉사단은 관내 지도자들과 협력해 취약계층 지원과 생활 밀착형 봉사 활동으로 봉사 범위를 확대했으며, 용산구 효정봉사단은 코로나19 기간 마스크 배포와 소독 작업으로 실질적 도움을 제공했다. 부산과 대구 지역 효정봉사단은 해안 정화 활동과 노인 복지 센터 지원을 통해 지역 환경 보호와 세대 간 소통을 촉진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연간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하며, 지역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로 자리잡고 있다.
신내종합사회복지관은 1995년 개관한 이후 올해로 30주년을 맞아, 지역사회와 함께 시스템화된 사회 복지의 실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2025년 11월 11일 기념행사를 통해 ‘당신의 의미가 모여 빛나는 30년’을 테마로 지역 주민과 성과를 공유했으며, 노인 복지, 아동 지원, 장애인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노인 복지 프로그램에서는 치매 예방 워크숍과 건강 관리 세션을 제공하며, 아동 지원 부문에서는 방과후 교실과 학습 멘토링을 통해 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연간 수만 명의 이용자를 지원하며, 한국 사회의 복지 인프라 강화에 기여하고 있다.
가정연합의 활동은 국내에 그치지 않고 국제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다문화 가정 지원과 독거노인 통합돌봄 사업, 김장 나눔 행사를 진행하며 취약계층을 지원한다. 특히, 가정연합 산하 세계평화여성연합(WFWP)은 2002년 북한사랑 1% 운동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시민들이 소득이나 마음의 1%를 나누어 북한의 여성과 아동들을 돕자는 인도적 평화 나눔 운동이었다. 여기에는 ‘통일은 정치 이벤트가 아니라 작은 나눔과 공감에서 시작된다’는 철학이 담겨있다. 초기에는 북한 내 여성·어린이 대상 의류, 침구류, 생활용품 등을 지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프로젝트는 북한뿐 아니라 전 세계 빈곤 국가를 대상으로 한 인도적 지원으로 확대됐으며, 명칭도 ‘지구가족사랑 1% 운동’으로 바뀌었다.
현재는 UN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달성을 위한 저개발국가 개발협력사업, 대북지원사업, 재난 긴급구호 및 인도주의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 저개발국가 개발협력사업으로는 여성 경제 자립 지원, 어린이 교육지원, 에이즈 예방, 의료지원 등이 있으며, 1994년부터 160개국에 자원봉사자를 파견해 왔다.
긴급구호 활동으로는 2010년 아이티 지진피해 복구지원, 2011년 일본 지진피해 구호, 2014년 필리핀 태풍피해 지원, 2015년 네팔 지진피해 구호, 2019년 강원도 고성 산불피해 지원, 2020년 코로나19 방역물품 지원(볼리비아, 레바논 등), 2022년 우크라이나·아프가니스탄 긴급구호, 2023년 튀르키예·시리아 지진피해 구호 등이 있다. 대북지원으로는 2002년 북한 아동 내의(속옷) 지원, 2003년 룡천 소학교 건립, 2005년 개성 나무 심기, 2010년 식량 지원, 2016년 두만강 수해 복구 등을 통해 지속적인 도움을 제공해 왔다.
가정연합 관계자는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국민과 함께 성장할 것”이라 “지역사회와의 연대 또한 더욱 공고히 하겠다”고 강조했다. 가정연합은 한국 사회의 복지 취약지대를 보완하는 데서 나아가, 지역 안의 사람들과 기관들이 서로 연결돼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지속적으로 돌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가고 있다. 아울러 국내외 다양한 주체들과의 협력과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단기적 지원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 가능한 사회공헌의 틀을 차분히 구축해 나갈 계획이다.
2026-01-19 16: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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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계·시민사회 “종교 자유는 불가침…사회적 책임과 공공성 강화해야”
한국종교협의회는 13일 서울 중구 필동 한국종교협의회 5층 세미나실에서 대한민국기독교성직자협의회(KCLC)와 공동으로 서울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종교자유와 사회적 책임을 위한 포럼’을 열었다.
종교계·학계·지역사회 인사 등 60여 명이 참석한 이번 포럼에서 참석자들은 종교의 공공성과 협력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홍윤종 한국종교협의회 회장은 환영사에서 “종교가 본연의 사명을 되찾고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시대의 절실한 요청”이라며, 종교의 공적 책임 회복을 강조했다.
서진우 KCLC 공동의장은 축사를 통해 “종교의 자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권리로, 하늘이 부여한 불가침의 영역”이라며 “종교의 자유는 종교를 억압하는 데 있지 않고, 이웃을 살리고 치유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더 큰 사랑으로 이 사회를 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조강연에 나선 성해영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종교 자유와 사회적 책임의 균형을 주제로 발제하며, “기술과 효율이 강조되는 시대일수록 인간 내면을 성찰하는 종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성 교수는 특히 “한국 사회는 통일을 비롯해 이념·세대·지역·정치·종교 갈등을 평화적으로 통합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며 종교의 화해와 사회 통합 역할을 강조했다.
이날 포럼에서는 종교간 상호 존중, 지역 사회의 공공성 회복 등을 골자로 한 공동성명서를 채택하고, 향후에도 정기적인 연대와 대화를 통해 종교의 공공성과 사회적 기여를 실천해 나가기로 했다.
2026-01-14 09: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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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전국 목회자 준법 실천 선언…“시스템에 의한 상호 견제 확립”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한국협회(이하 한국가정연합)이 관련 기관을 둘러싼 정교유착 논란으로 사회적 비판이 이어지는 가운데, 조직 운영 전반에 대한 준법 실천을 선언하며 신뢰 회복에 나섰다.
한국가정연합은 7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 한국가정연합 강당에서 전국 목회자와 공직자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적 신뢰 회복을 위한 준법 실천 선언식’을 개최했다고 밝혔다. 이번 선언식은 지난해 12월 발표한 ‘3대 혁신과제’ 선언후 후속 조치다.
앞서 한국가정연합은 지난해 12월 11일 송용천 협회장 명의로 ‘사과와 혁신 계획’을 발표하며, 내부 관리 체계가 일부 일탈 행위를 사전에 차단하지 못한 점에 대해 공식 사과한 바 있다. 당시 한국가정연합은 사태의 근본 원인으로 현장에서의 견제와 감시 의식 부재를 지목했다.
이날 송 협회장은 “거버넌스 혁신의 목적은 단순한 제도 마련이 아니라, 가정연합의 비전이 왜곡 없이 신도들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필터이자 통로를 세우는 데 있다”며 “신도들의 헌금을 신앙적 생명과 동일하게 여기고, 투명한 시스템을 통해 이를 철저히 보호함으로써 공동체의 신뢰를 반석 위에 세우겠다”고 밝혔다.
이번 선언식의 핵심 조치는 국제표준 기반의 준법·부패방지 시스템 도입이다. 한국가정연합은 ISO 37001(부패방지경영시스템)과 ISO 37301(준법경영시스템) 인증 취득을 추진하며, 이를 위해 한국컴플라이언스평가원과 협력한다. 종교 단체가 외부 전문기관의 검증을 받아 국제표준 인증을 추진하는 것은 이례적인 시도로 평가된다.
한국가정연합 관계자는 “ISO 시스템의 핵심은 개인의 도덕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한 상호 견제”라며 “부당한 지시에 대해 내부 구성원이 당당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겠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익명 제보 및 상담 프로세스도 함께 구축할 계획이다.
아울러 의사결정 구조 전반도 개편한다. 특정 개인의 독단적 판단을 차단하기 위해 집단 의사결정 체계를 강화하고,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독립적 윤리 감시 기구를 설치해 대외 활동의 공정성을 상시 점검받겠다는 방침이다.
이날 선언식에서는 전국 목회자와 공직자 전원이 ‘준법 선언문’을 공동 낭독했다. 선언문에는 정치적 중립과 순수성 유지, 무관용 원칙과 법규 준수, 투명한 거버넌스와 상호 견제, 공사 구분의 철저, 윤리적 사회 책임 이행 등 다섯 가지 원칙이 담겼다.
선언식과 함께 전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준법 교육도 병행됐다. 이현권 변호사는 ‘거버넌스 혁신의 필요성’을 주제로 내부 견제 시스템 구축 방안을 설명했으며, 최성락 한국컴플라이언스평가원 대표이사는 ISO 인증 도입의 구체적인 일정과 절차를 보고했다.
한국가정연합 관계자는 “비전이 실무 현장에서 오독되거나 사유화되지 않도록 철저한 교육을 시행할 것”이라며 “어떠한 정치적 개입이나 불법적 관행도 용납하지 않는 무관용 원칙을 조직 문화로 정착시키겠다”고 밝혔다. 이어 “견제는 비판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비전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방어막이라는 인식을 조직 전체에 뿌리내리겠다”고 덧붙였다.
2026-01-07 18: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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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유엔기구… 세계의 화약고 DMZ를 평화 허브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오늘날 국제질서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전 세계 인구의 60%가 거주하고 글로벌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위상은 날로 높아지고 있지만, 국제기구의 공간적 배치는 여전히 냉전기 질서에 머물러 있다. 현재 UN 사무국은 뉴욕, 제네바, 빈, 나이로비 등 서구와 아프리카에 편중되어 있다. 이러한 ‘글로벌 불균형’을 해소하고 아시아의 대표성을 강화하기 위한 실천적 대안으로 ‘제5 UN 사무국 한국 유치’ 운동이 국제사회 일각에서 논의되고 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이 제안하고, 참여해온 이 운동은 단순히 국제기구 하나를 국내에 들여오는 차원을 넘어선다. 이는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를 세계 평화의 허브로 재탄생시키려는 창의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평화 건축(Peace building)의 비전이다. 케냐 나이로비 사무국이 아프리카의 환경과 개발 의제를 선도하듯, 한반도에 들어설 제5 사무국은 아시아의 분쟁 관리, 기후 변화 대응, 그리고 지속가능발전(SDGs)을 가속화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종교적 양심과 정당한 사회 참여
이러한 대규모 국제 평화 운동을 바라보는 일각의 ‘정교유착’ 시선에 대해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종교는 과연 사회로부터 격리된 섬이어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신앙적 가르침에 따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회 지도자들과 소통하는 것은 종교의 양심이자 정당한 사회 참여다.
이를 두고 교단 전체의 활동을 '배후의 정치적 기획'으로 몰아가는 것은 종교인의 기본적인 시민권과 신앙의 자유를 과도하게 왜곡하는 처사다. 가정연합이 구축한 글로벌 네트워크는 특정 정당의 이익이나 선거 승리와 같은 협소한 목적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가정연합이 구축한 글로벌 네트워크는 분쟁 지역의 중재, 가정 윤리의 회복, 기아 대책 마련 등 실질적인 NGO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활용된다. 이러한 활동 결과물은 평화 가치 확대의 선언이며 투명한 민간 외교의 결실이다.
민간 평화 외교의 새로운 모델
가정연합의 ‘유엔 갱신운동’은 민간 액터(Non-State Actor), 즉 비국가 행위자가 글로벌 평화 네트워크 다각화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다. 유엔 갱신운동이란, 유엔의 설립 정신은 계승하되, 이해관계가 얽힌 국가 중심의 한계를 넘어 시민사회와 종교, 다양한 주체가 함께 참여하는 21세기형 평화 거버넌스로 유엔을 발전시키자는 제안이다. 이를 위해 가정연합이 각국의 전·현직 국가원수와 학자들로부터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있는 과정은 종교가 가진 초국가적 네트워크가 인류 공통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그동안 가정연합이 꾸준히 DMZ 평화 포럼과 국제 컨퍼런스를 통해 제시해온 평화 체제의 청사진은 혁신적이다. 정부와 지자체, 학계와의 건설적인 대화 채널을 통해 추진되는 이 여정은 투명하고 공익적인 비전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UN의 중립성과 보편성을 존중하면서도 민간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더하는 균형 잡힌 접근이다.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의 성지로
제5 UN 사무국 한국 유치 구상은 현실적으로 매우 높은 벽이 있지만, 그 자체로 불가능한 공상은 아니다. ‘아시아에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인식과 ‘한국은 분단국이자 민주화를 경험한 국가’라는 상징성이 힘을 얻는다면, 이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제도화하고, 한국이 아시아-태평양 평화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대담한 프로젝트가 국제 사회의 더 깊은 공명을 얻는다면, DMZ는 더 이상 단절의 땅이 아닌 세계 평화의 성지로 거듭날 수 있다.
종교의 사회적 실천을 편견의 시선으로 재단하기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진정성 있는 노력으로 평가해야 할 때다. 민간 차원의 투명한 외교와 평화 비전이 결실을 볼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지구촌 평화 공동체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2026-01-05 17:5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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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인프라 '한일터널'… "정교유착 아닌 정교협력 모범 사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요즘 정치권과 사회 일각에서 ‘한일해저터널’ 구상이 특정 종교와 정치의 결합, 이른바 정교유착의 사례처럼 단순화되어 거론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한일터널이 어떤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고, 어떤 공공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살피기 전에 논의를 경직시키는 측면이 있다. 국가 간 초대형 인프라 구상이 제안 주체의 배경만으로 재단되고, 그 공공적 가치와 장기적 비전은 논의조차 원천봉쇄된다면, 이는 우리 사회가 미래를 설계하는 능력 자체를 스스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한일해저터널은 최근에 갑자기 등장한 발상이 아니다. 냉전 종식 이후 동북아 질서 재편, 유라시아 대륙과 해양 네트워크의 연결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수십 년간 학계와 정책 현장에서 논의돼 온 구상이다. 세계는 이미 ‘연결’이 곧 경쟁력이며, 동시에 평화의 토대가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영불 해저터널, 북유럽 국가들의 해저·해상 간 교량, 중국의 대륙 연결망은 모두 단지 경제적 타당성만이 아니라 지역 통합과 안정이라는 전략적 판단 속에서 추진된 사례들이다.
토목·환경 분야 최고 전문가인 곽결호 전 환경부 장관은 한일터널을 ‘문명 인프라’, 즉 문명을 일으키는 공학으로 바라본다. 경부고속도로가 야당의 거센 반대와 초기 비용편익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가 경제 발전의 대동맥 역할을 해냈듯, 역사적 인프라는 늘 문명과 국가의 방향성을 바꾸는 계기가 되어왔다. 한일터널은 해상수송보다 빠르고, 항공수송보다 대량 이동을 가능하게 하며, 기후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아 한국과 일본을 넘어 중국·러시아까지 연결하는 동북아 경제권 형성의 핵심축이 될 잠재력을 지닌다. 경제적 편익은 물론이고 물류와 관광, 고급 일자리 창출, 토목기술 발전에 기여하며, 물리적 연결을 통해 상호 의존을 강화하고 대화와 협력의 비용을 낮춘다. 이는 초국경 인프라 유러터널로 이어진 유럽 통합 사례처럼 동북아에서 신뢰 구축의 상징적 장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현재의 논란을 이해하려면, 가정연합이 왜 정치의 문을 두드렸는지부터 차분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문선명 총재는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중심한 공생·공영·공의주의를 바탕으로 남남 갈등을 해소하며 평화로운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더불어 한국이 세계 평화의 중심 국가로 자리매김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문 총재는 종교를 ‘마음의 자리’, 정치·경제를 ‘몸의 자리’로 규정했다. 마음과 몸이 조화를 이룰 때 온전한 인간이 되듯,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종교와 정치가 대립이 아니라 협력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그는 유엔 역시 이러한 원리에 따라 거듭나야 한다고 보았다. 세계 종교 지도자들이 상원의 역할을, 정치 지도자들이 하원의 역할을 맡아 상호 보완적으로 협력할 때, 마음과 몸이 하나 된 유엔이 가능하다는 구상이었다.
종교와 정치의 협력이 내적 평화의 조건이라면, 외적 평화의 조건은 국경과 이념의 장벽을 물리적으로 낮추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 실천이 바로 ‘국제평화고속도로’ 구상이다. 문 총재는 1981년 서울에서 전 세계 과학자 700여 명이 참석한 국제통일과학회의에서 중국·한국·일본을 잇는 ‘아시아권 대평화고속도로’를 제안했다. 몰튼 카플란 시카고대 교수 등 세계적 석학과 노벨상 수상자들이 공감을 표했고, 이후 일본의 국제하이웨이재단과 일한터널연구회가 설립돼 한일 양국의 저명한 토목·도시 전문가들이 실현 가능성 검토에 참여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일터널은 학계와 전문가 사회, 정치권에서 꾸준히 논의돼 왔다. 한국에서는 노태우·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이 한일 화합의 한 방안으로 검토 필요성을 언급했고, 일본에서도 모리 요시로 총리가 ‘아셈터널’이라는 명칭을 제안하는 등 정치적 공감대가 형성된 바 있다. 이는 이 구상이 특정 종교의 확장 수단이 아니라, 시대적 과제에 대한 하나의 정책적 선택지로 인식돼 왔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일터널은 여전히 ‘누가 제안했는가’ ‘일본만 이익을 얻는 것 아니냐’는 프레임에 갇혀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공공 인프라는 그 특성상 제안자의 배경이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설계 구조 또한 어느 한쪽의 이익에 편중되기보다는 양국 모두에 실질적 혜택을 가져다주도록 전제되어 있다. 세계 인류는 단절과 갈등 속에서 고통받고 있으며, 국내 역시 인구 절벽과 공동체 해체, 국제 질서의 불안정이라는 복합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시대에 국가에 더 큰 안정과 국민에게 더 깊은 위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는, 종교와 정치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상호 협력 관계를 성숙하게 형성해 나가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방향일 것이다. 한일터널은 결코 정교 유착의 상징이 아니라, 단절과 갈등을 연결과 공존으로 전환하려는 상상력이자 실현 가능한 평화 인프라다. 한일터널이 불신과 혐오의 대상에서 벗어나 미래 세대를 위한 정교 협력의 상징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2026-01-05 17: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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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이념· 종교 넘어 평화 플랫폼 구축… '인류 한 가족' 큰 뜻 실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21세기 세계는 다시 힘의 정치로 회귀하고 있다. 지정학적 갈등, 이념 대립, 종교와 문화의 충돌이 중첩되며 평화는 선언이 아닌 실천의 문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종교의 사회 참여를 ‘정치적 야망’으로만 해석하는 시선은 과연 온당한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의 평화 운동을 둘러싼 논란은 이 질문을 우리 사회에 다시 던지고 있다.
가정연합이 표방해 온 평화의 핵심은 명확하다. 그것은 특정 권력이나 정치 세력을 향한 접근이 아니라,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One Family Under God)’이라는 보편적 가치의 구현이다. 지난 70여 년간의 활동은 정치 세력화나 권력 추구라기보다, 국경·이념·종교를 넘어 평화의 담론이 교차하는 공론의 장을 축적해 온 과정에 가까웠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991년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평양 방문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이다. 냉전의 장벽이 가장 높았던 시기, 종교 지도자가 이념의 경계를 넘어 평화를 논의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이 만남은 단순한 이벤트를 넘어, 평화자동차 설립, 보통강호텔 운영, 금강산 개발 성과로 이어졌고, 무엇보다도 수십 년간 단절됐던 이산가족 상봉이 실제로 성사되는 데 기여했다. 정부 간 대화가 멈춰 선 지점에서 했던 민간 외교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다.
가정연합의 국제 행사에 전·현직 국가 지도자와 정책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장면은 종종 ‘정치적 영향력 과시’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참석의 본질을 간과한다. 이 자리는 특정 정당이나 선거를 위한 무대가 아니라, 각자의 경험과 통찰을 인류 공동의 과제에 기여하도록 요청하는 공론의 장이다. 가정연합이 추진해온 ‘씽크탱크 2022’와 같은 국제 포럼 역시 지구촌의 평화와 당면 과제 해결을 위해 정치와는 무관하게 분쟁 중재, 종교 간 대화, 환경 위기, 빈곤 문제 등 보편적 의제를 다뤄왔다. 2022년 서울 평화서밋에서 채택된 ‘서울선언’이 공생·공영·공의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종교의 사회 참여는 언제나 논쟁적이었지만, 역사적으로 종교는 사회 정의와 인간 존엄을 외면한 적이 없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인종차별에 맞섰고,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가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에 저항했듯, 신앙은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았다. 평화와 가족 가치, 윤리적 사회를 위해 사회 지도자들과 대화하고 협력하는 행위는 정치적 야망이 아니라 종교인의 양심적 실천에 가깝다.
가정연합이 구축해 온 글로벌 네트워크 역시 선거 승리나 정파적 이익을 목표로 작동하지 않았다. 중동·아프리카·아시아 분쟁 지역에서의 종교 간 대화와 화해 중재, 160여 개국에서 진행된 ‘피스로드(Peace Road) 프로젝트’는 상징적 캠페인을 넘어 전 세계에 한반도의 분단 현실과 통일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알려온 국제 시민 평화운동이었다. 동시에 ‘참사랑’ 사상을 기반으로 한 가정 윤리와 청소년 교육, 부부 관계 회복 프로그램은 가정이라는 가장 일상적 공간에서 사회 통합의 가능성을 실험해 실천적으로 검증해 온 시도이기도 하다.
인도적 지원과 개발 협력 역시 단기적 구호에 머물지 않았다. 북한에 대한 식량·보건 지원, 평화자동차 공장 건립 등을 통한 경제 협력, 북한 사회 내부의 경제적 자립 구조를 모색했으며, 이는 협력의 방향을 ‘시혜’가 아닌 ‘동반 성장’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환경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한학자 총재 체제 이후 평화 담론의 중요한 축으로 확장되고 있다. 기후 위기가 갈등의 원인이 되는 현실에서, 환경과 평화를 연결하려는 시도는 국제사회의 공동 책무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는 비교적 분명하다. 그것은 정치 권력의 획득이 아니라, 평화 가치의 확산과 공개적 민간 외교의 축적이다. 국제회의와 포럼에서 발표된 선언문, 추진된 프로젝트의 성과, 인도적 지원 내역이 공개적으로 제시되어 왔다는 점에서 은폐된 정치 개입이라는 해석과는 거리가 있다.
가정연합의 행보는 특정 정치 세력을 지지하거나 권력을 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일관되게 강조해 온 것은 ‘인류 한 가족’이라는 보편적 가치 아래, 국경과 종교, 정파를 초월해 다양한 주체들이 평화의 담론을 형성하고 대화할 수 있도록 하는 공공적 플랫폼의 구축이었다. 힘의 정치가 다시 고개를 드는 오늘, 이러한 가치 중심의 접근이 얼마나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검증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 평화의 실험이 권력을 향한 행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가정연합이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도 걷고자 하는 길은 정치가 아닌 평화로 귀결될 것이다.
2026-01-05 17: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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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평화대사 제도는 지역사회 봉사 등 자원봉사제도, 정치적 중립 원칙 지켜와”… 중앙일보 보도 반박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은 중앙일보가 2일자에 보도한 ‘통일교 평화대사는 정치대사? 총선 선대본부장까지 맡았다’는 기사에 대해 “사실을 왜곡한 보도”라고 반박했다.
가정연합은 이날 반론문을 통해 “평화대사 제도는 정치 활동이나 정치 개입을 위한 직책이 아니라, 지역사회 봉사와 통일운동 등 시민 평화운동을 삶 속에서 실천해온 자원봉사 같은 제도”라며 “이를 ‘정치대사’로 규정한 것은 제도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가정연합은 개별 평화대사의 개인적 정치 이력을 단체의 조직적 정치 개입으로 연결한 데 대해 “개인의 정치 활동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역”이라고 선을 그으며 “평화대사협의회는 일관되게 정치적 중립 원칙을 지켜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정치자금 전달이나 불법 로비 의혹을 평화대사 제도와 연결한 것에 대해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의혹”이라고 지적했다.
가정연합은 “공익적 비판과 감시라는 언론의 역할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개별 사례를 일반화하거나 단체의 본질적 성격을 왜곡하는 보도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하고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2026-01-03 02: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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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상처 딛고 한마음으로 새 출발 결의… ‘2026 원단기도회’ 성료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2026 원단기도회’를 국내외 신도 2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일 경기도 가평군 청심평화월드센터에서 성황리에 개최했다고 2일 밝혔다.
