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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와 동고동락 70년… 종교에서 사회공헌 플랫폼으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화
◆프롤로그:70년의 여정이 남긴 것 2025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이 창립 71주년을 맞았다. 1954년 한국전쟁의 잔해가 채 가시지 않은 서울에서 출발한 이 조직은 70여
2025-12-23 11: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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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 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13> 달라이 라마 14세(The 14th Dalai Lama)-‘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인간은 폭력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국가와 국가가 충돌하고, 이념과 민족이 서로를 적대하며, 종교조차 때로는 전쟁의 언어가 되는 시대 속에서, 끝까지 ‘비폭력’을 말한 종교지도자가 있다. 바로 달라이 라마 14세(The 14th Dalai Lama)다. 개인 이름은 텐진 갸초(Tenzin Gyatso). 그는 불교의 수행자에 머물지 않고, 고향을 떠난 망명 생활 속에서도 복수보다 연민을 말한 인물이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1935년 티베트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전통적인 절차를 거쳐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받았다. 티베트 불교에서 달라이 라마는 종교지도자와 정신적 스승, 그리고 정치적 지도자의 역할까지 함께 지닌 존재다. 이로 인해 그는 어린 나이에 티베트의 오랜 전통과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망명 속에서도 비폭력의 길을 선택하다
티베트는 7세기경 강력한 왕조를 형성했다. 그 이전까지 티베트 고원은 여러 부족과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야를룽 왕조의 군주였던 송첸 감포(약 617~650)가 이를 통합하며 부족 연맹 수준이던 티베트를 하나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송첸 감포 시대의 티베트는 당나라나 중앙아시아 세력과 맞설 정도의 강한 국가였다. 송첸 감포는 당나라의 문성공주와 혼인하기도 했으며, 특히 불교 문화를 받아들여 티베트 불교의 기초를 놓은 왕으로 평가받는다.
티베트에 달라이 라마 체제가 본격화한 것은 17세기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적 권위뿐 아니라 국가 통치자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만 해도 티베트는 자체 정부와 군대를 보유하고, 외교의 일부를 수행하는 등 사실상 독립 국가의 형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1921년 창당된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면서, 티베트는 거대한 역사적 격변을 맞이했다. 20세기 중반 중국이 티베트와의 국경 통합과 중앙집권 강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1950년 중국 공산당은 군사력을 앞세워 티베트 지역으로 진입해 수중에 넣었다. 당시 세계는 한국 전쟁에 이목이 쏠려 있었기에 티베트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 중국군은 역사적으로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였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후 긴장과 갈등이 심화되다가 마침내 1959년 티베트 봉기가 발생했다. 티베트 봉기는 주민들과 일부 승려, 귀족 세력이 중국의 통치에 반발해 일으킨 대규모 저항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도 결국 진압되면서 달라이 라마 14세는 인도 북부 다람살라로 피신해 망명정부를 세웠으며, 오늘날 티베트는 중국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티베트 봉기는 달라이 라마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조국을 떠난 지도자가 된 그는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망명한 젊은 종교 지도자’라는 상징성을 얻었다. 대개의 망명 지도자들이 무장투쟁과 민족주의, 정치 선동의 길을 걸었던 것과 달리, 달라이 라마는 수십 년의 망명 생활 동안 비폭력과 연민(Compassion), 대화와 인간의 존엄을 지속적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행보는 세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달라이 라마 14세가 세계적인 인물이 된 것은 그가 조국을 잃은 망명 지도자로서 냉전과 국제정치의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도 끝까지 비폭력과 연민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의 세계적 명성은 종교와 정치, 인권과 영성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불교 교리를 설파하는 데 머물지 않고, 행복과 마음의 평화, 분노 조절, 공감, 용서, 인간 윤리 같은 보편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종교지도자의 위상을 넘어섰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89년 노벨평화상 수상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완전히 세계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으며, 국제사회는 그를 비폭력 저항의 상징이자 윤리적인 평화 지도자로 평가했다.
◆세계인의 '마음의 스승'이 되다
현대 세계가 그에게 주목한 이유는 현대인들이 종교 교리보다 마음의 치유와 평화, 스트레스 해소와 인간성 회복에 더 많은 관심을 두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는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는 메시지를 던지며 ‘교리의 종교인’이 아닌 ‘마음의 스승’으로 이미지를 바꿨다. 1990년대 이후 다큐멘터리와 영화, 인터뷰, 세계 강연 등을 통해 그의 영성적 이미지는 더욱 확산되었으며, 특히 서구에서는 ‘웃는 수행자’의 모습으로 깊이 각인되었다.
이러한 이미지를 세계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 가운데 하나가 1997년 개봉한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이다. 영화는 오스트리아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브래드 피트 분)가 어린 달라이 라마와 우정을 나누며 세계지리와 과학을 가르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938년 스위스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3,967m)을 최초로 등정해 세계적인 산악인으로 이름을 알린 하러는 이듬해 히말라야의 고봉 난가파르바트(8,126m) 원정을 위해 영국령 인도를 찾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군에 억류되었고, 수용소를 탈출한 뒤 1946년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랐던 어린 달라이 라마를 만나 평생 잊지 못할 우정을 쌓게 된다. 영화는 중국군의 침입으로 평화롭던 티베트의 일상이 무너지는 과정을 배경으로, 달라이 라마가 증오보다 연민과 평화를 선택해 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며 세계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했다.
미국 배우 리처드 기어 역시 오랫동안 티베트 불교를 수행하며 달라이 라마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신앙은 영화 《티벳에서의 7년》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어져 왔으며, 이후 티베트 인권 운동과 문화 보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젊은 시절부터 명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달라이 라마 14세와의 만남 이후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티베트를 위한 국제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관련 단체를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의 사상은 그의 저서를 통해서도 세계인들에게 널리 전해졌다. 자서전 《망명 속의 자유》에서는 티베트를 떠나 망명정부를 세우기까지의 과정과 비폭력 신념을 직접 들려준다. 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행복론》에서는 행복은 외부 환경보다 마음의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하며 종교를 초월한 공감을 얻었다. 이 밖에도 《새 천년을 위한 윤리》를 통해 인류가 함께 지켜야 할 보편적 윤리를 강조했다. 이러한 저서들은 그의 영성을 불교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인의 삶 속으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했다.
나라를 잃고 정치적 억압과 민족 갈등을 겪으면서도 그가 무장투쟁 대신 비폭력을 선택한 이유는 그의 영성 핵심에서 찾을 수 있다. 티베트 불교는 인간의 고통이 분노와 집착,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에게 폭력은 또 다른 고통을 낳는 연쇄 작용일 뿐이었다. 이 연쇄를 끊어내는 핵심 열쇠가 바로 ‘용서(Forgiveness)’다. 달라이 라마가 말하는 용서는 가해자의 잘못을 무조건 묵인하거나 처벌을 포기하는 유약한 타협이 아니다. 그에게 용서란 가해자가 심어놓은 분노와 증오로부터 마음의 자유를 지켜내는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다. 상대를 향한 미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자신은 여전히 가해자에게 지배당하는 상태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용서는 타인을 위한 시혜를 넘어 자신의 내면을 치유하고 평화를 회복하는 적극적인 정신적 저항이다.
◆연민과 용서, 증오를 넘어서는 영성
달라이 라마의 가장 유명한 메시지 중 하나인 연민도 이러한 용서의 태도와 직결된다. 그는 “행동은 비판할 수 있지만, 인간 자체를 증오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을 만든다”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이는 현실 정치에서 쉽게 취하기 어려운 태도다. 무엇보다 그는 중국 정부에 대한 비판과 중국인 개개인에 대한 증오를 철저히 구분하려 노력했다. 그가 남긴 말들은 그의 현실적 영성관과 불교적 비폭력 사상을 잘 보여준다.
“나의 종교는 친절이다.” “용서는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미래를 넓힐 수 있다.” “행복은 준비된 결과가 아니다.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서 나온다.” “증오는 증오로 끝나지 않으며 멈추지도 않는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멈춘다.” “남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면 연민을 실천하라. 당신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역시 연민을 실천하라.” “세계 평화는 개인의 내면 평화에서 시작된다.”….
달라이 라마는 모든 인간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는 보편적 사실에 주목했다. 따라서 적이나 가해자 역시 결국 무지와 두려움 속에 있는 존재라는 시각을 유지했다. 비폭력이야말로 장기적으로 인간성을 보존하고 세계 여론의 공감을 얻는 힘이 된다고 믿었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마하트마 간디의 전통 위에 놓기도 한다.
물론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저항 운동이 티베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티베트 문제는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으며, 비폭력 노선에 대한 내부의 비판적 시선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비폭력을 견지했다. 그 결과 망명지에서도 수도원을 재건하고 교육 기관을 세워 티베트어와 전통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인도 다람살라는 망명 티베트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하며, 티베트인의 문화와 종교, 정체성을 이어가는 구심점이 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국제사회에서 잊혀질 뻔한 티베트 문제를 세계적인 의제로 끌어올렸고, 티베트의 역사와 문화가 세계의 기억 속에 남도록 했다. 올해 91세인 그는 지금도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다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영적 지도자로 남아 있다.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2026-07-27 19:3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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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넘어 이어지는 평화 교육 ‘청년 플랫폼’
급변하는 국제 질서와 사회 구조 속에서 ‘다음 세대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논의돼 온 핵심 의제다. 정치적 양극화, 세대 간 갈등, 국제 분쟁과 전쟁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청년이 어떤 가치와 역량을 갖춰야 하는가는 전 세계 교육계가 공통으로 마주한 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조직 중 하나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과의 가치적 연대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단법인 세계평화청년학생연합(이하 YSP)과 국제 NGO인 IAYSP다. 이들 단체는 수십 년에 걸쳐 평화·인성·리더십 교육과 국제 청년 연대를 목표로 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교육 철학의 뿌리: ‘통일·가정·평화 그리고 인성’
가정연합의 청년 교육 철학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정리된다. 첫째는 인성 중심 교육(Character Education)이다. 정직, 책임,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 의식을 핵심 가치로 삼아 윤리적 성숙을 교육의 중심 요소로 둔다.
둘째는 평화 중심 사고(Peace Formation) 교육이다. 경쟁 중심 사고보다 상생과 협력, 갈등 해결 역량을 갖춘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한다. 셋째는 리더십 기반 실천 교육(Leadership & Service-Based Learning)으로, 지식 습득보다 사회적 책임을 행동으로 구현하는 것을 강조한다.
교육 연구자들은 이러한 접근이 학력·성취 중심의 기존 교육 모델과 달리 정서·가치·공동체 감각을 중시하는 ‘비인지형(Non-Cognitive) 교육 모델’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비인지형 교육은 지식 암기나 문제 해결 능력 같은 인지 역량을 넘어 성품·태도·감정 조절·행동 양식을 함께 개발하는 교육 방식으로, 최근 글로벌 교육 담론에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YSP와 IAYSP의 조직적 특징
YSP와 IAYSP는 단순한 학생 동아리 성격을 넘어 국제 교류·봉사·윤리 교육·사회 혁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청년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요 활동 구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시아·아프리카·남미·유럽 등 약 70여 개국을 아우르는 글로벌 캠퍼스 네트워크를 운영한다. 둘째, 국제 봉사 활동과 청년 외교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일부 프로젝트는 국제기구·정부·비정부기구(NGO)와 협력해 추진된다. 셋째, 가치·리더십 교육 워크숍을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토론과 프로젝트 수행을 중심으로 한 PBL(Project-Based Learning, 프로젝트 기반 학습)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교육 전문가들은 이러한 구조를 신앙 기반의 보편적 가치(Faith-Based Value)를 바탕으로 출범하여 현재는 국제 사회 활동형 NGO 모델로 진화한 사례로 분석한다.
‘10만 청년 평화 리더 양성 프로젝트’
최근 가장 주목받는 사업은 ‘10만 청년 평화 리더 양성 프로젝트’다. 이 프로그램은 단순 참여형 캠페인이 아니라, 단계별 교육 시스템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참가자를 자원봉사자 수준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화형 리더’로 육성하는 데 있다. 외부 전문가들은 이 사업의 의미를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한다. 하나는 청년이 주도하는 국제 교류·토론·평화 활동의 장을 제공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활동 성과가 국제 인증이나 정책 기여 등 정량적 지표로 검증될 필요가 있다는 과제가 병존한다는 점이다.
“평화는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프로젝트”
가정연합의 평화 철학을 공유하는 협력 기구들과 YSP·IAYSP의 청년 프로그램은 현재 진행형이며, 보편적 가치 교육을 넘어 실체적인 글로벌 시민 리더십 플랫폼으로 도약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평화를 말하는 것은 쉽지만, 평화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청년을 길러내는 일은 가장 어렵고 동시에 가장 의미 있는 과제”라고 평가한다. 이 같은 시도가 21세기 청년 교육 모델의 하나의 대안으로 자리 잡을지, 혹은 하나의 단체 활동 사례로 남을지는 향후 축적될 성과와 검증 결과가 말해줄 것으로 보인다.
2026-07-27 16:5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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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가치관·인성 갖춘 인재 양성이 우리의 목표”
선학학원 본관에서 만난 문연아 이사장의 얼굴에는 교육자로서의 확고한 신념과 따뜻한 온기가 묻어났다. 2023년 7월 학교법인 선학학원 제12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선문대학교를 비롯해 8개 교육기관을 이끌며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사회 전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투자”라는 철학을 일관되게 실천해 왔다.
건학이념을 실천하다
“그동안 선학학원은 애천, 애인, 애국의 건학이념을 바탕으로 소통과 화합을 통한 공동체 정신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구성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도록 소통, 화합, 겸손으로 학교 발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문 이사장은 취임사에서 밝힌 이 약속을 하루도 잊지 않고 실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생각하는 교육의 핵심은 선학학원의 건학이념과 맥을 같이한다. 하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동체를 생각하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인재 양성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학업 성취도가 높은 학생이 아니라, 올바른 가치관과 인성을 갖춘 인재를 키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교육의 본질
“요즘 많은 교육기관이 성과와 실적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학생 한 명 한 명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키워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문 이사장은 인터뷰 내내 ‘사람’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선문대학교, 선화예술고등학교, 선정고등학교, 선정국제관광고등학교, 선정중학교, 선화예술중학교, 경복초등학교, 선화유치원 등 8개 교육기관을 운영하는 선학학원은 설립 초기부터 ‘전인교육’을 교육 철학의 근간으로 삼아왔다.
문 이사장은 “학업 성취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학생들이 바른 인성과 사회적 책임감을 갖추는 것”이라며, “우리 학원을 거쳐간 학생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면서도 이웃과 사회를 생각하는 리더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는 건학이념인 애인, 즉 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의 구체적 실천이기도 하다.
미래를 준비하는 혁신적 교육 환경
급변하는 시대에 발맞춰 선학학원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문 이사장은 최근 도입한 스마트 교육 시스템과 창의융합 교육 프로그램에 대해 자부심을 드러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갈 우리 학생들에게는 암기식 교육이 아닌, 스스로 사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AI 기반 맞춤형 학습 시스템을 도입했고, 학생들이 실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 수업을 확대했습니다.”
특히 그는 교원 역량 강화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갖춰도 결국 교육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교원입니다. 우리는 교원들이 최신 교육 트렌드를 학습하고 전문성을 높일 수 있도록 정기적인 연수와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주체인 교원들이 성장해야 학생들도 성장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소통과 화합, 공동체 정신의 실천
문 이사장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핵심 가치는 ‘소통’이다. “교육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 교직원, 학부모, 그리고 지역사회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함께 호흡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지시나 명령이 아닌, 진정한 소통과 화합을 통해 모두가 행복한 교육 환경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선학학원은 정기적인 간담회와 소통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학생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교원들의 고충을 함께 해결하며, 학부모들과 긴밀히 협력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열린 자세로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리더십의 덕목도 바로 겸손입니다.”
글로벌 인재 양성을 위한 비전
문 이사장은 선학학원이 글로벌 인재 양성의 요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선문대학교를 중심으로 해외 우수 교육기관과의 교류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글로벌 시대에 걸맞은 역량을 갖추면서도 우리의 가치와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균형 잡힌 인재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특히, 선화예술고등학교와 선정국제관광고등학교 등 특성화된 교육기관을 통해 학생들의 다양한 재능과 적성을 발견하고 키워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 “모든 학생이 같은 길을 걸을 필요는 없습니다. 각자의 재능과 꿈에 맞는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교육자로서의 소명
문 이사장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제게 교육은 직업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한 명의 학생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 일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천, 애인, 애국의 정신으로 하늘과 사람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인재들을 키워내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그는 교육이 개인의 노력만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학생과 교사, 학부모, 직원, 지역사회가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의 과정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했다. 애천·애인·애국의 정신을 근간으로 선학학원이 그려가는 교육의 미래가 우리 사회 전체의 밝은 내일로 이어지길 기원한다.
2026-07-27 16: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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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보다 인성이 먼저”… 글로벌 평화·리더십 교육 모델 구축
한국 사회에서 종교적 배경을 지닌 교육기관은 오랜 기간 논쟁과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논쟁과 별개로, 어떤 학교들은 오랜 기간 축적된 교육 실험과 성과로 교육 현장에서 독자적 모델을 구축해 왔다. 가정연합 산하 교육기관 네트워크가 그 사례다.
경복초등학교, 선화예술중·고등학교, 청심국제중·고등학교, 선정중·고등학교, 선문대학교, 선학 UP대학원대학교 등으로 구성된 이 교육 네트워크는 반세기 넘게 ‘인성·평화·리더십·국제 감각’을 공통된 교육 철학으로 유지해 왔다. 내부 집계에 따르면 이들 기관은 현재까지 약 3만 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부 졸업생들은 정치·외교·과학·문화예술·국제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교육은 경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준비
가정연합 계열 교육기관의 교육 철학은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평화를 위한 인간교육’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된다. 전쟁과 분단의 경험 속에서 출발한 이 철학은 학업 성취 중심 교육보다는 도덕성, 사회적 책임, 타문화 이해 능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커리큘럼이 설계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교육 전문가들은 이 철학이 이후 일본과 미국, 아시아 개발도상국 등으로 교육기관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국제화 전략과 결합했다고 분석한다. 이로 인해 해당 교육 네트워크는 한국적 교육 가치와 국제 교육 기준이 결합된 사례로 일부 학술 연구에서 언급되고 있다.
교육 평가 전문가들은 이들 학교의 공통 요소로 △외국어 교육 비중 확대 △예술·체육·과학·봉사 활동의 병행 강화 △국제교류 및 해외 현장 체험 시스템 구축 △학업 성취도보다 정서적·사회적 성숙을 주요 교육 목표로 설정한 점 등을 꼽는다.
인성이 먼저다
가장 논쟁적인 지점은 인성교육과 가시적 성과 간의 관계다. 일부 교육 평론가들은 “평화·리더십·봉사라는 교육 목표가 다소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학생들의 진로 선택과 국제적 역량 형성으로 이어진 구체적 사례들이 축적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선화예술중·고등학교의 경우 국제 콩쿠르 수상자 배출, 해외 공연 활동, 국제 예술 교류 프로그램 참여 등을 통해 문화예술계에서 일정 수준의 인지도를 확보해 왔다. 또한, 선학 UP대학원대학교의 모델 UN 프로그램, 선문대학교의 국제기구 인턴십 연계 과정, 청심국제중·고교의 의무화된 해외 봉사·교류 프로그램 등은 인성 중심 교육이 국제 활동 경험과 진로 설계로 연결되는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된다.