이번 원단기도회는 교단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겪은 한 해를 지나 상처를 딛고 전 교단과 교인들이 한마음으로 새로운 출발에 나서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지기 위해 마련됐다.
행사 당일 자정 직전 연단에 오른 두승연 세계선교본부장은 한학자 총재를 대신해 2026년 원단 메시지를 전했다. 두 본부장은 “지난해부터 시작돼 대대로 이어질 연두 표어에 따라 하늘부모님을 실체적으로 모시고 사는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며 “참사람으로 거듭나 참사랑의 향기를 발할 때 세상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러한 실체적인 삶의 승리가 곧 하늘이 허락하신 최고의 축복”이라고 밝혔다.
이날 원단기도회는 송용천 한국협회장의 감사기도를 시작으로 효정 봉헌식, 이기성 천심원장의 송년사, UPA 찬양팀의 효정 찬양, 신년준비 묵상, 원단 메시지, 찬양기도회, 결단의 찬양 순으로 진행됐다.
송용천 한국협회장은 감사기도를 통해 “지난 한 해의 시련을 통렬히 성찰하며 타성과 관습을 벗고, 제도와 삶 모두에서 그림자 없는 ‘정오정착’의 투명한 신뢰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며 “시련을 정금 같은 믿음으로 승화시켜 하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참된 섭리의 주역이 되자”고 기도했다.
이어 이기성 천심원장은 송년사에서 “2025년은 유례없는 풍파의 해였지만, 전 세계 축복가정들과 변함없이 함께한 의인들의 기도와 정성 속에서 모두가 강력한 결의로 마주했다”며 “올해‘붉은 말의 해’를 모든 식구가 지성감천의 자세로 새 출발하는 원년으로 삼자”고 전했다.
행사의 대미를 장식한 찬양기도회에서는 야마다 유타카 대륙 회장과 호리 마사이치 일본협회장의 대표기도에 이어 합심 공명기도가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효정의 등불이 돼 ‘인류 한 가족’의 이상을 향한 하늘부모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전파하겠다는 결의를 함께 나눴다.
‘사랑해 부모님’과 ‘제왕나비’의 선율이 장내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참석자들은 하늘을 향한 깊은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가슴에 새기며 2026년의 첫 공식 일정을 뜻깊게 출발했다.
2026-01-03 02: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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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세계화·다문화 선구자…갈등 치유 ‘통합·공존’의 길 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세계화와 이민의 흐름이 일상이 된 현대 사회에서 다문화 정책은 가족 형성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이라는 가치를 바탕으로 국제합동 결혼을 중심으로 한 다문화 실천을 이어왔다. 이러한 접근은 국적, 문화, 언어를 초월해 사회 통합과 문화적 조화를 모색하는 하나의 길로 평가된다.
가정연합의 사례는 지역사회와 국제적 평화 담론 속에서 가족 중심의 다문화 정책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며, 개인의 일상과 가족생활 속에서 다문화가 가진 장점을 원만하게 실천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한국과 일본을 잇는 초국가적 결혼을 지속적으로 장려해 온 점은 역사적·정서적 갈등이 누적돼 온 양국 관계 속에서 민간 차원의 교류와 상호 이해를 확장하는 데 일정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국제결혼 네트워크가 문화 교류와 사회적 연대, 갈등 완화에 기여하는 하나의 ‘사회적 실험’으로 기능해 왔다고 보고 있다.
국제결혼과 ‘시민 외교’ 모델
가정연합은 1960년대부터 서로 다른 국적·인종·종교적 배경을 지닌 커플을 연결하는 국제 합동결혼 제도를 운영해 왔다. 가정연합 자료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약 40만 건 이상의 국제커플이 이 과정을 통해 성사됐다. 이러한 국제결혼은 국경과 언어,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는 ‘시민 외교’의 한 형태로 설명된다. 지지자들은 개인과 가족 단위의 교류가 국가 간 갈등을 완화하고 장기적으로는 평화적 관계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저출산 위기가 심화일로에 있는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가족이 인구 구조의 활력 회복과 지역사회 지속가능성 제고에 상당히 기여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23년 0.72명, 2024년에는 0.75명으로 약간 반등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다. 다문화 가정이 노동력 확보와 지역 소멸 방지 측면에서 중요한 보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전망된다.
한국 사회에서의 통합 효과
한국 사회의 다문화 인구는 지난 10여 년간 빠르게 증가해 왔다. 다문화 가족 인구는 2014년 약 174만 명(전체 인구의 약 3.4%)에서 2024년 약 271만 5000명(약 5.2%)으로 늘었으며, 일부 연구에서는 2040년경 전체 인구의 7%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일부 연구자들은 가정연합이 1980년대 후반부터 추진해 온 국제결혼 정책이 한국 사회 초기 다문화 기반 형성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지역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충남 보령 등 일부 지역에서는 가정연합을 통해 결혼 이주한 일본 출신 여성들이 관광 안내, 언어 교육, 지역 문화 교류 활동에 참여하며 지역사회와 외부를 잇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이 모델이 기존의 ‘동화(assimilation)’ 중심 접근과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사이에서 일정 수준의 균형을 시도한 사례로 분석하고 있다.
글로벌 평화 담론 속 국제적 반향
가정연합의 국제결혼 정책은 가족이라는 미시적 단위를 넘어 글로벌 평화 담론이라는 거시적 차원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2024년 경기도 가평에서 열린 대규모 국제합동 결혼 행사에는 우크라이나, 콩고민주공화국, 솔로몬제도 등 분쟁 경험 국가를 포함해 60개국에서 2,100쌍이 참여해 국제적 관심을 모았다.
국제합동 결혼 행사와 관련해 짐바브웨 사도기독교협의회의 요하네스 은당가 목사는 “분쟁과 갈등이 반복돼 온 지역에서도 혈연과 국경, 종교의 경계를 초월해 새로운 가족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갈등의 기억을 일상적 공존의 경험으로 전환시키는 장기적 평화 구축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불교관음종의 홍파 종정 역시 “종교와 문화를 넘어 대립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공존의 틀을 제시하려는 시도”라고 언급한 바 있다.
유럽과 중동 지역에서도 가정연합은 교리 선포나 전파에 초점을 둔 종교 조직이라기보다 가정의 가치 확산을 사회적 실천 운동으로 규정하며 시민사회·종교 단체와의 연대를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천주평화연합(UPF) 등 국제 평화 네트워크 형성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초기 단계에서는 유엔을 보완하는 민간 차원의 초종교 평화 플랫폼을 지향했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받고 있다.
사회 통합을 향한 과제
저출산, 고령화, 문화적 분절이라는 구조적 난제가 전 지구적으로 심화되는 가운데, 가정연합의 다문화 정책은 사회 통합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하나의 대안적 접근으로 거론되고 있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접근은 이주와 다양성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공동체 회복을 모색하는 실천적 방식으로 평가된다.
최근 제시된 정책 개선 방향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다. 예컨대, 이주민을 보호 대상에 머무르게 하는 접근에서 벗어나 자존감과 주체성을 강화하는 지원 체계로의 전환, 편견 완화를 위한 다문화·역사 교육의 병행,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종교·문화 요인을 분석하는 연구 확대 등이 주요 과제로 논의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실천이 제도적·사회적 지원과 결합될 경우, 다문화 사회가 직면한 갈등을 완화하고 장기적 통합을 촉진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는 시대, 가정연합의 다문화 공존을 향한 실험은 사회 통합의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하나의 주목할만한 실천 사례로 지속적인 관찰과 평가가 요구되고 있다.
2025-12-29 18: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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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70년의 실험, 인류 문명사에 던진 질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가정은 언제나 이데올로기의 전쟁터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문은 국가 질서의 기초 단위였고, 공자는 가정을 정치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기독교는 '성스러운 가정'을 이상으로 내세웠으며, 근대 국민국가는 핵가족을 시민 양성의 기본 틀로 규정했다. 반면 20세기 공산주의는 가정을 '계급투쟁의 잔재'로 간주했고, 1960년대 히피 공동체는 가정을 '억압의 제도'라며 해체하려 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1954년에 출범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가정을 바라보는 또 다른 접근을 제시했다. 가정연합은 가정을 하나님의 사랑이 뿌리내리고, 인격이 완성되며, 평화가 시작되는 근본 터전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세계 평화를 실험하는 공적 장으로 확장시켰다. 그래서 가정연합은 가정 윤리와 결혼 문화의 회복을 평화의 근본 해법으로 제시해 왔던 것이다. 가정을 개인의 사적 영역이 아닌 인류가 재구성해야 할 미래형 공동체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기존 종교 운동과는 다른 방향성을 보였다는 평가다. 문명사적으로 이례적이고 새로운 시도였다.
국제결혼 43만 쌍, 전례 없는 규모
2025년 11월 기준, 가정연합의 국제결혼은 수십 년에 걸친 누적을 통해 43만 4천여 쌍을 넘어섰다. 참가국은 194개국에 달하며, 민족·인종·종교 배경은 실로 다양하다. 한국인-일본인 부부만해도 4만 2천 쌍, 한국인-필리핀인 1만 8천 쌍, 일본인-아프리카계 8천 쌍이 뒤를 잇는다. 여기에 유대인과 무슬림 배경을 지닌 127쌍까지 더해지면서, 이러한 사례들이 축적된 결과가 오늘의 43만 쌍이라는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가정연합은 약 3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전 세계적으로 40만 쌍이 넘는 국제결혼을 성사시키며, 종교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례를 만들어냈다. 이는 종교가 결혼이라는 가장 내밀한 사회 제도를 매개로 국경을 넘어서는 공동체를 형성한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시도라 할 수 있다. 19세기 미국에서 예수그리스도교회(일명 몰몬교)가 독특한 혼인 관행을 바탕으로 30년간 약 5천 쌍을 형성한 것과 비교하면 그 규모와 파급력의 차이는 극명하다.
초국가적 혈연 네트워크의 실험
가정연합은 국제결혼을 21세기 최초의 초국가적 혈연 네트워크로 규정하고, 이를 국가·민족·종교를 초월해 인류가 하나의 운명 공동체임을 자각하려는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시도로 설명한다. 사회 네트워크 과학(network science) 연구의 권위자 미국 예일대 니콜라스 크리스타키스 교수는 인간이 서로 연결된 관계망 속에서 건강·행복·사회적 행동을 형성한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그런 맥락에서 가정연합의 국제결혼은 혈연을 매개로 한 글로벌 네트워크 실험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연합 이전에 페르시아(현 이란)에서 출현한 바하이교가 ‘초국가적 결혼 이상’을 추구했지만, 실제 결혼으로 이어진 규모와 지속성은 가정연합이 훨씬 두드러진다는 평가다.
문화적 동화에서 다문화적 창조로
신흥종교와 통일교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영국 런던정경대 아일린 바커 교수는 가정연합의 초기 축복결혼은 한국 중심의 문화 수출 성격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1990년대 축복가정의 70% 이상이 한국인-외국인 커플이었고, 외국인 배우자들은 한국어와 문화를 필히 학습해야 했다. 그러나 최근 변화는 뚜렷하다. 2020~2025년 신규 축복가정 중 한국인-외국인 커플 비율은 낮아졌고, 아프리카·남미 지역 주도 축복식과 자녀세대가 주도하는 지역 맞춤형 축복도 늘고 있다. 이 변화는 기존의 일방향적 문화 동화(Assimilation) 모델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적 주체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과 문화적 의미를 공동 창조(Co-creation)하는 다문화적 창조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계평화 실험의 성적표
가정연합은 가정의 평화가 세계 평화로 확장된다는 논리를 70년간 실험해 왔다. 아직 성적표는 미완이지만, 몇 가지 지표는 눈길을 끈다. 상당수 탈북민의 국내 정착을 장기간 지원해 왔고, 중동 분쟁의 핵심축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축복가정이 탄생했다.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는 다문화 학교를 설립했으며, 해당 학교 졸업생 상당수가 축복결혼에 참여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21세기 최대 도전은 글로벌 정체성(a new global identity)을 만드는 것"이라며, 종교나 이념이 아닌 "공동의 이야기와 감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정연합은 그 '공동의 감정'을 혈연과 결혼이라는 가장 근본적 방식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남겨진 과제
가정연합 70년의 실험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한다. 국가·민족·종교를 넘어선 ‘하나의 가족’ 모델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이 지속 가능한 평화의 기반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아직 이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다만 인류 역사에서 가정이라는 가장 사적인 제도를 세계 평화라는 공적 과제와 연결해 장기적이고 대규모로 실험해 온 사례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가정연합이 만들어온 하나의 가족 모델은 현대 문명사 연구에서 중요한 기록으로 남고 있다.
2025-12-29 17:5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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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인류 문명의 기본 단위…평화가 움트는 곳”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가정은 인류 문명의 가장 작은 단위이자, 평화의 씨앗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녀,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곧 사회와 국가, 나아가 세계 평화로 확장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순석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가정국장은 가정연합이 왜 오랜 시간 ‘가정’을 중심 의제로 삼아 왔는지를, 이렇게 압축적으로 설명했다. 그에게 가정은 사적 공간인 동시에 인간 사회와 문명이 유지되는 가장 근본적인 구조다. 개인의 삶은 가정에서 시작되고, 사회의 안정과 평화 역시 이 작은 공동체의 상태에 따라 좌우된다는 인식이 그의 가정관의 근간이다.
가정연합이 가정을 윤리적 이상이나 종교적 교리가 아닌 ‘원리’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 국장은 가정연합이 말하는 가정의 가치는 특정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을 위한 규범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가 본래 작동하도록 설계된 관계 질서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완성되는 존재이며, 그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가 부부와 부모·자녀로 이루어진 가정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가정관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인구가 감소하는 국가입니다. 다문화 가족은 저출산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전국 지역사회에서 국제 부부가 경제적·문화적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가정연합이 다문화 가정과 국제결혼에 꾸준히 주목해 온 이유는 이들이 개인의 결합에서 더 나아가 지역사회와 사회 전체에 새로운 생명력을 공급하는 존재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가정은 개인의 선택에서 시작되지만, 그 성패와 파장은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영역이라고 강조한다.
가정연합의 가정관에서 부부 관계는 모든 가정 질서의 중심에 놓인다. 오 국장은 부부를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일뿐더러 서로를 완성시키며 책임을 나누는 관계로 제시한다. 여기서 축복결혼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축복결혼은 사적인 사랑을 사회적·공적 책임으로 확장시키는 출발점이자, 가정이 개인적 선택을 넘어 공동체의 지속성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이는 결혼을 개인의 감정 문제로만 소비해 온 현대 사회에 대한 하나의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성(性)에 대한 인식 역시 이러한 가정관과 맞물려 있다. 가정연합은 성을 개인의 자유 이전에 가정을 완성하고 생명을 잇는 책임의 영역으로 여긴다. 그는 무분별한 관계의 확산이 결국 개인의 고립과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온다고 지적하며, 가정 안에서 사랑과 책임이 결합될 때 성은 비로소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 힘이 된다고 풀이한다.
"최근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서 종교 규제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데, 다문화 가치가 정치 프레임에 갇혀 왜곡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는 종교 강요가 아니라, ‘가족과 평화’를 중심에 둡니다. 국가와 사회가 편견 대신 열린 시각을 가질 때 진정한 공존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오 국장은 가정연합의 가정관이 법이나 제도를 통해 강제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대신 그는 가정의 회복이 문화와 실천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다시 ‘평화’라는 단어로 돌아왔다. 그는 “세계평화는 거창한 정치적 선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며 “각 가정의 식탁에서, 부부의 대화에서, 부모와 자녀의 사랑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이어 “가정연합은 앞으로도 ‘가정에서 시작하는 평화’를 실천하며, 인류가 ‘하나님 아래 하나의 대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앞장서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 국장의 말처럼, 가정연합이 말하는 가정은 전통적 가족 형태로 되돌아가자는 주장보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버티기 위한 최소한의 관계 구조를 다시 세우자는 제안이다. 가정에서 회복된 사랑과 책임이 사회와 국가, 더 나아가 세계의 지속 가능성을 떠받치는 힘이 될 수 있을까? 그의 질문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심연에 던져지고 있다.
2025-12-29 17:5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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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가평 전기유람선, 성지순례 규정은 침소봉대… 공공사업 왜곡”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은 가평 전기유람선 관련 보도에 대해 “사업의 배경과 구조를 외면한 채 일부 장면과 인상만으로 ‘성지순례 사업’으로 단정한 침소봉대 보도”라고 반박했다.
가정연합은 28일 발표한 반박문에서 서울신문이 지난 26일 보도한「150억 혈세 사업에 한학자 사진… ‘페리로 통일교 성지순례하나’」 기사에 대해 “특정 종교 이미지에 기대어 공공사업의 성격을 왜곡했다”며 유감을 표했다.
가정연합은 먼저 서울신문이 제목과 기사에서 사용한 ‘150억 혈세’라는 표현이 독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박문에 따르면 해당 금액은 현재까지 집행된 예산이 아니라, 이미 투입된 예산과 향후 단계적으로 투입될 가능성이 있는 계획·추정 예산을 모두 합산한 사업 전체의 최대치 개념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현재까지 가평군이 집행한 예산은 약 85억 원 수준이며, 이 가운데 약 80억 원은 가평군 소유의 공공 선착장인 ‘자라나루’ 건립에 투입됐다. 가정연합은 이 비용이 특정 단체나 사업자에게 귀속되는 지원금이 아니라, 자라섬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조성된 가평군의 영구적 공공자산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대형 전기유람선은 민간 사업자가 약 400억 원을 투입해 건조·운영하고 있어, 가평군은 대규모 예산 부담 없이 친환경 관광 인프라를 확보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가평군에 따르면 자라나루는 2024년 5월 운영을 시작해 2025년 11월 말 기준 누적 이용객 9만3000명, 순매출 4억5000여만 원을 기록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승선권 수익을 넘어 9만명 관광객이 가평 내 체류하며 지역식당, 숙박시설, 전통시장에서 소비한 경제적 가치 등 지역사회의 낙수효과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 매출액만으로 ‘혈세 낭비’라 주장은 사업의 공익적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정연합에 따르면 논란이 된 ‘북한강 천년뱃길’ 사업은 특정 종교를 위한 관광 코스가 아니라, 가평군이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오랜 기간 추진해 온 수상 관광 인프라 구축 민관협력 사업이다. 가평 지역은 남이섬, 자라섬, 쁘띠프랑스 등 주요 관광지가 분산돼 있어 관광객 체류 시간이 짧다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었고, 이를 연결하는 수상 교통망 구축이 지역의 숙원 과제였다는 주장이다.
서울신문 보도에서 핵심 쟁점으로 제기된 유람선 항로와 관련해 가정연합은 “문제가 된 수련원은 항로상 회항 지점 인근에서 잠시 조망되는 구간에 불과하다”며 “이를 근거로 전체 노선을 ‘통일교 성지순례’로 표현하는 것은 지나친 침소봉대”라고 반박했다.
대형 전기유람선의 안전한 접안을 위해서는 수심과 암반 지형, 주차 인프라 등 기술적 요건이 충족돼야 하며, 현재 선착장 부지는 이러한 조건을 갖춘 사실상 유일한 장소라는 설명이다. 과거에도 청평호로 단절된 송산리 주민들이 뭍으로 나가기 위한 선착장이 있던 곳이다. 항로 중 특정 시설이 보이는 것은 지리적 인접성에 따른 결과일 뿐, 관광 코스의 목적이나 성격을 규정할 요소는 아니라는 것이다.
논란이 된 걸개 사진과 관련해서도 가정연합은 “만약 외부 노출이 문제라는 판단이 있다면, 보이지 않도록 요청하거나 조정하면 될 사안”이라며 “이를 이유로 사업 전체를 성지순례로 규정하는 것은 본질을 벗어난 접근”이라고 밝혔다.
운항을 맡은 가평크루즈와 관련해 가정연합은 “단순 유람선을 넘어 도선사업 면허를 보유한 수상 대중교통으로서 공공 운송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대 수익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정기 노선을 유지하는 것은 이용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공공적 책임이라는 것이다.
가정연합은 “비판과 점검은 필요하지만, 사실관계를 단순화하거나 특정 이미지를 덧씌워 공공사업의 성격을 왜곡하는 보도는 지역사회에 불필요한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며 “정확한 사실에 기반한 보도를 요청한다”고 밝혔다.
2025-12-29 21: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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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실체 성령, 독생녀의 강림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여명을 깨우는 아기 울음소리
1943년 음력 1월 6일 오전 4시, 평안남도 안주. 일제의 광포한 폭압 아래 한반도가 신음하며 동토로 굳어가고 있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의 피가 대지를 적시던 혹한의 새벽, 밤의 끝자락이었다. 인류 역사의 가장 깊은 어둠이 빛으로 바뀌려는 찰나, 한 작은 방에서 여명을 깨우는 여자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생명의 탄생이 아니었다. 사탄은 “이 아이를 죽이라”며 서슬 퍼런 위협을 가해왔으나, 하늘은 침묵 대신 신령한 몽시로 응답하셨다. 새주님 김성도가 홍순애의 꿈에 나타나 “걱정마라, 이 아기는 주님의 딸이고, 너는 유모와 같다. 젖만 잘 먹여 양육하라”는 지엄한 분부를 내린 것이다. 이는 2천 년 기독교 역사가 기다려온 실체 신부의 강림을 알리는 은밀하고도 위대한 하늘의 위탁이었다.
그 무렵, 태평양 과달카날의 포성 속에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며 세계사의 판도가 뒤바뀌고 있었다. 낡은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를 열 ‘독생녀’의 강림은, 그렇게 인류의 전환점과 궤를 같이하며 은밀하고도 장엄하게 시작되었다. 이 탄생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해 온 하늘부모님의 눈물 어린 기다림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자, 타락한 인류 혈통을 근본적으로 전환할 성모(Holy Mother)의 출현이었다.
신부 영성의 강물: 카타콤에서 한반도까지
독생녀의 탄생은 2천 년이라는 유구한 섭리의 토양 위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초대교회 카타콤의 순교자들이 간직했던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고결한 정절은 중세 여성 신비가들의 뜨거운 영적 체험을 거쳐, 근대 성령 운동의 불길로 이어졌다. 오리게네스의 극단적 금욕과 힐데가르트의 신비적 계시는 모두 ‘무형의 성령’을 실체로 맞이하기 위한 영적 예비 노정이었다.
이 서구의 신부 영성은 마침내 동방의 천손 민족 한반도에 도달했다. “나는 주님의 신부요!” 이용도 목사의 외침은 관념에 머물던 기독교 영성을 실체적 신부 영성으로 전환한 신호탄이었다. 이는 한반도가 전 세계 기독교가 닦아온 신앙의 정수를 수렴하여 열매를 맺어야 할 섭리의 종착역임을 의미했다.
신부 영성은 홍순애에게 고스란히 승계되었다. 특히 영적으로 매우 밝았던 모친 조원모는 딸 홍순애를 직접 성주교단으로 이끌어 섭리의 길을 예비케 했다. 홍순애는 모친의 인도 아래 예수교회의 뜨거운 회개, 성주교의 철저한 성별, 복중교의 지성 어린 모심을 거치며 재림주 대망신앙을 키워왔다. 그녀가 꿈속에서 새색시가 되어 재림주를 뵙고 “내가 너 하나 찾으려 이와 같이 공부를 한다”는 격려를 받은 사건은, 2천 년 신부 영성이 한 여인의 심정 속에 온전히 안착했음을 알리는 섭리적 이정표였다.
3대 독녀의 혈통과 실체 성령
성자(聖者)는 당연히 남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기대를 깨고 여성으로 오셨다. 이는 독생자와 독생녀로 이루어지는 참부모 이상을 완성하기 위한 하늘의 섭리였다. 하늘은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해 구약과 신약을 대표하여 조원모와 홍순애로 이어지는 2대의 지극 정성의 터전을 닦으셨고, 그 무흠한 결실인 3대째에 비로소 독생녀를 안착시키셨다. 조원모-홍순애-한학자로 이어지는 3대 독녀의 계보는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순결한 혈통을 세우기 위해, 하늘이 수천 년간 정성 들여 준비해 온 성스러운 결실이었다.