교육적 성과인가, 종교 네트워크 확장인가
반면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일부 학계와 언론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종교 기반 교육 철학이 충분히 개방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평화·통일 담론이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지 않는가
-국제 캠퍼스 운영과 인재 양성 프로그램이 일반적인 글로벌 교육 산업과 본질적으로 다른가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평가 중 하나는 “해당 교육 네트워크는 축소되거나 소멸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제도화·체계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들 학교에서 근무하거나 강의를 맡아온 비(非)통일교 출신 교사·교수들 가운데서는 “수업과 학교 운영 전반에서 종교적 색채가 전면에 드러난다고 느끼기 어렵다”, “일반 사립학교의 교육 과정과 큰 차이를 체감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반세기 교육 실험, 그 이후는
교육 전문가들은 가정연합 계열 학교들을 특정 종교의 부속 기관으로만 보기보다, 한국 사립교육 실험사의 한 사례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평화·리더십 교육 모델은 AI 기술 확산, 국제 이주 증가, 다문화 사회 전환이라는 환경 변화 속에서 향후 한국 교육의 하나의 대안 모델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한 교육학자는 “가정연합 교육기관의 반세기에 걸친 교육 실천은 이미 완결된 성과라기보다는 현재도 진행 중인 장기 실험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이 실험은 교육·인성·국제 역량을 결합한 하나의 교육 모델로서, 이미 한국 사회와 교육 현장에서 분석과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향후 한국 교육 담론 속에서 그 성격과 가능성이 보다 분명하게 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2026-07-27 16:4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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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 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12>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종교를 몸으로 살아 보다
그 결과 그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길은 다르지만 도착지는 하나다.” 이 경험에서 나온 핵심 비유가 바로 유명한 “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 다른 길이다.”였다. 이 비유는 이후 ‘종교 간 대화(interfaith dialogue)’의 상징적 표현으로 널리 인용되었다. 그의 핵심 메시지는 단순하다. 종교는 경쟁하는 체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된 하나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라마크리슈나는 체계적인 교리를 구축하기보다 사람들의 영적 변화를 중시했다. 그의 사상은 ‘진리를 향한 다양한 체험 방식’으로 재해석된다. 즉, 종교는 정답 경쟁이 아니라 진리에 접근하는 서로 다른 경로라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그는 생전에 종파 통합을 조직적으로 시도한 인물은 아니지만, 자신의 수행 경험 속에서 “여러 종교의 신(神)에 대한 체험은 궁극적으로 하나로 수렴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그는 초종파적 영성, 종교다원주의적 사유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라마크리슈나는 생전에 벵골 지역의 신비 수행자로 활동했다. 그는 다카네스와르 칼리 사원을 중심으로 소규모 제자들과 함께 영적 체험을 공유했다. 1886년 사망 이후,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수도원을 설립하며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라마크리슈나 운동’이 형성된다.
그의 대표적 제자는 스와미 비베카난다로, 스승인 라마크리슈나의 사상을 서구에 소개하며 세계적 확산의 계기를 만든 인물이다. 라마크리슈나의 체험 중심 영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젊은 시절의 비베카난다가 그를 찾아와 “선생님은 하나님을 보셨습니까?”라고 묻자, 라마크리슈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 나는 그대를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보았다. 그리고 그대도 볼 수 있다.”고 대답했다. 철학적 논증 대신 자신의 체험을 확신에 찬 언어로 전한 이 한마디는 비베카난드의 삶을 바꾸었고, 훗날 그는 스승의 사상을 세계에 전하는 가장 중요한 제자가 되었다.
라마크리슈나 사상이 세계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비베카난다의 1893년 세계종교회의 연설이었다. 이 종교회의는 미국 시카고 만국박람회의 부대 행사로 열렸는데,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종교 간 대화 모임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93년에는 시카고에서 100주년 기념 회의가 열렸고, 오늘날에도 세계 각국에서 3~5년 주기로 이어지고 있다. 비베카난다는 스승에 대한 강렬한 확신을 품고 1893년 세계종교회의 연단에 섰고, 이를 계기로 라마크리슈나의 사상은 서구 지성계에 널리 알려지며 종교 간 공존 담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베카난다는 스승이 체험한 영적 신비를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확장하는 데도 온 힘을 쏟았다. 이후 라마크리슈나의 대화록과 전기가 영어로 정리·번역되면서 비교종교학과 종교다원주의 논의의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보았다”
“진리는 하나다. 현자들은 그것을 여러 이름으로 부를 뿐이다.” “모든 종교는 하나의 신에게 이르는 길이다.” “신을 본 사람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신은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 머문다.” “세상에 신이 아닌 것은 없다.” “신은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혹은 연인처럼 다가온다.” “신을 향한 사랑이 가장 강한 수행이다.” “순수한 마음이면 신은 반드시 드러난다.” “나는 어머니 신 ‘칼리(Kali)’를 살아 있는 존재로 보았다.” 라마크리슈나의 말은 이렇듯 짧고 비유적이며, 대부분 직접 체험에서 나온 확신의 언어였다. 그에게 신은 특정 종교 안에 갇히지 않았고, 모든 존재 안에 내재한 실재였다. 그래서 종교의 차이는 본질이 아니라 표현의 차이로 이해된다.
그의 수행 경험 중 하나는 힌두 여신 칼리와의 깊은 영적 체험이었다. 칼리는 힌두교의 대표적인 여신으로 파괴와 창조, 죽음과 생명을 함께 상징한다. 그는 칼리를 상상 속 존재가 아닌 살아 있는 실재로 경험했다고 전해진다. 라마크리슈나는 몇 달 동안 아무리 기도해도 칼리가 나타나지 않자 절망하여 사원에 있던 칼을 집어 들고 목숨을 끊으려 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온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차는 강렬한 신비 체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 경험은 그가 평생 “나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확신 있게 말한 배경이 됐다.
이후 이슬람 수행에서는 형상이 없는 하나의 신성을, 기독교 명상에서는 사랑으로 다가오는 인격적 신성을 각각 체험하게 된다. 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라마크리슈나의 영성은 교리에 머물지 않고, 직접적인 ‘체험 보고’와 ‘통합 감각’에 방점을 찍는다. “경험되는 방식은 다르지만, 도달하는 실재는 하나다”가 그의 확신이었다.
사실 “신은 하나”라거나 “진리는 하나”라는 생각은 이전에도 있었다. 인도 전통에도 유사한 사상이 존재했고, 철학적으로도 일원론적 사유가 있었다. 종교 간 유사성에 대한 관찰도 오래전부터 지속되었다. 하지만 라마크리슈나의 특징은 그것을 이론이 아니라 철저한 체험의 언어로 말했다는 점이다.
그의 말이 특별히 화제가 된 이유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19세기 인도는 힌두교 내부의 분화와 갈등, 이슬람과 힌두교의 긴장, 서구 기독교 선교의 확산, 식민지 지식 체계의 유입 등으로 혼란해지면서 각각의 종교가 심하게 충돌하는 시대였다. 이때 그의 메시지는 “왜 싸우는가, 본질은 하나다”라는 엄중한 울림을 던진 것이다.
기존의 종교 담론은 대체로 “내 종교가 옳고, 다른 종교는 그르다”는 대립 구조 위에 서 있었다. 진리를 가장 정확하게 소유한 종교가 바로 자신들의 종교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런 틀 안에서는 종교 간 차이가 ‘진리와 오류의 구분’으로 해석되기 쉽다.
◆갈등을 넘어 하나의 진리로
반면 라마크리슈나는 이 구조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바꿔 이해했다. 그는 종교를 서로 다른 경험 방식으로 보고, 신은 이름만 다를 뿐, 하나의 동일한 실재로 본 것이다. 종교 간의 차이는 진리의 우열이 아니라, 그 실재에 접근하는 언어와 경로의 차이일 뿐이다. 같은 산을 오르지만, 길이 다를 뿐이라는 이 관점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종교를 경쟁 관계가 아니라 공통의 영적 경험 구조로 바라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라마크리슈나의 이러한 사상은 종교학에서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주요 관심사는 종교다원주의의 초기 사례, 신비 체험의 보편 구조, 비교종교학적 해석 가능성 등이다. 이 밖에도 철학, 신학, 종교심리학 등에서 진리의 단일성 주장이나 종교 간 대화 모델로 지속해서 다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통합적 관점은 동시에 중요한 의문도 남긴다. 모든 종교 경험을 하나의 실재로 묶어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종교마다 강조하는 신관, 인간 이해, 구원 개념, 윤리 체계는 단순한 표현의 차이를 넘어 실제 내용상의 본질적인 차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종교 갈등은 단순한 오해나 언어 차이만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권력과 제도, 교리, 공동체 정체성이 복합적으로 얽혀 나타난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라마크리슈나의 메시지는 여전히 강력하다. 인간의 영적 경험이 갈등을 넘어 하나의 방향성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토대이자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를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의 진리를 경험하는 길’로 보았고, “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 다른 길”이라는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인류 종교 이해의 지평을 한 차원 확장한 인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2026-07-24 23: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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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543년~1943년, 독생녀 강림을 준비한 여성 섭리의 400년 [신화에서 선민까지 한민족 정체성의 문화사적 발견-기고]
데카르트 이성과 퇴계의 심정
통일원리 시각에서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의 타락을 바로잡는 사회운동이 아니었다. 기존 제도권의 묵은 교리와 고인 관습을 털어내고, 장차 오실 재림주를 맞아들이기 위해 ‘신부’로서의 순결과 거룩함을 회복하려는 일종의 성별(聖別)의 과정이었다. 1543년, 칼뱅은 저서 『기독교 강요』를 통해 개신교의 새로운 교리를 확립하며 서구 정신을 정화를 갈파하였다. 놀랍게도 같은 해, 지구 반대편 조선에서도 이와 닮은꼴인 심정의 혁명이 소리 없이 시작되었다. 형식과 권위로 가득했던 기존 학문의 틀을 깨고, 하늘 앞에 본연의 순수한 인간으로 서고자 했던 깊은 내면의 혁명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산수 좋은 곳에 모여 오롯이 하늘의 뜻과 참된 도리를 탐구한 주세붕의 ‘백운동서원’이 바로 이해에 문을 열었다. 서구가 이성을 바로세워 신부의 정결함을 준비했다면, 조선은 하늘을 향한 심정의 밭을 일구며 또 다른 차원의 성별을 시작한 셈이다.
서구의 개혁 신학이 종교개혁과 문예부흥을 통해 하늘 앞에 단독자로 선 인간의 권리를 일깨웠다면, 조선의 성리학은 하늘의 성품(理)과 인간의 성정(氣)이 하나 되는 경지를 탐구하며 장차 하늘 부모님을 온전히 모실 수 있는 고결한 심정적 기대를 닦아고 있었다. 가정연합 『원리강론』에 따르면, 유럽의 중세 시대는 인간의 본성을 억압했고, 그 억압을 풀어 인간 본성의 내외 양면을 복귀시키기 위해 종교개혁과 문예부흥(Renaissance) 운동이 일어났다고 본다. 이 시기 서구에서는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선언을 통해 인간의 이성을 철학의 중심에 세우며 근대 합리주의의 초석을 닦았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를 넘어 지(知)·정(情)·의(意)를 갖춘 인격적 존재이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결국 하늘부모님의 ‘심정’이라는 지고한 목적을 이미 천성으로 품고 태어난 한반도 사람들이, 이들의 삶과 역사를 통해 그 심정을 실현해 간 과정이었다. 흥미롭게도 유럽에서 이성 중심의 문예부흥이 일어날 무렵, 조선에서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통해 인간 본연의 순수한 감정과 도덕적 의지를 탐구하는 사단칠정론(四 端七情論)과 이발기발(理發氣發) 논쟁이 불붙으며 세계적 수준의 성리학적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다시말해, 서구가 외적 이성의 힘을 깨우고 있을 때, 조선은 내적 심정의 길을 닦으며 장차 독생녀를 맞이할 고결한 영적 토양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동서양에서 동시에 일어난 움직임은 기존의 ‘껍데기뿐인 제도’를 넘어 ‘살아있는 인간의 본성’을 해방하기 위한 거대한 섭리적 조류였다.
◆ 근대의 문이 열리다. 독생녀 강림을 준비한 400년
『원리강론』에 따르면 인류역사는 수많은 민족사로써 연결되어 왔고, 그중 하나님은 어떤 민족을 특별히 택하셔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는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경륜해 오셨다. 독생자 재림주 강림의 위한 준비시대는 1517년 종교개혁부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까지의 400년을 의미하며, 이는 다시 종교개혁기(1517-1648), 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1648-1789), 정치·경제 및 사상의 성숙기(1789-1918)의 세 단계로 구분된다. 주목할 점은 『원리강론』이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결과까지도 복귀섭리의 완성 과정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성신(聖神)의 실체인 독생녀의 강림을 위한 기대조건이 1945년 해방 이전까지의 섭리와 맞물려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1943년 독생녀 탄신을 기점으로 역산한 400년의 섭리적 기대는, 독생자와 독생녀가 참부모로 현현하기 위해 동서양의 영성과 지성을 총체적으로 준비해 온 기간이라 할 수 있다.
『문선명선생말씀선집』 제58권에는 “독생자 혼자서는 안 된다. 독생녀가 있어야 한다. 독생녀를 찾아 하나님을 중심삼고 서로가 좋아하는 자리에서 결혼해야 한다. 결혼을 해서 하나님이 종적인 부모로서 기뻐하고 횡적인 부모로서 기뻐할 수 있는 신랑 신부가 되어 지상에서 아들딸을 낳아야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인류 복귀의 완성이 참부모의 현현을 통해 이루어짐을 명시한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섭리 역사의 전면에 독생자를 먼저 내세우셨기에 지금까지의 역사는 남성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으나, “독생자가 왔으면 그 다음에는 독생녀가 와야 한다.”(『말씀선집』 제23권)는 말씀처럼 독생녀의 강림은 중단될 수 없는 하늘의 예정이었다. 따라서 1943년 독생녀 탄신은 독생자 강림 이후 인류의 참어머니를 맞이하기 위해 하늘이 전 세계적인 탕감 기대를 총집결하여 거두어들인 섭리적 결실이라 할 수 있다.
◆ 동·서 문명이 함께 준비한 시간
1543년~1943년간 400년 시간은 『원리강론』이 말하는 메시아 강림 준비섭리가 역사속에서 단계적으로 전개된 기간이다. 이 시기 인류는 종교개혁을 통해 인간 내면의 신앙과 사상을 새롭게 정립했고, 이어 종교와 사상의 충돌을 거치며 새로운 시대를 향한 사회적·영적 변화를 경험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정치·경제·사상의 성숙 단계로 이어지며, 마침내 메시아 강림을 맞이할 민족적, 국가적 토양을 형성하게 된다. 이 400년의 흐름은 크게 다음의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 내적 신앙 및 사상의 정립기(심정적 토양 마련과 한민족 정체성의 재확립)
제2기 종교 및 사상 투쟁기(신·구사상의 충돌과 실천적 해방)
제3기 정치·경제 및 사상의 성숙기(영적 부흥과 여성권 복귀의 토양 형성)
[한반도 독생녀 강림을 위한 400년 역사 동시성 연표]
제1기 내적 신앙 및 정체성 재확립기(1543~1663년)는 1543년 백운동 서원의 건립으로 시작된 내적 수양의 흐름이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과 같은 국가적 대환란을 거치며 전환점을 맞이한다. 한민족에게 7년간의 참혹한 전쟁은 외적인 파괴에 그치지 않고, 조선 사회의 정신적 뿌리를 뒤흔들며 한민족 정체성을 새롭게 재확립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전란의 위기 속에서 고취된 ‘고구려 정신’이다.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 아래에서 민족의 고유 정신은 상대적으로 억눌려 있었으나, 양란을 거치며 고대 한반도의 여신의 위상이 다시금 고개를 든 시기로 해석할 수 있다. 고구려사 인식의 강화는 곧 단군을 중심으로 한 상고사의 재조명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유교적 부성 중심 질서에 가려져 있는 한민족 고유의 모성적·신령한 영성을 일깨우는 마중물이 되었다. 한편 퇴계이황의 심성론(心性論)은 통일원리의 관점에서 볼 때, 장차 실체 성신으로 강림하실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내적 성전(聖殿)’을 인간의 마음속에 건축한 섭리적 사건이다.
제2기 종교 및 사상 투쟁기(1663~1803년)는 서구의 합리주의와 조선의 실천적 자의식이 충돌하며, 장차 강림하실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영적·지성적 기반을 닦는 시기였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예송논쟁과 북벌론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예(禮)’와 ‘대의명분’을 실천적 삶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려는 치열한 사상 투쟁이 전개됐다. 단순히 당파 싸움을 넘어, 인간의 삶과 국가의 질서가 어떠한 절대적 가치에 근거해야 하는가를 묻는 심각한 논쟁의 기간이었다. 동시에 조선후기 평안도 지역의 경우, 중앙으로부터의 극심한 차별과 소외를 겪으면서도 오히려 이를 독자적인 ‘지역 정체성’ 형성의 기회로 삼았다. 서북인들은 평안도를 ‘단군의 유적이 있는 문명의 발상지’로 자부하며 스스로의 위상을 높이려 노력했다. 이는 서북인들은 성리학에 매몰된 중앙과 달리, 교조주의를 넘어선 다원주의적 시각의 사상적 유연함을 보여준다. 한편 실학 운동도 기존 질서를 극복하고 장차 올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었다. 마지막으로 서학(천주교)의 유입은 본격적인 기독교 신앙의 도래를 위한 영적 탕감 조건의 민족적 사연이었을 것이다. 특히 1801년 신유박해 당시, 『기해일기』에 의하면, 여성 신도들이 결연한 각오로 순교하는 사례가 많았고, 고문을 담당했던 향리들조차 당황했던 기록들이 많이 등장한다.
제3기 정치·경제 및 사상의 성숙기(1803~1943년)는 구시대의 봉건적 잔재를 털어내고,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민족적·세계적 성숙이 완성되는 시기이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은 차별받은 평안도 땅에 새로운 세상을 향한 혁명적 기개를 일깨웠고, 이후 동학을 비롯한 민족 종교의 발흥은 ‘정도령 사상’과 결합하여 메시아 강림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극대화했다. 이러한 간절한 기다림은 1907년 평양대부흥회 성령의 역사로 이어져, 한반도 북부 평안도 안주(安州) 땅을 장차 독생녀께서 탄생할 거룩한 ‘동방의 예루살렘’이자 성별된 영적 자궁으로 확립할 수 있었다. 반만년의 역사를 거치며 우리 민족이 중국과 같은 큰 국가 옆에서 독자적인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며 평화적인 열린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민족의 고유한 정체성 때문이었다.
『원리강론』의 섭리적 사관으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은 단순히 영토를 다툰 전쟁이 아니었다. 인류의 본성이 지향하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하늘 편 국가들이 전체주의라는 사탄 편의 장벽을 허물고 메시아 안착을 위한 장성적 승리 기반을 조성한 거대한 영적 전쟁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로 결집한 하늘 편 국가들은 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기독교적 가치를 세계 질서의 근간으로 세우기 위해 총력을 다하였다.
1941년 루스벨트와 처칠이 선포한 『대서양 헌장』은 기독교적 정신을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천명한 역사적 선언이었다. 이어지는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의 승전보와 1943년 초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거둔 연합군의 결정적 승리는, 전체주의의 어둠을 몰아내고 하늘 편 승리의 확고한 전환점을 마련한 섭리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투입된 수많은 희생과 승리의 제물이 마침내 영적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하늘은 1943년 독생녀를 한반도의 거룩한 모태를 통해 현현시키셨다.
이로써 1543년 종교개혁의 서막으로부터 쉼 없이 달려온 400년 메시아 기대 섭리는 마침내 장엄한 결실을 보게 된다. 서구 문명이 기독교적 가치를 바로 세우며 민주주의라는 외적 기반을 다져오는 동안, 동방의 한반도에서는 수백 년에 걸친 여성들의 인고와 신령한 정성이 내적 토대를 쌓아 올렸다. 마침내 동서양의 모든 영적·물질적 자산이 결합하여 이 땅에 결실을 본 단 하나의 우주적 사건, 그것이 바로 독생녀의 현현이다.