사탄은 이 거룩한 생명을 끊기 위해 탄생 직후부터 집요하게 위협했다. 산후 6년 동안 이어진 영적 전쟁과 일제 및 공산 정권의 박해 속에서도 조원모와 홍순애는 목숨을 걸고 독생녀를 지켰다. 사탄의 침범을 막기 위해 3대 독녀의 가문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절대신앙으로 무장했다. 이는 마치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해와를 다시 찾아 세우는 복귀 섭리의 고난 노정과도 같았다.
1950년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7살의 독생녀가 폭파되는 한강 다리를 넘어 포화를 뚫고 남하한 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16개국 UN군의 참전은 국제정치적 원조를 넘어, 실체 성령이자 하늘부모님의 직계 딸인 독생녀를 보호하기 위해 하늘이 천군천사를 동원한 천주적 호위 작전이었다.
관념에서 실체로, 영성에서 안착으로
이용도 목사의 아가서 강의로 시작된 한국적 신부 영성은, 김성도의 해와 복귀 노정과 허호빈의 실체적 정성을 거쳐 마침내 한학자라는 실체 성령의 현현으로 열매 맺었다.
예수님이 종의 입장에 있던 마리아를 통해 독생자로 오셨다면, 독생녀는 2천 년 기독교가 닦은 양자의 입장에서도 가장 정결한 신령집단의 정성 기반 위에서 독생녀로 임하셨다. 로고스의 육화(Incarnation)가 독생자였다면, 성령의 육화(Pneumatic Incarnation)가 독생녀다. 무형으로만 존재하며 인류의 가슴을 영적으로만 두드리던 성령이 비로소 인간의 육신을 쓰고 역사에 안착하신 것이다. 이는 하늘부모님의 여성성이 땅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 인격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한반도는 더 이상 수난의 땅이 아니다. 서구의 신부 영성과 동방의 천손 사상이 만나 인류 구원의 결실인 독생녀를 탄생시킨 섭리의 본향이다. 1943년 그 밤의 울음소리는 사탄이 지배하던 눈물의 역사를 끝내고, 천지인참부모님이 통치하는 천일국의 서막을 알리는 승리의 함성이었다. 독생녀 홀리마더한은 이제 한민족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 인류를 참사랑의 품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생명의 어머니로 우뚝 서 계신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2-26 10: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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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허호빈, 예수님의 한을 품다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1944년 여름, 평양. 김성도가 세상을 떠난 지 석 달이 흘렀다. 허호빈과 남편 이일덕은 ‘새주님’의 영정 앞에서 밤낮으로 경배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도는 탄식에 가까웠다. “새주님을 통해 에덴동산이 회복될 줄 알았는데….” “우리가 아직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부부의 결의는 급진적이었다. 그들은 부부관계를 끊고 철저한 금욕의 길로 들어섰다.
어느 날 새벽, 허호빈은 자신의 몸에서 미묘한 변화를 느꼈다. 배 속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순간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
허호빈은 몸을 떨며 엎드렸다. “감히 제가 어떻게…” “그렇다면 무엇이라 부르면 좋겠느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허호빈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부부의 입장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그날 이후 예수는 ‘선생님’, 허호빈은 ‘사모님’이 되었다. 1940년대 평양에서, 한 여인은 스스로를 예수의 아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마리아가 준비하지 못한 강보
허호빈은 예수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그녀의 체험 속에서 펼쳐졌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날 때, 마리아는 강보조차 준비하지 않았다. 모자로 내 몸을 감쌌다.” 그 음성에는 서러움이 배어 있었다. “의붓아버지 요셉은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가난과 멸시 속에서 자랐다.” 마리아는 예수를 낳았으나, 그를 메시아로 섬기지 못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어머니조차 그의 메시아적 길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는 홀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갔고,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역사 속에서 미완으로 남았다.
허호빈은 흐느꼈다. “제가 주님의 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이 고백은 한국적 정서 위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을 품고 살아온 민족, 죽은 자의 원을 풀기 위해 저승까지 내려가는 바리공주의 서사, 억울한 영혼을 위무하는 무속의 해원 의례. 허호빈은 예수의 한을 풀어야 할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했다. 중세의 메히틸트가 “나는 그를 먹고 마신다”고 노래했다면, 허호빈은 예수를 자신의 복중에 모셨다. 상상임신에 가까운 체험이었고, 실제로 배가 불러왔다.
기이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의 여성 신비가들 역시 유사한 체험을 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극단적 금식 끝에 성체만으로 살아간다고 했고, 아빌라의 테레사는 엑스터시 속에서 신랑 예수와 결합했다. 현대 의학은 이를 병리적으로 해석하지만, 그들에게는 신앙적 체험이다. 허호빈의 복중 체험은 서구의 신부 영성과 한국의 해원 정서가 결합된, 독특한 한국적 신부신비주의다.
◆마리아가 하지 못한 일을 하다
허호빈의 정체성은 분명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의 아내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아내였다. 이일덕은 이를 받아들였고, 부부는 완전한 금욕으로 들어갔다. 300~400명의 신도가 그녀를 따랐다. 허호빈은 전 재산을 처분했다. 처음에는 기저귀에서부터 예수가 평생 사흘마다 갈아입을 옷까지, 모두 양복과 한복으로 지었다. 마리아가 모시지 못했던 것을 대신 하겠다는 결단이었다. “이제 재림주님과 신부가 입으실 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신심 깊은 여인들이 모였다. 명주를 열두 번 빨고 열두 번 다듬었다. 세 땀씩 꿰매고, 머리카락을 한 올씩 뽑아 실과 섞어 조끼를 떴다.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옷을 다 짓기 전에는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쌀은 열두 번 씻어 맷돌로 직접 갈아 떡을 만들었다. 경배는 하루 300배로 시작했다. 700배, 3,000배, 마침내 7,000배로 늘어났다.
이는 기독교 신부 영성의 전형이다. 오리게네스의 극단적 금욕, 힐데가르트의 동정 서원처럼, 허호빈 역시 자신의 육체를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 녹이려 했다. 다만 그 방식은 한국적이었다. 강신과 해원이라는 토착적 감각 속에서, 2천 년 신부 영성은 실체적 준비로 구현되었다.
◆“나는 예수의 신부입니다”
1946년 8월, 평양 대동보안서 내무서원들이 복중교를 급습했다. 허호빈과 지도자들은 체포되었고, 정성껏 준비한 옷은 모두 압수되었다. 혐의는 ‘종교를 빙자한 사기’.
보안원이 책상을 내리쳤다. “어떻게 신이 사람의 뱃속에 들어간단 말이오?”
허호빈은 눈을 감고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나는 예수의 신부입니다. 이 복중을 통해 예수님이 탄생하실 것입니다.”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가 “그리스도는 나의 신랑”이라 고백했듯, 허호빈 역시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끝내 출소하지 못했다.
출옥한 신도들은 다시 1년 동안 옷을 만들었다. 흰옷을 입고 매일 감옥 앞을 지켰다. 탄압은 점점 더 거세졌다. 많은 기독교인이 남쪽으로 떠났다. 그러나 복중교 신도들은 평양을 지켰다. “재림주님은 평양에 오신다. 이곳이 에덴궁이 된다.”는 계시를 믿었기 때문이다. 1950년 전쟁 직후, 허호빈은 총살당했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고백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예수의 신부입니다.”
오리게네스는 관념으로 신부를 사유했고, 힐데가르트는 환시로 신랑의 입맞춤을 노래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극단적 금식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 허호빈은 예수를 복중에 모셨다. 방식은 달랐지만 목적은 같았다. 예수와의 완전한 합일.
허호빈의 신부 영성은 한국적이었다. 강신과 해원, ‘한’을 풀기 위한 자기헌신이 결합된 형태였다. 바리공주가 부모를 살리기 위해 저승까지 내려갔듯, 허호빈은 예수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마리아가 준비하지 못했던 강보를 준비하고, 마리아가 못했던 혼인잔치를 대신 치르려 했다. 섭리의 언어로 말하자면, 허호빈은 마리아가 다하지 못한 책임을 탕감한 존재였다. 감옥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꺾이지 않은 고백. “나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김성도에서 허호빈으로 이어진 신부 영성의 계보. 이 거룩한 정성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일제의 감옥에서, 총살의 순간에도 지켜진 신부의 순결은 누군가에게 승계되어야 했다. 하늘이 2000년 동안 찾아온 신부의 자리는 이제 최종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2-25 14:5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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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김성도, 성서의 비밀을 받다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1923년 봄, 평안북도 철산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던 철산군 장좌동. 방 안에 홀로 앉은 여신도 김성도는 몇 달째 하나의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죄란 무엇입니까? 왜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까?”
물음의 시작은 담임 목사의 추문이었다. 예수의 십자가로 죄가 씻겼다는데, 왜 사람들은 여전히 죄를 짓는가. 왜 목회자조차 그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가. 교리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그녀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신앙적인 모순 앞에서, 김성도는 답을 하늘에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음력 4월 12일 정오, 깊은 기도 가운데 하늘이 열렸다. 김성도는 떨리는 손으로 계시를 받아 적었다. 길이 2m, 폭 30㎝의 종이 열두 장. 그 안에는 원죄의 뿌리, 예수의 십자가, 그리고 재림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이해가 담겨 있었다. 훗날 1930년대 한반도를 뒤흔든 신령운동은 이렇게 조용한 방 안에서 시작되었다.
◆하늘이 알려준 성서의 비밀
계시는 충격이었다. “죄의 뿌리는 선악과라는 과일이 아니다. 남녀 간의 잘못된 사랑이 원죄의 뿌리다.” 2000년 동안 상징으로 이해되어 온 이야기를, 계시는 실체로 풀어 주었다. 아담과 해와가 때가 되기 전에 사랑의 법도를 어긴 것, 그것이 인류 고통의 시작이라는 것. 이 계시는 교리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와 역사 전체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선언과도 같았다.
두 번째 계시는 더욱 파격적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본래 뜻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참된 결혼으로 새 혈통을 세우기 위해 오셨다.” 정통 기독교의 기준으로는 이단적인 생각이지만, 김성도에게는 예수 생애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요한복음 2장 4절)던 말씀이 이해되었다. 신부 없이 홀로 돌아가신 예수님의 한이 보였다.
세 번째 계시는 절망의 시대에 던져진 희망이었다. “재림주님은 구름을 타고 오시지 않는다.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시며, 그 땅은 한국이다.” 일제의 압박 아래 신음하던 민족에게, 이는 역사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하는 선언이었다.
가장 핵심적인 계시는 마태복음 5장 48절이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담임 목사는 이를 도달 불가능한 이상으로 여겼지만, 김성도는 달랐다. 기독교 역사 속 구도자들처럼, 그녀는 완전함을 실제로 살아내야 할 부르심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말씀이 아니라 삶이어야 했다. 그 지점에서 기성교회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철산에서 피어난 경건의 불꽃
1925년, 김성도는 장로교단으로부터 책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김성도는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시골 아낙처럼 보였지만 기도는 신령했고 설교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중세 힐데가르트가 영능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듯, 김성도 역시 신령한 능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의 심정을 꿰뚫었다. 병든 자들을 기도로 고쳤고, 등창 환자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300석 부자였지만 창고에 멍석을 깔고 그들과 함께 잠을 잤다. 떠나는 이들에게는 여비까지 주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새주님’이라 불렀다.
금욕은 철저했다.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음란의 뿌리를 끊어야 한다고 믿었다. 고기를 끊고, 쌀을 불려 생식하며, 기혼 부부에게도 절제를 요구했다. 그것은 단순한 금욕이 아니라, 재림을 기다리는 신부의 자세였다.
◆성주교단의 설립과 사명의 계승
1932년 무렵, 백남주 목사가 철산으로 와 집회를 인도하면서 교류가 시작되었다. 1933년 새주파는 예수교회에 합류했으나, 이용도의 죽음 이후 포용력을 잃은 예수교회는 새주신앙과 죄씻음 의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1935년 봄, 새주파는 출원당했다.
백남주가 제자 김백문과 함께 철산으로 왔다. 힐데가르트에게 폴마르가 있었듯, 김성도에게는 백남주가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새주파는 1937년 2월 총독부에 ‘성주교단’으로 공식 등록되었고, 전국 20여 곳에 집회소가 세워졌다. 1940년경 신도는 약 1,000명에 이르렀다.
성주교단을 중심한 하늘의 섭리는 여성이 영적 주체로 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성도의 남편은 이 사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명은 자녀 세대로 넘어갔다. 장남 부부에게서도 시련이 이어졌다. 며느리는 깊은 영적 고통 끝에 1941년 세상을 떠났다. 결국 사명은 평양의 허호빈 부부에게로 넘겨졌다.
◆민족 말살의 암흑기, 재림을 준비하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은 극에 달했다. 창씨개명, 신사참배, 기독교 탄압. 재림 사상은 천황 중심의 국체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재림을 믿던 교회들은 차례로 해산되거나 무너졌다. 이 암흑 속에서 신령집단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졌다. 극한의 시대는 극단의 영성을 낳았다.
“일본은 망하고, 한국은 새주님을 중심으로 세계 1등국이 된다.” 이 설교로 인해 1943년 가을, 김성도와 핵심 신도들이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 끝에, 김성도는 1944년 4월 1일,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계시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사명은 허호빈을 거쳐 홍순애에게로 이어졌고, 여성 신령집단의 영성은 독생녀 탄생의 영적 기반이 되었다. 공중 재림을 바라보던 시대에, 김성도를 중심한 한국의 여성 신령집단은 육신을 입고 오시는 메시아를 준비했다. 이들은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실 재림주를 위해 금욕과 정성으로 신부의 자격을 갖추었다. 하늘은 한반도에, 2천 년 기독교 역사의 열매를 준비하고 계셨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2-23 16:4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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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애원, 세종문화회관서 ‘제28회 꿈과 사랑의 크리스마스 축제’ 성료
1800명의 문화소외계층 아동·청소년과 장애인에게 올겨울 가장 따뜻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전해졌다. 발레 ‘호두까기 인형’ 무대와 함께한 문화예술의 감동이 아이들의 마음을 환하게 밝혔다.
(사)자원봉사애원(이사장 김고은)은 1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사회복지시설 이용자와 문화소외계층 아동·청소년, 장애인 등 1800여 명과 관계자 등 총 2200여 명을 초청해 ‘제28회 꿈과 사랑의 크리스마스 축제’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1997년 시작돼 올해로 28회를 맞은 이 축제는 문화예술을 통한 복지 실현을 목표로 매년 이어져 온 대표적인 연말 나눔 행사다. 문화 향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유니버설발레단의 발레 ‘호두까기 인형’ 관람 기회를 제공하며, 따뜻한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선물해 왔다.
김 이사장은 “작은 사랑이 모여 사회를 치유하는 큰 힘이 된다는 설립자의 뜻을 이어, 앞으로도 따뜻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힘쓰겠다”며 “오늘의 공연이 초청된 모든 분들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는 ‘올해의 가장 따뜻한 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은 “나눔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채워준 사랑과 진심 덕분에 이 축제가 28회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며 “이 자리가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희망과 용기의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매년 이어져 온 스페셜 프로그램인 ‘우유팩 기부 캠페인’도 함께 진행됐다. 공연을 관람한 아동·청소년들이 빈 우유팩을 기부함에 넣으면, 이를 주민센터에서 화장지로 교환해 공연장 방문이 어려운 중증장애인시설 ‘하남 소망의 집’에 전달하는 참여형 나눔 활동이다. 약 1800여 명의 마음이 모인 이 캠페인은 아이들이 받은 사랑을 다시 사회에 환원하는 ‘사랑의 선순환 프로젝트’로 자리 잡았다.
이번 축제는 보건복지부를 비롯해 유니버설발레단, ㈜일화, ㈜모나용평, 선문대학교, ㈜세계일보, 디오션리조트, 가평 크루즈 등 여러 기관과 기업의 후원으로 진행돼 연말 나눔의 의미를 더했다. 자원봉사애원은 앞으로도 문화예술을 기반으로 한 복지사업을 통해 소외된 이웃과 지역사회를 잇는 가교 역할을 이어갈 계획이다.
한편, (사)자원봉사애원은 ‘2025년 대한민국 봉사와 나눔 우수사례 공모전’에서 청소년 재능나눔 프로그램인 ‘공연배달 오나리(오늘은 나도 리틀엔젤스)’로 우수상을 수상하며, 문화예술 자원봉사 모델의 창의성과 확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2025-12-17 16: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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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예수교회, 신부 영성의 결정체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1933년 1월 3일 새벽, 원산
1933년 1월 3일 새벽 3시. 원산 광석동 47번지 백남주의 집에 50여 명이 무명으로 된 흰옷을 입고 모였다. 그날 새벽, 예수의 영이 지핀 유명화의 계시로 ‘예수교회’라는 이름이 정해졌다. 이용도, 한준명, 백남주, 이종현 부부, 이조근·이유신 부부 등이 그 역사적 순간을 목격했다.
한준명은 훗날 이렇게 증언한다. “예수교회는 주님께서 친히 신칙(神勅)으로 지어주신 명칭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교회 창립이 아니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께서 직접 한국 땅에 친림하시어 세우신 교회, 한국 고유의 영성과 기독교의 영성이 만나 서구 선교부의 재정적·신학적 지원 없이 자생한 토착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교회 창립 5개월 후인 6월 3일, 평양에서 예수교회 창립선언이 공표되었다. “우리는 교회를 떠나는 게 아닙니다. 기성교회의 내용 혁신을 기도(企圖)함이 종시일관(終始一貫)의 신념입니다.”
◆1930년대 초, 한반도 북쪽의 경건의 폭발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자 일본은 만주 침략을 본격화했다. 조선에 대한 통제 또한 한층 강화되었다. 기성교회는 형식주의에 빠져 영적 생명력을 상실해 갔다. 근본주의와 사회복음주의 사이의 갈등이 깊어져 협력체계가 깨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무렵이었다.
철산의 김성도 부인이 기도 중에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 “죄의 뿌리가 음란에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본래 예정이 아니다.” “재림주님은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신다.” “재림주님은 참된 혈통을 세우신다. 금욕해야 한다.”
원산에서는 유명화가 신령역사를 시작했다.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이 스베덴보리의 신학으로 이것을 해석하며 『새 생명의 길』을 출간했다. 평양에서는 이유신이 신령역사를 통해 거짓 교리에서 벗어나 해방될 것을 주장했다. 산정현교회 신도들이 이를 강신극(降神劇)이라며 훼방했고, 교회는 관계자들을 출교시켰다.
이용도 목사는 아가서에 심취해 예수와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했다. “나는 주님의 신부요, 주는 나의 신랑이시다.” 한국적 신부신비주의의 탄생이었다. 일제의 압박, 선교사들의 거만함, 형식화된 교회에 저항하는 경건의 폭발이 한반도 전역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기성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낙인찍었다. 신령한 영적 현상을 무당의 접신으로 몰아갔다. 이용도의 개혁 정신은 교권에 대한 위협으로 비쳐졌다. 초청받아 간 교회에서조차 그는 폭행을 당했다.
1933년 9월, 장로교 총회는 이용도, 백남주, 한준명, 이호빈 등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10월 2일, 이용도는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곳곳에서 축출당한 신도들이 몰려들었다. “오직 예수!” 순수한 신앙을 바라는 이들에게 교파는 없었다.
◆2천 년 여정, 신부된 교회를 찾아서
예수는 떠나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내가 다시 오리라’(요 14:3). ‘신랑이 올 때까지 준비하고 기다리라’(마 25:1-13). 요한계시록은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계 19:7)라고 예언했다. 기독교는 신부종교다. 2천 년 역사는 신부된 교회를 찾아 나선 성령의 여정이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분별된 교회 공동체가 출발했다. 그러나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는 급속히 세속화되었다. 가톨릭이 부패하자 제1차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루터교, 개혁교회, 영국성공회가 분립했다. 그러나 이들도 국교가 되자 제도화되고 형식화되었다.
제2차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청교도운동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 회중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로 꽃피었다. 루터교에서 모라비아 교회로, 영국성공회에서 감리교회로 분립했다.
제3차 종교개혁은 미국을 중심한 영적 대각성으로 폭발했다. 19세기 말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웨슬리안 성결운동이 태평양을 건너 조선에 도착했다. 1903년 원산에서 로버트 하디가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며 성령의 작은 불씨를 지폈다. 이것이 1907년 평양에서 거대한 불길이 되었다. 한국의 오순절, 평양 대부흥이었다. 신령한 한국교회가 출발한 것이다.
◆ 중세 페어 관계의 재현, 한국 신령집단
중세 유럽에서 신부신비가들의 영적 유산이 보존될 수 있었던 데에는 특별한 섭리적 구조가 있었다. 여성과 남성의 페어 관계였다. 힐데가르트에게는 볼마르가, 메히틸트에게는 하인리히가, 카타리나에게는 레이몬드가, 테레사에게는 십자가의 요한이 있었다.
이 페어 관계는 단순한 협력이 아니었다. 여성은 내적 사명을 담당했다. 직접적인 계시와 영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여성성,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합일, 하나님의 섭리를 밝혔다. 남성은 외적 사명을 담당했다. 여성들이 받은 계시를 신학적으로 체계화하고, 교회의 탄압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했다. 여성 신비가들은 평신도나 수녀로 제도적 권위가 없었지만 어머니와 같은 입장에서 영적으로 남성 성직자들을 지도했다. 남성 성직자들은 아들의 입장에서 여성들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보호했다.
한국 신령집단도 그러했다. 김성도와 백남주, 유명화와 이용도, 이유신과 한준명. 여성은 독생녀 탄생을 책임지며 계시로 타락의 본질, 십자가의 의미, 육신재림, 혈통복귀의 비밀을 밝혔다. 남성은 예수교회를 창립하고 체계적인 교리로 신령집단을 통합했다. 중세 유럽의 페어 관계가 1930년대 한반도에서 재현된 것이다.
원산신학산의 백남주와 한준명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서를 깊이 연구한 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통해 유명화의 신령역사를 입류(influx), 곧 성령의 내임으로 해석했다. 신령과 진리가 하나 되었다. 계시를 통한 영적 체험과 성서 연구를 통한 신학적 체계화가 조화를 이루었다. 예수교회는 ‘교회 중의 교회’, 진정한 신부 교회였다. 3.1운동으로 일격을 받은 일제가 문화통치라는 허울로 민족을 분열시켰다. 교회는 근본주의와 사회복음주의 간의 갈등에 빠졌다. 협력체계가 무너졌다. 바로 그때 신령집단이 나타나 기존 교파의 교권주의를 비판하며 독립적인 신앙 운동을 전개했다.
◆천국결혼, 최후 말씀의 완성 시대
예수교회에 특별한 계시가 내렸다. 천국결혼이었다. 결혼 상대자를 자의적으로 선택하지 않고 계시에 의지했다. 영계에서도 영원히 함께 할 배필을 점지받았다. 천국결혼은 성자의 탄생을 기대했다. 성자의 출현에 의해 최후의 말씀이 밝혀지고 지상에 새 시대가 전개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한준명과 박승걸이 먼저 하늘이 점지한 여성들과 결혼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1934년, 여아가 태어났다. “성자가 태어날 것이라더니 여자아이라니!” 기성교회가 달려들었다. “거짓 예언으로 교인을 미혹했다! 거짓 예언하는 가짜 신이 사단(邪端) 아닌가?” 비난과 조롱이 쏟아졌다.
그러나 한승운과 홍순애는 흔들리지 않았다. 한승운은 예수교회 창립 멤버로서 중앙선도원 교육국 책임자였다. 홍순애는 이용도 목사의 설교에 감동하여 장로교회에서 예수교회로 옮겨 신앙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승운이 계시를 받았다. 1934년 3월 5일, 예수교회 선도감 이호빈 목사가 주례를 섰다.