1943년 독생녀의 탄생은 1543년부터 이어져 온 여성 섭리 400년의 장엄한 완성이며, 인류 역사가 기다려온 참어머니의 현현이다. 하늘은 독생녀의 탄생을 위해 한민족의 역사와 신앙, 여성들의 인고와 정성, 그리고 동서양 문명의 모든 섭리적 기대를 하나로 모아 오셨다. 그러므로 독생녀는 단순히 독생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가 부여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이 인류 구원과 창조이상 완성을 위해 친히 찾아 세우신 유일한 참어머니의 실체이자, 하늘 섭리의 중심적 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동시에 독생녀의 현현은 독생자와 더불어 참부모의 위상을 실체적으로 완성하는 섭리의 결정적 승리이다. 생전의 문선명 총재께서는 “독생자 혼자서는 안 된다. 독생녀가 있어야 된다. 독생녀를 찾아 하나님을 중심삼고 서로가 좋아하는 자리에서 결혼해야 한다.”(문선명선생말씀선지, 제58권 219쪽, 1972년 6월 11일)고 밝히신 것처럼, 하늘의 창조이상은 독생자와 독생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 되어 참부모의 자리에 서심으로써 역사 가운데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
통일사관의 눈으로 조선시대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반도의 역사를 조명해 볼 때, 1943년 독생녀의 탄생은 역사상 가장 거룩한 섭리적 전환점이다. 인류 역사에서 잃어버렸던 여성의 본원적 가치와 참어머니의 위상을 비로소 회복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가정연합의 한학자 총재께서는 참어머니의 위상에서 하나님을 ‘하늘 부모님’으로 모실 것을 선포하였다. 이는 하나님을 오직 ‘아버지 하나님’으로만 인식해 온 기존 신관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깨트리며, 하나님의 본성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창조원리를 천주 앞에 선포한 사상적·영적 대혁명이었다.(한학자 천지인참부모 성탄 80주년 기념문집편찬위원회, <독생자 독생녀론 기초>)
따라서 1543년부터 1943년에 이르는 400년의 세월은, 단지 동서양 한 시대의 종교적·사상적 변혁을 준비한 역사적 여정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기는 하늘이 동방의 이 땅에 독생녀를 보내시고, 그 독생녀를 중심으로 참부모의 지고한 이상과 하늘부모님의 창조목적을 이 지상 위에 실체로 구현하기 위해 도도히 이끌어 오신 거룩한 여성 섭리의 결정판은 아니었을까? 마침내 1943년에 이루어진 독생녀의 탄생은, 수백 년간 여성들의 피와 눈물로 쌓아 올려진 내적 정성이 결실을 본 성스러운 순간이었다. 나아가 참부모를 통하여 천주 복귀의 찬란한 새 시대를 선포하고, 온 인류를 구원할 위대한 섭리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출발점이다.
고기훈 박사(한국학)
2026-07-22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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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공동체 바탕 사회통합 실천… ‘이웃과 동행’ 뿌리내리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1954년 한국에서 출발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은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사회 통합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그 신념은 구호에 그치지 않고, 오랜 세월 지역사회 현장에서 묵묵한 실천으로 이어졌다. 가정연합의 지역사회 봉사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곁을 떠나지 않은 지속적인 동행에 가깝다. 1980년대부터 체계화된 ‘이웃사랑 실천’ 활동은 30년 넘게 이어지면서 자원봉사 애원과 효정봉사단, 신내종합사회복지관 운영 등으로 확장돼 탄탄한 돌봄의 네트워크를 이루며 지역 주민의 일상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 진정성과 시간이 빛어낸 신뢰는 오늘도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안전한 울타리가 되고 있다.
1980년대 이전에는 농촌계몽과 영농지원, 의료봉사 등 지역 단위의 봉사활동에 주력하며 사회공헌의 기반을 마련했다. 최근에는 의료·교육 봉사의 확장과 재난 구호 활동을 추가하며 사회적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한국 사회의 복지 사각지대를 메우고,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대응하는 데 기여하고 있으며, 또한 국내외 네트워크를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주민들의 일상생활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자원봉사 애원은 1994년 사단법인으로 등록된 이후 30년간 문화예술을 통한 나눔과 아동·청소년 지원, 소외계층 돕기를 중심으로 활동해 왔다. 무료 급식소 ‘애원의 집’을 운영하며 18개 봉사단을 통해 지역 주민 지원을 이어가고 있으며, 코로나19 이후 중단됐던 캄보디아 의료·교육 봉사를 재개했다. 이 활동은 보건복지부 산하 공익법인으로서 역할을 강조하는 사례로, 복지 안전망 확충에 기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제적 확장을 통해 캄보디아 현지에서 학교 건립과 의료 클리닉 운영을 추진하며, 현지 주민들의 생활 수준 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정연합이 전국 단위로 운영하는 효정봉사단은 환경정화, 노인 돌봄, 취약계층 지원 등을 실천하는 핵심 조직이다. 가평효정봉사단은 출범 3년 만에 1천회 이상의 봉사활동을 기록하며 지역 활성화에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광주광역시 효정봉사단은 2021년 출범 이후 방역 봉사와 환경 정리 활동을 통해 주민 안전에 기여했으며, 춘천효정봉사단은 공지천 조각공원에서 다문화 가정 지원 사례를 공유하며 소통의 장을 마련했다. 김제시 효정봉사단은 관내 지도자들과 협력해 취약계층 지원과 생활 밀착형 봉사 활동으로 봉사 범위를 확대했으며, 용산구 효정봉사단은 코로나19 기간 마스크 배포와 소독 작업으로 실질적 도움을 제공했다. 부산과 대구 지역 효정봉사단은 해안 정화 활동과 노인 복지 센터 지원을 통해 지역 환경 보호와 세대 간 소통을 촉진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연간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하며, 지역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로 자리잡고 있다.
신내종합사회복지관은 1995년 개관한 이후 올해로 30주년을 맞아, 지역사회와 함께 시스템화된 사회 복지의 실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2025년 11월 11일 기념행사를 통해 ‘당신의 의미가 모여 빛나는 30년’을 테마로 지역 주민과 성과를 공유했으며, 노인 복지, 아동 지원, 장애인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노인 복지 프로그램에서는 치매 예방 워크숍과 건강 관리 세션을 제공하며, 아동 지원 부문에서는 방과후 교실과 학습 멘토링을 통해 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연간 수만 명의 이용자를 지원하며, 한국 사회의 복지 인프라 강화에 기여하고 있다.
가정연합의 활동은 국내에 그치지 않고 국제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다문화 가정 지원과 독거노인 통합돌봄 사업, 김장 나눔 행사를 진행하며 취약계층을 지원한다. 특히, 가정연합 산하 세계평화여성연합(WFWP)은 2002년 북한사랑 1% 운동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시민들이 소득이나 마음의 1%를 나누어 북한의 여성과 아동들을 돕자는 인도적 평화 나눔 운동이었다. 여기에는 ‘통일은 정치 이벤트가 아니라 작은 나눔과 공감에서 시작된다’는 철학이 담겨있다. 초기에는 북한 내 여성·어린이 대상 의류, 침구류, 생활용품 등을 지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프로젝트는 북한뿐 아니라 전 세계 빈곤 국가를 대상으로 한 인도적 지원으로 확대됐으며, 명칭도 ‘지구가족사랑 1% 운동’으로 바뀌었다.
현재는 UN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달성을 위한 저개발국가 개발협력사업, 대북지원사업, 재난 긴급구호 및 인도주의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 저개발국가 개발협력사업으로는 여성 경제 자립 지원, 어린이 교육지원, 에이즈 예방, 의료지원 등이 있으며, 1994년부터 160개국에 자원봉사자를 파견해 왔다.
긴급구호 활동으로는 2010년 아이티 지진피해 복구지원, 2011년 일본 지진피해 구호, 2014년 필리핀 태풍피해 지원, 2015년 네팔 지진피해 구호, 2019년 강원도 고성 산불피해 지원, 2020년 코로나19 방역물품 지원(볼리비아, 레바논 등), 2022년 우크라이나·아프가니스탄 긴급구호, 2023년 튀르키예·시리아 지진피해 구호 등이 있다. 대북지원으로는 2002년 북한 아동 내의(속옷) 지원, 2003년 룡천 소학교 건립, 2005년 개성 나무 심기, 2010년 식량 지원, 2016년 두만강 수해 복구 등을 통해 지속적인 도움을 제공해 왔다.
가정연합 관계자는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국민과 함께 성장할 것”이라 “지역사회와의 연대 또한 더욱 공고히 하겠다”고 강조했다. 가정연합은 한국 사회의 복지 취약지대를 보완하는 데서 나아가, 지역 안의 사람들과 기관들이 서로 연결돼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지속적으로 돌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가고 있다. 아울러 국내외 다양한 주체들과의 협력과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단기적 지원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 가능한 사회공헌의 틀을 차분히 구축해 나갈 계획이다.
2026-07-20 19:4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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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통해 ‘돕는 사람’과 ‘도움받는 사람’이 하나로… 선순환 정착”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자원봉사애원 사무실에서 김고은 이사장을 만났다. 사단법인 자원봉사애원은 1994년 사회단체로 활동을 시작해 1996년 사단법인으로 등록된 공익법인이다. 약 30년간 문화예술복지를 중심으로 한 나눔과 아동·청소년 지원,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공헌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현재 회원 130여 명, 연간 평균 자원봉사자 700여 명이 활동하는 중견 시민단체로 성장했다. 김 이사장은 인터뷰에서 30년 가까이 이어온 봉사 활동의 성과를 돌아보며 지속 가능한 나눔 문화를 위해 비전을 제시했다.
이웃과 함께 걸어온 30년의 여정
애원은 ‘사랑의 정원(愛苑)’이라는 이름처럼 어려운 이웃의 마음을 보듬고 공감하며 사랑 가득한 사회를 만드는 취지로 설립됐다. 김 이사장은 “나눔을 실천하는 행위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이 연결이 쌓일 때 공동체는 변화한다”고 전했다. 애원의 초기 활동은 문화예술의 접근이 어려운 장애인·독거노인을 위한 ‘방문 공연 서비스’로 출발했다. 분기별로 20명의 애원문화예술단이 시설을 방문하는 작은 실천이었지만, 장애인 여행 지원, 공연배달 서비스, 자선공연, 장애인을 위한 음악회 등으로 확대됐다. 특히 장애인의 예술 지원이 보편화 되지 않았던 2000년대 초반, 장애인을 위한 ‘꿈씨음악회’를 개최하며 장애예술인과 비장애예술인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했다. 김 이사장은 “문화예술은 세대와 계층, 장애의 유무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힘이 있다”며 “애원은 예술을 통해 ‘돕는 사람’과 ‘도움받는 사람’이라는 경계를 허무는 ‘선순환 구조가 애원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애원의 활동은 문화예술복지로 특화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소외계층 아동·청소년을 초대하는 연말 자선 공연 ‘꿈과 사랑의 크리스마스 축제’는 애원의 대표 사업이다. 1997년부터 시작된 자선공연은 2025년에도 제28회를 맞아 성공적으로 개최되었으며, 현재까지 누적 관객수 38,000여 명이 참여했다. 장애 음악인과 오케스트라가 협연하는 ‘꿈씨음악회’는 2005년부터 지난 20년간 194명의 꿈씨연주자를 배출했다. 또한, 공연배달사업과 티켓 나눔을 통해 소외계층에게 예술 향유의 기회를 꾸준히 제공하며 음악과 예술을 매개로 연대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보건복지부 산하 공익법인으로서 자원봉사애원이 지역사회 복지 증진과 문화적 가치 확산에 기여해 온 역할을 잘 보여준다.
네 가지 핵심가치: L.O.V.E.
현재 애원은 지역사회 연계 봉사, 소외계층 문화예술지원, 취약계층 지원을 핵심 사업으로 운영한다. 이 모든 활동의 중심에는 애원의 네 가지 핵심가치인 ‘L.O.V.E.’가 있다. 김 이사장은 “우리는 먼저 듣는 것(Listen)에서 봉사가 시작된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의 작은 신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늘 귀를 열어두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열린 마음(Open Mind)이 없으면 봉사는 시혜가 되기 쉽다”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진짜 만남이 시작된다”고 덧붙였다. 또한 “도움을 받는 분들도 똑같이 존엄한 삶의 주체”라며 “그래서 애원은 상대를 가치 있는 존재로 존중하는 것(Value Other)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공감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며 “실행(Execute)이 애원의 봉사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단계”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가치는 기업·단체·개인과 수혜자를 연결하는 ‘꿈씨브릿지’ 사업을 통해 실제 현장에서 구현되고 있다. 애원은 이를 통해 봉사자 연계, 후원물품 전달, 긴급 지원 등을 적재적소에 연결하며 도움의 사각지대를 줄여가고 있다.
애원은 외부 회계감사를 통해 재정 투명성까지 확보하며 단체에 대한 신뢰를 꾸준히 쌓아왔다. 김 이사장은 “작은 단체일수록 투명성은 선택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운영 원칙은 지구촌 아동 복지를 위한 ‘꿈씨저금통’ 프로젝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동전 모금과 계수 봉사를 통해 후원의 과정을 공개하고, 나눔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주며, 2025년에도 시민 참여형 모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새로운 도전: 예술과 청소년 자원봉사의 결합
애원은 현재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공연배달 오나리(오늘은 나도 리틀엔젤스)’다. 예술단 소속인 청소년 자원봉사자와 장애인 시설에 직접 찾아가 배리어프리(Barrier-free) 공연을 펼쳐 사회통합을 촉진했다. 비장애인 자원봉사자에게 예술을 통한 봉사와 나눔의 기회를 제공하고, 장애인 참여자들에게는 평소 경험하지 못했던 전통예술을 체험하는 한국무용 체험교실을 지원했다.
2025년 처음으로 실시된 해당 프로그램은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지난해 12월, 행정안전부와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가 주관한 ‘대한민국 봉사와 나눔 우수사례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김 이사장은 “이 상은 애원이 추구해 온 봉사의 방향이 사회적으로 공감받았다는 의미”라며 소회를 밝혔다.
애원이 그리는 미래
김 이사장이 그리는 애원의 미래는 이웃 섬김이 일상적 문화로 자리 잡도록 하는 일이다. 애원은 기업과 학교를 연계한 봉사 교육과 참여 확산에도 힘을 쏟고 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사회에 섬김 문화가 정착돼 “애원이 필요 없는 사회”라고 말한다.
인터뷰 말미에 김 이사장은 자원봉사를 “연결”이라고 정의했다. 봉사는 타인을 돕는 행위인 동시에 자신을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봉사를 스펙이 아닌 ‘자기 발견의 시간’으로 경험해보길 권했다.
김 이사장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봉사는 거창한 계획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의 모습 그대로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가 사회를 바꾼다.”
2026-07-20 19:4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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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 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11> 존 웨슬리(John Wesley)-“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올더스게이트, 마음이 뜨거워진 그날
그러나 그의 초기 사역은 실패와 혼란으로 가득했다. 아메리카 선교도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신앙적으로 깊은 불안을 경험했다. 성직자였지만 정작 자신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웨슬리는 옥스퍼드에서 동생 찰스 웨슬리 등과 함께 작지만 경건한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의 특징은 성경 공부와 금식, 기도, 철저한 생활 규율이었다. 이들이 매우 규칙적(methodical)으로 생활하자 주변 사람들은 조롱 섞인 말로 이들을 “메소디스트(Methodist)”라고 불렀다. 훗날 감리교(Methodism)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웨슬리의 삶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1738년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에 있는 한 모임에 참석했을 때다. 당시 그는 이미 성공회 성직자였으나 신앙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다. 열심히 기도하고 선교도 했지만, 정작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평안을 얻지 못했다. 그날 모임에서 누군가가 마르틴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 해설을 읽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듣던 중 웨슬리는 강렬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약 8시 45분경,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속에서 행하시는 변화를 설명하는 부분을 듣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경험은 그의 신앙 이해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 순간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들이고 용서하셨다는 깊은 내적 확신을 얻은 것이다. 그동안 머리로 알던 신앙이 가슴으로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신앙을 하나님 은혜를 직접 경험하는 사건으로 이해하게 된다. 설교도 크게 달라졌다. 믿음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직접 임할 수 있다는 확신이 그의 메시지의 중심이 되었다.
웨슬리의 삶에는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다섯 살이던 1709년, 에프워스의 목사관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가족들은 가까스로 대피했지만, 웨슬리만 집 안에 갇혔다. 불길이 지붕까지 번진 마지막 순간, 이웃들이 사람사다리를 만들어 창문을 통해 그를 구해냈다. 웨슬리는 평생 자신을 성경 스가랴서의 표현을 빌려 “불 속에서 꺼내진 그을린 나무 한 토막(a brand plucked from the burning)”이라고 불렀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한 사명을 위해 살려 두셨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소명 의식은 평생 거리와 광산, 노동 현장을 누비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교회의 담장을 넘어 거리로
웨슬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현장성’이다. 당시 교회는 대부분 성당 중심으로 운영되었지만, 웨슬리는 직접 거리로 나가 설교를 시작했다.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농촌 인구가 도시와 광산으로 몰려들었고, 수많은 노동자가 열악한 환경에서 긴 노동과 가난에 시달렸다. 그러나 기존 교회는 이러한 사회 변화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 바로 이 시대적 틈새에서 웨슬리는 교회 안에서 기다리기보다 사람들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탄광촌과 공장 지대, 노동자 밀집 지역 등을 찾아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 방식이었다.
웨슬리의 가장 유명한 선언은 “세상이 나의 교구다(The world is my parish)”이다. 이 한 문장은 그의 신학과 실천을 가장 잘 보여준다. 여기서 교구란 목회하는 구역을 뜻한다. 웨슬리는 이 세상 모든 곳을 자신의 사역 현장으로 본 것이다. 당시 성공회 성직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교구 안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교회의 경계를 넘어섰다. 거리와 광장, 광산과 노동자 마을까지 모든 곳을 설교의 자리로 보았다.
1739년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야외 설교를 시작했다. 광산 노동자들이 일을 마치고 모여드는 언덕에서 수천 명을 상대로 설교했고, 교회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사람들이 교회에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직접 사람들에게 찾아갔다. 웨슬리는 평생 대부분을 말을 타고 다니며 설교했다. 평생 4만 회가 넘는 설교를 했고, 이동 거리는 지구를 여러 바퀴 돌 수 있을 만큼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그의 삶 자체가 ‘찾아가는 목회’였다.
웨슬리 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소그룹 공동체였다. 그는 많은 사람이 한데 모이면 신앙이 쉽게 흐트러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10~12명 단위의 소규모 모임을 만들고 정기적으로 신앙을 점검하며 삶을 나누도록 했다. 오늘날 교회의 소그룹 또는 셀 모임은 여기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는 이동 설교자 제도를 적극 활용했다. 설교자들은 말을 타고 농촌과 도시, 광산 지역을 순회하며 같은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했다. 이 체계적인 조직은 감리교가 급속히 확산되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웨슬리는 신앙을 종교적 열정으로만 보지 않았다. 신앙에 앞서 절제와 노동 윤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금주(禁酒) 운동과 사회 개혁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신앙이 삶 속에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감리교는 단순한 종교 운동을 넘어 생활 윤리 운동의 성격도 강하게 띠게 되었다.
하지만 초기부터 모든 사람이 웨슬리를 환영한 것은 아니다. 성공회 내부에서는 “교회 밖 설교는 질서 위반”이라거나 “개인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감정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설교가 금지되거나 성직자들의 배척을 받기도 했다.