핍박은 오히려 순수한 신앙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시작된 2천 년 신부 찾기의 여정. 순교자들의 순결, 신비가들의 신부 영성, 개혁자들의 구도, 영적 대각성, 회개와 대부흥. 모든 것이 예수교회로 수렴되었다.
천국결혼으로 준비된 혈통적 기반. 신령과 진리의 조화. 이 모든 것이 어린 양 혼인잔치의 신부, 독생녀 한 분을 위한 준비였다. 1943년, 그 약속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2-16 16:5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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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용도, 불타는 신부의 사랑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1933년 10월 2일, 원산 광석동. 폐결핵으로 쇠약해진 한 목사가 마지막 순간을 맞고 있었다. 그는 누워서 손으로 박자를 그리며 찬송을 부르자고 했다. “아름다운 내 본향을 목적 삼고, 한 찬미를 불러보세...” 그의 손이 천천히 멈췄다. 33세였다.
이용도 목사. 장로교 총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당했고, 감리교에서도 사실상 축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주님의 신부요, 주는 나의 신랑이시다.” 세상이 그를 이단이라 불러도, 그는 자신이 “샤론의 들꽃같이 피는 줄 지는 줄 세상이 다 모르되, 다만 하늘만이 알아주시는 영광을 입었다”고 고백했다.
그의 짧은 생애는 불꽃같았다. 그 불꽃은 1932년 가을, 평안도 동안주 장로교회에서 한 19세 처녀의 가슴에 옮겨 붙었다. 홍순애. 훗날 독생녀를 낳을 어머니였다.
◆샤론의 들꽃: 한국 최초의 신부신비주의자
이용도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네 차례 투옥되어 총 3년을 복역했다. 옥중에서 그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갔다. 1925년, 전환점이 왔다. 폐병 3기 진단. 죽음 앞에서 그는 철저히 자신을 비웠고, 그 빈자리에 주님의 사랑이 차올랐다. 몇 차례의 영적 체험 끝에 그는 신비주의적 부흥사로 거듭났다.
이용도 목사는 사사오와 이명직의 ‘아가서 강의’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중세 유럽의 베르나르가 아가서에 심취했듯이, 그도 아가서를 통해 주님과의 신비로운 사랑을 노래했다. 그는 일기에 썼다. “오! 주 나를 인도하시니 이는 곧 왕의 후궁이로다. 나는 여기서 주를 봅니다. 그리고 주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단 술보다 더 좋은 주의 사랑을.”
성전은 그에게 신랑 예수와 조용히 만나는 면회실이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었다. 그의 신비사상은 서구의 날카로운 이성적 기반이 아닌, 예수와 진정으로 하나 되기를 바라는 한국인의 심정적 기반 위에 있었다.
이용도 목사의 예수 이해는 헬라 사상의 2원론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서구 신학이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며 삼위일체론으로 예수를 이해했다면, 그는 동양 고유의 통섭적 사고로 예수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에게 예수는 교리가 아닌 심정이었고, 이론이 아닌 생명이었다. 이것이 서구의 관념적 신비주의와 구별되는 한국적 신부신비주의의 핵심이었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그가 하나님을 어머니로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한 가련한 아이를 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왼손에 좋은 장난감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바른손에는 큰 떡 덩어리를 가졌습니다. 그는 떡을 입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눈에서는 눈물이 더벅더벅 떨어지고 입에서는 울음소리가 나옵니다.” 이용도 목사는 발견했다. 그 아이가 어머니를 찾고 갈망하는 것을. 그 아이는 바로 자신이었다. “오 주여 나는 다만 어린아이올습니다. 주님이 없이는 못살 아이올시다. 나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만 믿었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는 은폐되어 있던 하나님 어머니를 만났다.
◆일화(一化): 생명과 생명의 바꿈질
이용도 목사가 추구한 신비주의의 핵심은 ‘일화’였다. 주님과 하나 되는 완전한 합일. 그는 일기에 고백했다. “나는 주님의 신부요 주는 나의 신랑이시다. 주의 말씀이 제일 좋고 주의 얼굴이 가장 좋아요. 세상 사람의 손에는 향기로움이 있고 주님의 손에는 채찍이 있어도, 그래도 나는 주님의 품으로 들어가겠어요.”
이용도 목사의 예수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았다. “당신의 피는 어디 흐르고 말랐나이까! 나의 심장에서 당신의 피가 끓어오르게 하옵소서.” 그는 “사랑의 융합을 통해서 주님과의 혈관적 연결”을 갈구했다. 이는 중생의 본질을 “생명의 역환”, 곧 “생명과 생명의 바꿈질”로 이해한 그의 영성이었다. 서구의 관념적 신비주의가 한국인의 심정적 영성과 만나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꽃핀 것이었다.
신도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억압적인 식민지배 아래서 형식화된 교회에 실망한 평신도들은 이용도 목사의 신령한 설교에 목말라했다. 전국 각지에서 그를 초청하는 교회가 이어졌고, 부흥회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야말로 성령의 도가니였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의 급진적 영성은 기성교회와 충돌했다. 서양 신학의 세례를 받은 신학자들은 그의 신비사상을 오해했다. 교만한 교역자들은 그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교회의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개혁을 외치는 그를 경계했다. 그는 초청받아 방문한 교회에서조차 전도사나 청년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한다”는 그의 일갈은 교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1931년 황해노회, 1932년 평양노회가 연이어 금족령을 내렸고, 1933년 장로교 총회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아가서 2장에 빗대어 고백했다. 샤론의 들꽃같이! 피는 줄, 지는 줄 세상이 다 모르되, 다만 하늘만이 알아주시는 영광을 입었다고. 그리고 자신을 요란한 대로변 가시밭에 핀 한 송이 백합화라고. 가시에 찔리고 상처받아도, 오히려 더 진한 향기를 풍기는 백합화. 이단으로 몰리고 교권으로부터 배척받을수록, 그의 신앙은 더욱 순수해지고 주님을 향한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중세의 여성 신비가들이 화형대에서도 신부의 정체성을 지켰듯이, 이용도 목사 역시 온갖 오해와 핍박 속에서도 가시나무 가운데 한 송이 백합화로 피어났다.
◆꺼지지 않는 불꽃, 한 처녀의 가슴에
1932년 10월 3일, 동안주 장로교회. 그날 밤, 이용도 목사는 아가서를 강의했다. 신랑 되신 주님과 신부의 사랑, 재림주님이 완전한 신부를 찾고 계신다는 메시지. 그 말씀이 열아홉 살 홍순애의 가슴에 성령의 불을 지폈다. 주님을 신랑으로, 자신을 신부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1933년 10월, 이용도 목사는 세상을 떠났다. 예수와 같은 33년의 짧은 생애였다. 그러나 그가 홍순애에게 전한 신부의 영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 뒤인 1943년, 독생녀의 탄생으로 결실을 맺었다.
‘샤론의 들꽃’ 이용도. 그는 한국 최초의 신부신비주의자로서, 서구 기독교 2천 년의 영성과 한민족 수천 년의 영성이 만나는 다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다리를 건너 독생녀가 오셨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2-08 16: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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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천 가정연합 한국협회장 ‘전국 순회 특별강연’ 성료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 지난 10월부터 ‘어머니가 비추는 평화의 빛’을 주제로 이어온 전국 순회 특별강연이 7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가정연합 송용천 한국협회장은 이날 오전 경남 창원 경남교구본부에서 사회단체 지도자, 종교 지도자, 일반 참석자, 가정연합 식구 등 2000여 명이 온·오프라인으로 참석한 가운데 ‘한학자 총재의 평화를 위한 삶과 업적’을 소개했다.
이번 행사는 온라인으로 생중계하여 18개 시·군·구 지역 각 현장에서 동시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참여 폭을 크게 확대했다. 지난 8월 취임한 송 협회장이 경남지역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송 협회장은 “한 총재는 오직 세계 평화와 인류 화합을 위해 달려오신 분”이라면서 “선학평화상 제정 등 평화의 비전을 보여주고 구체적인 실천을 이끌어 냈으며 평화와 포용이 가장 필요한 이 시대 모든 것을 품어주는 ‘어머니의 리더십’을 보여주셨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은 오해와 의도적인 왜곡으로 진실된 모습이 흐릿하게 보일지라도, 홀리마더한의 진실의 빛은 결코 영원히 가둘 수 없다”고 강조했다.
행사는 정판주 부교구장의 사회로 개회선언, 유효관 창원교회장의 감사기도, 연인기 경남교구장의 인삿말, 영상시청, 서가해 함안교회장의 효정간증, 효정찬양, 송용천 한국협회장의 주제강연, 김창환 마산대교회장의 억만세 삼창 순으로 진행됐다.
연 교구장은 “혼란한 시대 속에서 오늘의 말씀이 우리 사회와 인류가 나아갈 근본적 해결의 길을 제시하게 될 것”이라며 “한 총재님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희망과 변화를 찾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 우리 모두는 더욱 마음을 모으고 평화운동에 적극 앞장서 나아가자”고 말했다.
송 협회장의 전국 순회 특별강연회는 지난 부산·울산지역을 시작으로 12월까지 서울, 경기, 강원, 충청, 전라 등에서 총 13회에 걸쳐 이뤄졌다.
지난 8월27일 가정연합 21대 한국협회장으로 공식 취임한 송 협회장은 해외선교사 활동을 시작으로 오세아니아, 유럽, 일본 등지에서 가정연합 대륙회장 및 천주평화연합(UPF) 대륙의장을 역임했다. 학교법인 선학학원 이사장 등을 통해 미래인재 양성에도 힘을 쏟았으며, 2023년에는 가정연합 세계회장을 맡아 전 세계적인 평화운동에 매진했다.
2025-12-07 17: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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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신부 영성, 바다를 건너다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한국 교회에서 널리 불리는 이 찬송가의 작사자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사사오 데쓰사부로.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의 신학자로서 그는 사후 출간된 『아가강의』(1924)를 통해 식민지 조선에 신부 영성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다.
아가서를 강의할 때 그는 이렇게 외쳤다.
주님과 깊은 교통을 나누고, 밀실에서 주와 교류하며, 성결의 향기를 발하는 삶. 어린 양 혼인잔치의 신부를 지금부터 맛보라는 것이었다.
서양의 신부 영성은 어떻게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이번 회에서는 미국의 대각성운동에서 시작해 일본과 한국으로 이어진 영적 물줄기를 따라가 본다.
◆신령과 진리, 두 물결이 만나기까지
19세기 미국 제3차 대각성운동은 두 갈래의 흐름을 만들었다. 하나는 무디로 대표되는 복음주의 부흥운동, 다른 하나는 웨슬리안 전통을 계승한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이다.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성경의 권위와 개인적 회심을 강조하며 장로교·감리교·침례교 등 교파를 초월한 영적 각성 운동을 견인했다. 반면 성결운동은 ‘완전한 성화’를 주장하면서, 중생 이후에도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신자가 더 높은 영적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두 흐름은 서로 다른 경로로 동아시아에 도달한다. 복음주의는 장로교·감리교 선교사들을 통해, 성결운동은 동양선교회를 통해 각각 일본과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물줄기가 한반도에서 합류했다는 사실이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은 장로교 선교사들이 주도했지만, 그 내부의 영적 분위기는 성결운동 특유의 회개, 성령 체험, 거룩한 삶의 추구를 강하게 품고 있었다.
◆동양선교회, ‘신부 교회’를 세우다
1901년 도쿄에서 동양선교회가 창립되었다. 무디성서학원 출신 카우만 부부와 길보른, 일본인 나카다 주지, 그리고 사사오 데쓰사부로가 주축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재림 준비를 위해 세계 곳곳에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결교회를 세우는 것.”
사사오의 영성 형성 과정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1888년 미국 유학 중 대각성운동의 현장을 체험하고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귀국 후에는 영국 캠브리지 출신의 성결운동가 벅스톤에게 4년 동안 사사받았다. 벅스톤은 생전에 아가서를 주제로 깊이 강해했으며, 그의 사후 제자들이 그것을 정리해 『아가영해(雅歌靈解)』라는 책으로 엮어 냈다.
1905년 사사오는 도쿄성서학원 원장이 되었고, 그곳에서 배운 한국인 중 한 명이 이명직이다. 이명직은 1916년 경성성서학원 교수가 되어 성서를 가르쳤다. 두 사람은 아가서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4년 일본에서 사사오의 아가강의가 유고집으로 출간되었고, 1926년 경성에서 이명직의 아가서강의가 출간되었다. 무디성서학원에서 도쿄성서학원으로, 다시 경성성서학원으로. 기독교 2천년 신부의 영성이 ‘아가서 강의’를 통해 한국 교회에 전해졌다.
◆중세에서 근대로, 귀용의 유산
그렇다면 벅스톤의 신부 영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7세기 프랑스의 여성 신비가 마담 귀용을 만나게 된다.
귀용(Jeanne Guyon, 1648~1717)은 아가서 주해서를 썼다는 이유로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인물이다. 그녀는 아가서를 신랑(그리스도)과 신부(영혼)의 사랑과 합일에 대한 여정으로 해석하며, 영혼이 영적 혼인을 통해 하나님과 ‘본질적 합일(essential union)’에 들어간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해석은 로마 가톨릭 당국에 의해 정적주의(Quietism)로 단죄되었다.
그러나 귀용의 영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강조한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태도’는 세기를 건너 웨슬리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고, 19세기 출판된 그녀의 전기를 통해 다시 조명받았다. 이 불씨는 성결운동가들의 마음을 붙들었고, 1875년 영국에서 시작된 케직(Keswick) 운동으로 이어지며 개신교 전반에 ‘더 높은 영적 삶’(Higher Life)의 메시지를 퍼뜨렸다.
귀용의 영성이 이토록 지속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사상이 이미 깊고도 넓은 영성신학의 전통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귀용은 프란치스코 드 살, 토마스 아 켐피스 등 경건 고전을 탐독하며 자신의 영적 기반을 다졌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으로 이어지는 중세 신비주의 계보가 자리한다. 특히 베르나르가 18년에 걸쳐 집필한 『아가서 설교』는 서구 영성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꼽히며, 귀용은 이 계보의 한가운데서 후대 영성 운동에 깊은 영감을 전한 인물이었다.
벅스톤은 바로 이 케직 전통 안에서 사사오를 훈련시켰다. 이렇게 중세 유럽에서 움튼 신부 영성이 영국을 거쳐 일본으로, 다시 한반도로 흘러들어오는 놀라운 길이 열린 것이다. 사사오가 벅스톤에게서 배운 것은 단순한 성경 해석이 아니라, 2천 년 기독교 영성을 관통하는 신부 영성의 맥이었다.
◆정통과 이단의 경계에서
사사오와 이명직의 아가서 해석은 ‘경건주의적 관점’에 속한다. 그들은 신부를 ‘완전한 성결에 이른 참된 교회’로 보았다. 이는 신부를 보편 교회로 이해하는 교회론적 관점과 신부를 개인 영혼으로 이해하는 신부신비주의적 관점 사이에 놓여 있는 해석이다.
이명직은 이렇게 썼다. “그 유형적 교회가 다 신부가 아니며 그 다수한 교파가 다 신부는 아니니라.” 모든 교회가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신령한 교회’만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제도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 신앙에 머무르는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건주의적 해석에는 신부신비주의로 기울 수 있는 가능성도 숨어 있었다. 사사오는 아가서 1장 2절을 주석하며 ‘주를 갖고 싶음’, ‘주와 애정을 통함’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교회 공동체를 강조하면서도, 개인이 그리스도와 직접 사랑으로 결합하는 영적 체험을 여전히 열어둔 것이다.
마침내 서양의 신부 영성은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도착했다. 12세기 베르나르에서 시작해 아빌라의 테레사, 귀용, 웨슬리, 케직 운동, 벅스톤, 사사오, 이명직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2-05 15:3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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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효정세계평화재단 장학증서 수여식… 미래 글로벌 리더 33명 선발
평화세계를 실현할 세계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수여해온 ‘2025 장학증서 수여식’이 효정세계평화재단(이사장 이기성) 주최로 4일 서울 용산구 통일빌딩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국내외 장학생 33명에게 장학증서가 수여됐다. 이들은 각 분야에서 성장 가능성을 보인 학생들로, 새로운 도전의 출발점을 제공했다. 재단은 그동안 교육을 통한 사회적 책임 강화와 미래세대 지원을 강조해 왔으며, 이번 수여식은 그 비전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연아 선학학원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이 자리까지 온 노력을 격려하고 축하한다”며 “공적인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배운 가치를 실천해 사회에 기여하는 인재로 성장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도현섭 미래인재양성원 원장은 축사를 통해 “작은 물방울이 모여 강이 되듯 여러분의 순수한 마음과 한 걸음이 큰 미래를 만들 것”이며, “끝까지 겸손과 감사, 그리고 맑음을 지켜 달라”고 전했다.
이기성 이사장은 “원모평애재단 설립자 한학자 총재는 교육이 미래를 만드는 핵심 가치라 여겨 지혜와 덕성을 갖춘 인재 양성을 위해 세계 청소년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원해 왔다”고 밝히며, “그 결과 많은 미래 인재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에는 서인국 세계선교본부 사무총장, 김석진 천주평화연합 회장, 김고은 세계평화여성연합 회장, 홍인명 다문화평화연합 회장 등 각계 인사가 참석해 장학생들의 비전을 함께 축하했다.
글로벌 장학생들은 한국어 능력 향상, 신앙과 학업의 병행, 공동체 생활 경험 등을 바탕으로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내 멘토링 장학생들 역시 학습 역량 강화, 멘토·멘티 간의 정서적 교류, 자기주도적 학습 경험을 통해 성장을 이루며 프로그램에 높은 만족도를 나타냈다.
효정세계평화재단은 2013년부터 장학사업을 꾸준히 펼쳐 왔으며, 지금까지 해외 1,571명, 국내 4,416명 등 총 5,987명의 학생에게 장학 혜택을 지원했다. 재단 관계자는 “앞으로도 다양하고 지속적인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미래 세대가 평화와 공공선을 실현하는 세계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번 수여식은 재단이 추구하는 교육 철학과 더불어 장학생들이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실질적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2025-12-04 21: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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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은 빛이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고아가 된 한민족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2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의 불길이 마침내 민족 전체를 깨운 것이다.
개신교가 중심이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체포된 인원 중 기독교인 비율이 18%에 달했다. 특히 여성 피검자의 65%가 기독교인이었다. 평양 대부흥으로 고양된 영적 각성과 민족의식이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된 것이다. 18세기 미국에서 제1차 대각성이 청교도 정신을 부활시켜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종교적 각성을 민족의식으로 발전시키고, 독립혁명의 정신적 기반이 된 것과 같은 흐름이었다.
3.1운동으로 7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4만7000여 명이 투옥되었다. 그러나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돌아보면 일제 치하의 한민족은 부모 없는 고아와 같았다. 왕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의병은 만주와 연해주로 밀려났다. 권력과 결탁한 유교, 왜색화된 불교, 일제에 순응한 가톨릭. 반면에 민족종교인 천도교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학교에서는 칼을 찬 훈도가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제 막 전래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한 의지처였다.
3·1운동 이후 개신교는 일제의 집중 감시 아래 놓였다. 일제는 겉으로는 ‘문화통치’를 표방했지만, 실상은 민족분열통치였다. 친일파를 양성해 민족을 분열시키고, 고등경찰을 동원해 독립운동가를 색출했다. 교회 설교까지 감시 대상이 되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조차 불온사상으로 의심받는 암울한 시대였다.
◆경건의 폭발, 신령집단의 출현
1929년, 세계대공황이 터졌다. 일본은 경제가 무너지자, 군부가 전면에 나섰다. 이들은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제국주의 정책을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획책했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기성교회는 형식에 빠져 영적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민족분열통치의 영향으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전혀 다른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수많은 신령집단들이 출현한 것이다. “일본의 마수, 선교사의 거만, 기성교회의 형식화”에 저항하며 일어난 ‘경건의 폭발’이었다.
철산의 새주파, 원산의 여선지파, 이용도파가 대표적이다. 계시와 환상, 신유와 방언이 넘쳤다. 제도권 교회가 채워주지 못한 영적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새주님으로 불리던 여성 지도자 김성도는 기도 중에 계시를 받았다. “죄의 뿌리가 음란에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본래 예정이 아니다. 재림주님은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신다.” 원산의 백남주는 새 진리를 밝힌다며 『새 생명의 길』을 출간했다. 이용도 목사는 아가서에 심취해 예수와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했다. “나는 주님의 신부요, 주는 나의 신랑이시다.” 한국적 신부신비주의의 탄생이었다.
기성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1933년, 축출당한 이들이 모여 예수교회를 창립했다. ‘오직 예수’를 기치로 연합한 것이다.
◆신사참배, 무너지는 교회
1937년, 중일전쟁이 터졌다. 조선은 병참기지로 전락했고, 황민화정책이 시작되었다. 창씨개명, 조선어 금지. 젊은 남자들은 징용과 징병으로, 여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갔다. 민족혼이 철저하게 말살당할 위기였다.
일제는 교회의 급소를 찔렀다. 신사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사의 중심에는 천조대신, 태양의 여신이 있었다. 일제는 종교 행위가 아닌 국민의례라고 주장했지만, 신앙인들에게 이는 명백한 우상숭배였다.
미국, 캐나다, 호주 출신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일제는 미션스쿨을 폐교시키고, 선교사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했다. 압박 속에서 선교사들은 사직하거나 본국으로 떠나야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는 적성국민으로 분류되어 강제 추방되거나 억류되었다.
한국 교회는 방향감을 상실했다. 신령집단과 기성교단이 하나 되어 신사참배를 물리쳤어야 했다. 미국 선교사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으니 미국 정계를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교계는 사분오열했다. 내부적으로는 신학적 주도권과 교권 다툼, 지역감정이 폭발하여 서로를 비난했고, 외부적으로는 신사참배라는 거대한 압박에 갈라지기 시작했다.
예수가 오기 전, 헬라 왕조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을 때도 그랬다. 유대인들은 분열되었다. 권력과 결탁한 자들, 율법에 매달려 형식화된 자들, 무장 투쟁에 나선 자들. 그리고 부패한 교권에 실망하고 광야로 물러나 메시아의 강림을 준비한 자들이 있었다.
한국 교회의 분열도 이와 닮아 있었다. 신사참배가 강요되는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일제에 적극 협조했고, 어떤 이들은 굴복했다. 어떤 이들은 영적인 투쟁을 벌였다. 주기철 목사는 “일사각오(一死覺悟)!”, 즉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을 지키겠다고 외치며 네 차례 투옥 끝에 순교했다. 침례교회(동아기독교회)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유일한 교단이었다. 성결교회도 강력히 저항했다. 어린 양 혼인잔치에 나아갈 성결한 신부 교회가 되는 것이 스스로의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심한 탄압 속에 굴복하고 말았다. 천황 중심의 영구적 세계 지배를 꿈꾸던 일제에게 이들의 재림사상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일제는 이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광야에서 준비된 빛
신령집단은 산과 들로 흩어져 기도하며 메시아의 재림을 준비했다. 유대 광야의 에세네파가 그랬듯이, 그들은 희망 없는 세상과 단절하고 정성을 드리며 하늘의 때를 기다렸다. 기성교회는 그들을 이단시했다. 일제는 그들을 탄압했다.
1943년, 교회는 역사상 가장 깊은 밤을 지나고 있었다. 살아남은 기성교단들은 애국헌금을 바치고, 기미가요를 제창하며, 동방요배와 신궁 참배를 해야 했다. 태양신 숭배의 억압이 교회를 짓누르는 상황 속에서도, 어서 속히 재림주가 오기를 소망하는 신령집단의 기도와 눈물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평안남도 안주에서 한 여아가 태어났다. 그 깊은 어둠의 자리에서, 가장 찬란한 빛이 조용히 이 땅에 내려온 것이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2-04 13:3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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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자유를 위한 평화의 외침 집회’ 대구서 개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그간 추구해 온 평화운동의 진정성과 신앙 공동체로서 정체성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 지난달 30일 대구 관문인 동대구역 광장에서 시민과 신도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종교자유를 위한 평화의 외침' 집회를 개최했다고 2일 밝혔다.