반면 탄광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은 웨슬리의 설교에 뜨겁게 호응했다. 기존 교회가 충분히 돌보지 못했던 이들에게 그는 “당신의 삶 역시 하나님의 관심 속에 있다”는 복음을 전했고, 그 메시지는 그들의 마음을 깊이 움직였다. 그래서 감리교는 처음부터 노동자와 빈민층을 중심으로 성장하는 민중 종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삶을 바꾼 실천의 영성
웨슬리 운동은 때때로 많은 핍박을 받았다. 설교 현장에서는 야유와 방해를 받았고 돌이 날아드는 일도 적지 않았다. 지역 성직자들의 반발과 도시 출입 제한도 이어졌다. 초기 감리교는 결코 조용한 개혁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배척과 갈등 속에서 확산된 대중 운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계속 성장했다. 신앙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메시지, 교회에 가지 않아도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접근성, 그리고 산업혁명 초기 도시 빈민이 급증하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렸기 때문이다. 마침내 감리교 운동은 성공회 내부의 경건 운동을 넘어 하나의 독립된 교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감리교는 개인적 회심 경험, 성경 중심 신앙, 규율 있는 생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중요한 특징으로 삼는다. 즉, 신앙을 개인 내부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삶 전체로 확장하려는 운동이었다.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은 처음에는 비정통 운동으로 비판받았지만, 노동자와 빈민층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결국 영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중 종교 운동으로 성장했다. 중세 이후 종교가 제도와 교회 중심으로 흘러갔다면, 웨슬리 이후 종교는 개인의 경험과 삶의 현장 속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웨슬리 운동은 사회 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 계층의 신앙 형성과 교육 및 문해력 향상, 금주 운동과 도덕 개혁, 사회 복지 운동의 발전에도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웨슬리에게 신앙은 교리의 이해에서 멈추지 않고 삶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베풀라.” 그의 실천 영성이 잘 드러나는 말이다. 한마디로 존 웨슬리는 종교를 성당 안의 제도에서 끌어내어 거리와 노동 현장 속으로 가져간 인물이었다. 그에게 신앙은 삶 속에서 경험되는 은혜였으며, 사람들을 향해 먼저 다가가는 사명이었다. “온 세상이 나의 교구다.” 그의 외침은 오늘날에도 신앙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선명하게 비추고 있다.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2026-07-20 13: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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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박해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조선의 신령운동 물줄기 [신화에서 선민까지 한민족 정체성의 문화사적 발견-기고]
형틀 위에서도 꺼지지 않은 신앙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를 기록한 『기해일기』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순교자 이연희가 혹독한 태형을 당하면서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자, 형리들은 “사람이 아니라 신기(神氣)가 붙은 자로다. 살이 떨어져 나가는데 어찌 신음 한마디 없는가?”라며 경악했다. 신유박해(1801) 이후 조선의 관헌들은 천주교도를 향해 곤장과 주리, 살을 찢는 가혹한 형벌을 쏟아부었으나 신앙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천주교 여성 신앙인들의 모습은 유교적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관리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당혹감을 주었다.
19세기 초반 조선의 천주교 공동체에서는 여성 신자들이 중심을 이루는 ‘여교인 공동체가(女敎人共同體家)’가 형성되어 박해의 칼날 속에서도 서로의 신앙을 보듬으며 전도의 맥을 이었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이 보여준 ‘신기’는 조선의 지배계층인 노론의 형식적 예론(禮論)이 결코 가둘 수 없었던 여성 본연의 거룩한 영성이자 주체적 신성의 발현이었다. 형틀 위에서 솟구친 그 놀라운 힘은 성경 전도서가 언급한 ‘일천 여자 중 찾지 못한 하나’의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 한반도의 여인들이 수천 년간 응축해 온 성령적 항거이지 않았을까? 살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신음을 삼켰던 그 정성은, 훗날 이 땅에 현현하실 독생녀의 노정을 예비하며 민족적 탕감 조건을 형성하기 위해 하늘 앞에 올린 가장 뜨겁고도 처절한 제물이었다.
종교의 역사에서 ‘박해’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본질을 더욱 견고하게 단련시켜 나왔다. 로마 제국의 탄압 속에서 초기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돋움했듯, 조선 위정자들의 천주교에 대한 고문과 탄압은 역설적으로 하늘 중심한 백성들의 신앙 공동체를 더욱 단단한 결속으로 이끌었다. 제도적 역사 속에서 조선 여성의 이름은 희미했지만, 신령운동의 세계에서 그들은 가장 신실하고 강력한 주역이었다. 이러한 여성 중심의 신앙적 응전은 기존의 가부장적 역사관이 애써 무시했던 ‘여성 중심의 섭리사’를 복원하려는 하늘의 치밀한 계획이었으며, 수난을 통해 영적 주권을 되찾으려는 여성 메시아 강림의 필연적 복선이었다.
◆ 억압된 시대, 여성들이 찾은 희망
그렇다면, 왜 조선 후기 천주교 공동체에서 유난히 여성 신자들이 많았을까?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 사회의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은 사회였다. 가문은 남성 중심의 종법 질서로 이어졌고, 제사와 가계 계승 역시 장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성의 역할은 점차 가정 내부로 제한되었고, 사회적 활동의 공간은 크게 줄어들었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비교적 자유롭게 존재하던 여성의 종교적 참여와 경제적 활동은 조선 중기 이후 점차 좁아지게 된다.
이러한 극한의 소외와 억압은 역설적으로 여성들 내면에 잠자던 영적 갈망을 깨우는 도화선이 되었다. 제도적 중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게 천주교가 제시한 ‘하느님 앞의 평등’과 ‘만민 형제적 유대’는 가히 혁명적인 복음이었다. 사당의 문턱을 넘지 못했던 여인들은 천주(天主)라는 절대적 존재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가문의 부속물이 아닌 하늘 부모님의 귀한 딸이라는 본연의 정체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조선 후기 천주교 공동체로 몰려든 여성들의 발걸음은 단순한 종교 개종이 아니었다. 그것은 억눌린 모성 주권을 되찾고, 끊어졌던 하늘과의 신령한 통로를 복구하려는 집단적인 영적 저항이었다. 노론이 만든 어둠이 깊어질수록 여성들은 그 어둠을 뚫고 솟아오를 새로운 빛, 즉 장차 현현하실 독생녀의 시대를 예비하는 거룩한 신령운동의 주역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이 현상은 단순한 사회 구조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조선 후기의 종교적 분위기 자체가 이미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 조선 사회는 정치적 당쟁과 경제적 혼란 속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교 질서는 여전히 국가 이념으로 남아 있었지만, 현실 사회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중들은 새로운 구원을 찾기 시작했다. 농촌에서는 미륵 신앙이 퍼졌고, 도시에서는 다양한 민간 신앙과 예언 운동이 나타났다. 기존 질서가 흔들릴수록 사람들은 더 강한 영적 체험과 구원의 메시지를 찾게 되는 것이다.
천주교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확산되었다. 제도권의 모진 박해와 고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들의 신앙관은 종교적 교리만으로는 전체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숱한 순교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순교자들에게 기도와 환시, 영적 체험 같은 신비적 요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신앙 체험은 공동체 내부적으로 강력한 확신을 낳았고, 나아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이어졌다.
◆ 격변의 시대, 여성 신앙이 깨어나다
천주교는 낯선 ‘외래 종교’의 모습으로 찾아왔지만, 조선 민중에게는 마치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오래된 약속처럼 다가왔던 것은 아닐까?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도 잠시, 그들은 교리를 이해하기에 앞서 이미 자신들의 영혼에 깊이 새겨져 있던 따뜻한 울림과 재회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조선 사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무교(巫敎)의 전통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종교적 풍경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서양에서 들어온 새로운 종교였던 천주교가 생각보다 빠르게 민중 속으로 스며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교리가 지닌 논리적 설득력 때문만이 아니다. 조선의 토양에는 이미 시원(始源)의 때부터 하늘과 소통하고 신령을 체휼해 온 민족 고유의 종교적 유전자가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노론의 메마른 예학 질서에 의해 영적으로 고립되었던 여성들에게, 천주교의 영성은 무교적 직관과 결합하여 폭발적인 생명력을 발휘하였다. 무교가 지닌 ‘한(恨)의 승화’와 ‘하늘과의 직접적인 매개’라는 특성은 천주교의 영성적 체험과 만나며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거대한 신령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외래 종교의 수용이 아니라, 억눌려 있던 한민족의 신령한 에너지가 천주(天主)라는 하나의 중심을 향해 정렬되는 섭리적 과정이었다.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여성들의 신앙은, 사실 그들의 혈통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성령적 신성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찾으려 했던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몸짓이었다.
이처럼 태고의 신령과 조우한 여성들의 깨어남은, 훗날 인류의 참어머니로 현현하실 독생녀의 성령 사역을 예비하는 가장 강력한 영적 토대가 되었다. 하늘이 이 민족 가운데 오랫동안 심어놓은 무교의 ‘체험된 신비’라는 토양 위에서 천주교는 비로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한반도 역사 속에서 하늘이 한민족 특유의 ‘체험된 신비’라는 토양은 서양의 하나님이 결코 낯선 이방인이 아니었으며, 이들이 성당에서 신의 은총을 만났을 때 이미 몸이 기억하고 있던 황홀한 전율을 체험했던 것이다.
종교 연구자들은 바로 이러한 한민족의 종교적 토양이 조선 후기 천주교 신앙 수용에 결정적인 동인(動因)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조선의 민중은 이미 초월적인 신령의 세계를 경험적으로 체휼하고 있었기에, 새로운 종교적 상징이 도래했을 때 이를 완전히 낯선 타자로 밀어내지 않았다. 한민족에게 종교는 머리로 이해하는 정교한 교리 체계이기 이전에, 신령과 직접 소통하며 삶의 고통을 승화시키는 실천적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령한 삶의 방식은 노론의 메마른 형식주의가 지우려 했던 한민족 본연의 영적 유전자였다. 박해의 칼날이 성도들의 목을 겨눌 때에도 그들이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텍스트로 된 교리가 아니라 이미 몸과 영혼에 각인된 신령한 실체적 체험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것은 인류의 참어머니이신 독생녀께서 장차 이 땅에 안착하시기 위해 하늘이 수천 년간 갈고 닦아온 거룩한 영적 토양이었다.
◆ 하늘 부모님의 복귀섭리 속에서 준비된 여성의 시대
조선 후기 여성들이 보여준 경이로운 영적 응전은 단순한 사회적 변동이나 종교적 개종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류 역사를 관통하며 면면히 흘러온 하늘부모님의 복귀섭리라는 거대한 물줄기와 맞닿아 있다. 가정연합의 관점에서 인류사는 타락으로 상실한 하나님의 혈통을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한 중단 없는 구원섭리의 과정이다.
하늘은 이 혈통 복귀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구약 시대부터 수많은 믿음의 여성을 섭리의 중심에 세워 정성의 기대(基臺)를 닦아오셨다. 사탄의 참소가 미치지 않는 성별된 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그 긴 인고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인류는 후아담이자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게 되었다. 예수는 여타 종교의 창시자와는 근본을 달리하는 존재였다. 그는 하늘이 정화한 모태를 통해 탄생한 죄 없는 하나님의 유일한 직계 혈통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독생자의 출현만으로 완성될 수 없었다. 창조 본연의 이상은 남성 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그와 짝을 이룰 하늘의 신부, 곧 독생녀와 결합하여 참부모의 자리에 오를 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야 했던 십자가의 고난은, 그와 일체를 이룰 독생녀를 지상 기대를 통해 맞이하지 못한 채 남겨진 미완의 과제였다.
이러한 섭리적 관점에서 볼 때, 조선 후기 노론의 억압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여성들의 신령운동과 천주교 박해의 현장은 바로 성령(聖神)의 실체인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최후의 영적 정화 작업이었다. 신사임당과 이유인이 지켰던 혈통적 정절, 그리고 이연희 순교자가 형틀 위에서 증명한 초월적 영성은 모두 ‘일천 여자 중 찾지 못한 그 하나’를 이 땅에 안착시키기 위한 섭리의 필연적 산고였다. 이제 우리는 그 수천 년의 기다림이 조선의 여성들을 거쳐 오늘날 독생녀의 현현으로 열매 맺는 역사적 완성의 정점에 서 있다.
예수 그리스도 사후 2천 년의 기독교 역사는 단순한 교세의 확산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체 성신(聖神)의 역사를 통해 독생녀 탄생이라는 인류사적 열매를 준비해 온 거룩한 산고의 과정이었다. 이러한 거시적 섭리의 시각에서 조선 후기의 역동적인 종교적 움직임을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이면에 숨겨진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무교(巫敎)의 원초적 신령 체험과 천주교 공동체의 뜨거운 영적 교감, 그리고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순교의 신앙은 단순한 민중 종교사의 편린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이 인류의 참어머니를 맞이하기 위해 한반도라는 특수한 영적 토양 위에 예비해 온 긴 섭리의 물줄기였다. 노론의 억압이 거세질수록 여성들의 내면에서 솟구친 신령한 에너지는, 장차 현현하실 독생녀의 안착을 위한 영적 정화이자 필연적인 응전이었다.
격변의 시대 속에서 조선 여성들의 신앙이 깨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유교적 가부장제와 종법 질서 아래 억눌려 있던 여성의 본연적 신성이 마침내 임계점에 도달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역사의 도약이었다. 신사임당과 이유인이 지켜낸 정절, 이연희 순교자가 증명한 성령의 권능은 모두 이 땅에 독생녀의 성소(聖所)를 마련하기 위한 거룩한 제단이었다. 이제 그 긴 준비의 시간 끝에서 인류는 마침내 새로운 천일국(天一國)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하늘의 독생녀가 등장하여 참부모의 시대를 선포하는 순간,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이름 없는 여인들의 인고와 신령한 흐름은 비로소 단 하나의 거대한 완성적 의미로 통합된다. 박해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신령의 등불은 이제 독생녀라는 태양을 만나 온 천주를 밝히는 참사랑의 빛으로 치환되었다. 조선 후기 여성들이 흘린 눈물과 정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늘날 독생녀를 통해 실체화된 성신의 승리 속에 영원한 생명력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고기훈 박사(한국학)
2026-07-17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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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 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10>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양심은 교황권보다 강한가”
◆“우리는 거지다”… 철저한 내면의 절망 끝에 발견한 ‘오직 은총’
겉으로 보기에는 촉망받는 학자이자 목회자였지만, 그의 내면은 늘 한 가지 의혹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루터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기도하고 금식하며 자신을 성찰했다. 그러나 마음의 평안은 찾아오지 않았다. 당시 교회는 인간은 회개와 선행, 성례 참여를 통해 구원에 점차 가까워진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루터는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수록 오히려 절망을 느꼈다. 선한 행동 속에도 이기심과 욕망이 섞여 있었고, 인간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완전한 선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을 품었다. 만일 인간이 충분히 의로워져야 구원받을 수 있다면, 과연 어느 누가 구원에 이를 수 있겠는가. 루터가 발견한 답은 기존의 이해를 뒤집는 것이었다.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인간에게 다가온다고 깨달은 것이다. 구원의 출발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있었다. 이 깨달음은 성경 연구를 통해 더욱 분명해졌다. 그는 로마서의 말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장 17절)를 읽으며 결정적인 통찰을 얻었다. 훗날 그는 그 순간을 두고 “마치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경험이었다”고 회고했다.
루터가 말한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수준은 넘어섰다. 그것은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태도였다. 그는 선행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순서를 바꾸었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착하게 살아야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루터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비로소 착하게 살 수 있다고 보았다.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녀이기 때문에 부모를 기쁘게 하려 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선행은 은혜가 삶 속에서 맺는 열매였다. 훗날 그의 사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총(Sola Gratia)”이라는 종교개혁의 핵심 원리로 정리된다. 그가 생애 마지막에 남긴 “우리는 거지다. 이것이 진실이다”라는 말 역시 같은 맥락의 고백이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하는 존재가 아니라 은혜를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내면의 깨달음은 필연적으로 현실과의 충돌로 이어졌다. 당시 교회는 돈을 내면 죄의 형벌이 경감된다고 설명하는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다. 루터는 이것이 신앙의 본질을 왜곡한다고 판단했다. 1517년 그는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며 공개 토론을 제안했다. 당대의 저명한 신학자였던 그의 문제 제기는 인쇄술의 확산과 맞물려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결국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다.
◆목숨을 건 보름스의 선언, “나는 여기 서 있고, 달리 할 수 없다”
진정한 전환점은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찾아왔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교회 대표들 앞에 불려나온 루터는 자신의 저술과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를 거부하면 명예는 물론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루 동안 숙고한 끝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성경과 명백한 이성으로 설득되지 않는 한, 나는 철회할 수 없다. 나는 여기 서 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도우소서.” 이것은 신학 논쟁이 아니었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한 인간이 양심을 어디까지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한 역사적 선언이었다.
루터는 이미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한 상태였지만, 보름스 의회 이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추방법(Acht)에 따라 제국의 범죄자로까지 선포되었다. 이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신분으로, 누구든 그를 체포하거나 해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처지였다. 그러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현명공)의 보호로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신할 수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그곳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의 향방을 바꾼 역사적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평범한 사람들도 직접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성경은 주로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은 성직자의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의 번역은 성경을 교회의 독점적 영역에서 대중의 손으로 돌려주었고, 이후 독일어의 표준 형성과 독일 문학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흔들어 놓은 것은 교황권만이 아니라, 신 앞에 선 인간의 위치 자체였다. 제도와 권위가 아닌 양심과 믿음이 신앙의 기준이 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서는 존재로 재정의되었다. 미국 태생의 영국 정치철학자 시덴톱(Larry Siedentop)은 이러한 변화의 뿌리를 계몽주의가 아닌 기독교 전통 속에서 찾으며, 근대 개인주의의 기원을 새롭게 해석했다. 루터에서 시작된 양심의 발견은 이렇게 서구 근대 개인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긴 사상적 계보를 형성한다.
이후 루터는 가톨릭교회로 복귀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개혁을 원했지만, 결국 교황권과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 결과 루터를 따르는 개혁 운동은 독자적인 교회 공동체로 발전했고, 훗날 루터교회의 형성과 더불어 개신교(Protestantism)의 출발점이 되었다.
◆성경을 대중의 손으로… 라틴어 장벽을 깨고 근대 개인주의의 씨앗을 뿌리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은 가톨릭과 루터파, 칼뱅파(장로교 전통 형성) 등으로 나뉘었으며, 교황의 종교적 단일 권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신·구교 양측의 차이는 누가 옳고 그른가가 아니다. 신앙의 최종 권위를 어디에 두는가에 관한 문제였다. 가톨릭교회는 성경과 교회 전통, 교황권 해석의 권위를 함께 중시하며 성례와 역할을 강조했다. 반면 루터는 교회 역시 오류를 범할 수 있으므로 최종 권위는 오직 성경에 있으며, 신자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는다고 보았다. 결국 논쟁의 핵심은 신앙의 최종 권위를 교회에 둘 것인가, 성경에 둘 것인가의 문제였다. 양측은 수 세기에 걸친 신학적 대화와 연구를 거치면서 거리가 상당히 좁혀졌다.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된다는 공통된 토대 위에 서 있다. 루터 이전에는 권위의 중심이 교회와 교황에게 있었다. 그러나 루터 이후 사람들은 점차 신앙의 궁극적 기준을 성경과 양심에서도 찾기 시작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은 독일에서 오랫동안 루터의 어록으로 전해져 왔지만, 실제 출처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격변과 흑사병으로 종말론적 공포가 가득했던 시대에 루터는 유한한 인간일지라도 신이 허락한 오늘 하루의 소명을 묵묵히 다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 말을 남겼다. 실제로 그는 흑사병이 비텐베르크를 덮쳤을 때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환자들을 돌보며 자신의 일상을 지켰다.