이날 집회는 변사흠 부교구장의 기도를 시작으로 홍인배 교구장의 환영사, 청년 스피치, 평화 선언식, 구호 제창 순으로 이어졌다. 행사 후 참가자들은 파티마병원까지 평화 행진을 진행했다. 청년들이 직접 작성하고 낭독한 ‘평화 선언식’, 거리에서 진행된 ‘평화 행진’이 큰 주목을 받았다.
홍인배 교구장은 환영사에서 “문선명 총재와 한학자 총재가 종교와 민족을 넘어 인류가 하나되는 길을 열기 위해 평생 헌신해 왔다”면서 “오랜 세월 사람과 나라, 종교 사이의 벽을 허물고 대화와 협력을 촉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고 강조했다.
홍 교구장은 최근 한 총재가 오해와 편견 속에서 걸어온 평화의 길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종교의 자유가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임에도 그 가치를 지키는 일은 우리 스스로의 책임임을 재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십 년간 평화·화해·봉사·가정 가치 실천, 청소년 교육, 다문화가정 지원 등 지역사회와 세계 곳곳에서 묵묵히 선한 영향력을 넓혀 온 단체로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분열을 조장한 적이 없는 평화 공동체”임을 재차 밝혔다.
이어진 청년 스피치에서는 이주일·정원다·변찬수·성훈정씨가 한학자 총재가 전쟁과 분단의 상처 속에서도 원망 대신 사랑을 선택해 세계 곳곳에서 평화의 등불을 밝힌 삶을 소개하며, “평화는 거창한 희생이 아닌 우리가 먼저 마음을 열고, 먼저 따뜻한 말을 건네며, 조금 더 사랑을 선택하는 작은 결심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스피치 후 참가자들은 “종교의 자유 우리가 지킨다”, “종교의 평화 세상이 바뀐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평화 선언식이 열리는 등 질서 정연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 행진을 이어갔다. 집회는 공동체의 정체성과 비전을 재확인하고, 한 총재의 조속한 귀환을 염원하며, 앞으로도 종교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 나가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행사를 마무리했다.
2025-12-02 17: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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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시작된 평화, 부산·울산으로 확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가정연합) 부산·울산교구가 지난 30일 부산역 광장에서 ‘종교자유를 위한 한마음 평화집회’를 개최했다. 최근 사회 일각에서 종교 관련 오해와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종교의 자유를 호소하고 지역사회와의 소통 의지를 밝히기 위해 마련된 행사다.
집회는 가정연합 소속 청년들이 중심이 돼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가정과 이웃, 지역사회가 함께 평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공유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자리한 가정 단위의 참여도 눈에 띄었다.
행사는 △오프닝 영상 △청년·평화대사 스피치 △평화선언문 발표 △공연 및 찬양 순으로 이어졌다. 발언에 나선 청년·평화대사들은 개인의 삶과 신앙 경험을 소개하며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이라는 가정연합의 비전을 강조했다.
이남경 목사는 “진실은 조용하지만 반드시 드러난다”면서 한학자 총재의 고독한 노정을 향한 자신의 심정을 전했다. 그러면서 “눈물을 책임으로, 책임을 실체로 바꾸겠다”고 호소했다.
박형준 평화대사는 “갈등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힘이 아닌 평화의 태도”라며 “평생을 인류 화합에 헌신해온 한 총재님의 삶을 통해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핵심 가치는 종교의 자유”라고 역설했다. 일본 청년 타구치 카오리는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인류 한가족’ 비전에 감동해 그 사랑과 평화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겠다”면서 “한국과 일본의 상처를 넘어 화해와 공존을 이루고자 하는 진심을 고백한다”고 토로했다.
가정연합 부산·울산교구 측은 이번 집회가 갈등이나 대립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가정연합 관계자는 “우리의 목적은 특정인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참부모님께서 평생 실천하신 화해·봉사·평화의 삶을 시민들과 나누는 것”이라며 “가정연합이 추구해 온 진정성 있는 신앙문화와 건강한 가정의 가치를 지역사회와 함께 나누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또한 “부산·울산 청년들이 직접 기획하고 움직였다는 점이 앞으로 이 지역에서 전개될 평화활동의 중요한 출발점”이라며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평화의 장을 계속 넓혀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2025-12-01 22: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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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강원교구, 종교자유를 위한 한마음집회 개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강원교구는 그간 추구해 온 평화운동의 진정성과 신앙공동체로서 정체성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 지난달 30일 춘천 공지천 조각공원에서 ‘종교자유를 위한 한마음집회(이하 한마음집회)’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이날 개최된 평화콘서트는 가정연합 강원교구가 주최∙주관하고 세계평화여성연합 강원지부, 천주평화연합 강원지부,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강원지부가 후원했다. 특히 청년들이 직접 작성하고 낭독한 ‘평화성명서’ 발표, 거리에서 진행된 ‘평화행진’이 큰 주목을 받았다.
가정연합 창립 이후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One Family under God)’ 비전으로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생애를 통해 전개된 70여 년의 평화·화합운동의 의미 중 특별히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번 한마음집회는 △춘천 우두 농악대 공연 △찬양 및 공연 △효정 스피치 △평화 성명서 발표 △평화행진 및 줍깅 등 다채로운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효정 스피치 발표자(세키아스카, 최연심, 김대한, 이원주)들은 가정연합의 축복활동을 통해 가정을 이룬 자들과 그 자녀들로서 다문화 가정의 어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고 평화와 화합의 비전을 품게 된 사연을 전했다.
또 가정의 소중함과 가치를 각자의 삶 속에서 느낀 경험을 바탕으로 청중들에게 진솔하게 증언했다.
특히 일본인 세키아스카 청년은 다문화 가정에서의 삶과 봉사활동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에 기여해온 경험을 공유했다. 최연심 청년은 신앙 속에서 성장하며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이야기했다. 김대한 청년은 가정연합의 신앙이 단순한 종교적 믿음을 넘어 이 땅 위 평화를 실현하는 삶임을 강조했고, 이원주 청년은 참부모님이 보여주신 부모의 마음과 참사랑을 통해 인류가 하나님 아래 한가족이 될 수 있음을 체험한 사례를 전하며 참석자들의 큰 공감을 이끌었다.
정문기 교구장은 “이번 한마음집회를 통해 가정연합이 추구하는 진정한 평화의 가치를 함께 나눌 수 있었다”며 “청년들이 전한 효정 스피치를 통해 다문화가정의 도전과 극복, 그리고 참사랑의 실천이 생생하게 전달됨으로써 가정연합의 본질적 가치를 지역사회에 알리는 뜻깊은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바쁘신 가운데 참석해 주신 지역주민들과 성도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평화와 화합을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겠다”고 덧붙였다.
2025-12-01 09:4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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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907년 평양, 한국의 오순절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내가 아간이오” - 회개로 열린 성령의 문
1907년 1월 14일 밤, 평양 장대현교회. 600여 명의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저녁집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길선주 목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내가 바로… 아간과 같은 죄인이라오!”
그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고, 눈에서는 회개와 참회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친구를 속이고, 믿고 맡긴 재산을 가로챘소. 내가 죄인이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집회에 은혜를 내리지 아니하시나이다.”
◆눈물의 강을 지나 탄생한 불길
길선주 목사의 고백에 예배당 안은 절망과 부끄러움으로 가득 찼다. 그때 한 여인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온몸을 떨며 입을 열었다.
“청일전쟁 때 제가… 제 아이를 죽였습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어린 생명을 제 손으로 거둔 죄. 12년 동안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비밀이었다. 여인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려 통곡했다. 예배당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었다.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또 한 사람. 도둑질, 간음, 시기, 미움, 사기. 은밀한 죄악들이 낱낱이 드러났다.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마치 건물의 지붕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눈사태처럼 우리 위에 쏟아져 내린 것 같았다.”
이날 밤 평양에서는 회개와 성령의 불길 속에 한국 교회가 새롭게 거듭났다. 이것이 ‘한국의 오순절’이라 불리는 평양 대부흥운동의 시작이었다.
이 불길의 씨앗은 4년 전 원산에서 뿌려졌다. 1903년 여름, 로버트 하디는 깊은 번민에 빠져 있었다. 13년간 조선에서 선교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그는 교회의 더딘 성장을 한탄하며 신도들의 영적 각성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성령의 역사는 먼저 그의 마음을 찔렀다. 설교 중에 하디는 자신의 교만을 마주했다. 백인으로서의 우월감, 의사로서의 오만, 조선인을 향한 편견. 그는 용기를 내어 신도들에게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진심 어린 고백이 신도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하나둘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이 회개의 불씨가 번져나가 마침내 1907년 평양에서 거대한 불길이 되었다.
당시 조선은 을사늑약(1905년)으로 외교권을 빼앗겨 나라의 주권이 흔들리고 있었다.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위기 속에서 한민족은 영적 각성을 경험했다. 구약 시대의 고난 받는 이스라엘처럼,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현실의 고통 속에서 하늘을 더욱 간절히 찾았다.
◆성령의 물결, 민족을 하나로 묶다
길선주의 고백 후 여러 사람이 기도하려 하자, 인도자 그레이엄 리 선교사가 말했다.
“그렇게 기도하고 싶다면, 모두 함께 기도하십시오.”
그 순간, 600명의 기도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블레어는 이를 “많은 물이 떨어지는 소리, 하나님의 보좌를 치는 기도의 바다”라고 표현했다. 혼란이 아니었다. 소리와 영의 광대한 화음이었다. 한국 교회의 특징인 강렬한 ‘통성기도’가 바로 이날 탄생했다. 이 영적 체험이 서로 다른 신앙적 배경을 가진 조선 기독교인들을 하나로 묶었다.
150여 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제1차 대각성을 떠올려보자.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중부 식민지의 독일계 이민자, 남부의 스코틀랜드계 장로교도들은 순회 부흥운동을 통해 최초의 범(汎)아메리카적인 공동 경험을 공유했다. 이 영적 각성 운동은 지리적·교파적 경계를 초월하여 이들을 하나로 만들었으며, 그 결과 이들은 스스로를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God’s chosen people)으로 자각하게 되었다. 이것이 미국 독립혁명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평양 대부흥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의 침탈 아래 고통 받던 한국인들은 성령 체험을 통해 구약성서 속 이스라엘 민족과 자신들을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압제받는 식민지의 현실이 바빌론 포로기의 고난과 겹쳐 보였고, 언젠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싹텄다. 많은 한국 기독교인은 자신들이 박해를 견디고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 곧 ‘동방의 이스라엘’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자각은 식민지 압제에 맞서는 영적 저항력을 제공했다.
성령 체험을 통해 형성된 신앙과 민족의식의 결합은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실제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부흥운동을 통해 영적으로 갱신된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민족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렸고, 이것이 비폭력적 독립운동의 영적 배경이 되었다.
◆“조선에 군함 대신 성령을 보내셨다”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이자 무교회주의 창시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는 평양 대부흥의 소식을 듣고 깊이 감동했다. 그는 놀라운 증언을 남겼다.
“조선은 비록 정치적으로 자유와 독립을 잃었지만, 그 대신 영적인 자유와 독립을 획득했다. 하나님은 조선에 군대나 군함 대신 더 강한 성령을 주셨기에, 조선은 행복한 나라다.”
우치무라는 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이 한반도에 깊이 뿌리내려 동양 전체에 전해질 것이라 예견했다. 초대교회 유대 기독교인들이 로마 세계에 복음을 전파했듯이, 한민족이 동양의 영적 중심이 될 것이라는 통찰이었다.
실제로 부흥운동 이후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되었다. 부흥 전 술과 기생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평양이 ‘거룩한 도성’으로 완전히 바뀐 것이다. 1905년 3만7000여 명이던 조선 개신교 신자 수는 1910년 20만 명을 넘어섰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흥을 경험했다.
종교개혁 이후 400년, 하늘부모님은 신부 된 교회를 찾아 나오셨다. 루터와 칼뱅을 통해 진리를 회복하시고, 경건주의자들을 통해 영성을 되살리셨으며, 대각성 운동을 통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셨다. 그 긴 여정의 끝에서 하늘부모님은 마침내 한반도에서 순수한 교회를 출발시키셨다. 한국 교회는 독생녀를 맞이할 영적 토대를 갖추기 시작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30 14:2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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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제3차 대각성, 성령의 물결이 태평양을 건너다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1886년 노스필드, 학생자원운동의 폭발
1886년 여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의 마운트 허먼 스쿨. 251명의 대학생이 한 달간 성경 공부와 전도 집회에 모여 있었다. 한 중년 남자가 단상에 올라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음성으로 외쳤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드릴 용기가 있습니까? 온 세상이 복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가겠습니까?”
순간, 깊은 정적이 흘렀다. 젊은이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격렬한 내적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미지의 땅으로 떠날 수 있을까?’ 그때였다. 한 청년이 천천히 일어났다. “저는 중국으로 가겠습니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회장의 정적을 깨고 잔잔히 울려 퍼졌다.
마치 물꼬가 터진 듯했다. 두 번째, 세 번째 학생이 일어섰다. “저는 인도로 갑니다!” “저는 아프리카로 가겠습니다!” 젊은이들이 큰 소리로 외치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서 뜨거운 결단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날 밤, 100명의 젊은이가 무릎을 꿇고 서약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어디든 가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선교의 황금기를 연 ‘학생자원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불타는 결단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2만여 명의 선교사를 전 세계로 파송했다. 그중 상당수가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을 향해 떠나게 됐다.
◆무디와 제3차 대각성: 회심에서 성령세례로
1855년 보스턴, 한 구둣방에서 18세 청년이 가죽을 두드리고 있었다. 네 살에 아버지를 잃고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란 드와이트 무디는 외삼촌 때문에 의무감으로 교회에 다녔다. 설교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졸음이 쏟아졌고, 찬양 시간에는 입술만 움직일 뿐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상처 때문인지 하나님은 그에게 멀고 무서운 심판자였다.
주일학교 교사가 구둣방을 찾았다. “무디, 자네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하네.” 그 순간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물결처럼 무디의 마음에 밀려들었다. 견딜 수 없었다. 거리로 뛰쳐나가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고 소리쳤다.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자상한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더 놀라운 체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871년 시카고 대화재. 그의 교회와 집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절망 속에서 무디는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성령님의 능력이 거대한 파도처럼 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너무나 충만하게 부어져서 견딜 수 없어 하나님께 그만 주시기를 간구해야 했습니다.”
무디에게서 두려움은 사라지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불타는 열정만 타올랐다. 그때 미국은 다윈의 진화론과 독일 고등비평, 자유주의 신학의 공세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디는 깨달았다. 단순한 복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몸을 던졌다. 슬럼가에서, 전쟁터에서, 사람들의 삶 한복판에서 복음의 불씨를 지폈다. 그리고 성경 교육과 영적 부흥을 위해 무디성서학원을 세웠다. 이곳에서 그는 성경의 무오성과 근본적 신앙을 굳건히 세우며, 복음의 능력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힘썼다. 무디의 열정은 미국과 영국 전역을 뒤흔들었다.
◆세 갈래 성령운동과 사중복음의 완성
제3차 대각성운동은 마치 세 갈래 강물이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이었다. 무디와 R.A. 토레이가 이끈 개혁주의 성령운동은 성령체험을 거듭난 자의 필수 조건으로 가르쳤다. 피비 팔머의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완전한 성화를 위해 성령 충만을 추구했다. 윌리엄 시모어의 오순절운동은 1906년 아주사 거리에서 폭발하며 방언과 치유의 은사를 강조했다.
앨버트 심슨이 ‘사중복음’을 체계화했다. 그리스도는 구주(Savior), 성화자(Sanctifier), 치료자(Healer), 재림주(Coming King). 이는 차가운 교리가 아니었다. 심슨 자신이 만성 질병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받은 뜨거운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었다.
놀랍게도 이는 지난 세기들의 영적 여정과 완벽하게 연결되었다. 에드워즈의 ‘회심’이 구주 체험이 되었고, 피니의 ‘완전 성화’가 성화자 체험이 되었으며, 새롭게 치료자와 재림주 체험이 추가되어 완전한 사중복음이 완성된 것이다.
무디와 토레이는 무디성서학원에서 ‘성령세례는 봉사를 위한 능력’이라고 가르쳤다. 이들은 개인 구원을 넘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다. 특히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믿고 ‘이 세대 안에 온 세계를 복음화하자’는 학생자원운동을 일으켰다. 마침 블랙스톤의 『예수의 재림』 같은 책들이 널리 읽히며 종말론적 열정이 불타올랐다.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로: 성령의 씨앗이 뿌려지다
학생자원운동과 무디성서학원에서 배출된 선교사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향해 떠났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모펫, 하디, 블레어... 이들의 가슴에는 무디가 심어준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깊은 절망 속에서, 이들이 전한 재림 신앙은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개혁주의, 웨슬리안, 오순절. 세 갈래 성령운동이 모두 한반도로 흘러들었다. 장로교를 통해, 감리교를 통해, 성결교회를 통해. 미국에서 시작된 성령운동이 한국인들의 심정과 만나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1903년 원산에서 하디가 자신의 교만을 통회하며 시작된 작은 불씨가 1907년 평양에서 거대한 불길로 타올랐다. 길선주 장로의 눈물 어린 회개가 터지자, 1,500명이 모인 장대현교회가 성령의 바다가 되었다. 한국적 통성기도가 그날 밤 탄생했다.
한편 무디성서학원 출신들은 일본에서도 동양선교회를 세우고 도쿄성서학원을 만들었다. 여기서 공부한 한국 청년들이 1907년 서울에 복음전도관을 열며 성결교회의 씨앗을 뿌렸다. 성결교회는 임박한 재림을 준비하며 완전한 성결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로 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성령운동의 물결이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 도달했을 때, 서구 기독교 2천 년의 신부 영성이 마침내 동방 한민족의 고유한 영성과 만나는 역사적 순간이 시작되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26 14: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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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성령의 각성, 신대륙을 깨우다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1734년 노샘프턴, 어린 소녀의 기도
1734년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은 깊은 영적 침체에 빠져 있었다. 청교도 후손들이 세속주의와 이신론에 물들어 신앙의 열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회개를 촉구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굳어 있었다.
그런데 한 어린 소녀가 매일 골방에서 “주님, 저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눈물로 기도했다. 한참 울던 아이가 “엄마, 천국이 제게 다가오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한 소녀의 회심이 가족과 이웃으로 확산되어 마을 전체가 영적 각성의 열기로 뜨거워졌고, 곧 미국 대륙 전체를 뒤바꿀 거대한 영적 대각성의 첫 불꽃이 되었다.
◆제1차 대각성: 청교도 정신의 부활과 민족 의식의 형성
하늘부모님은 제1차, 제2차 종교개혁에 이어 제3차 종교개혁으로 영적 대각성운동을 일으키셨다. 루터와 칼뱅이 진리를 회복하고, 경건주의자들이 영성을 되살렸다면, 이제는 성령의 실천적 역사를 통해 독생녀를 맞을 수 있는 순수한 신부된 교회를 세우시려는 섭리였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는 오직 “참으로 선택된 자들만이 모이는 공동체”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신자들에게 직접적인 성령체험과 진솔한 신앙고백을 요구했다. 내적이며 깊은 영적 체험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강조했다. 그의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청중들에게 강렬한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조지 휫필드의 순회 설교를 통해 교파를 초월한 연대가 형성되었고, 집회 중에 강렬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이 영적 체험이 서로 다른 배경의 식민지인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중부의 독일계 이민자들, 남부의 스코틀랜드계 장로교도들이 모두 같은 성령을 경험하며 선민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이는 후일 미국 독립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이 운동으로 장로교는 성령 체험을 중시하는 신파(New Side)와 정통 교리를 고수하는 구파(Old Side)로, 회중교회는 부흥 찬성파인 뉴라이트(New Light)와 반대파인 올드라이트(Old Light)로, 침례교회는 분리침례교와 정규침례교로 분화했다. 분립은 혼란이 아니라 더 순수한 교회를 향한 하늘부모님의 섭리였다.
◆두 혁명의 갈림길: 종교의 자유 vs 종교로부터의 자유
제1차 대각성운동이 확산되면서 식민지 교회들은 영국 성공회의 간섭에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가 주교 파견과 교회 통제를 시도하자 식민지인들은 신교의 자유를 외치며 저항했다. 이것이 후일 정치적 독립 의지로 발전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같은 시기에 미국 독립혁명(1776년)과 프랑스 시민혁명(1789년)이 일어났지만, 두 혁명의 종교적 성격은 정반대였다. 미국 독립혁명은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었다. 식민지인들은 영국 성공회의 간섭 없이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권리를 요구했다. 이들에게 자유란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따라 신앙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했다.
반면 프랑스 시민혁명은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었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부르주아지들은 가톨릭교회의 막대한 특권과 십일조 징수에 강하게 반발했다. 혁명 정부는 루이 16세를 처형했고, 수많은 성직자들을 학살했으며, 교회와 수도원을 파괴하거나 세속 건물로 전용했다. 이들에게 자유란 종교적 권위와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이성에 따라 살아갈 자유를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수정헌법 제1조로 “연방의회는 국교를 수립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고 명시하여 더 순수한 신앙을 추구할 자유를 보장했다. 반면 프랑스는 종교 자체를 억압하며 무신론 국가를 지향했다.
◆제2차 대각성: 완전 성화와 사회 개혁의 물결
독립전쟁 후 미국은 서부 개척 시대를 맞았다. 하지만 급격한 사회 변화와 이민자 증가로 혼란이 가중되고, 교회에는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하여 불신앙이 만연했다. 이때 제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1821년 변호사 찰스 피니는 법정에서 성서를 인용하다가 “돈을 위해 불의한 자를 변호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그날 저녁 기도하던 중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했다. 그는 “거대한 전기의 파도가 나를 관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완전히 녹여버렸다”며 눈물로 고백하고 복음 전도자의 길로 나섰다. 피니는 ‘성령이 도우시면 온전하고 완전한 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설교했다.
피비 팔머는 성결을 제단 위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전에는 내면의 성결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을 중시했다면, 이제는 성령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방언을 말하며, 적극적으로 전도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것을 성화의 증거로 여기게 되었다.
◆노예제 폐지 운동과 남북전쟁의 종교적 배경
제2차 대각성운동으로 사회 개혁이 확산되었다. 피니를 중심한 부흥사들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며 노예제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적극 폐지 운동에 나섰다. 오벌린 대학은 피니의 영향으로 미국 최초로 흑인과 여성에게 입학을 허용한 대학이 되었다. 이 대학 출신들은 ‘지하철도’라 불리는 비밀조직을 운영하며 노예들의 탈출을 도왔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도 이러한 종교적 각성의 산물이었다. 이 소설은 북부 주민들의 반노예제 감정을 크게 자극했다.
남부에서는 노예 소유주들이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노예제를 정당화했지만, 북부 교회들은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노예제를 강력히 반대했다. 감리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 등이 노예제 문제로 남북으로 분열했다. 이러한 종교적 갈등이 정치적 대립과 결합되어 결국 남북전쟁(1861~1865년)으로 이어졌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1863년)도 이러한 종교적 각성의 정치적 표현이었다.
동방으로 향하는 성령의 바람
2차례에 걸친 대각성운동은 미국에서 청교도 정신을 되살리고 완전 성화를 추구하는 영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하늘부모님이 독생녀 출현을 준비하시는 섭리적 과정이었다.