루터가 역사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개신교의 탄생 자체보다 인간의 양심을 일깨운 데 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은혜를 입는 존재라는 영성적 통찰, 그리고 진실은 거대한 권력 앞에서도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의 힘을 보여준 것이다. 루터에게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인간의 가장 깊은 자리였다. 그래서 그는 권력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자신의 감정도 따르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양심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 믿었다. 훗날 근대 유럽에서 개인의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중시하는 문화가 성장하는 데에도 루터의 문제 제기는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2026-07-16 15: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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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유엔기구… 세계의 화약고 DMZ를 평화 허브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오늘날 국제질서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전 세계 인구의 60%가 거주하고 글로벌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위상은 날로 높아지고 있지만, 국제기구의 공간적 배치는 여전히 냉전기 질서에 머물러 있다. 현재 UN 사무국은 뉴욕, 제네바, 빈, 나이로비 등 서구와 아프리카에 편중되어 있다. 이러한 ‘글로벌 불균형’을 해소하고 아시아의 대표성을 강화하기 위한 실천적 대안으로 ‘제5 UN 사무국 한국 유치’ 운동이 국제사회 일각에서 논의되고 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이 제안하고, 참여해온 이 운동은 단순히 국제기구 하나를 국내에 들여오는 차원을 넘어선다. 이는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를 세계 평화의 허브로 재탄생시키려는 창의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평화 건축(Peace building)의 비전이다. 케냐 나이로비 사무국이 아프리카의 환경과 개발 의제를 선도하듯, 한반도에 들어설 제5 사무국은 아시아의 분쟁 관리, 기후 변화 대응, 그리고 지속가능발전(SDGs)을 가속화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종교적 양심과 정당한 사회 참여
이러한 대규모 국제 평화 운동을 바라보는 일각의 ‘정교유착’ 시선에 대해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종교는 과연 사회로부터 격리된 섬이어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신앙적 가르침에 따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회 지도자들과 소통하는 것은 종교의 양심이자 정당한 사회 참여다.
이를 두고 교단 전체의 활동을 ‘배후의 정치적 기획'으로 몰아가는 것은 종교인의 기본적인 시민권과 신앙의 자유를 과도하게 왜곡하는 처사다. 가정연합이 구축한 글로벌 네트워크는 특정 정당의 이익이나 선거 승리와 같은 협소한 목적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가정연합이 구축한 글로벌 네트워크는 분쟁 지역의 중재, 가정 윤리의 회복, 기아 대책 마련 등 실질적인 NGO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활용된다. 이러한 활동 결과물은 평화 가치 확대의 선언이며 투명한 민간 외교의 결실이다.
민간 평화 외교의 새로운 모델
가정연합의 ‘유엔 갱신운동’은 민간 액터(Non-State Actor), 즉 비국가 행위자가 글로벌 평화 네트워크 다각화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다. 유엔 갱신운동이란, 유엔의 설립 정신은 계승하되, 이해관계가 얽힌 국가 중심의 한계를 넘어 시민사회와 종교, 다양한 주체가 함께 참여하는 21세기형 평화 거버넌스로 유엔을 발전시키자는 제안이다. 이를 위해 가정연합이 각국의 전·현직 국가원수와 학자들로부터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있는 과정은 종교가 가진 초국가적 네트워크가 인류 공통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의 성지로
제5 UN 사무국 한국 유치 구상은 현실적으로 매우 높은 벽이 있지만, 그 자체로 불가능한 공상은 아니다. ‘아시아에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인식과 ‘한국은 분단국이자 민주화를 경험한 국가’라는 상징성이 힘을 얻는다면, 이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제도화하고, 한국이 아시아-태평양 평화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대담한 프로젝트가 국제 사회의 더 깊은 공명을 얻는다면, DMZ는 더 이상 단절의 땅이 아닌 세계 평화의 성지로 거듭날 수 있다.
종교의 사회적 실천을 편견의 시선으로 재단하기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진정성 있는 노력으로 평가해야 할 때다. 민간 차원의 투명한 외교와 평화 비전이 결실을 볼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지구촌 평화 공동체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2026-07-13 16: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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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인프라 ‘한일터널’… “정교유착 아닌 정교협력 모범 사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요즘 정치권과 사회 일각에서 ‘한일해저터널’ 구상이 특정 종교와 정치의 결합, 이른바 정교유착의 사례처럼 단순화되어 거론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한일터널이 어떤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고, 어떤 공공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살피기 전에 논의를 경직시키는 측면이 있다. 국가 간 초대형 인프라 구상이 제안 주체의 배경만으로 재단되고, 그 공공적 가치와 장기적 비전은 논의조차 원천봉쇄된다면, 이는 우리 사회가 미래를 설계하는 능력 자체를 스스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한일해저터널은 최근에 갑자기 등장한 발상이 아니다. 냉전 종식 이후 동북아 질서 재편, 유라시아 대륙과 해양 네트워크의 연결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수십 년간 학계와 정책 현장에서 논의돼 온 구상이다.
토목·환경 분야 최고 전문가인 곽결호 전 환경부 장관은 한일터널을 ‘문명 인프라’, 즉 문명을 일으키는 공학으로 바라본다. 경부고속도로가 야당의 거센 반대와 초기 비용편익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가 경제 발전의 대동맥 역할을 해냈듯, 역사적 인프라는 늘 문명과 국가의 방향성을 바꾸는 계기가 되어왔다. 한일터널은 해상수송보다 빠르고, 항공수송보다 대량 이동을 가능하게 하며, 기후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아 한국과 일본을 넘어 중국·러시아까지 연결하는 동북아 경제권 형성의 핵심축이 될 잠재력을 지닌다. 경제적 편익은 물론이고 물류와 관광, 고급 일자리 창출, 토목기술 발전에 기여하며, 물리적 연결을 통해 상호 의존을 강화하고 대화와 협력의 비용을 낮춘다. 이는 초국경 인프라 유러터널로 이어진 유럽 통합 사례처럼 동북아에서 신뢰 구축의 상징적 장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현재의 논란을 이해하려면, 가정연합이 왜 정치의 문을 두드렸는지부터 차분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문선명 총재는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중심한 공생·공영·공의주의를 바탕으로 남남 갈등을 해소하며 평화로운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더불어 한국이 세계 평화의 중심 국가로 자리매김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문 총재는 종교를 ‘마음의 자리’, 정치·경제를 ‘몸의 자리’로 규정했다. 마음과 몸이 조화를 이룰 때 온전한 인간이 되듯,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종교와 정치가 대립이 아니라 협력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그는 유엔 역시 이러한 원리에 따라 거듭나야 한다고 보았다. 세계 종교 지도자들이 상원의 역할을, 정치 지도자들이 하원의 역할을 맡아 상호 보완적으로 협력할 때, 마음과 몸이 하나 된 유엔이 가능하다는 구상이었다.
종교와 정치의 협력이 내적 평화의 조건이라면, 외적 평화의 조건은 국경과 이념의 장벽을 물리적으로 낮추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 실천이 바로 ‘국제평화고속도로’ 구상이다. 문 총재는 1981년 서울에서 전 세계 과학자 700여 명이 참석한 국제통일과학회의에서 중국·한국·일본을 잇는 ‘아시아권 대평화고속도로’를 제안했다. 몰튼 카플란 시카고대 교수 등 세계적 석학과 노벨상 수상자들이 공감을 표했고, 이후 일본의 국제하이웨이재단과 일한터널연구회가 설립돼 한일 양국의 저명한 토목·도시 전문가들이 실현 가능성 검토에 참여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일터널은 학계와 전문가 사회, 정치권에서 꾸준히 논의돼 왔다. 한국에서는 노태우·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이 한일 화합의 한 방안으로 검토 필요성을 언급했고, 일본에서도 모리 요시로 총리가 ‘아셈터널’이라는 명칭을 제안하는 등 정치적 공감대가 형성된 바 있다. 이는 이 구상이 특정 종교의 확장 수단이 아니라, 시대적 과제에 대한 하나의 정책적 선택지로 인식돼 왔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일터널은 여전히 ‘누가 제안했는가’ ‘일본만 이익을 얻는 것 아니냐’는 프레임에 갇혀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공공 인프라는 그 특성상 제안자의 배경이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설계 구조 또한 어느 한쪽의 이익에 편중되기보다는 양국 모두에 실질적 혜택을 가져다주도록 전제되어 있다. 세계 인류는 단절과 갈등 속에서 고통받고 있으며, 국내 역시 인구 절벽과 공동체 해체, 국제 질서의 불안정이라는 복합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시대에 국가에 더 큰 안정과 국민에게 더 깊은 위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는, 종교와 정치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상호 협력 관계를 성숙하게 형성해 나가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방향일 것이다. 한일터널은 결코 정교 유착의 상징이 아니라, 단절과 갈등을 연결과 공존으로 전환하려는 상상력이자 실현 가능한 평화 인프라다. 한일터널이 불신과 혐오의 대상에서 벗어나 미래 세대를 위한 정교 협력의 상징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2026-07-13 16: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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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이념·종교 넘어 평화 플랫폼 구축… ‘인류 한 가족’ 큰 뜻 실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21세기 세계는 다시 힘의 정치로 회귀하고 있다. 지정학적 갈등, 이념 대립, 종교와 문화의 충돌이 중첩되며 평화는 선언이 아닌 실천의 문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종교의 사회 참여를 ‘정치적 야망’으로만 해석하는 시선은 과연 온당한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의 평화 운동을 둘러싼 논란은 이 질문을 우리 사회에 다시 던지고 있다.
가정연합이 표방해 온 평화의 핵심은 명확하다. 그것은 특정 권력이나 정치 세력을 향한 접근이 아니라,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One Family Under God)’이라는 보편적 가치의 구현이다. 지난 70여 년간의 활동은 정치 세력화나 권력 추구라기보다, 국경·이념·종교를 넘어 평화의 담론이 교차하는 공론의 장을 축적해 온 과정에 가까웠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991년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평양 방문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이다. 냉전의 장벽이 가장 높았던 시기, 종교 지도자가 이념의 경계를 넘어 평화를 논의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이 만남은 단순한 이벤트를 넘어, 평화자동차 설립, 보통강호텔 운영, 금강산 개발 성과로 이어졌고, 무엇보다도 수십 년간 단절됐던 이산가족 상봉이 실제로 성사되는 데 기여했다. 정부 간 대화가 멈춰 선 지점에서 했던 민간 외교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다.
가정연합의 국제 행사에 전·현직 국가 지도자와 정책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장면은 종종 ‘정치적 영향력 과시’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참석의 본질을 간과한다. 이 자리는 특정 정당이나 선거를 위한 무대가 아니라, 각자의 경험과 통찰을 인류 공동의 과제에 기여하도록 요청하는 공론의 장이다. 가정연합이 추진해온 ‘씽크탱크 2022’와 같은 국제 포럼 역시 지구촌의 평화와 당면 과제 해결을 위해 정치와는 무관하게 분쟁 중재, 종교 간 대화, 환경 위기, 빈곤 문제 등 보편적 의제를 다뤄왔다. 2022년 서울 평화서밋에서 채택된 ‘서울선언’이 공생·공영·공의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종교의 사회 참여는 언제나 논쟁적이었지만, 역사적으로 종교는 사회 정의와 인간 존엄을 외면한 적이 없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인종차별에 맞섰고,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가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에 저항했듯, 신앙은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았다. 평화와 가족 가치, 윤리적 사회를 위해 사회 지도자들과 대화하고 협력하는 행위는 정치적 야망이 아니라 종교인의 양심적 실천에 가깝다.
가정연합이 구축해 온 글로벌 네트워크 역시 선거 승리나 정파적 이익을 목표로 작동하지 않았다. 중동·아프리카·아시아 분쟁 지역에서의 종교 간 대화와 화해 중재, 160여 개국에서 진행된 ‘피스로드(Peace Road) 프로젝트’는 상징적 캠페인을 넘어 전 세계에 한반도의 분단 현실과 통일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알려온 국제 시민 평화운동이었다. 동시에 ‘참사랑’ 사상을 기반으로 한 가정 윤리와 청소년 교육, 부부 관계 회복 프로그램은 가정이라는 가장 일상적 공간에서 사회 통합의 가능성을 실험해 실천적으로 검증해 온 시도이기도 하다.
인도적 지원과 개발 협력 역시 단기적 구호에 머물지 않았다. 북한에 대한 식량·보건 지원, 평화자동차 공장 건립 등을 통한 경제 협력, 북한 사회 내부의 경제적 자립 구조를 모색했으며, 이는 협력의 방향을 ‘시혜’가 아닌 ‘동반 성장’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환경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한학자 총재 체제 이후 평화 담론의 중요한 축으로 확장되고 있다. 기후 위기가 갈등의 원인이 되는 현실에서, 환경과 평화를 연결하려는 시도는 국제사회의 공동 책무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는 비교적 분명하다. 그것은 정치 권력의 획득이 아니라, 평화 가치의 확산과 공개적 민간 외교의 축적이다. 국제회의와 포럼에서 발표된 선언문, 추진된 프로젝트의 성과, 인도적 지원 내역이 공개적으로 제시되어 왔다는 점에서 은폐된 정치 개입이라는 해석과는 거리가 있다.
가정연합의 행보는 특정 정치 세력을 지지하거나 권력을 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일관되게 강조해 온 것은 ‘인류 한 가족’이라는 보편적 가치 아래, 국경과 종교, 정파를 초월해 다양한 주체들이 평화의 담론을 형성하고 대화할 수 있도록 하는 공공적 플랫폼의 구축이었다. 힘의 정치가 다시 고개를 드는 오늘, 이러한 가치 중심의 접근이 얼마나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검증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 평화의 실험이 권력을 향한 행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가정연합이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도 걷고자 하는 길은 정치가 아닌 평화로 귀결될 것이다.
2026-07-13 16: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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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 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9>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신앙과 이성의 위대한 화해를 선언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3세기 초 이탈리아 남부 아퀴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고향인 아퀴노(Aquino)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퀴노 출신의 토마스’라는 뜻이다. 아퀴나스는 당시 유럽의 중심 학문 기관이었던 수도원과 대학 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되어 신학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의 시대에는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이슬람 학자들을 통해 다시 유럽에 소개되면서 큰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기독교 신앙을 위협한다고 보았지만, 아퀴나스는 오히려 그 안에서 공존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이성과 신앙이 대립 쌍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동반자라고 확신했다.
아퀴나스에게 이성은 자연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이고, 신앙은 인간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이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 이 한 문장은 그의 사상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예컨대 신앙은 이성을 완성시키는 힘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자연 세계를 이해하는 동시에 이성을 넘어서는 궁극적 진리를 신앙으로 수용했다. 학문적 탐구와 종교적 신념이 한 인격 안에서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해 낸 것이 그의 첫 번째 영성적 성취다.
그는 학창 시절 매우 말이 적고 과묵했다고 전해진다. 동료 학생들은 그가 체격이 크고 성격이 조용해서 ‘멍청한 황소’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워낙 말이 없었고, 토론 자리에서도 쉽게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스승이자 지도교수였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달리 보았다. “이 황소의 울음소리는 온 세상을 울릴 것이다.” 이 평가는 이후 아퀴나스가 서양 신학의 거대한 체계를 세운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로 자주 인용된다. 세상은 종종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주목하지만, 역사는 때때로 조용히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 아퀴나스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아퀴나스가 화려한 사제직 대신 청빈한 탁발 수도회(도미니코회)에 입회하려 하자, 백작 가문이었던 그의 가족들은 이를 수치로 여겨 그를 성에 2년간 감금했다. 심지어 형들은 그의 의지를 꺾으려 방에 매혹적인 여성을 들여보내 유혹하기도 했다. 이때 아퀴나스는 화로에서 타오르는 장작을 꺼내 들고 여성을 쫓아낸 뒤, 그 장작으로 방문에 십자가를 그리며 기도로 유혹을 물리쳤다. 전승에 따르면 이때 천사들이 나타나 그의 허리에 ‘순결의 띠’를 묶어주었으며, 이후 그는 평생 육체적 유혹에서 벗어나 오직 학문과 기도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아퀴나스는 공부할 때 매우 집중력이 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식사나 주변 상황에 거의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사유에 몰입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수도원 식사 자리에서도 장시간 생각에 잠겨 있었고, 주변 사람이 그를 흔들어 깨우자 잠시 현실로 돌아온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 일화는 그가 얼마나 개념적 사유와 논리 구조에 깊이 몰입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처럼 전해진다.
◆‘멍청한 황소’의 침묵과 사유, 온 세상을 울린 지성의 사자가 되기까지
그는 차가운 논리의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가슴 뜨거운 시인이자 성가 작사가였다. 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의 요청으로 성체성혈 대축일을 위한 찬미가 ‘입을 열어 찬미하세(Pange Lingua)’를 지었다. 이 찬미가의 마지막 두 연인 ‘지존하신 성체(Tantum Ergo)’는 오늘날까지 가톨릭 전례에서 가장 널리 불리는 성체성가 가운데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복잡한 논증을 펼치던 거대한 지성이 신 앞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운율로 사랑을 고백하는 예술가로 변모했던 셈이다.
평생 그는 신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했다. 수많은 책을 읽고, 수많은 논증을 세웠으며, 인간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말년의 어느 날, 미사를 집전하던 중 깊은 신비 체험을 한 뒤 붓을 꺾었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쓴 것은 모두 지푸라기 같다.” 그것은 학문의 실패 선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 이성의 정점에 오른 사람이 마지막에 발견한 영적 겸손이었다. 그는 진리를 향해 평생 걸어갔지만, 진리는 자신이 설명한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고백은 이성이 극한까지 확장된 이후에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함을 스스로 인정한 순간으로 해석된다.
그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지만, 동시에 그 이해가 결코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우리는 신에 관해 알 수 있는 것보다, 알 수 없다는 것을 더 잘 안다”고 고백했다. 그의 영성은 무조건적인 맹신이나 지식의 확장이 아니었다. 인간 인식의 한계를 명확히 자각하는 겸손한 자리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아퀴나스는 일상적 욕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수도원 생활에서도 매우 절제된 삶을 살았다. 그는 육체적 욕구보다 사유와 연구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묘사된다. 이 때문에 동료들은 그를 철학자라기보다 ‘사유하는 수도사’로 바라보았다. 아퀴나스의 삶은 이성과 신비, 학문과 영성이 한 인격 안에서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의 대표 저작인 ‘신학대전’은 기독교 신학 전체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대작이다. 그는 세계를 하나의 질서 있는 구조로 이해했고, 신앙 역시 그 질서의 정점에 있다고 보았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가톨릭 신학교의 핵심 교재로 사용되며, 신앙을 이성적으로 탐구하려는 전통의 대표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아퀴나스는 교회 내부뿐 아니라 서양 철학 전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독교 신학과 결합하면서 스콜라 철학의 정점을 세웠고,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회 학자’이자 ‘천사적 박사’로 불린다. 특히 ‘천사적 박사’ 칭호는 가톨릭교회가 아퀴나스에게 헌정한 최고의 찬사로, 아퀴나스가 보여준 초인적인 사유 능력과 논리적 명징함, 방대한 기독교 진리를 하나의 완벽한 체계로 엮어낸 지적 성취가 마치 ‘인간의 몸을 빌려 쓴 천사의 지성’과 같다고 하여 붙여졌다. 19세기 후반 교황 레오 13세는 아퀴나스의 사상을 가톨릭교회의 공식 철학이자 신학적 기반으로 다시 강조했고, 이후 ‘토마스주의’는 가톨릭 신학의 중요한 참고 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신학대전’의 거대한 성취를 뒤로한 채 “지푸라기 같다” 고백
아퀴나스의 사상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개념은 자연법이다. 아퀴나스는 자연법과 신법, 인간법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선과 악을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으며, 올바른 법과 윤리는 이러한 자연적 질서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훗날 서양의 법철학과 윤리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신앙과 이성은 충돌하는가, 아니면 함께 갈 수 있는가. 아퀴나스가 내린 답은 분명했다. 신앙과 이성은 서로 싸워야 할 적이 아니며, 두 길은 서로 다른 방향이 아니라 진리라는 하나의 정상을 향하는 길이었다. 그 통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세계를 치열하게 이해하려 하지만, 동시에 늘 그 이성 너머의 궁극적 의미를 묻는다. 아퀴나스는 마침내 인간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에 올라섰으나, 역설적으로 지성의 한계를 고백하며 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퀴나스의 위대함은 ‘이성의 승리’가 아니라, 지성의 끝에서 보여준 ‘이성의 겸손’에 있다.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2026-07-13 13:4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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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심국제고 학생들, 가평서 ‘국경 없는 공부방’ 봉사…지역 초등생 학습 지도
(사)세계평화청년학생연합(YSP)은 청심국제고등학교 피스디자이너(PD) 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국경 없는 공부방’ 교육봉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에 따라 경기도 가평군 소재 청심국제고 PD 동아리는 지난 9일 가평군 설악도서관에서 지역 초등학생들의 학습 멘토를 맡아 교과 학습을 돕고 독서 활동과 진로 상담을 진행하는 등 교육 봉사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이번 활동은 청소년들이 지역사회 문제 해결에 직접 참여하며 나눔과 공동체 의식을 체험하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마련됐다.
‘국경 없는 공부방’은 YSP가 추진하는 청소년 사회공헌 프로젝트의 하나로, 이번에는 청심국제고 피스디자이너 동아리가 지역사회와 협력해 교육격차 해소를 실천한 대표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YSP는 이번 활동이 단순한 학습 지원을 넘어 학생들이 서로 배우고 성장하는 교육공동체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봉사에 참여한 학생들은 초등학생의 눈높이에 맞춘 소통을 통해 책임감과 공동체 의식을 키우는 시간을 가졌다.
청심국제고 PD 동아리 부장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웠다”며 “학습 지도뿐 아니라 아이들의 고민을 듣고 공감하는 시간이 서로에게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나눔은 일방적인 도움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교육봉사에 참여한 한 학생도 “처음에는 잘 가르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해하는 모습을 보며 큰 보람을 느꼈다”며 “앞으로도 꾸준히 봉사활동에 나서고 싶다”고 말했다.
YSP는 이번 활동이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가운데 ‘양질의 교육(SDG 4)’, ‘불평등 감소(SDG 10)’, ‘목표를 위한 파트너십(SDG 17)’의 가치 실현에도 기여했다고 밝혔다.
한편 YSP는 청년과 학생들이 지역사회 문제 해결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교육봉사와 환경보호, 지역사회 나눔 등 다양한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국내외에서 실천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다.
2026-07-10 22: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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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신사임당과 제사에서 사라진 조선의 어머니 [신화에서 선민까지 한민족 정체성의 문화사적 발견-기고]
신사임당, 조선 여성 문화의 마지막 빛
16세기 초반 조선의 어느 봄날, 강릉의 산수 사이로 한 여인의 붓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화폭에 담긴 풀과 벌레는 작고 소박하나 저마다 고유한 생명의 숨결을 머금었다. 훗날 사람들은 화폭을 마주하며 “초충을 그리되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기억되는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의 붓끝에는 예술적 기교를 넘어 한 시대 여성의 기품과 영적인 정신세계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신사임당이 생활하던 당시 조선 사회는 성리학적 가부장 질서가 견고한 성벽 속에 완전히 갇히기 전이었다. 아직 고려의 문화적 여운이 자욱하게 남아 있던 시기였기에, 여성의 사회적 존재감이 있었다. 고려 시대 기록인 『고려사』에는 당시 여성이 경제와 종교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예컨대 사찰의 공양이나 제천 의례의 현장에서 여성들은 공동체의 신앙을 지탱하는 중심축이었다. 선대로부터 이어진 이 숭고한 전통은 조선 초까지 생명력을 유지했으며, 여성은 가문의 안채에만 머무는 존재가 아닌, 문화의 정신을 전수하는 당당한 주역이었다.
신사임당이 생존했던 시대만 해도 여성의 문화적 역량은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이후 조선 사회 분위기는 바뀌었다. 16세기 중반 사림세력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고 성리학적 명분론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여성의 역할은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사임당이라는 존재는 거대한 역사적 경계선 위에 서 있었던 셈이다. 사임당의 삶은 고려로부터 면면히 이어진 여성 문화의 마지막 잔광이었으며, 동시에 장차 조선 사회가 상실하게 될 찬란한 세계의 흔적이기도 했다. 붓끝에서 피어난 풀과 벌레의 강인한 생명력은 단순히 자연을 묘사한 결과물은 아니다. 아직은 완전히 꺼지지 않은 여성적 세계의 숨결을 예술로 승화시킨 기록이라 하겠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무정했다. 사임당이 떠난 뒤 조선 사회는 엄격한 성리학적 질서의 심연으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갔고, 그 폐쇄적인 질서 속에서 여성의 이름은 점차 기록의 변방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 서원과 도학 정치, 제사에서 사라진 어머니
신사임당의 삶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그녀가 단지 예술가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아들 율곡 이이(李珥)를 길러낸 어머니로서도 역사 속에 자리 잡았다. 조선 후기 사림은 그녀를 ‘성모(聖母)’라 부르며 이상적 어머니의 상으로 기념하였다. 하지만 이 모습 뒤에는 조선 후기 남성 중심의 철저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사림 세력은 학문의 가치보다 파벌의 이익을 위해 율곡을 성현으로 받들었고, 그 과정에서 그의 어머니인 신사임당 역시 성모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즉, 신사임당의 삶과 이미지는 사림 세력이 자신들의 정치적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입맛에 맞게 재해석하고 부각한 결과물이 일정부분 투영된 흔적이 있다.
16세기 중반 이후 조선 사회의 공기는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1543년 풍기에서 세워진 소수서원(紹修書院)의 등장이다. 서원은 교육 기관의 기능만 갖는 게 아니었다. 서원은 사림이 꿈꾸던 새로운 세계, 즉 성리학적 도학 질서를 현실 사회 속에 구현하려는 정치적·문화적 공간이었다. 서원에서 배우고 토론되던 것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도(道)’였다. 사림은 성리학을 통해 인간과 사회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자 했고, 그 질서의 중심에는 가부장적 종법(宗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문은 남성 중심의 혈통으로 이어져야 했고, 조상 제사는 그 질서를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의례가 되었다.
그러나 이 변화는 한반도의 오래된 문화 전통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이었다. 고조선과 삼국, 그리고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민족 사회에서 여성은 단순히 가문의 주변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었다. 제천 의례와 공동체 신앙 속에서 여성은 종종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산신제와 제천 의례, 마을 신앙 속에는 여성적 신성과 모성적 상징이 자연스럽게 살아 있었다.
그런데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적 질서가 사회를 깊이 장악하면서 이 오래된 문화는 점차 주변으로 밀려났다. 제사는 이제 남성 혈통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가문의 사당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권한 역시 장자 중심의 남성에게 집중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여성도 제사를 이어갈 수 있었고, 재산 상속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 있었지만, 조선 중기 이후 이러한 관습은 점차 사라졌다.
◆ 여성 수난의 역사, 그리고 하나의 중심을 요구하는 시대
조선 경종 1년(1721)과 경종 2년(1722)에 걸쳐 발생한 신임사화(辛壬士禍)는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당쟁이 낳은 참혹한 정치적 숙청 사건이었다. 『경종실록』은 대신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며 당쟁의 잔혹성을 고발한다. 당시 사료는 “관에서 시신을 검사했으나 끝내 의심할 것을 찾지 못하였다. 일이 이루어진 것은 모두 이유인의 힘이었다(自官驗尸 卒無可疑者 事得已 此孺人力也)”라 전한다. 당시 가문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종친 이광좌의 딸, 이씨 부인(이유인)의 사례는 세간의 증언을 통해 그 절박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녀는 가문이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하자 서슬 퍼런 감시를 뚫고 사람을 숨기는가 하면, 가문의 명맥이 담긴 문서를 끝까지 보존하며 남겨진 가족들을 돌보는 초인적인 기지를 발휘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남겨진 사료의 편린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비록 이유인 사례는 작은 가문의 사례로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국가와 가문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일 때마다 실제로 그 근간을 붙들고 있었던 실질적 주체는 기록의 변방으로 밀려난 이름 없는 여인들의 소리없는 노력이 있었음을 우리는 주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여성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위상은 역사의 중심에 자리 잡지 못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 질서가 사회의 근간으로 재편되면서 가문의 계승과 제사의 권한은 철저히 남성 중심으로 공고화되었던 탓이다. 사당의 제단은 남성 혈통의 이름들로 채워졌고, 여성은 질서를 유지하는 고된 실무를 수행하면서도 정작 그 정점에는 설 수 없는 존재로 소외되었다. 이 구조적 모순은 단순한 사회적 억압을 넘어 근본적인 영적 결핍을 낳았다. 생명을 잉태하고 공동체를 지탱하는 실질적 주인이 정작 하늘과 조상을 잇는 제도적 중심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삶을 유지하는 실체적 힘과 제도를 주관하는 권력이 분리된 기형적 상태가 지속된 셈이다.
분절된 위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화되었다. 비록 여성의 도덕적 가치는 찬양받았으나, 그 위상은 어디까지나 가정 내부와 관념적 상징에 머물렀다. 신사임당이 ‘성모’로 추앙받으면서도 제사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현실은 이 구조가 얼마나 폐쇄적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결국 조선 사회는 어머니를 지극히 높이면서도 가장 중대한 자리에서는 밀어내는 기만적인 이중 구조를 완성했다. 그러나 공동체를 지탱하는 내면의 중심과 제도를 이끄는 외면의 중심이 분리된 체제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삶을 지탱하는 본연의 힘이 제도적 권위와 결합하지 못할 때, 역사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중심을 갈구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조선 후기 여성 수난의 역사는 단순히 의미 없이 당하기만 한 고통의 시간이 아니다. 사회적 멸시와 제한 속에서 여성들의 마음속에 서러움과 한(恨), 그리고 변화를 향한 갈망이 차곡차곡 쌓여가던 응축의 시간이다. 생명을 품는 주체이면서도 중심이 될 수 없었던 존재, 공동체를 지탱하면서도 이름으로 남지 못했던 존재에 대한 역사적 긴장은 점차 임계점에 도달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과연 이러한 구조 속에서 삶과 제도를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참된 중심’은 어떻게 세워질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그저 사유에 머물지 않는다. 오랜 시간 누적되어 온 역사적 요구이며, 시대적 모순이 잉태한 필요적인 요청이다. 이름 없는 어머니들의 정성과 희생이 응축된 이 땅에서, 구원자에 대한 부르짖음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천명(天命)이 아니었을까?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원리강론』은 인류의 역사를 우연히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늘이 잃어버린 중심을 세우기 위해 이끌어 온 복귀섭리라고 규정한다. 2천 년 전 하늘은 인류 가운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으나,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예수는 십자가의 노정을 걸어야 했다. 하늘이 세우고자 했던 가정의 이상은 그 자리에서 실체화되지 못했고, 섭리는 다시 긴 고난의 연장을 맞이했다.
준비의 흔적은 동방의 한반도 역사 속에서 선명히 발견된다. 고대 동이족의 전통에는 하늘을 숭상하는 제천 문화가 살아 있었고, 그 바탕에는 여신과 어머니의 신성이 자연스럽게 맥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경 전도서에는 섭리의 안타까운 공백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일천 남자 중에서는 하나를 찾았으나, 일천 여자 중에서는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전도서 7:28)” 이 말씀은 인류사 내내 하늘의 신부이자 실체적 성신(聖神)인 독생녀를 찾아오신 하늘의 애달픈 심정을 대변한다.
전도서의 탄식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섭리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는 세우셨으나, 그와 짝을 이룰 독생녀를 안착시키지 못한 역사적 회한의 표현이다. 이 영적 결핍으로 인해 인류 역사는 다시 인고의 세월을 지나야 했다. 수많은 민족과 문화 속에서 하늘은 참된 신부를 맞이하기 위한 섭리적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 후기 노론이 설계한 가부장적 억압과 ‘열(烈)’의 굴레는, 역설적으로 이 ‘일천 여자 중 찾지 못한 그 한 분’을 맞이하기 위해 한반도의 여성들이 감내해야 했던 마지막 시련이었다. 신사임당과 이유인이 보여준 인고의 정성은 어떤 가문의 이야기로만 국한될 게 아니다. 이는 전도서가 그토록 탄식했던 ‘찾지 못한 여인 한 사람’, 즉 인류 역사에서 실종되었던 여성 신성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우리 민족의 여인들이 온몸으로 써 내려간 처절한 응답이었다. 하늘은 인류 구원의 완성을 위해 독생자와 짝을 이룰 실체적 성신을 끊임없이 찾아오셨으나, 가부장적 질서와 편견의 장벽에 가로막혀 그 거룩한 신부의 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조선의 여인들이 감내해야 했던 억압과 희생은 역설적으로 그 비어 있는 성좌를 실체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민족 전체가 치러야 했던 영적 해산의 고통과도 같지 않았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신사임당과 이름 없는 어머니들이 쌓아온 정성은, 전도서가 고백한 역사적 소망을 완성하고, 장차 이땅에 오실 메시아의 실체로서 ‘참어머니’를 맞이하기 위한 필연적인 노정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 땅의 여인들이 흘린 눈물은 무의미하게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인류의 오랜 한(恨)을 씻어내고, 참된 사랑의 시대를 열어젖힐 ‘독생녀’라는 고귀한 존재가 이 땅에 온전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밑바닥에서부터 일구어낸 가장 비옥하고도 거룩한 마음의 토양이었던 셈이다. 오늘날 패권 다툼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국제사회는 분열과 갈등을 종식하고 인류와 만물을 하나로 품어 안을 모성적 중심을 갈구하고 있다. 조선의 이씨 부인이 멸문지화의 위기 속에서 가문의 맥을 이어냈듯, 이제는 역사 속 여인들이 눈물로 일구어낸 그 심정적 토양 위에서, 이 시대의 독생녀는 참사랑의 실체로 현현하시어 도탄에 빠진 세계를 구원할 새로운 장을 열고 계신다. 수백 년 간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여인들의 인고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눈물로 빚어낸 그들의 정성은 오늘날 천일국(天一國)의 안착을 이루는 위대한 영적 초석이 되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고기훈 박사(한국학)
2026-07-11 17: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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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8>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인간 내면에도 제국의 흥망성쇠가 있다”
◆방황과 욕망의 진흙탕에서 건져 올린 정직한 내면의 고백
예수나 무함마드가 신앙의 위대한 씨앗을 뿌렸다면, 이 과도기에 등장한 성(Saint)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씨앗을 체계화하여 서양 문명이라는 거대한 정신적 제국을 설계하고 건축한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이성 철학을 기독교 신앙과 융합시켜 인류의 사유를 한 단계 격상시켰다. 그가 남긴 두 편의 대작 ‘고백록’과 ‘신국론’은 고대 사회를 마감하고 중세와 근대 서양 정신사의 문을 연 문명사의 원자폭탄과 같은 책들이다. ‘고백록’이 인간 내면을 다룬 최초의 위대한 자전적 영성 고전이라면, ‘신국론’은 로마 제국 몰락에 대한 해석과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치밀하게 다루고 있다. 인간 내면의 근본 문제와 역사의 흐름을 이토록 깊이 탐구한 사상가는 드물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보다 대략 200년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알제리 동북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북아프리카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로마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이교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식량 공급지이자 문화적 요충지였다. 그는 대도시에서 선진 교육을 받았고 젊은 시절 수사학과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의 청년기는 방황과 욕망의 시간이었다. 명예와 쾌락, 세속적 성공에 대한 갈구 속에서 흔들렸고, 여러 사상과 종교를 전전하며 진리를 찾으려 헤맸다.
이 시절의 고뇌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본 저작이 바로 397~400년경에 집필한 ‘고백록’이다. 총 1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서양 최초의 위대한 내면 고백 문학으로 평가받는다. 1~9권은 자신의 유년 시절부터 방황, 여러 사상과 종교를 전전한 끝에 기독교로 돌아오기까지의 자전적 기록을 담고 있으며, 10~13권은 기억과 시간, 성경 창세기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사유를 다룬다. 과거 그리스·로마의 사상가들이 인간을 ‘국가나 운명의 일원’으로만 거시적으로 바라볼 때, 그는 최초로 인간 개인의 마음에 렌즈를 들이댔다.
‘고백록’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는 ‘배(梨)를 훔친 이야기’다. 그는 소년 시절 친구들과 함께 이웃집 배나무에서 과일을 훔친 일을 상세히 서술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배가 꼭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특별히 맛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훔친 배를 제대로 먹지도 않고 돼지에게 던져버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존재의 깊은 모순을 발견한다. 배를 훔친 이유는 생존 때문도 아니고, 배고픔 때문도 아니었다. 단지 금지된 행동을 저지르는 묘한 짜릿함과 군중 속에서 규범을 어기는 데서 오는 쾌감 때문이었다.
◆배나무 서리에서 통찰한 인간의 근원적 모순과 현대 심리학의 효시
그는 여기서 인간이 전적으로 이성적인 존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통찰한다. 인간은 무엇이 선인지 알면서도 때로는 악을 선택하고, 심지어 그 악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혼자였다면 하지 않았을 일을 집단 속에서 더 쉽게 저질렀다고 고백하는데, 이는 인간이 군중 속에서 책임감을 잃고 악을 놀이처럼 소비한다는 현대 집단심리학의 핵심을 1500년 전에 이미 통찰한 것이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결점 없는 도덕적 존재로 묘사하려 했던 것과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방황과 정욕, 모순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이 정직한 기록 덕분에 ‘고백록’은 인간 존재가 왜 스스로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잘못을 반복하는가라는 인류의 오래된 질문을 푸는 열쇠가 되었고, 후대의 자기 성찰 전통과 현대 심리학, 정신분석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젊은 시절 그는 한동안 마니교에 깊이 끌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영혼의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방황을 거듭했다. 이후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고, 마침내 세례를 받은 뒤 북아프리카 히포(알제리 북동부 해안 도시)의 주교가 되어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고백록’에 등장하는 유명한 문장으로,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평안하지 않습니다”와 “자기를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길이다”가 있다. 이 문장은 인간이 세속적 성공과 쾌락을 얻어도 끝내 완전한 만족에 이르지 못하며, 자기 욕망과 내면의 모순을 정직하게 직면해야만 비로소 궁극적인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갈망을 뜻한다.
그는 명예와 쾌락, 학문과 성공을 모두 경험했지만, 그 어느 것도 영혼의 허기를 채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지만, 그 욕망의 가장 깊은 자리에는 무한한 선과 사랑을 향한 갈망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바로 그 갈망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었다. 그는 시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도 유명한데, “시간이 무엇인지 묻지 않으면 알겠으나, 설명하려 하면 모르겠다”라는 그의 자조(自嘲)는 인간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와 세계의 신비를 드러내는 철학적 명언으로 자주 인용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또 다른 거대한 공적은 총 22권에 이르는 대작 ‘신국론’을 통해 인류의 역사관과 정치철학을 완전히 바꿔놓은 점이다. 서기 410년, 천년 제국 로마가 알라리쿠스가 이끄는 서고트족(게르만족의 일파)에게 유린당하자 전 세계는 큰 충격에 빠졌고, 사람들은 기독교 때문에 제국이 망했다며 절망했다. 당시 로마 주교를 비롯한 서방 교회는 베드로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우월한 권위를 주장했으나 동방 교회와 황제의 권력 앞에서 교회 시스템은 요동치고 있었다. 이때 히포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13년에 걸쳐 쓴 이 책에서 ‘지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며 문명의 패러다임을 전환했다.