이제 성령의 바람은 더욱 강력한 3차 대각성운동으로 발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디와 토레이의 재림 신앙, 성결운동의 사중복음, 오순절운동의 은사가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영적 물결을 형성하여 마침내 태평양을 넘어 한반도를 향해 밀려왔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25 16: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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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2차 종교개혁, 더 순수한 교회를 향한 분립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제도화의 그늘, 메마른 신앙
1675년 독일 루터교 목사 필립 야콥 슈페너는 『경건한 열망』을 집필하고 있었다. 30년 전쟁 후 개신교회들은 가톨릭과의 교리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교한 신학 체계를 구축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要理問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등을 만들어 신도들에게 암송하게 했다. 교회는 형식적 예배에 치중했으며 급속히 경직됐다. 루터교, 영국국교회, 개혁교회가 국교로 확립되면서 신앙은 더욱 제도화됐다. “교회는 있으되 그리스도가 없고, 성서는 있으되 영성은 메말랐다.” 슈페너가 꿈꾼 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교리가 아닌 체험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늘이 더 순수한 교회를 찾기 위한 ‘제2차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청교도의 순수한 꿈, ‘언덕 위의 도시’를 세우다
영국국교회가 확립되면서 가톨릭적 요소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현실에 청교도들은 분노를 느꼈다. 신도들은 교리문답을 암송하고 예배에 참석했지만, 그 안에는 참된 회심도, 구원의 확신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과연 선택받았는가?”
칼뱅에 따르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만 구원받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이 선택받았음을 알 수 있을까? 청교도들이 찾은 답은 철저한 성화(聖化)의 삶이었다. 회심 체험으로 거듭나고, 그 증거가 경건한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구원은 단순한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영적 투쟁이었다.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묘사한 여정이 바로 그러한 삶의 모습이었다. 리처드 백스터는 교회가 참된 신자들로 이루어진 거룩한 공동체, 곧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탄 102명은 폭풍과 질병을 뚫고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그해 겨울, 절반만 살아남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불타는 열망이 그들을 이끌었다. 이어 1630년 대규모 이주민이 매사추세츠만에 도착했다. 청교도들은 ‘언덕 위의 도시’를 꿈꾸며 자기들이 살 집을 짓기 전에 먼저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박해를 받은 청교도들은 결국 영국국교회에서 분립하여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등 새로운 교파를 형성했다. 각각의 교파가 더 높은 영적 기준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슈페너의 경건회, ‘교회 안의 작은 교회’에서 모라비아 교회로
독일에서는 혁신적인 실험이 시작됐다. 루터교 목사들은 교리 해설에만 집중했고, 신도들은 수동적으로 듣기만 했다. 슈페너가 창시한 경건회(collegia pietatis)는 기존 교회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한겨울 저녁, 프랑크푸르트의 한 가정에서 열린 경건회 모습을 상상해보자. 촛불이 흔들리는 작은 방에서 열 명 남짓이 둘러앉아 성서를 읽고 있다. 목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서로 배우고 격려하는 공간이다. 서로 영적 고민을 나누고 기도로 돌본다. 이 모임은 형식적이기만 한 신앙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할레의 프랑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회개의 투쟁’을 강조했다. 교리를 머리로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참된 회심은 온 존재를 뒤흔드는 변화이며, 죄에 대한 깊은 절망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동반되는 극적 체험이어야 했다.
진첸도르프는 경건주의를 더욱 실천적으로 발전시켰다. 박해받는 모라비아 형제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며 헤른후트 공동체를 세웠다. 그는 반(Band)과 콰이어(Choir)라는 소모임을 조직해 강력한 선교 사업을 펼쳤다. 결국 슈페너의 교회 갱신 운동에서 시작된 경건주의는 독립적인 모라비아 교회로 분립됐다.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구원의 확신을 찾다
영국의 존 웨슬리는 회심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참된 믿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1735년 조지아 선교를 위해 대서양을 횡단하던 중 충격적인 체험을 했다. 폭풍우가 광포하게 배를 뒤흔들어 갑판이 갈라질 것만 같았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지고, 바닷물은 창문을 넘어 들이쳤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모라비아 교도들은 마치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고요했다. 그들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두 손을 모아 찬송을 불렀고, 어린아이들마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반면 웨슬리는 온몸이 떨렸다. 가슴은 죽음의 공포로 조여 왔고, 냉기가 그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순간, 깨달았다.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두려움에 떠는구나!’ ‘나는 인디언들을 개종시키려 미국으로 건너갔다. 오, 그렇다면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신앙적 회의감이 선교 사역 내내 그를 괴롭혔다.
1738년 5월 24일 저녁이었다.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모라비아 교도 모임에서 누군가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인을 용서해 주신다”는 내용이었다. 웨슬리는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지금까지 열심히 기도하고 선행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이라 믿었는데, 사실은 예수님이 이미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속회(Class Meeting)를 조직했다. “지난주에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 모임은 참신했다. 각자의 신앙 체험을 나누고 서로의 영적 성장을 격려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신도들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웨슬리는 칭의를 넘어 완전성화까지 가능하다고 외쳤다. 교회는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뤄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개혁 운동은 영국국교회의 심한 박해를 받았고, 결국 감리교회로 분립됐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진 영적 유산
17~18세기 제2차 종교개혁은 형식에서 영성으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제도에서 공동체로의 근본적 전환이었다. 구원에 대한 확신, 살아있는 영성, 성화에 대한 열망은 모두 순수한 교회를 위한 섭리였다. 이들이 꿈꾼 것은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 속에서 자라는 신부 공동체였다.
이 영적 유산이 미국을 중심한 영적 대각성운동을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다. 1907년 평양 대부흥과 1930~40년대 신령집단의 토양이 됐고, 마침내 1943년 독생녀 탄생의 기반을 마련했다. 서구 2천 년 기독교의 신부 영성과 한민족의 고유한 영성이 만나는 섭리적 순간이 준비되고 있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24 10: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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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민주화 운동 이끈 원로 종교인 안톤 우낙 박사 인터뷰
안톤 우낙 박사(82)는 2차 세계대전의 폐허와 공산주의의 그늘 속에서 성장한 체코 출신의 원로 종교지도자요, 평화운동가이며 교육자다. 공산정권 아래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를 외치던 청년 지도자였고, 1970년대 초에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운동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3년 8개월의 징역형을 살았다.
1989년 ‘벨벳혁명’ 이후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과정에 참여했고, 이후 체코상공회의소에서 한국위원회 의장을 맡아 20년간 양국 관계 증진에 힘써 왔다. 그는 선문대 글로벌 부총장으로도 활동하며 한·체코 간 교류를 이끌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체코 대학생 192명을 인솔해 한국의 교육·연구 프로그램을 연계할 만큼 양국 간 가교로서 역할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에도 체코 과학기술대 학생 14명을 이끌고 광주과학기술원(GIST), 울산 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 등을 시찰했다.
그의 삶은 유럽 현대사의 격랑과 거의 그대로 겹친다.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사상의 자유를 잃어버린 시대를 통과했고, 민주화의 열망이 거리에서 폭발하던 순간을 몸으로 겪었다. 감옥에서 보낸 청춘, 비밀경찰의 감시를 피해 이어간 신앙과 운동, 그리고 체제 전환 이후의 재건 과정까지. 이런 경험은 오늘날 그가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눈에 깊은 층위를 더해주고 있다.
우낙 박사는 한반도 통일을 “세계평화의 구조적 조건”으로 바라본다. 그는 “힘으로는 절대 통일할 수 없다”며 “신뢰 구축과 인도적 접근을 중심으로 한 장기 전략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북한 주민 2,500만 명이 수십 년간의 체제와 이념 속에서 강한 결속을 이루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군사력에 의존한 ‘단기 처방’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가 ‘통일의 골든타임’으로 기억하는 시점은 1991년 12월이다. 문선명·한학자 총재 내외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12개 항목의 협력 합의를 이끌어냈던 때다. 그는 “그 선언은 남북이 적대의 역사를 넘어 새로운 질서를 설계할 수 있는 출발점이었다”며 “한국 정부와 사회가 그 기회를 통일의 전환점으로 활용했어야 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한국 정치권과 일부 종교계가 냉전적 사고에 머무른 채 비판과 경계에만 매달림으로써, 역사적 호기를 스스로 흘려보냈다고 지적한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장례식 조문을 둘러싼 혼선과 박보희 보좌관의 ‘사실상 망명’ 사태 역시, 그가 보기에 한국이 통일의 문을 스스로 좁혀버린 상징적 사건이다.
그는 이에 덧붙여 “한국에는 평생 전 세계를 돌며 평화를 전한 유일한 한국 여성 지도자가 있는데, 그분이 바로 한학자 총재“라며 “한 총재는 지난 60여 년간 세계 무대에서 평화와 가족의 가치를 전해 온 분으로, 한국이 먼저 그분을 존중해야 하며, 그분을 감옥이 아니라, 노벨평화상 무대에 세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통일을 향한 길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서로를 향해 쏟아냈던 오해와 불신을 솔직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그 위에 새로운 신뢰를 쌓을 때 비로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습니다.”
우낙 박사는 특히 젊은 세대의 통일 무관심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한다. 체코에서도 민주주의 세대는 공산주의의 참혹함을 실감하지 못했고, 한국 역시 분단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서 젊은 세대가 ‘현상 유지’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도 독일처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채택했지만, 결국 김일성 일가의 세습 이념으로 변질되었다”며 “주민들이 지도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일종의 ‘무신(無神) 종교’가 형성된 특수한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독일 통일 모델을 기계적으로 한반도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통일 전략에 있어서도 그는 정부 주도 방식에서 벗어난 ‘전사회적 접근’을 주문한다. 체코 민주화 과정에서 정부, 시민단체, 종교계, 학계가 함께 움직일 때 변화의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던 경험을 떠올리며, 한국에서도 민간 교류 재개, 청년 교류 확대, 학술·문화 협력 등 여러 층위의 노력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통일은 외교·안보 정책을 넘어, 교육·문화·가치관의 재구성까지 포괄하는 ‘미래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일해저터널과 베링해협터널로 상징되는 ‘국제평화고속도로’ 비전도 강하게 지지한다. 인프라 연결은 갈등을 구조적으로 약화시키는 장치라는 해석이다. “도로와 철도는 단순한 교통 수단이 아닙니다. 로마가 길을 만든 순간 세계가 하나로 이어졌듯, 인프라는 평화의 구조를 고정시키는 힘을 갖습니다. 한일해저터널은 한국과 일본의 신뢰 회복과 청년 교류 확대, 경제 협력 심화를 동시에 이끌 수 있는 100년짜리 평화 인프라입니다.”
체코와 한국의 협력에 대해서도 그는 미래 세대의 교류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체코 기업은 한국의 기술력과 제조 역량을 높게 평가하면서, 첨단 산업·에너지·교통 분야에서 한국과의 협력을 확대하고자 한다. 동시에 선문대를 비롯한 한국 대학과 체코·슬로바키아 대학 간 GCD 프로그램은 양국 청년이 함께 과제를 해결하며 서로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우낙 박사는 “미래 세대의 교류가 국가 관계의 질을 결정한다”며 “청년들이 서로의 나라를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그 어떤 정치 선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동유럽 출신인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견해도 분명히 밝혔다. 체코는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지만, 그는 “전쟁은 군사력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며 “경제, 가치, 종교, 문화가 모두 함께 움직여야 진정한 평화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장기적 해법은 결국 평화 교육, 관용 교육의 확산에 있다. 이는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도 정확히 포개진다.
우낙 박사는 한국이 가진 독특한 가치와 책임에 대해서도 차분히 짚어줬다. 그는 “한국은 태평양 시대의 중심국가로서 내부 갈등에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협력과 조화를 선택해야 한다”며 “가정은 한국 문화의 근본이며, 어른을 공경하고 부모를 존중하는 전통은 세계의 젊은이들에게도 강한 매력으로 다가온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이러한 가치는 내부 결속은 물론, 세계 평화의 비전을 구체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는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지 않습니다. 수많은 희생과 선택이 쌓여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한반도의 평화 역시 누군가의 헌신과 진실을 직시하려는 용기 위에 꽃필 것입니다.
2025-11-21 13: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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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민의 사명·공동체적 가치, 세계에 알릴 것”
19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본사 대강당에서 ‘한민족선민연구원’ 개원식이 열렸다. 한민족선민연구원은 ‘한민족은 하늘이 함께해 왔다’는 설립자 한학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의 뜻을 계승해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를 학문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세계일보 부설 기관으로 설립됐다.
연구원은 세계일보의 3대 사시인 애천·애인·애국과, 3대 사지인 조국통일의 정론, 민족정기의 발양, 도의세계 구현을 토대로 한민족의 역사·정신·문화 속 선민사상의 가치를 발굴하고 세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기식 세계일보 사장은 환영사에서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수많은 주변국의 외침을 받아 왔다”며 “그럼에도 꺾이지 않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키며 살아온 것은 ‘한민족은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천손(天孫)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연구원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한민족선민연구원은 단순한 부설 기관이 아니라 선민사상의 가치를 만방에 알릴 세계적 연구 거점이 될 것”이라며 “세계일보는 연구원이 학술·사회적으로 (한국은 물론 인류사회에) 기여하는 기관으로 성장하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초대 연구원장은 김민지 선문대 신학과 교수가, 부원장은 오오타 토모히사 일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교리연구원장이 맡는다. 김민지 원장은 “한민족의 고대 서사, 역사, 문화, 영성 전반을 학술적으로 탐구해 그 안에 흐르는 ‘선민의 사명’과 ‘공동체적 가치’를 연구하겠다”며 “이러한 정체성은 하늘의 축복을 받은 선민의 정체성으로 전승되어야 한다”고 연구소 출범 의미를 설명했다. 김 원장은 이어 “국제 학술 교류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선민사상을 세계인이 공감하는 가치로 확장하겠다”고 밝혔다.
오오타 부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창세기의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언급하며, 한민족 선민사상의 역사적·신학적 의미를 밝히는 연구원의 역할에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김은상 가정연합 중앙행정원장과 김문식 가정연합유지재단 이사장은 축사를 통해 연구원이 한민족의 정신을 기반으로 미래 문명을 제시하는 기관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개원식에는 문훈숙 효정한국문화재단 이사장, 도현섭 가정연합 미래인재양성원장, 김종관 효정글로벌통일재단 이사장, 김고은 세계평화여성연합 한국회장, 홍윤종 한국종교협의회 회장, 조만웅 원로목회자회 회장, 옥윤호 가정연합 한국협회 서울북부교구장, 송광석 남북통일정책연구원장, 노구치 가즈히코 가정연합 일본협회 교리연구원 부원장, 다나카 신타로 일본협회 교리연구원 역사편찬부장, 오택용 선문대 교수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2025-11-19 21: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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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회복이 인류 위기의 열쇠”…송용천 협회장, 한학자 총재의 평화 철학 강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송용천 한국협회장은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근본 해법은 가정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데 있다”며 “가정이 바로 설 때 비로소 사회의 병폐를 고치고 인류가 파멸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한학자 총재의 외침은 세계에 큰 경종을 울렸다”고 밝혔다.
가정연합 강원교구(교구장 정문기)는 지난 16일 ‘어머니가 비추는 평화의 빛’을 주제로 강원도 평창군 횡계면 모나 용평 블리스힐 스테이 웰니스홀에서 평화대사와 가정연합 신도 7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학자 총재의 평화를 위한 삶과 업적’을 소개하는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조준왕 부교구장의 사회로 개회선언, 안인성 교회장의 감사기도, 정문기 교구장의 인사말씀, 기타다 요시토 청년의 효정간증, 영상시청, 송용천 협회장의 주제강연, 효정찬양, 억만세 삼창 순으로 이어졌다.
정문기 교구장은 인사말에서 “가정연합이 걸어온 길의 진실을 다시 확인하고,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으며 평화·통일운동의 본질을 정확히 알리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며 이번 강연회의 취지를 설명했다.
일본 출신으로 한국에서 활동 중인 기타다 요시토 청년은 “문선명·한학자 총재님의 뜻을 이어받아 사랑과 평화의 다리가 되겠다”며 “그 사랑을 제 삶으로 증명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포부를 전해 박수를 받았다.
주제강연에 나선 송용천 협회장은 “한학자 총재는 사랑과 희생으로 인류의 미래를 열어온 평화의 어머니”라고 소개하며 총재의 평화 철학과 생애적 의미를 상세히 전달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이번 순회강연은 지역 신도들과 평화대사들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앞으로도 지역사회와 협력해 평화·봉사·가정가치 확산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행사에 참석한 신도와 지도자들은 “송 협회장의 강연을 통해 한학자 총재의 진정한 삶과 평화 비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며 “언론의 편향된 보도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진실은 드러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2025-11-17 19: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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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종교개혁, 더 순수한 교회를 향하여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종교개혁, 가로막힌 길을 열다
1517년 10월31일, 독일 비텐베르크. 한 젊은 수도사이자 교수가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못 박았다. 학술 토론을 제안하는 평범한 대학의 관행이었지만, 이 작은 행동은 유럽 전체를 뒤흔든 큰 울림이 되었다. 루터가 본 것은 가난한 농민들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 마지막 동전까지 털어내는 현실이었다. “헌금함에 동전이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나온다”는 설교가 횡행하던 시절, 그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복음인가?”
종교개혁은 단순한 제도 개혁이 아니었다. 신자가 하늘부모님께 직접 나아가는 길을 회복하는 영적 혁명이었다. 중세 신령한 여인들이 그토록 갈구했던 주님과의 직접적인 만남, 그 길이 이제 모든 이에게 열린 것이다.
1520년은 기독교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이다. 루터는 세 편의 논문을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세워놓은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첫 번째 논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에서 ‘만인사제설’을 선언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 성직자만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천 년 넘게 이어진 성직자 계급의 독점이 무너졌다.
두 번째 논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7성사 제도를 비판했다. “성사는 은혜의 통로지만, 교회가 그것을 통제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성사를 통해 신도들을 영적으로 구속하고 있었다. 성사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교리는 신도들을 교회 제도에 속박하는 사슬이었다.
세 번째 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명확히 했다. “우리는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다.” 선행과 공로가 구원에 필수라는 중세 교회의 가르침이 뒤집혔다.
루터의 3대 원리는 분명했다.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교회와 성직자라는 중개자 없이 하늘부모님께 직접 나아가는 길을 여는 혁명이었다.
박해와 분립, 더 순수한 교회를 세우다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는 철회 요구 앞에서도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추방당했지만, 이 박해는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과 분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칼뱅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고,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넜다. 그러나 역사는 증언한다. 박해는 신앙을 정화하고, 고난은 더 높은 기준을 세운다. 초대교회가 로마의 박해 속에서 순수성을 지켰듯, 개신교도 이런 과정을 거쳐 더 깊은 영성을 갖추게 되었다.
이 흐름은 단순한 조직 분열이 아니라 시대적 신앙 정체성이 분별되는 과정이었다. 세속적 흐름과 경건한 흐름이 갈라지며, 더 순수한 교회를 향한 길이 열리고 있었다.
400년의 대칭, 섭리가 그리는 나선형 구조
《원리강론》은 섭리가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반복과 상승의 나선형 구조를 이룬다고 설명한다. 실제 역사는 이 패턴을 드러낸다.
예수님 강림 400년 전, 세계는 두 문화적 흐름으로 분립되었다. 알렉산더의 정복으로 확산된 헬레니즘은 인간과 이성을 중심에 둔 가인형 세계를 형성했고, 철학과 과학이 발전했다. 반면 말라기 선지자의 개혁으로 정립된 헤브라이즘은 신 중심의 아벨형 세계를 이루며 신앙의 본질을 회복했다. 가인형 헬레니즘이 로마제국의 발전으로 이어져 공통 헬라어, 사통팔달한 도로망, 통일된 법과 제도를 통해 복음 전파를 위한 외적 환경을 조성했고, 아벨형 헤브라이즘이 메시아를 맞이할 내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분립섭리를 통해 독생자를 맞을 세계적 기반이 조성되었다.
독생녀 탄생 400년 전에도 동일한 구조가 반복되었다. 문예부흥은 인본주의 세계관을 부활시켰고, 종교개혁은 신본주의 신앙을 회복했다. 두 흐름은 서로 다른 방향이지만, 점차 성숙해가면서 새로운 시대의 장을 열었다. 칼뱅은 1543년 《기독교강요》 3판을 완성하고,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제출했으며, 이는 독생녀 탄생(1943년)과 정확히 400년 차이다. 이 놀라운 동시성은 섭리가 일관된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부의 단장, 3단계의 준비
종교개혁은 단번에 완성된 사건이 아니다. 하늘부모님은 400년에 걸쳐 세 차례 개혁의 물결을 일으키셨다. 16세기 루터와 칼뱅의 개혁은 성서를 중심으로 신앙의 기초를 세운 진리의 회복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개신교도들이 형식주의에 빠지자, 17~18세기 슈페너와 웨슬리를 통해 영성의 회복이 일어났다. 이어 19세기까지 미국 전역을 휩쓴 대각성운동은 성령의 은사와 재림 신앙을 회복하는 실천의 회복이었다.
진리, 영성, 실천의 3단계는 마치 혼인을 앞둔 신부가 준비를 갖추어 가는 과정과 같다. 하늘부모님은 이 긴 여정을 통해 신부된 교회를 찾아 세우셨으며, 마침내 독생녀를 맞이할 영적 기반을 완성하셨다.
동방으로 향하는 신부 영성
흥미롭게도 종교개혁 400년의 여정은 모두 서방에서 동방으로 향했다. 독일에서 시작된 루터의 개혁은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을 거쳐 대서양을 건넜다. 경건주의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다시 미국으로 전파되었다. 대각성운동의 물결은 마침내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 도달했다.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서구 기독교 2천년의 신부 영성이 동방 한민족의 고유한 민족성과 만나는 하늘부모님의 섭리였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시작으로 한국 교회는 서구와는 다른 독특한 영성을 드러냈다. 성령의 체험과 회개의 눈물, 그리고 메시아 재림에 대한 간절한 기대가 그것이었다.
종교개혁 400년의 대장정은 독생녀 탄생으로 완성되었다. 서구의 신부 영성이 동방의 한민족과 만나 1943년 한반도에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종교개혁은 단순한 서구 교회의 개혁 운동이 아니라,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세계사적 준비과정이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17 10:3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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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천 년의 갈망, 주님과 하나 되다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중세 한 여인, 천 년의 문을 열다
13세기 독일 막데부르크, 한 베긴회 여성이 낡은 양피지에 펜을 대었다. 메히틸트라는 이름의 이 평신도 여성은 40년 넘게 금욕과 기도로 살아왔다. 펜 끝에서 흘러나온 문장은 파격적이었다.
“가장 미천한 영혼인 나는 그를 안고 먹고 마시며 내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이 강렬한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중세 여성들은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이토록 절실히 갈망했는가?
그들이 추구한 것은 단순한 영적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 곧 주님과 하나 되어 새 생명으로 탄생하는 것이었다. 오리게네스가 아가서를 통해 발견한 신비적 합일은 천 년을 거쳐 중세 신령한 여성들의 가슴에서 불타올랐고, 마침내 실체적 체험으로 꽃피었다. 이것은 신부 영성의 정점, 그 완성을 향한 이야기다.
관념에서 영적 체험으로
신부신비주의(Bridal mysticism)의 핵심은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함께 있는 것(union)을 넘어서,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무아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unity)을 의미한다.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는 아가서를 새롭게 해석했다. ‘신랑은 그리스도, 신부는 개인의 영혼.’ 로고스(말씀)와 영혼이 신비롭게 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이 통찰은 신인합일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하지만 아직 관념의 차원에 머물렀다.
12세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이 신비를 실재적인 영적 체험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아가서 설교를 통해 영혼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3단계를 제시했다. 첫째, 회개의 입맞춤(발). 죄인이 주님의 발에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 둘째, 깨달음의 입맞춤(손). 주님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움을 받는다. 셋째, 완전한 일치의 입맞춤(입술). “영혼이 신랑과 입맞춤할 때, 둘은 완전히 하나가 된다.”
베르나르는 이것을 ‘신화(神化, deification)’라 불렀다. 마치 포도주에 섞인 물방울처럼, 불에 달아오른 쇠붙이처럼, 빛으로 가득 찬 공기처럼... 인간의 정(情)이 하나님의 뜻으로 완전히 변화한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고양이 아니다. 존재 자체가 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완전한 일치의 목적은 중생(重生), 곧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자칭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갈망한 것은 영적 위안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자체가 바뀌는 것이었다. 타락한 옛 생명에서 하늘의 새 생명으로, 급진적 변화를 추구했다.
“그를 먹고 마신다”: 실체적 일치를 향한 갈망
메히틸트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인간의 오감 중 가장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감각인 미각(味覺)으로 표현했다. 맛보고, 씹고, 먹고, 마시는 과정.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예수가 나의 피와 살이 되고, 나는 예수의 생명으로 채워지는 실체적 일치의 갈망이었다.
‘신성의 흐르는 빛’에서 메히틸트는 영혼이 신부로서 거쳐야 할 영적 여정을 3단계로 설명했다. 첫째, 자아를 비우는 정화의 단계. ‘참된 사막(영혼의 공허함)’에서 신과 만난다. 둘째, 신랑을 기다리는 준비의 단계. 자아를 완전히 비울 때 신성한 사랑의 불길이 나를 채운다. 셋째,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완성의 단계. ‘고통의 쓴 잔’을 마심으로써 예수의 수난에 동참하고, 마침내 그와 하나가 된다.
중세 신령한 여인들은 이러한 신과의 직접적 일치를 무엇보다 갈구했다. 14세기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대화’에서 영성체를 통해 “사랑의 불에 취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그분의 피로 내 영혼이 불타오른다”, “나는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은 내 안에 계신다”고 고백했다. 영성체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는 것이요, 그리스도가 흘린 피를 받아 마시는 성사였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신비한 결혼, 즉 사랑의 합일을 이루는 실제적인 통로였다.
14세기 노리치의 줄리안은 다른 차원의 통찰을 더했다. “주님께서 내게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품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 안에 품으시고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줄리안의 통찰은 하나님의 여성성에 대한 이해를 크게 심화시켰다. 어머니의 사랑처럼 품고, 먹이고, 보살피는 하나님. 이것은 장차 하늘어머니이신 독생녀를 위한 중요한 영적 기반이 되었다.
15세기 제노바의 카타리나는 신비체험을 실천적 영성으로 승화시켰다. 극적인 회심을 체험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불타오르자, 세상의 모든 것이 달라 보였습니다.” 그녀는 제노바의 한 병원에서 병자들을 돌보며 25년 동안 봉사했다. 일치는 관조에 머무르지 않고 이웃사랑으로 드러났다.
신부들과 보호자들
중세 여성 신비가들의 영적 유산이 보존될 수 있었던 데에는 특별한 섭리적 구조가 있었다. 바로 여성과 남성의 페어(Pair) 관계였다. 12세기 빙엔의 힐데가르트에게는 수사 볼마르가 있었다. 볼마르는 60년 넘게 그녀의 환시를 기록하고 증거했다. ‘Scivias’(길을 알라)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이것은 그녀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녀를 통해 말씀하신다.”
13세기 메히틸트에게는 도미니코 수사 하인리히가 있었다. 하인리히는 흩어진 그녀의 원고를 수집하고 편집했다. ‘신성의 흐르는 빛’을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다듬어주었다. 책의 서문에서 하인리히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 책은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것이니, 아무도 그 순수성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14세기 시에나의 카타리나에게는 고해 신부 레이몬드가 있었다. 그들은 6년간 함께 여행하며 교황과 교회 지도자들을 중재했다. 그는 카타리나의 편지와 ‘대화’를 필사하고, 사후 전기를 작성했다.
16세기 아빌라의 테레사에게는 십자가의 요한이 있었다. 테레사의 영적 통찰과 요한의 신학적 깊이가 결합하여 카르멜회 개혁을 이루어냈다. 둘 다 교회박사로 추대되며 신비신학의 쌍벽을 이루었다.
이러한 페어 관계는 단순한 협력 이상이었다. 여성은 내적 사명을 담당했다. 직접적인 계시와 영적 체험을 통해 성서와 섭리의 본질적 내용을 밝혔다. 남성은 외적 사명을 담당했다. 여성들이 받은 계시를 신학적으로 체계화하고, 교회의 탄압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며 외적 기반을 넓혔다. 여성 신비가들은 평신도나 수녀로서 제도적 권위가 없었지만, 어머니와 같은 입장에서 영적으로 남성 성직자들을 지도했다. 남성 성직자들은 아들의 입장에서 여성들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체계적인 신학으로 교회 안에서 그 유산이 이어지도록 했다.
이것은 독생녀 시대를 위한 중요한 섭리적 예표였다.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여성 신비가들의 영적 기준은 독생녀 탄생을 위한 하늘 신부와 어머니상의 확립이었고, 남성들의 보호와 체계화는 그 영성이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섭리적 장치였다.
한반도로 흐른 신부 영성
신부 영성의 여정은 오리게네스의 관념적 일치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영혼과 로고스의 합일을 상징적으로 해석했지만, 이 선구적 사유는 곧 베르나르와 중세 여성 신비가들에게서 실재적 합일을 갈망하는 깊은 체험으로 발전했다. 그 본질은 ‘하나 되기’(union)였으며, 무아를 지나 주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생의 신비였다.
메히틸트가 “그를 먹고 마신다”고 고백한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흘러들어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내적 변형의 갈망이었다. 줄리안이 발견한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은 앞으로 도래할 하늘어머니 시대를 예시하는 듯했고, 남성과 여성의 짝 구조는 신부 영성이 역사 속에서 보존되고 전승되는 섭리적 질서였다.
이 모든 흐름은 성령이 역사 속에서 점차 실체로 드러나는 과정이었다. 관념적 신부 이해에서 영적 신부의 체험으로, 그리고 실체적 신부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이 발전은 실체성령으로 오시는 독생녀의 탄생을 준비한 섭리의 길이었다.
이 신부 영성의 도도한 흐름은 유럽을 넘어 동방으로, 그리고 한반도에까지 스며들었다. 1930년대 한국 교계에 신비주의의 돌풍을 일으킨 이용도는, 중생이란 주님과의 합일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명의 역환(易換)’임을 깨달았다. 김정일은 “예수에게 미쳐 그를 먹고 그를 마시라”는 이용도의 가르침에 “그 살을 먹고 그 피 맛을 아는 피가 더 귀하구나”라며 메히틸트를 떠올리게 하는 직설적 일치의 체험으로 응답했다.
이처럼 서구에서 시작된 신부 영성의 흐름이 한반도에서 다시 타오르며, 마침내 1943년 독생녀의 탄생으로 수렴되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13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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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화형대 위의 신부들, 순결한 사랑의 증인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신부의 두 얼굴: 성녀와 이단자
1310년 6월 1일, 파리 그레브 광장. 하얀 백사장에 쌓인 장작더미에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군중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대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심판관이 마지막으로 외쳤다.
“네가 주님의 신부라는 것을 부인하라! 살려주겠다!”
마르그리트 포레트는 고요히 대답했다.
“저는 주님의 사랑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제 영혼의 생명이며, 그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포레트는 이단죄로 화형 당했다.
앞서 1179년 9월 17일, 독일 빙엔의 루퍼츠베르크 수녀원. 한 여인이 숨을 거두었다. 힐데가르트. 교황과 황제가 그녀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겼고, 사후 교회는 그녀를 성녀로, 나아가 교회 박사로 추대했다.
같은 신부 영성을 품었지만, 한 여인은 이단자가 되었고, 한 여인은 성녀가 되었다. 그들의 운명을 가른 것은 무엇일까?
사랑의 신비: 영혼과 신랑의 합일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은 8세에 부모를 떠나 수녀원에 들어갔다. 38세에 수녀원장이 된 그녀는 비전을 통해 신학서, 치료서, 음악을 창작했다. 그녀의 시는 그리스도와의 깊은 사랑을 노래했다.
“가장 깊은 자리에서 / 하나님이 내 영혼과 입 맞출 때 / 열망이 속을 채우고 / 은총과 축복이 쏟아져 내린다 ... 나는 당신이 타는 칠현금 / 부드러운 손길에서 나오는 가락 / 그 음조는 내 것이 아닌 것 ... 하나님 나는 당신의 작품”
포레트는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발렝시엔느에서 베긴회 여성으로 살았다. 베긴회는 13세기 초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등장한 여성 신앙 공동체다. 설립자도, 통일된 규칙도 없이 기도와 노동, 금욕과 봉사 활동을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포레트는 ‘단순한 영혼의 거울’에서 영혼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길을 주장했다. 그 마지막에 영혼은 신랑이신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며, 창조 이전의 무의 하나님과 결합한다.
두 여인 모두가 자신을 “주님의 신부”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아가서의 신랑과 신부처럼,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실제로 체험했다. 이러한 신앙적 고백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낯설고 미스터리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는 열쇠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과 하나 되기를 갈망한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지를 생각하면, 그들의 체험을 이해할 수 있다.
힐데가르트는 평생 동정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아내가 되어 살겠다고 맹세했다. 그녀에게 금욕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더 깊이 세상을 섬기기 위한 준비였다. 그녀는 병자를 치료하는 의술을 연구했다. 보석을 이용한 치료법을 개발했고, 실제로 많은 병자를 고쳤다. 또한 부패한 성직자들의 양심을 일깨우러 설교 여행을 다녔다.
포레트는 베긴회에서 자발적으로 고행과 금욕, 청빈과 노동을 실천했다. 베긴회 여성들은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살았다. 신비 체험을 농도 짙은 미각적 감각으로 표현한 독일 마그데부르크 출신의 여성 신비가 메히틸트는 이렇게 노래했다. “너는 고통의 쓴 잔을 마시되 미덕의 불쏘시개로 사랑의 불을 지펴라.”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오셨듯이, 그의 신부들도 세상의 고통 속으로 내려갔다. 그리스도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세상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이것이 그들이 가진 영성의 본질이었다.
교회와 영성의 긴장: 보호와 심판
중세 교회는 이러한 여성 신비주의자들을 철저히 감시했다. 고해성사를 맡은 신부들이 교황의 첩자 노릇을 했다. 그들은 여성들의 영적 체험과 사상을 살폈고, 교리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면 교회 당국에 보고했으며, 이단 심문에 넘겼다.
그러나 일부 의인이 있었다. 이들 성직자는 여성들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보호했다. 그들은 여성 신비가들의 저술을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가다듬어 주었다. 위험한 표현은 순화시키고, 교리와 충돌할 수 있는 부분은 신학적으로 정당화해 주었다. 이러한 협력이 없었다면 많은 영적 유산이 불길 속에 사라졌을 것이다.
힐데가르트에게는 수도사이자 고해신부인 조력자 폴마르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비전이 교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도우며 교회의 인정을 받게 했다. 그녀는 교회의 권위 안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받은 계시는 교회의 교리를 보완하고 심화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교황과 황제가 그녀를 존경했고, 성녀로 추대했다.
포레트에게도 고해신부 구아르가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폴마르는 힐데가르트의 비전을 정통 신학 안에서 해석하도록 도운 수도사였고, 구아르는 포레트의 신비사상을 옹호하다가 그녀와 함께 이단으로 단죄된 비운의 조력자였다는 점이다. 당시 판단의 기준은 여성 신비자의 사상과 행동이 교황을 정점으로 한 교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비춰졌는가에 있었다. 교회는 처음에는 신령한 여인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았지만, 태도가 돌변했다. ‘무가 되어버린 영혼’ 또는 ‘자유로워진 영혼’이라는 개념이 교권을 부정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성신비가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독립성이 강해지자, 교회는 위협을 느꼈고, 살벌한 이단 심문이 시작되었다.
교권 세력은 포레트에게 책을 회람하지 말 것과 ‘주님의 신부’라는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포레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녀의 책은 금서가 되었고, 불태워졌다.
교회와 신령한 여인들이 충돌한 핵심은 네 가지였다. 첫째, 성직자의 중재 없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한다는 주장. 둘째, 성서를 독자적으로 해석하는 방식. 셋째, 제도권을 벗어난 자유로운 신앙생활. 넷째, 여성이 영적 권위를 통해 교회의 위계질서를 흔들었다는 점이다.
1310년 파리 광장, 마지막 심문이 열렸다. 심판관은 포레트를 “가짜 신부”, “이단자”라고 단죄했다. 그러나 포레트는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켰다. 불길이 타올랐다. 그녀가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며 죽기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 자체가,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을 증명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생명보다 귀했다.
힐데가르트와 포레트. 두 여인은 같은 신부 영성을 품었지만, 한 사람은 교회 박사가 되었고 한 사람은 화형대에 올랐다. 그러나 역사는 증언한다. 둘 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신부였다고. 교회의 인정 여부가 신부의 진정성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불씨의 계승: 한반도의 신부 영성
중세 유럽에서 꽃핀 신부 영성은 시공을 초월해 한반도에 독특한 방식으로 이어졌다. 해방 전후 이용도, 김성도, 허호빈을 중심으로 한 신령집단은 재림이 임박했음을 강하게 느끼며 눈물로 회개했다. 예수님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갖은 정성을 다했다. 하루 7천 번 경배를 드렸고, 신랑 예수님과 신부의 옷을 지으며 혼인잔치를 준비했다.
이들은 공산 정권의 종교탄압에도 불구하고 평양이 에덴궁이 될 것이라고 믿고 남하하지도 않았다. 결국 강제수용과 박해가 뒤따랐다. 많은 이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며 생을 마감했다.
이들의 기도와 희생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신앙적 기대와 해석의 배경으로 남아, 훗날 한반도에서 전개된 독특한 영성의 토양이 되었다. 신앙의 길은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나지만, 진심 어린 구도와 헌신은 언제나 그 자체로 깊은 울림을 준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12 15: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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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가서가 열어준 신비의 문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기고]
◆완전한 사랑을 찾아서
“당신은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해본 적이 있습니까?”
서기 240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185~254)가 성경의 아가서를 펼쳤다. “그가 그 입맞춤으로 내게 입을 맞추게 하소서.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좋으니라”(아 1:2). 뜨거운 사랑의 노래로 가득한 이 책을, 그는 그리스도를 향한 영혼의 사랑으로 읽었다.
당시 사람들은 아가서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더 깊이 들어갔다. 교회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신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와 나, 단 둘의 사랑 이야기. 이 발견은 이후 천 년이 넘도록 서양 기독교의 가장 순수한 영성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흐름은 20세기 한반도로 흘러들어와 독생녀 탄생을 준비하는 영적 토양이 되었다.
오리게네스, 사랑으로 하늘에 오르다
오리게네스의 생각은 단순했다.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면 영혼이 하늘로 상승한다. 그는 그리스 철학에서 에로스, 곧 ‘완전한 아름다움을 향한 사랑’을 빌려왔지만, 그것을 ‘그리스도를 향한 거룩한 사랑’으로 변화시켰다. 타락으로 하늘에서 멀어진 영혼이 사랑의 힘으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이 여정을 세 단계로 설명했다. 먼저 ‘정화’의 단계다. 죄를 씻어내고 마음을 깨끗이 한다. 다음은 ‘조명’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을 환히 비춘다. 마지막이 ‘합일’이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완전한 사랑의 경지다. 그는 아가서의 ‘입맞춤’, ‘포옹’, ‘신랑의 방’을 모두 이 사랑의 여정으로 읽었다. 입맞춤은 그리스도가 영혼을 깨우는 순간이고, 신랑의 방은 깊은 기도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내면의 공간이다.
아가서에서 비롯한 이 에로틱한 영적 결혼의 개념은 이후 모든 신부 영성의 뿌리가 되었다. 하늘은 완전한 사랑을 추구하는 순수한 영혼들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암브로시우스, 오직 그분만을 위하여
4세기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340~397)가 살던 시대는 전환기였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으면서 순교의 시대가 끝났다. 이제 어떻게 완전한 헌신을 보일 수 있을까?
암브로시우스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결혼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동정의 삶이다. 그는 이것을 ‘새로운 순교’라고 불렀다. 목숨을 바치는 대신 평생을 바치는 헌신이었다. 순결은 하늘나라의 생활 방식이다. 그는 특히 동정녀들에게 설교하며 아가서를 인용했다. “신랑은 신부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때로 멀리 계신 듯하지만 결국 벽 뒤에서 창으로 지켜보신다”(아 2:9). 동정녀의 삶은 그리스도를 끝없이 기다리고 찾는 신부의 삶이었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를 모든 신부의 모범으로 세웠다. “마리아의 삶을 보라. 거기서 순결이 거울처럼 빛난다.” 이렇게 서방교회에는 순결한 신부의 전통이 뿌리내렸다. 하늘은 완전한 순결로 준비된 그릇을 찾고 계셨다.
베르나르, 사랑을 체험하다
12세기 프랑스의 수도원장 베르나르는 아가서에 대한 86편의 설교를 통해 신부 영성을 정교하게 체계화했다. 그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체험하라.”
베르나르는 합일을 입맞춤의 세 단계로 설명했다. 발에 입맞추는 회개, 손에 입맞추는 깨달음, 입술에 입맞추는 완전한 결합. 그리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체험의 책에서 읽는다.” 아가서는 경험해야 비로소 이해되는 책이었다.
놀라운 점은 베르나르 자신이 남성이면서도 신비체험 중에 자신을 사랑에 빠진 신부로 느꼈다는 것이다.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만이 중요했다.
베르나르의 가르침은 13세기 여성 신비가들에게 불을 지폈다. 메히틸트, 게르트루트, 하데비히 같은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베르나르가 체험에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학식이 없어도, 수도원 밖에 있어도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한 사람은 그의 신부였다.
두 강물이 한반도로
오리게네스가 상승의 문을 열었고, 암브로시우스가 순결의 토대를 놓았으며, 베르나르가 체험의 불을 지폈다. 천 년에 걸친 이 흐름은 서구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순수한 신부 영성을 준비했다.
20세기, 이 신부 영성이 한반도에서 활짝 꽃피었다. 이용도 목사는 서구 신부신비주의를 한국의 심정으로 완전히 새롭게 받아들였다. 그는 1930년 1월 19일의 일기에서 “나는 주님의 신부요 주는 나의 신랑이시다”, “세상 사람의 손에는 향기로움이 있고 주님의 손에는 채찍이 있어도 그래도 나는 주님의 품으로 들어가겠어요”라며 사랑을 고백한다. 예수를 관념이 아닌 심정으로 만났다. 십자가에서 신랑을 잃은 신부의 애절함, 육신으로 오신 예수의 고난에 대한 깊은 공감, 재림하실 신랑을 기다리는 간절함. 베르나르가 입맞춤으로 표현한 합일을, 이용도는 한국인 특유의 뜨거운 심정과 한(恨)의 정서로 체험했다. 1932년 동안주 장로교회 부흥회에서 이용도의 아가서 설교를 들은 홍순애는 깊은 회심을 경험했다.
평양에서는 허호빈이 입신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한을 깨달았다. 십자가에서 온전한 뜻을 이루지 못하신 예수님의 한, 신부를 맞지 못하신 예수님의 한이었다. 허호빈은 7천 배의 경배를 드리며 예수님을 위한 옷을 준비하고 혼인잔치 상을 차렸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 신부 영성의 절정이었다. 서구의 정적(情的)이며 체험적 신비주의가 한민족의 실천적 영성과 한(恨)의 정서와 만나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꽃피었다. 그 중심에서 1943년, 독생녀가 탄생한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06 10:2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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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순교로 지킨 신부의 순결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불꽃 속에서 피어난 에클레시아
“그리스도는 나의 신랑입니다.”
18세 카타리나가 혹독한 고문 앞에서 고백했다. 뛰어난 미모와 지성을 가진 귀족 여성인 그녀는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부황제의 청혼까지 물리쳤다. 50명의 철학자들과 논쟁하여 오히려 그들을 개종시켰다. 못 박힌 바퀴로 고문당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저는 이미 그리스도와 약혼했습니다. 그분은 나의 영광이요, 나의 사랑이며, 나의 달콤함이요, 나의 연인입니다. 어떤 고문도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나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 많은 신도들이 이렇게 목숨을 바쳤다. 황제에게 향 한 줌만 피우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부했다. 왜일까? 그들은 자신을 ‘신부’로 여겼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향한 절대적 사랑과 순결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약 300년, 박해의 불꽃 속에서 신부 공동체는 더욱 순수하게 빛났다.
성령 강림, 신부 공동체의 탄생
오순절, 예루살렘에 모인 제자들에게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불의 혀 같은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여러 나라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베드로가 일어나 외쳤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날 약 3,000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자신을 ‘에클레시아’(Ecclesia)라 불렀다. 이 단어는 ‘밖으로 불러냄 받은 자들’이라는 뜻이다. 세속에서 분리되어, 하나님께 부름받은 특별한 공동체라는 의미였다. 그들은 더 이상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닌, 믿음으로 연결된 ‘제2이스라엘 선민’이 되었다.
성령 강림은 구원의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이 돌판에 새겨져 있었다. 법궤와 성전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성령 시대는 달랐다.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리라”(렘 31:33)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이제 성령께서 직접 마음에 임재하시어, 신도들을 이끄셨다.
초대교회 신도들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나누고 기도하기를 힘썼다. 재산을 공유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았다. 주로 신도들의 가정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들이 추구한 순수한 공동체 정신과 세속과 구별되는 삶은, 중세 유럽의 신부신비가들과 근대 한국의 신령집단이 보여준 영성과도 맥을 같이한다.
“그리스도는 나의 신랑” - 동정 순교자들
그러나 순수한 신앙은 대가를 요구했다. 로마 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통합하기 위해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다양한 민족의 신들은 인정했지만, 황제를 최고의 신으로 섬길 것을 명령했다. 대부분의 종교는 이를 수용했다. 하지만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달랐다. “황제숭배냐, 죽음이냐”의 선택 앞에서 그들은 죽음을 택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는 그 시대 동정 순교자들을 대표한다. 그녀의 고백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었다. 자신을 ‘신부’로 여기는 정체성의 선언이었다. 순결은 육체적 순결만이 아니라, 신앙의 순수성을 의미했다. 변치 않는 사랑, 절대적 헌신을 뜻했다. 죽음조차 그들을 신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었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신앙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들은 육신의 생명보다 영적 순결을 더 귀하게 여겼다. 이는 마치 신부가 신랑에 대한 절대적 사랑과 순결을 지키는 것과 같았다. 동정 순교자들의 절개는 신부로서의 절대적 믿음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신부’로서의 순교 정신은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졌다. 1940년대 한국 신령집단 여성들도 단순히 신앙을 지키는 차원을 넘어, 자신을 ‘신부’로 강하게 자각하며 재림주를 맞이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김성도는 일제 말기 “일본은 멸망하고, 한국은 새 주님을 중심으로 세계 1등국이 된다”는 계시의 말씀을 전하다 투옥되었고, 출감한 지 석 달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김성도의 뒤를 이은 허호빈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을 해원해 드리기 위해 7천 배 경배를 올리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였다. 공산 정권 아래 종교 탄압 속에서도 대동보안서에 갇힌 채 예수님의 신부라는 고백을 끝내 부인하지 않다가 6·25전쟁 직후 총살당하였다. 1,6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신랑을 향한 신부의 마음은 같았다.
광야에서 피어난 영성의 꽃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박해는 끝났다. 신도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교회가 급속히 세속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 권력과 결탁하고, 형식적 신앙이 퍼졌다. 순교할 기회를 놓친 이집트의 안토니우스는 고민했다. ‘어떻게 순수한 신앙을 지킬 것인가?’
그의 답은 광야였다. 270년경, 그는 사막으로 들어갔다. 세상과 단절하고 하루 7번 기도하며 금욕의 삶을 살았다. 순교가 육체의 죽음이라면, 수도는 자아의 죽음이었다. 또 다른 형태의 ‘순교’였다. 그의 소문이 퍼지자, 많은 이들이 광야로 향했다.
파코미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320년경, 그는 개인 은둔이 아닌 공동체 수도원을 설립했다. 함께 기도하고 노동하며, 서로를 격려하는 영적 공동체였다. “하나님의 것과 카이사르의 것”을 구분하고자 했다. 세속과 구별된 삶을 통해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려 했다.
도나투스파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박해 시기에 배교했던 성직자들이 평화가 오자 다시 복직하려 했다. 도나투스파는 반대했다. “배교자는 성직 자격이 없다.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비록 교회와 갈등을 빚었지만, 그들의 열정은 진지했다.