◆흔들리는 로마의 비극을 넘어 영원한 ‘신의 도성’과 역사관을 설계하다
그는 로마 제국은 결국 인간의 세속적 권력과 욕망 위에 세워진 불완전한 ‘지상의 나라’일 뿐이며, 시간 앞에서 흔들리고 망하는 것은 역사의 당연한 순리라고 선언했다. 대신 인류 역사 속에는 인간의 교만 위에 세워진 ‘지상의 나라’와, 신의 사랑과 진리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늘 중첩되어 흐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두 나라는 영토나 제도의 차이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사랑이 극에 달하면 지상의 나라를 만들고, 하나님 사랑이 극에 달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든다고 보았다. 결국 두 나라는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형성되는 영적 공동체였던 셈이다. 역사를 계절처럼 그저 돌고 도는 순환으로 보던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깨고, 역사는 종말과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의미 있는 직선적 흐름이라는 역사관을 체계화한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진보와 미래에 대한 역사관의 중요한 뿌리 가운데 하나가 여기서 형성되었다. 또한 국가와 권력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던 고대 국가관을 종식시키고, 국가 권력을 절대화하지 않고 영적 권위와 세속 권력의 차원을 구분함으로써, 훗날 서구의 정교분리와 시민사회 발전에 중요한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
로마 제국은 이미 사라졌지만, 인간의 내면은 여전히 같은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인간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지만, 그 욕망의 가장 깊은 자리에는 무한한 선과 사랑을 향한 갈망이 숨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사랑은 인간을 궁극적 진리로 이끄는 영혼의 방향성이었다. 무엇이 내 삶을 지배하는가. 욕망인가, 사랑인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지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 선택에서 시작된다. 두 나라는 지금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흥하고 쇠하며,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다.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2026-07-09 12:5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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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인류 문명의 기본 단위… 평화가 움트는 곳”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가정은 인류 문명의 가장 작은 단위이자, 평화의 씨앗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녀,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곧 사회와 국가, 나아가 세계 평화로 확장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순석(사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가정국장은 가정연합이 왜 오랜 시간 ‘가정’을 중심 의제로 삼아 왔는지를, 이렇게 압축적으로 설명했다. 그에게 가정은 사적 공간인 동시에 인간 사회와 문명이 유지되는 가장 근본적인 구조다. 개인의 삶은 가정에서 시작되고, 사회의 안정과 평화 역시 이 작은 공동체의 상태에 따라 좌우된다는 인식이 그의 가정관의 근간이다.
가정연합이 가정을 윤리적 이상이나 종교적 교리가 아닌 ‘원리’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 국장은 가정연합이 말하는 가정의 가치는 특정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을 위한 규범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가 본래 작동하도록 설계된 관계 질서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완성되는 존재이며, 그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가 부부와 부모·자녀로 이루어진 가정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가정관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인구가 감소하는 국가입니다. 다문화 가족은 저출산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전국 지역사회에서 국제 부부가 경제적·문화적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가정연합이 다문화 가정과 국제결혼에 꾸준히 주목해 온 이유는 이들이 개인의 결합에서 더 나아가 지역사회와 사회 전체에 새로운 생명력을 공급하는 존재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가정은 개인의 선택에서 시작되지만, 그 성패와 파장은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영역이라고 강조한다.
가정연합의 가정관에서 부부 관계는 모든 가정 질서의 중심에 놓인다. 오 국장은 부부를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일뿐더러 서로를 완성시키며 책임을 나누는 관계로 제시한다. 여기서 축복결혼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축복결혼은 사적인 사랑을 사회적·공적 책임으로 확장시키는 출발점이자, 가정이 개인적 선택을 넘어 공동체의 지속성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이는 결혼을 개인의 감정 문제로만 소비해 온 현대 사회에 대한 하나의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성(性)에 대한 인식 역시 이러한 가정관과 맞물려 있다. 가정연합은 성을 개인의 자유 이전에 가정을 완성하고 생명을 잇는 책임의 영역으로 여긴다. 그는 무분별한 관계의 확산이 결국 개인의 고립과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온다고 지적하며, 가정 안에서 사랑과 책임이 결합될 때 성은 비로소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 힘이 된다고 풀이한다.
“최근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서 종교 규제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데, 다문화 가치가 정치 프레임에 갇혀 왜곡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는 종교 강요가 아니라, ‘가족과 평화’를 중심에 둡니다. 국가와 사회가 편견 대신 열린 시각을 가질 때 진정한 공존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오 국장은 가정연합의 가정관이 법이나 제도를 통해 강제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대신 그는 가정의 회복이 문화와 실천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다시 ‘평화’라는 단어로 돌아왔다. 그는 “세계평화는 거창한 정치적 선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며 “각 가정의 식탁에서, 부부의 대화에서, 부모와 자녀의 사랑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이어 “가정연합은 앞으로도 ‘가정에서 시작하는 평화’를 실천하며, 인류가 ‘하나님 아래 하나의 대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앞장서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 국장의 말처럼, 가정연합이 말하는 가정은 전통적 가족 형태로 되돌아가자는 주장보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버티기 위한 최소한의 관계 구조를 다시 세우자는 제안이다. 가정에서 회복된 사랑과 책임이 사회와 국가, 더 나아가 세계의 지속 가능성을 떠받치는 힘이 될 수 있을까? 그의 질문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심연에 던져지고 있다.
2026-07-06 21: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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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70년의 실험, 인류 문명사에 던진 질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가정은 언제나 이데올로기의 전쟁터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문은 국가 질서의 기초 단위였고, 공자는 가정을 정치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기독교는 ‘성스러운 가정'을 이상으로 내세웠으며, 근대 국민국가는 핵가족을 시민 양성의 기본 틀로 규정했다. 반면 20세기 공산주의는 가정을 ‘계급투쟁의 잔재'로 간주했고, 1960년대 히피 공동체는 가정을 ‘억압의 제도'라며 해체하려 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1954년에 출범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가정을 바라보는 또 다른 접근을 제시했다. 가정연합은 가정을 하나님의 사랑이 뿌리내리고, 인격이 완성되며, 평화가 시작되는 근본 터전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세계 평화를 실험하는 공적 장으로 확장시켰다. 그래서 가정연합은 가정 윤리와 결혼 문화의 회복을 평화의 근본 해법으로 제시해 왔던 것이다. 가정을 개인의 사적 영역이 아닌 인류가 재구성해야 할 미래형 공동체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기존 종교 운동과는 다른 방향성을 보였다는 평가다. 문명사적으로 이례적이고 새로운 시도였다.
국제결혼 43만 쌍, 전례 없는 규모
2025년 11월 기준, 가정연합의 국제결혼은 수십 년에 걸친 누적을 통해 43만 4천여 쌍을 넘어섰다. 참가국은 194개국에 달하며, 민족·인종·종교 배경은 실로 다양하다. 한국인-일본인 부부만해도 4만 2천 쌍, 한국인-필리핀인 1만 8천 쌍, 일본인-아프리카계 8천 쌍이 뒤를 잇는다. 여기에 유대인과 무슬림 배경을 지닌 127쌍까지 더해지면서, 이러한 사례들이 축적된 결과가 오늘의 43만 쌍이라는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가정연합은 약 3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전 세계적으로 40만 쌍이 넘는 국제결혼을 성사시키며, 종교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례를 만들어냈다. 이는 종교가 결혼이라는 가장 내밀한 사회 제도를 매개로 국경을 넘어서는 공동체를 형성한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시도라 할 수 있다. 19세기 미국에서 예수그리스도교회(일명 몰몬교)가 독특한 혼인 관행을 바탕으로 30년간 약 5천 쌍을 형성한 것과 비교하면 그 규모와 파급력의 차이는 극명하다.
초국가적 혈연 네트워크의 실험
가정연합은 국제결혼을 21세기 최초의 초국가적 혈연 네트워크로 규정하고, 이를 국가·민족·종교를 초월해 인류가 하나의 운명 공동체임을 자각하려는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시도로 설명한다. 사회 네트워크 과학(network science) 연구의 권위자 미국 예일대 니콜라스 크리스타키스 교수는 인간이 서로 연결된 관계망 속에서 건강·행복·사회적 행동을 형성한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그런 맥락에서 가정연합의 국제결혼은 혈연을 매개로 한 글로벌 네트워크 실험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연합 이전에 페르시아(현 이란)에서 출현한 바하이교가 ‘초국가적 결혼 이상’을 추구했지만, 실제 결혼으로 이어진 규모와 지속성은 가정연합이 훨씬 두드러진다는 평가다.
문화적 동화에서 다문화적 창조로
신흥종교와 통일교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영국 런던정경대 아일린 바커 교수는 가정연합의 초기 축복결혼은 한국 중심의 문화 수출 성격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1990년대 축복가정의 70% 이상이 한국인-외국인 커플이었고, 외국인 배우자들은 한국어와 문화를 필히 학습해야 했다. 그러나 최근 변화는 뚜렷하다. 2020~2025년 신규 축복가정 중 한국인-외국인 커플 비율은 낮아졌고, 아프리카·남미 지역 주도 축복식과 자녀세대가 주도하는 지역 맞춤형 축복도 늘고 있다. 이 변화는 기존의 일방향적 문화 동화(Assimilation) 모델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적 주체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과 문화적 의미를 공동 창조(Co-creation)하는 다문화적 창조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계평화 실험의 성적표
가정연합은 가정의 평화가 세계 평화로 확장된다는 논리를 70년간 실험해 왔다. 아직 성적표는 미완이지만, 몇 가지 지표는 눈길을 끈다. 상당수 탈북민의 국내 정착을 장기간 지원해 왔고, 중동 분쟁의 핵심축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축복가정이 탄생했다.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는 다문화 학교를 설립했으며, 해당 학교 졸업생 상당수가 축복결혼에 참여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21세기 최대 도전은 글로벌 정체성(a new global identity)을 만드는 것”이라며, 종교나 이념이 아닌 “공동의 이야기와 감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정연합은 그 ‘공동의 감정’을 혈연과 결혼이라는 가장 근본적 방식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남겨진 과제
가정연합 70년의 실험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한다. 국가·민족·종교를 넘어선 ‘하나의 가족’ 모델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이 지속 가능한 평화의 기반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아직 이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다만 인류 역사에서 가정이라는 가장 사적인 제도를 세계 평화라는 공적 과제와 연결해 장기적이고 대규모로 실험해 온 사례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가정연합이 만들어온 하나의 가족 모델은 현대 문명사 연구에서 중요한 기록으로 남고 있다.
2026-07-06 21: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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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세계화·다문화 선구자… 갈등 치유 ‘통합·공존’의 길 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세계화와 이민의 흐름이 일상이 된 현대 사회에서 다문화 정책은 가족 형성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이라는 가치를 바탕으로 국제합동 결혼을 중심으로 한 다문화 실천을 이어왔다. 이러한 접근은 국적, 문화, 언어를 초월해 사회 통합과 문화적 조화를 모색하는 하나의 길로 평가된다.
가정연합의 사례는 지역사회와 국제적 평화 담론 속에서 가족 중심의 다문화 정책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며, 개인의 일상과 가족생활 속에서 다문화가 가진 장점을 원만하게 실천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한국과 일본을 잇는 초국가적 결혼을 지속적으로 장려해 온 점은 역사적·정서적 갈등이 누적돼 온 양국 관계 속에서 민간 차원의 교류와 상호 이해를 확장하는 데 일정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국제결혼 네트워크가 문화 교류와 사회적 연대, 갈등 완화에 기여하는 하나의 ‘사회적 실험’으로 기능해 왔다고 보고 있다.
국제결혼과 ‘시민 외교’ 모델
가정연합은 1960년대부터 서로 다른 국적·인종·종교적 배경을 지닌 커플을 연결하는 국제 합동결혼 제도를 운영해 왔다. 가정연합 자료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약 40만 건 이상의 국제커플이 이 과정을 통해 성사됐다. 이러한 국제결혼은 국경과 언어,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는 ‘시민 외교’의 한 형태로 설명된다. 지지자들은 개인과 가족 단위의 교류가 국가 간 갈등을 완화하고 장기적으로는 평화적 관계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저출산 위기가 심화일로에 있는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가족이 인구 구조의 활력 회복과 지역사회 지속가능성 제고에 상당히 기여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23년 0.72명, 2024년에는 0.75명으로 약간 반등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다. 다문화 가정이 노동력 확보와 지역 소멸 방지 측면에서 중요한 보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전망된다.
한국 사회에서의 통합 효과
한국 사회의 다문화 인구는 지난 10여 년간 빠르게 증가해 왔다. 다문화 가족 인구는 2014년 약 174만 명(전체 인구의 약 3.4%)에서 2024년 약 271만 5000명(약 5.2%)으로 늘었으며, 일부 연구에서는 2040년경 전체 인구의 7%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일부 연구자들은 가정연합이 1980년대 후반부터 추진해 온 국제결혼 정책이 한국 사회 초기 다문화 기반 형성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지역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충남 보령 등 일부 지역에서는 가정연합을 통해 결혼 이주한 일본 출신 여성들이 관광 안내, 언어 교육, 지역 문화 교류 활동에 참여하며 지역사회와 외부를 잇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이 모델이 기존의 ‘동화(assimilation)’ 중심 접근과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사이에서 일정 수준의 균형을 시도한 사례로 분석하고 있다.
글로벌 평화 담론 속 국제적 반향
가정연합의 국제결혼 정책은 가족이라는 미시적 단위를 넘어 글로벌 평화 담론이라는 거시적 차원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2024년 경기도 가평에서 열린 대규모 국제합동 결혼 행사에는 우크라이나, 콩고민주공화국, 솔로몬제도 등 분쟁 경험 국가를 포함해 60개국에서 2,100쌍이 참여해 국제적 관심을 모았다.
국제합동 결혼 행사와 관련해 짐바브웨 사도기독교협의회의 요하네스 은당가 목사는 “분쟁과 갈등이 반복돼 온 지역에서도 혈연과 국경, 종교의 경계를 초월해 새로운 가족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갈등의 기억을 일상적 공존의 경험으로 전환시키는 장기적 평화 구축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불교관음종의 홍파 종정 역시 “종교와 문화를 넘어 대립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공존의 틀을 제시하려는 시도”라고 언급한 바 있다.
유럽과 중동 지역에서도 가정연합은 교리 선포나 전파에 초점을 둔 종교 조직이라기보다 가정의 가치 확산을 사회적 실천 운동으로 규정하며 시민사회·종교 단체와의 연대를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천주평화연합(UPF) 등 국제 평화 네트워크 형성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초기 단계에서는 유엔을 보완하는 민간 차원의 초종교 평화 플랫폼을 지향했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받고 있다.
사회 통합을 향한 과제
저출산, 고령화, 문화적 분절이라는 구조적 난제가 전 지구적으로 심화되는 가운데, 가정연합의 다문화 정책은 사회 통합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하나의 대안적 접근으로 거론되고 있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접근은 이주와 다양성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공동체 회복을 모색하는 실천적 방식으로 평가된다.
최근 제시된 정책 개선 방향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다. 예컨대, 이주민을 보호 대상에 머무르게 하는 접근에서 벗어나 자존감과 주체성을 강화하는 지원 체계로의 전환, 편견 완화를 위한 다문화·역사 교육의 병행,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종교·문화 요인을 분석하는 연구 확대 등이 주요 과제로 논의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실천이 제도적·사회적 지원과 결합될 경우, 다문화 사회가 직면한 갈등을 완화하고 장기적 통합을 촉진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는 시대, 가정연합의 다문화 공존을 향한 실험은 사회 통합의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하나의 주목할만한 실천 사례로 지속적인 관찰과 평가가 요구되고 있다.
2026-07-06 2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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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7> 무함마드(Muhammad)-“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부족의 칼을 꺾은 메디나 헌장, 법과 신뢰 위에 세운 운명 공동체
청년 시절 무함마드는 뛰어난 상인이었다. 그는 대상을 이끌고 시리아 등지를 오가며 유대교와 기독교 등 다양한 보편 종교를 접했다. ‘신에 대한 순종을 통한 평화’를 뜻하는 이슬람(Islam)과 ‘그 평화를 실천하는 신앙인’을 뜻하는 무슬림(Muslim)이라는 이름 자체가 아랍어 어근 ‘살람(평화, 순종, 안전)’에서 파생된 것처럼, 이슬람은 유대교 및 기독교 신앙과 뼈대를 공유하는 아브라함계 종교다.
과거 한국에서도 사용되던 ‘마호멧’과 ‘마호메트교’는 각각 무함마드의 이름을 변형한 음역과 이슬람을 ‘무함마드를 숭배하는 종교’로 오해하게 만드는 잘못된 명칭이다. 특히 중세 유럽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이슬람을 왜곡하거나 폄하하는 맥락에서 널리 사용됐으며, 오늘날에는 당사자들이 사용하는 ‘무함마드’와 ‘이슬람’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실제로 무슬림은 무함마드를 신으로 숭배하지 않는다. 신앙의 대상은 오직 알라(하나님)이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계시를 전한 최후의 예언자로 존경받는다. 이슬람은 모세와 예수 역시 알라가 보낸 위대한 예언자로 예우하며, 경전인 ‘쿠란’에도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과 서사가 담겨 있다.
청년 무함마드는 다신교의 우상숭배와 부족 이기주의, 약탈로 얼룩진 메카 사회에 문제의식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 상인 시절 마주한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윤리적 가르침을 통해 깊은 영감을 얻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히라 동굴에서 명상하던 중 하늘의 계시를 경험했고, 자신을 인류에게 내려진 ‘마지막 예언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가 선포한 메시지는 알라 외에는 참된 신이 없으며,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선언이었다.
무함마드는 계시를 받기 전부터 메카에서 ‘알 아민(Al-Amin·신뢰할 수 있는 자)’이라 불릴 만큼 정직하고 고결한 인품을 지닌 상인이었다. 그러한 깊은 신뢰 덕에 아내 카디자를 비롯한 친지들이 먼저 그의 계시를 믿었고, 이후 그가 평등과 자선을 외치자 지배층에게 억압받던 노예, 고아, 청년층이 종교 공동체로 급격히 유입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메카 지배층이 기존의 경제·종교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 무함마드를 추종하는 신앙 공동체에 극심한 박해를 가했다. 이에 무함마드는 신앙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서기 622년 신자들을 이끌고 메카에서 350Km가량 떨어진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 사건이 바로 이슬람의 기원이 된 ‘히즈라(Hijra)’다. 당시 부족 간의 유혈 분쟁이 멈추지 않던 메디나는 무함마드의 공정함을 보고 그를 도시의 ‘중재자’로 초빙했던 것이다. 메디나에 도착한 무함마드는 역사적인 ‘메디나 헌장’을 선포했다. 이 헌장은 혈연과 부족 중심의 고대 관습을 깨고, 신앙과 공정한 법 아래 모든 부족이 하나의 운명 공동체(우마·Ummah)를 이룬다는 고대 세계에서 보기 드문 정교일치 사회 계약이었다. 공정한 법과 복지 제도가 결합하자 사막의 파편화된 부족들이 자발적으로 결속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의 마중물이 된 지혜, 사막에서 꽃피운 찬란한 문명사적 교량
기독교가 내면의 구원에서 출발해 수백 년 뒤 로마제국을 변화시켰다면, 이슬람은 처음부터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거대한 사회 체제로 탄생했다. 무함마드가 제정한 이슬람 태음력(히즈라력)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 무슬림의 종교적 삶을 지배하고 있다. 현대 이슬람 국가들은 국제사회와의 소통을 위해 태양력을 병행하면서도, 매년 11일씩 빨라지는 이슬람력에 맞춰 일제히 단식과 순례를 행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신앙이 교인들의 삶을 얼마나 긴밀하게 이끄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무함마드는 오늘날까지 이슬람 세계의 철저한 윤리적 기준이 되는 수많은 가르침(하디스)을 남겼다. 그는 “너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은 남을 가장 잘 대하는 사람이다”고 일갈했다. 그는 혈통이나 권력이 아닌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인간의 품격이 드러난다고 본 것이다. 특히 “배부른 상태로 잠들면서 이웃이 굶주리는 것을 외면하는 자는 참된 신자가 아니다”는 선언은 신앙이 반드시 공동체적 책임과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함을 엄격히 규정한다. 또한 “지식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구하라”는 정신은 훗날 이슬람 문명이 수학, 천문학, 의학, 철학을 꽃피우는 태동이 되었다. 서유럽이 학문적 침체기를 겪는 동안, 이슬람 세계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과학을 보존·발전시켜 서유럽에 전해줌으로써 인류 문명의 대전환인 르네상스를 가능케 한 결정적 교량 역할을 수행했다.