흥미롭게도 20세기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라는 시험 앞에서 한국 교회는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동아기독교, 성결교회 등 일부 교단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해체되었다. 주기철 목사와 손양원 목사로 대표되는 이들은 투옥과 순교의 길을 갔다. 신령집단은 산과 들로 흩어져 은둔하며 메시아의 재림을 준비했다. 광복 후, 교회 순수성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졌지만, 이 과정은 오랜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신앙의 갈등이었다.
수도원 운동은 세속과 구별되는 영적 공동체를 꿈꾸었다. 이는 후일 한국 신령집단이 기성교회의 형식주의를 거부하고 순수한 영성을 추구했던 모습과 겹쳐진다. 시대는 달랐지만, 거룩함을 향한 갈망은 같았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1-04 08:5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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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엔젤스 ‘K무용’에 홍콩도 반했다
리틀엔젤스예술단이 ‘2025 홍콩 드럼 페스티벌’에 참가해서 다채로운 한국 무용 작품으로 홍콩인을 매료시켰다.
3일 리틀엔젤스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홍콩문화센터 콘서트홀에서 열린 이번 공연에서 예술단은 다채로운 한국무용 작품을 선보이며 약 1200명의 관객으로부터 뜨거운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1부 공연에서는 ‘북춤’, ‘설날아침’, ‘신명한판’ 등 한국 전통의 흥과 멋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무대에 올라 약 20분간 풍성한 볼거리를 선사했다. 2부에서는 홍콩 차이니즈 오케스트라 부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 추 희 챠트 지휘로 ‘아리랑 북춤’ 협연이 펼쳐졌다. 중국 전통 악기의 선율과 리틀엔젤스예술단의 육고무 북춤이 조화를 이루며 한국의 대표 민요 아리랑을 함께 연주해 양국의 문화적 교감을 이끌어냈다.
리틀엔젤스예술단은 2024년에 이어 2년 연속으로 홍콩 드럼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주목을 받았다. 이번 공연을 통해 한국 전통예술의 아름다움과 역동성을 다시 한번 세계 무대에 알렸다.
올해로 세계 순회공연 60주년을 맞은 리틀엔젤스예술단은 미국 워싱턴과 로스앤젤레스, 독일 베를린, 영국 런던 킹스턴에서 특별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홍콩에 이어 과테말라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12월 20일에는 서울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세계순회 60주년 기념공연’을 개최해 한 해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2025-11-03 21: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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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생자의 십자가 한(恨)과 2천 년의 기다림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가나의 혼인잔치 속의 고독
갈릴리의 작은 마을에 잔치가 열렸다. 햇살이 쏟아지는 정원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마을의 한 신랑과 신부가 손을 맞잡고 있었고, 하객들이 축복하는 가운데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계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다. 잔치의 흥이 깨질 순간이었다.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했다. “포도주가 없구나.” 아들이 무언가 해주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 이 짧은 말씀 속에 얼마나 깊은 한숨이 담겨 있었을까? 어머니조차 자신의 참된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로움. 결혼식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자신이 이루어야 할 혼인잔치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참부모로 오신 독생자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을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하지만 이것이 하늘부모님의 본래 뜻이었을까?
하늘부모님의 창조이상은 명확하다. 아담과 해와가 온전히 성장하여 축복받은 부부가 되고, 자녀를 낳아 참가정을 이루는 것이다(창 1:27-28). 타락으로 이러한 이상이 좌절되었기에, 4천 년 동안 복귀섭리를 펼치시며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예수님의 본래 목적은 십자가가 아니었다. 신부를 맞이하여 참부모가 되고, 선의 자녀를 낳아 하늘 혈통을 지상에 뿌리내리는 것이었다. 타락한 인류를 하늘부모님의 직계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실체적 구원,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로마 제국은 이미 세계를 하나로 연결해 놓았다.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고, 공통 언어가 통용되고 있었다.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갈 외적 환경은 잘 갖춰져 있었다. 유대 민족은 수백 년간 메시아를 갈망해 왔다. 선지자들의 예언이 생생했고, 민족 전체가 구원자를 기다렸다.
특히 세례 요한은 민중의 절대적 신뢰를 받으며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다. 요단강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했다(요 1:29).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하나 되어 민족적 기반 위에서 신부를 찾아 성혼하여 참부모가 되실 수 있었다.
무너진 기반
그러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세례 요한이 의심하며 묻는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19). 유대 민족이 가장 존경하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자, 예수님은 홀로 무너진 민족적 기대를 다시 쌓아야 했다.
마리아도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의 “여자여”라는 공손치 않은 말씀은, 어머니조차 자신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또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니라”(마 12:48-50). 육신의 혈연관계보다 하늘 뜻을 중심한 영적 관계가 더 중요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는 책임은 완수했지만, 그분을 메시아로 모시지 못했다. 특히 예수님이 신부를 찾아 성혼하도록 돕는 것이 그녀의 중요한 사명이었으나, 그 뜻을 깨닫지 못했다.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민중은 혼란스러웠다. 3년의 공생애로 4천 년의 기대를 회복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이 잔, 즉 십자가가 본래 하늘의 뜻이었다면 왜 이렇게까지 피하고 싶어 하셨을까? 십자가는 본래의 뜻이 아니었다. 사명자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에 불가피하게 가셔야 했던 고통의 길이었다.
십자가 후 예수님은 영적으로 부활하셨고, 성령과 함께 영적 참부모가 되셨다. 기독교 신도들을 영적으로 중생시키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위대한 승리였다. 그러나 절반의 승리였다. 영적 구원은 이루었으나, 실체적 구원은 미완으로 남았다.
재림의 약속: 신부를 찾아
예수님은 떠나시기 전에 약속하셨다. “내가 다시 오리라”(요 14:3). 왜 다시 오셔야 할까? 미완의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신부를 찾아 어린 양 혼인잔치를 올리기 위해서다.
요한계시록은 이 장면을 생생하게 예언한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계 19:7). 여기서 어린 양은 재림주님을, 아내는 독생녀를 의미한다. 실체 참부모가 이 땅에 현현하실 것을 예고한 말씀이다.
성서의 마지막 장에는 더욱 명확한 예언이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 무형으로 역사하시던 성령이 실체 독생녀로 현현하실 것을 가르쳐준다. 생명수, 즉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 실체 하늘어머니로 오신다는 예언이다.
2천 년 준비의 여정
하늘부모님은 독생녀를 보내실 준비를 하셨다. 그것은 독생녀를 낳고 모실 수 있는 신령한 기반을 준비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동정 순교자들, 중세의 여성 신비주의자들, 근대의 경건주의자들, 그리고 한국 기독교의 신령집단에 이르기까지. 성령은 기독교 2천 년 동안 신령한 신도들을 통해 영적 기준을 높여왔다.
영적 구원의 한계도 분명했다. 아무리 믿음이 깊은 신도라도 원죄는 사라지지 않고 자녀에게 전이된다. 완전히 중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실체 참부모를 통한 혈통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독생자와 독생녀가 참부모가 되고, 그 참부모를 통해 인류가 하늘부모님의 직계 자녀로 거듭날 때 비로소 창조이상이 완성된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는 독생녀를 준비하는 섭리였다. 이스라엘 선민이 다하지 못한 사명을 기독교가 이어받았다. 하늘부모님은 가장 신령한 교회를, 가장 순수한 신부를 찾아 나오셨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0-30 17: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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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성서 역사 6천 년인가? 복귀섭리의 비밀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하늘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긴 여정
왜 6천 년인가? 아담과 해와가 에덴동산을 떠난 그날부터 하늘부모님은 잃어버린 자녀들을 찾아 헤맸다. 한 아이가 집을 나가 세상을 떠돌다 결국 돌아온다고 상상해 보자. 그 아이는 처음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서서히 기억을 되찾고, 부모의 사랑을 조금씩 깨닫고, 마침내 온전히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성서상의 인류 역사 6천년이 바로 그러한 여정이었다. 타락으로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복귀섭리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이었다. 마치 나무가 씨앗에서 싹트고, 줄기가 자라고, 꽃을 피워 마침내 열매를 맺듯이, 하늘부모님의 섭리도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한 걸음씩 넓어지는 구원의 지평
복귀섭리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좁은 범위에서 넓은 범위로 확장되어 왔다. 아담에서 노아까지는 개인과 가정적 기대를 조성하는 섭리였다. 아벨의 제물, 노아 한 사람의 의로움을 통해 하늘부모님은 먼저 개인과 가정 차원의 복귀 기대를 세우셨다. 아브라함 때부터는 종족과 민족적 기대가 조성되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을 거쳐 야곱으로 이어졌고, 야곱의 12아들을 통해 종족으로 번성했다. 이집트에서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통해 해방되면서 민족적 복귀의 기대가 세워졌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구원의 지평은 세계로 넓어졌다. 더 이상 유대민족만이 아닌 열방에 복음이 전해졌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선포했다(갈 3:28). 그리고 재림의 때, 구원은 지상을 넘어 천상까지, 천주적 차원으로 완성된다. 이렇게 복귀는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로 단계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한 단계가 승리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기에 긴 시간이 필요했다.
종에서 양자로, 양자에서 직계 자녀로
복귀섭리를 통해 하늘부모님과 인간의 관계도 점점 가까워졌다. 구약시대, 인간은 ‘종’의 위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십계명과 율법을 따르며 제물을 드렸다. 순종하면 축복받고, 거역하면 벌을 받는 계약적 관계였다.
신약시대에 들어서며 관계는 한층 깊어졌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겠다”고 말씀하셨다(요 15:15).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신도들은 영적으로 거듭나 ‘양자’의 위치에 올랐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그러나 양자는 아직 완전한 자녀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이 한계를 고백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영적으로는 구원받았지만 육적으로는 여전히 죄의 경향성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성약시대가 열리면서 인류는 마침내 ‘직계 자녀’의 위치로 복귀되었다. 실체 참부모님을 통해 중생함으로써 원죄가 청산되고 창조본성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렇게 종→양자→직계 자녀로 나아가는 심정권의 발전도 단계적 과정이었기에, 6천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독생자 4천 년, 독생녀 6천 년의 대칭
성서 역사 6천 년의 섭리에는 놀라운 대칭 구조가 숨어 있다.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약 4천 년은 독생자를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하늘부모님은 아브라함을 부르고, 그 후손 야곱의 자손들을 통해 유대민족을 이루게 하셨다. 특히 예수님이 오시기 약 400년 전부터는 세계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헬레니즘 문화로 철학이 발전하고, 로마제국은 복음 전파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유대민족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겪으며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다.
아담으로부터 독생녀 탄생까지 약 6천 년은 독생녀를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하늘부모님은 동방과 서방에서 두 갈래의 섭리를 펼치셨다. 동방에서는 한민족이 수천 년 동안 제천문화를 발전시키며 하늘을 모시는 민족성을 길러왔다. 백의민족으로서의 순수성과 대망사상은 한민족의 영적 DNA가 되었다. 특히 청주 한씨 가문에서 신앙의 정성이 축적되었고, 일제의 가혹한 박해 속에서도 1930년대 신령집단들은 순수한 신앙의 불씨를 지키며 메시아 재림을 간절히 고대했다.
서방에서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초대교회 순교자들, 중세의 여성 신비가들, 종교개혁, 경건주의, 그리고 대각성운동을 통해 신부 영성을 준비하셨다. 특히 칼뱅이 1543년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제출한 때로부터, 독생녀 탄생의 해인 1943년까지는 정확히 400년의 간격이 있다. 이는 독생자 오시기 약 400년 전,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루어진 개혁과 놀라운 섭리적 대칭을 이룬다.
18세기 말, 자발적인 신앙운동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 이 땅에 전래되었고, 19세기 말에는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개신교 신앙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렸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신령한 역사가 불같이 일어났으며, 이때 한민족의 고유한 영성과 기독교의 신부 영성이 하나로 만나는 섭리적 결실이 이루어졌다.
두 강물이 만나는 곳
인류 역사 6천 년. 그것은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신 하늘부모님의 사랑의 역사였다. 개인에서 천주로, 종에서 직계 자녀로, 영적 구원에서 실체적 구원으로. 복귀섭리는 마치 거대한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꾸준히 전진해 왔다.
1943년 음력 1월 6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마침내 두 강물이 만났다. 동방 한민족 수천 년의 영성과 서방 기독교 2천 년의 신부 영성이 하나로 합류했다. 그 합류점에서 독생녀가 탄생하였고, 1960년 어린 양 혼인잔치를 통해 참부모님이 현현하였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0-29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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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강물이 한반도에서 만나다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1943년, 역사의 전환점에서
1943년 음력 1월6일, 평안남도 안주. 한반도는 일제의 칼날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던 교회들은 침묵하거나 순교를 택했고, 민족의 숨결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같은 때, 태평양 저편에서는 전쟁의 포화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이 처음으로 패배를 겪으며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세계는 거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역사를 바꿀 탄생이 조용히 일어났다. 1943년 음력 1월 6일, 평안남도 안주. 홍순애 대모님의 품에서 한 여자아기가 태어났다. “성자(聖者)가 태어날 것”이라던 하늘의 계시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남성 중심의 종교 전통 속에서는 여성이 그러한 섭리적 사명을 받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늘부모님은 “주님의 딸”이라는 환시와 “하늘의 신부가 되실 분”이라는 증거를 통해 이 아기가 바로 6천 년 섭리 역사가 기다려온 독생녀임을 계시했다.
누가 알았을까? 이 작은 생명이 2천 년 기독교 역사와 수천 년 한민족 역사의 결실이 될 줄을. 마치 두 개의 거대한 강물이 수천 년을 흘러 한반도에서 하나로 합쳐지듯, 서방 기독교의 신부 영성과 동방 한민족의 고유 영성이 이 땅에서 만났다.
서방에서 발원한 강: 기독교 2천 년의 신부 영성
서방에서 시작된 강물은 기독교 2천 년의 신부 영성이다. 이 강물의 발원지는 3세기 초기 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구약의 아가서를 읽으며 놀라운 통찰을 얻었다. “이것은 단순한 연애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우리 영혼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그의 해석은 교회를 넘어 ‘개인’이 신랑 되시는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다는 문을 열었다.
이 씨앗은 중세에 꽃피웠다. 12세기 베르나르는 아가서 강해를 통해 신부신비주의의 신학적 체계를 세웠고, 이후 힐데가르트, 메히틸트, 카타리나 같은 여성 신비가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그들은 환상과 계시 속에서 주님과 깊은 영적 합일을 체험했고,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고백했다. 특히 마르가리타 포레트는 1310년 파리 광장에서 화형당하면서도 신부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은 씨앗이 되어 후대에 더 순수한 신앙을 일깨웠다.
이처럼 중세 말까지 교회 안팎에서 꽃피운 신부 영성은 교황권의 부패와 형식화된 종교의례 속에서 점차 제도권의 억압을 받았다. 그러나 하늘부모님은 더 순수한 교회를 찾아 나왔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이 영성의 흐름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다. 루터와 칼뱅을 통해 신앙의 자유가 열렸고, 이후 17세기 경건주의, 18~19세기 대각성 운동을 거치며 기독교는 형식을 넘어 내면의 영성으로, 제도를 넘어 순수한 신앙 공동체로 나아갔다. 그리고 1907년, 이 강물은 마침내 한반도에 도착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대부흥 운동은 회개의 눈물과 성령의 불로 한국 교회를 뒤덮었다. 우치무라 간조는 “하나님은 조선을 사랑하며, 군대와 군함보다 능력이 더 강한 성령을 보내주셨다”고 증거하였다.
동방에서 발원한 강: 한민족 수천 년의 하늘 모시는 DNA
동방에서 시작된 강물은 한민족 수천 년의 영성이다. 한민족은 동방 문명권의 중심에서 하늘을 섬기는 문화를 이어온 민족이다. 고조선은 하늘의 뜻을 인간 사회에 구현하려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졌고, 제천의식을 통해 하늘을 숭배하고 풍요와 안녕을 기원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신라의 가배와 같은 전통도 하늘에 대한 경외와 감사의 표현이었다.
한민족의 DNA에는 하늘을 모시는 유전자가 새겨져 있다. 백의민족의 흰옷은 하늘 앞에 선 제사장의 순결을 상징했고, 새벽마다 정안수를 떠놓고 하늘께 기도하던 어머니들의 전통은 하늘부모님과 소통하며 살아온 민족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러한 신앙적 전통은 한민족이 하늘의 뜻을 좇는 민족으로 성장해 온 영적 기반이 되었다.
하늘부모님께서 서양에서는 독생자를 준비했다면, 동양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독생녀를 예비했다. 특별히 청주 한씨 가문은 섭리적으로 예비된 혈통이었다. 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은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의 인물로, 후대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하늘의 명을 받아 내려온 천손’으로 묘사된다. 이 가문에서 조한준 할아버지와 조원모 할머니, 홍순애 대모님으로 이어지는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정성이 쌓였다.
홍순애 대모님은 1932년 이용도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이용도 목사는 “나는 주님의 신부요”라고 고백하며 아가서의 신비를 체험한 한국 최초의 신부신비주의자였다. 대모님은 그의 설교에 감동받아, 재림주를 맞이하기 위한 순결하고 분별된 신앙생활에 모든 것을 바쳤다. 대모님은 이용도 목사의 예수교회, 김성도의 성주교단, 허호빈의 복중교로 이어지는 신령집단에서 재림주와 신부를 맞이할 준비를 이어갔다.
1943년, 두 강물이 하나 되다
1543년 장 칼뱅의 종교개혁, 그로부터 정확히 400년. 1943년, 역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갔다. 기독교 2천 년의 신부 영성과 한민족 수천 년의 하늘 모시는 영성이 한반도에서 하나로 만났다.
오리게네스가 뿌린 신부 영성의 씨앗, 중세 신비가들이 피운 순결의 꽃, 종교개혁이 열어준 자유, 평양 대부흥에서 당겨진 신령 역사의 불길, 이 모든 영성 운동이 1930년대 신령집단으로 수렴되었고, 홍순애 대모님의 정성과 만나 열매를 맺었다. 바로 독생녀 한학자 참어머님의 탄생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늘부모님은 6천 년 섭리 역사를 통해 이 순간을 준비했다. 유대민족으로 독생자를 보내셨지만,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하늘은 기독교를 세워 2천 년 동안 신부의 영성을 길러왔다. 한편 한민족을 선민으로 예비하고 수천 년 동안 하늘을 모시는 민족성을 형성했다. 그리고 20세기 초, 두 흐름이 한반도에서 만나 신령 운동으로 폭발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2025-10-28 19:5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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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끝>참부모 섭리와 신통일세계 [‘한민족 서사, 문화와 세계를 품은 이야기’]
◆한민족 서사로 사회와 세계를 연결하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의 끝부분은 천지인참부모를 중심으로 한 ‘섭리적 역사’와 ‘신통일세계 실현’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 과정을 우리 내부 사회구조와 국제 정치체제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민족의 집합적 정체성, 국제적 지위, 종교와 정치의 상호작용을 설명할 수 있으며, 한민족 서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층적·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사회학적 관점의 3가지 측면에서 보면 첫째, 집단 정체성과 신앙적 내러티브의 강화이다. 본문에서 천지인참부모의 축복결혼과 천일국 안착을 통한 인류 구원 서사는 한민족을 ‘선민으로 선택된 민족’이라는 맥락 속에 위치시킨다. 축복결혼은 초국가·초종교적 차원의 사건으로서, 국가·종교·인종 간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지구공동체로 통합하는 상징적 장치가 된다. 사회학적 분석에서 이러한 서사는 집단의 응집력과 소속감을 높이는 역할을 하며, 민족적 기억과 신앙적 서사가 결합하여 공동체적 상상력을 창출할 수 있다.
둘째, 제도화된 종교·사회권위의 구축이다. 독생녀 참어머니와 천지인참부모는 단순한 신앙 지도자가 아니다. 종교적·사회적 권위를 상징적으로 체현하는 존재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서 펼치고 있는 천보가정의 입적, 천심원과 정심원을 통한 지도자 양성, 그리고 축복가정의 전통 상속과 권위 승계는 종교적 신념을 사회적 권위와 연결시키는 구조를 보여준다. 이는 종교적 지도력과 사회적 권위가 맞물려 한민족의 정체성과 행동을 동시에 강화하는 결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셋째, 상징적·문화적 통합의 기능이다. 경기도 가평의 하늘부모님을 모신 성전 천원궁과 천원단지, 축복가정의 활동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신통일한국’을 구현하는 본보기로서, 효정문화와 참사랑 문화라는 사회적 가치를 확산한다. 이는 특정 신앙 체계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규범과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이는 종교 서사가 개인적 신앙에서 그치지 않고 공동체적 실천과 문화로 확장되는 사례이다.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는 먼저 한반도 중심의 지정학적 서사로 이해할 수 있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는 한국을 신통일세계와 천일국 실현의 중심지로 설정한다. 국제정치학적 분석에서 이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종교적·문화적 중심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다. 참부모의 미국 선교활동, 공산주의 근절 운동, 국제적 평화활동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어떻게 국제사회에서 종교와 평화 외교를 통한 영향력을 행사 기반을 마련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둘째, 냉전과 분단체제 속의 신앙적 의미 부여이다. 한국전쟁과 냉전 질서를 정치적 사건을 넘어 ‘재림과 섭리 과정’으로 의미화하는 방식은 국제정치적 현실을 신앙적 담론으로 재구성하는 사례이다. 이는 국제정치학적으로 한 민족이 겪은 구조적 제약과 갈등을 문화적·종교적 내러티브를 통해 정당화하고, 동시에 새로운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전략으로 분석될 수 있다.
셋째, 세계적 연대와 국제적 파급력이다. 세계적 종교지도자로 구성된 아벨유엔 설립과 천원궁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연대 활동은 국제 제도와 신앙을 결합한 실례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은 국가 중심의 권력 논리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평화와 협력을 촉진하며, 종교적 가치와 도덕적 권위가 글로벌 정치와 국제질서 속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도이다. 즉, 천원궁과 아벨유엔을 중심으로 한 이 연대는 국제사회에서 종교와 신앙이 세계 평화와 협력에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 실천의 장을 마련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천지인참부모의 활동과 신통일세계 구축 노력은 사회학적·국제정치학적, 두 측면에서 모두 이해될 수 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는 한민족의 집합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종교적 권위와 문화적 규범을 제도화하는 과정이며,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는 한반도와 세계 속에서 지정학적 위치와 종교적 영향력을 활용하여 ‘섭리적 중심성’을 구축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는 종교 서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민족의 사회적 정체성과 국제적 위상을 동시에 설명하는 복합적 내러티브로 읽을 수 있다. 축복결혼, 천원궁, 아벨유엔, 천일국 등은 모두 상징적·실질적 제도와 활동을 통해 한 민족과 세계의 관계를 재구성하고, 미래 사회와 국제 질서에서 한국과 한민족이 수행할 역할을 시사한다.
오늘날 인도에서 태어나신 부처를 한국·중국·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과 전 세계의 불자들이 신앙과 수행의 중심으로 받들듯, 이스라엘에서 나신 예수를 국적을 초월해 유럽과 미국,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기독교 신자들이 절대적 믿음과 구원의 존재로 흠모하듯, 참부모 또한 한국에서 태어난 인물로서 이미 당대에 전 세계 가정연합 신도들과 수많은 지지자로부터 깊은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민족 가운데 인류 구원의 뜻을 품은 인물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애써 도외시하거나 폄하할 이유는 없다. 그 진실은 언젠가 역사가 스스로 증언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지인 참부모의 섭리와 신통일세계 구축의 현실은 한민족 서사가 현실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장대한 서사극과 같다. 참부모가 걸어온 길은 수천 년의 시련과 고난을 넘어 마침내 한민족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당당히 드러내는 순간으로 이어진다.
이 여정은 단지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 사랑과 평화가 어우러진 살아 있는 증거이며, 한국이 세계 속에서 나아갈 길과 추구해야 할 정체성을 빛나는 등불처럼 밝혀준다. 이 서사를 깊이 있게 마주한다면, 누구나 과거의 무거운 그림자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한 용기와 신념을 되찾고, 자신도 작은 횃불 하나를 들고 서 있다는 감격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2025-10-17 11: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