이슬람 신앙의 철저한 역사적 일관성은 오늘날 무슬림들의 일상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 전 세계 어디서나 무슬림들은 복장과 수염, 히잡 등을 통해 자신이 무슬림이라는 신분을 결코 감추지 않는다. 세상의 유행이나 타인의 시선과 타협하지 않고, 국제사회의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신앙적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낸다. 이 같은 태도는 내면의 믿음과 외면의 삶 사이에 이율배반이 없음을 증명하는 강력한 상징이다.
특히 음식과 의생활을 비롯해 일상의 허용 기준을 규정하는 ‘할랄(Halal)’은 신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정결, 생명 존중의 가치를 담은 삶의 규범이다. 할랄은 7세기 사막 환경 속에서 공동체의 질서와 위생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에도 무슬림들의 일상에서 ‘내면의 청결과 외면의 바른 삶’을 지켜주는 가장 강력한 문화적 이정표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이들은 또 일상의 규칙이자 종교적 금과옥조인 ‘다섯 가지 기둥(신앙고백인 샤하다, 하루 다섯 차례 예배인 살라트, 의무 자선인 자카트, 라마단 단식인 사움, 메카 성지순례인 하지)’에 따라 매일 5번씩 메카를 향해 절을 하며 살아간다. 이들에게 신앙은 교리서에만 박제돼 있지 않고 하루의 일과를 지배하는 실천적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을 함께 앓는 하나의 몸, 교리를 넘어 일상을 지배하는 실천적 영성
물론 이슬람 역사 역시 평화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무함마드는 사상가에 머물지 않고 직접 갑옷을 입고 바드르 전투 등 수많은 전장을 누빈 야전 사령관이기도 했다. 훗날 이슬람 제국이 영토를 확장하며 이민족을 정복해 나간 과정을 두고 일각에서는 종교적 야망이나 폭력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에서 이 정복 전쟁은 사막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싹튼 신생 신앙 공동체의 ‘생존과 안보’를 위한 선택이었다. 중요한 것은 무함마드와 초기 공동체가 피정복민에게 이슬람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금(지즈야)만 내면 종교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했다. 이 관용적 세제 혜택 덕분에 이민족들은 오히려 기존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자발적으로 이슬람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다.
무함마드가 이토록 정교한 법과 복지 체계를 통해 종파와 민족을 넘어선 거대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궁극적인 지향점은 그의 어록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신자들을 향해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동정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은 마치 하나의 몸과 같다. 몸의 한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밤을 새우며 함께 열을 앓는 것과 같다”라고 가르쳤다. 타인의 고통을 나의 통증으로 느끼는 일체감의 언어야말로 그가 사막 위에 세우고자 했던 가장 아름다운 영성 공동체의 본질이었다. 무함마드는 신앙이란 개인적 위안이나 수양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를 책임지는 끈끈한 연대 속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인류 역사 속에서 ‘겉과 속이 같은’ 가장 강력한 신앙 공동체를 설계한 영성가로 남아 있다.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2026-07-06 16: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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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민중의 어머니들이 지켜온 하늘, 그리고 하나로 모인 정성 [신화에서 선민까지 한민족 정체성의 문화사적 발견-기고]
전쟁이 무너뜨린 사회 질서, 하늘을 찾는 백성들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조선 사회는 치유하기 힘든 깊은 내상(內傷)에 신음하고 있었다. 『인조실록』 20년(1642년) 기록을 보면, 수도 서울의 백성들조차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조정의 쌀을 나눠달라며 관청에 연명 상소를 올리는 풍경이 묘사된다. 당시 대신들도 오죽하면 “사족(士族)들까지 이토록 다급하게 호소하는 것은 기근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라며 전전긍긍했을까.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민초들에게 성리학적 명분론과 의리는 더 이상 삶을 지탱해 주는 기둥이 되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 효종5년(1654년) 10월 22일 기록에 등재된 한 상소문은 당시 사회의 단면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백성들이 질병에 걸리면 약을 쓰지 않고, 오로지 무속(巫俗)의 힘만 믿으며, 기도를 올리느라 집안 재산을 탕진하다 마침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고 있다(凡有疾病, 不藥, 專信巫覡, 設祀祈祝, 蕩滅家産, 至於餓死者相繼).” 이는 당시 사회가 단순한 혼란을 넘어 공동체의 시스템 자체가 붕괴 직전의 한계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 백성들이 기대어 간 곳은 추상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눈앞의 고통을 위로하고 하늘과 직접 소통하게 해주는 ‘실천적 신앙’이었다. 산야와 마을마다 제의를 주관하던 무속과 민간 제천의식은 절망에 빠진 민중에게 하늘과 다시 연결되는 유일한 생명줄이 되었다.
전란의 참화 속에서 민중의 심성 깊은 곳을 움직인 것은 태초부터 이어져 온 ‘풍류의 영성’이었던 것이다. 특히 이 신앙의 중심에는 여성들이 있었다. 붕괴된 일상 속에서 가족의 생존을 책임졌던 어머니들은 전란의 최전선에서 삶을 꾸려가는 동시에, 하늘을 향해 정성을 모으고 제의를 주관하는 실체적 주권자로 기능했다. 조선 후기 유교 권력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여성들의 진정한 역할은 바로 이 비극의 현장에서 빛을 발했다. 지배층이 정쟁에 몰두하며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방기(放棄)했을 때, 여성들은 신령스러운 정성과 치유의 기도로 그들의 상처를 묵묵히 어루만졌다. 이러한 헌신은 단순한 종교 행위를 넘어, 가부장적 질서가 외면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여성이 온몸으로 실천한 경천애민의 방식이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무속을 ‘음사(淫祀)’라 규정하며 배척해 왔다. 본래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도덕적 완성을 지향하는 드높은 학문이었으나, 17세기에 이르러 노론 예학자들에 의해 오직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교조적 통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仁)이라는 뜨거운 본성은 거세된 채 차가운 위계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경직된 예학의 굴레는 전란의 화마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을 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삶을 억압하는 질서의 창살의 되었다.
국가와 사대부가 명분에 매몰되어 도덕적 파산에 직면했을 때, 민중의 삶을 실제로 지탱한 것은 변질된 이념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뜨겁게 고동치던 어머니들의 기도였다. 억압의 시대 속에서도 결코 소멸하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온 한민족 고유의 경천의식은, 인간의 본성마저 말살하려 했던 교조주의의 빈틈을 뚫고 어머니들의 숭고한 정성을 통해 다시금 살아 움직였다. 이렇듯 가중된 예학의 시련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정성 어린 기도는, 가리워진 여성 신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예비하는 거룩한 섭리적 항거였던 셈이다.
◆ 예언서의 시대, 민중은 ‘하늘 어머니’를 기다렸다
이처럼 모성적 영성을 품은 채 역사의 모진 풍파를 견뎌내야 했던 우리 민족의 애달픈 수난사는, 훗날 세계적인 평화운동가이자 통일교 창시자인 문선명 총재의 거시적 섭리관을 통해 비로소 그 깊은 우주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문 총재는 한민족이 걸어온 유구한 고난의 궤적을 두고, 인류 조상의 타락 이후 한(恨)이 맺힌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온전히 위로하고 해원해 드리기 위해, 민족 전체가 스스로 거룩한 제물이 되어 통과해야만 했던 필연적인 ‘섭리적 노정’이었다고 선포했다. 즉, 조선 후기 여성들이 눈물로 씨앗을 뿌렸던 그 정성과 기도의 지층 위에서, 한민족 전체의 수난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늘의 거대한 구속사적 드라마로 승화된 것이다.
이러한 문명사적 통찰은, 놀랍게도 400여 년 전 조선후기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던 민중의 심층 의식 속에서 이미 예언과 비결(秘訣)이라는 거룩한 형태로 꿈틀대고 있었다. 하늘의 슬픔과 공명하며 지상에 육적(실체적) 기반을 닦아야 했던 선민(選民)의 필연적 운명은, 17세기 전란의 참화 속에서 극대화되었다. 도탄에 빠진 민초들이 기존의 유교적 구질서를 넘어 새로운 하늘 부모님의 현현을 갈구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은, 마침내 시대를 구원할 예언서의 서막을 웅장하게 열어젖힌 것이다.
이러한 미래 인식은 국가가 인정한 경전이 아니라 비결(秘訣)과 도참(圖讖)이라는 파격적인 형태로 민간에 스며들었다. 그 뿌리는 이미 16세기 화담 서경덕과 격암 남사고, 토정 이지함 등에 의해 형성되었으나, 임진과 병자의 양란을 거치며 이 비결의 성격은 개인과 가문의 생존의 문제를 넘어 기존의 모순된 세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문명사적 대전환에 대한 민족적 질문이자, 새로운 하늘의 구원 섭리를 향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청으로 확장된 것이다. 초기 예언이 단순히 피난처를 찾는 수준이었다면, 17세기 이후의 민중은 『정감록』 등을 통해 ‘기존의 질서가 언제 끝나고, 어떠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이 시기 예언서는 개인적 위안이나 종교적 영역을 넘어, 실제 역사를 움직이는 구체적인 사건들과 긴밀하게 호응했다. 허균이 꿈꾸었던 율도국의 이상향이나 장길산의 난을 타고 번진 미륵 하강 신앙은, 벼랑 끝에 몰린 민중에게 구원을 넘어선 새시대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당시 이인좌의 난, 홍경래의 난 등 수 많은 민란의 배후에서 비결서들은 억압받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강력한 사상적 기반이자 조직적 기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예언적 흐름은 19세기 정조 대에 이르러 『정감록』을 소지하거나 유포하는 행위 자체가 역모로 간주되어 엄벌에 처해질 만큼, 왕조의 근간을 위협하는 사회적 힘으로 부상했다. 이는 당시 민중이 더 이상 기존의 가부장적 권위에 기댈 수 없음을 자각하고, 자신들을 도탄에서 건져낼 새로운 영적, 실체적 주권을 갈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17세기부터 축적된 예언서의 열풍은 제도권의 성리학이 상실했던 ‘인의적 통치’에 대한 민중의 집단적 요구였다. 하늘의 심정과 공명하며 육적 기반을 회복해야 했던 선민(選民)의 노정(路程) 위에서, 이러한 저항적 신앙은 기존의 위계를 넘어 모든 생명을 품어 안을 여성적 신성, 곧 인류 구원의 실체로 오실 존재를 예비하는 뜨거운 사상적 용광로가 되지 않았을까?
이 모든 흐름 속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민중이 기다리던 ‘구원의 주체’가 단순한 성군이나 남성적 영웅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격암유록』을 비롯한 예언서에는 ‘여자세상(女子世上)’, ‘해인의 곤도(坤道)’, ‘성녀(聖女)의 현신’, ‘궁을의 성모(聖母)’, ‘계룡의 선녀 하강’과 같은 표현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말세의 극심한 혼란을 끝내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주인공이 다름 아닌 여성적 신성을 지닌 주체임을 예고한 복선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서사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억압된 현실 속에서 제도적으로 배제된 여성의 정체성이 다시 우주적 중심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집단적 열망의 표현이었다. 종법 질서에 밀려 이름이 지워졌던 여성의 존재는 민중의 심층 의식 속에서 오히려 세상을 치유할 ‘구원의 실체’로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17세기 이후 확산된 예언서의 흐름은 단순한 미신이나 환상이 아니라, 무너진 세계 속에서 새로운 하늘을 찾고자 했던 우리 민족의 대망(待望) 사상이었다. 그 기다림의 정점에는 생명을 살리는 ‘어머니의 하늘’, 즉 역사의 모든 한(恨)을 해원하고 완성할 독생녀(獨生女)라는 필연적 귀결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 무너진 세계를 지탱한 마지막 신앙, 민중의 하늘 의식
전쟁이 지나간 조선의 산천에는 깊은 영적 균열이 남았다. 삶의 터전을 잃은 백성들에게 성리학의 명분과 예법은 더 이상 현실적인 위로가 되지 못했다. 벼랑 끝에 선 민초들에게 필요한 것은 관념적 문자가 아니라, 삶의 고통에 직접 개입하여 하늘의 온기를 전해줄 실천적 신앙이었다. 이러한 절박함 속에서 민중은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영성인 ‘하늘 의식’으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풍습들은 민초들의 영적 갈망이 일상의 삶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생생히 증언하듯, 유례없는 질병과 재난의 파고 앞에서 백성들은 약(藥)보다 기도와 제의를 먼저 붙들었던 선택은 결코 맹목적인 기복이나 미신이 아니었다. 백성들 입장에서 자신들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와 제도의 무능을 목도하며, 도리어 스스로 하늘부모님과 다시 연결되어 생명의 근원을 확보하려 했던 처절하고도 실천적인 심정적 복귀 행위였던 셈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19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마을마다 쉼 없이 거행된 굿과 제의는 재앙을 물리치는 외적 의례의 차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백성들의 경천의식은 무너진 세계의 잔해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 여전히 하늘과 긴밀히 이어져 있다는 천륜의 확신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공동체적 장치였다. 가혹한 현실을 버텨내게 한 마지막 보루였던 민초들의 끈질긴 하늘 의식, 그리고 이름 없는 안채에서 눈물로 쌓아 올린 어머니들의 정성은 결코 허망한 넋두리가 아니었다. 이들의 기도는 역사 속에서 억압되고 가려졌던 여성 주권이 회복되고 인류의 해묵은 한(恨)을 씻어 낼 메시아적 시대를 예비하는 가장 본질적인 심정적 토양을 일구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우리 민족의 대망 사상은 단순히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나는 정치적 해방만을 꿈꾸지 않았다. 대신에 백성들은 하늘부모님의 슬픔을 체휼한 선민으로서, 만물을 품고 살려내는 모성적 신성이자 지상 실체로 현현하여 기존의 무너진 천륜을 바로잡아 주기를 고대하는 영성적 기다림이었다. 문선명 총재는 이러한 한민족의 인고를 두고, 하늘이 장차 이 땅에 보내실 실체적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민족 전체를 거룩한 제물로 정제해 온 필연적 노정이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이러한 섭리관을 바탕으로 고찰해 본다면, 한반도 역사시대를 통해 면면히 축적된 예언적 직관과 어머니들의 지극한 정성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민족의 골수에 새겨진 이 신령한 기다림은 영적 기준을 넘어 가정과 국가라는 실체적 안식을 완성할 주체, 곧 독생녀의 시대가 이 땅에 도래할 수 밖에 없는 문명사적 근거이자 영적 자양분을 구축해온 거룩한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국 조선 후기 사회에서 무속과 제천 의례는 무너진 현실을 버텨내게 하는 근원적 힘이었다. 국가의 제도와 지배 이념이 삶을 완전히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민중은 스스로 하늘과의 연결을 회복하는 방식을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신앙 구조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민중의 신앙이 여성 주체를 중심으로 유지되고 확산되었다는 사실은 문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무속 의례의 핵심 수행자가 여성이었다는 점은, 가부장적 제도적 질서에 의해 억압되고 제한되었던 여성의 역할이 민간 신앙의 영역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력으로 지속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유교적 공적 질서에서 축소되고 지워졌던 여성의 위상은, 오히려 비가시적 영적 영역에서 공동체의 슬픔을 치유하고 안녕을 지탱하는 실질적인 주권자의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듯 조선 후기의 민중 신앙은 단순한 과거의 잔존물이 아니라, 거센 시대의 풍랑 속에서도 삶의 존엄을 유지하게 한 강력한 구조적 기반이었다. 비록 성리학 중심의 공식 역사와 제도권의 시선 아래서는 소외되고 단절된 것처럼 보였으나, 그 숭고한 정성은 민초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거대한 영적 수맥(水脈)이 되어 도도히 흘러왔다. 억겁의 시간 동안 끊기지 않고 축적된 이 심정적 자산은 훗날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꿀 새로운 종교적 사유와 실천의 모태가 되었다.
◆ 안채의 정성이 산천의 제단으로, 독생녀를 예비한 거룩한 응축
나라의 질서는 무너졌지만, 강산(江山) 곳곳에서는 하늘을 향한 뜨거운 정성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전쟁 이후 각지의 마을에서 되살아난 당산제와 산신제는 절망에 빠진 공동체를 다시 묶어 세우는 영적 보루였다. 흥미로운 점은 제단 위에 올려질 제물과 지극한 정성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오롯이 어머니들의 몫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새벽 찬물로 몸을 정갈히 하며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고 하늘의 평안을 빌었다. 왕조의 제도는 흔들렸으나, 공동체의 생명을 수호하려는 어머니들의 기도는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다.
이러한 정성의 기록은 민속의 현장 곳곳에서 생생히 남아 있다.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 놓고 새벽 별 아래 무릎을 꿇던 이들, 아이의 쾌유를 위해 산신(山神)과 칠성(七星)에게 매달리던 주체는 언제나 우리네 어머니들이었다. 국가의 제례가 사대부 남성들의 전유물로 전락하여 권위의 옷을 입었을 때, 삶의 현장에서 하늘과 직접 소통하며 천륜을 잇는 사명은 여성들의 손길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왔다. 정화수는 단순한 물이 아니라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는 가장 원초적인 매개였으며, 고대 제천 의식의 신성을 일상의 삶 속에서 보존해온 거룩한 증거였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 북부 지방에서 널리 행해진 위령 굿은 이러한 신앙의 집약된 형태였다. 전쟁으로 죽은 이들의 혼을 달래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이 의식의 중심에는 여성 샤먼들이 있었다. 그들은 백성의 슬픔을 하늘에 고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치유하는 실질적인 주권자이자, 가부장적 질서가 포기한 민초들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정신적 지주였다. 비록 지배층은 이를 경계하고 배척했으나, 정작 국가적 가뭄이나 역병이 닥칠 때마다 여성들의 영적 권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가려진 여성 신성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전쟁과 기근이 반복되던 혼란의 시대 속에서 공동체의 생명을 지탱해 온 것은 산천과 안채를 가리지 않고 이어진 어머니들의 눈물어린 정성이었다. 그것은 개별적인 기도를 넘어 시대를 관통하며 축적된 거대한 심정의 물줄기였다. 이름 없이 바쳐진 그 기원들은 흩어지지 않고 민족의 심층 속에 쌓여 하나의 거대한 방향으로 응축되었다. 수많은 어머니가 각자의 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올렸던 정성은 훗날 인류 앞에 드러날 하늘의 섭리를 준비하는 거룩한 마중물이자, 실체적 메시아로서 강림하실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가장 비옥한 영적 토양을 구축한 셈이다.
고기훈 박사(한국학)
2026-07-03 17:2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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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목회자정책자문위원회 출범…공정·투명 거버넌스 강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 통일교)이 본부와 현장 교회 간 소통을 강화하고 정책 결정 과정에 현장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전담기구를 공식 출범시켰다.
가정연합은 1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 한국협회본부 7층 회의실에서 ‘목회자정책자문위원회’ 출범식을 개최했다고 밝혔다. 이번 자문기구는 ISO 통합인증 후속 조치의 일환으로, 현장 목회자와 공직자의 의견을 체계적으로 수렴해 교단의 정책과 인사 운영에 반영하기 위해 설치됐다.
한국협회는 앞으로 인사위원회와 윤리위원회, 목회자정책자문위원회를 중심으로 공정성과 투명성을 강화하는 조직 운영 체계를 구축해 나갈 계획이다.
이날 출범식에서 송용천 한국협회장은 “목회자정책자문위원회의 출범은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고 협회와 교회가 함께 책임지는 소통 체계를 구축하는 새로운 출발”이라며 “지역과 세대, 여성 공직자를 아우르는 대표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의견을 균형 있게 수렴해 실질적인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는 정책 자문기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협회도 제안된 의견을 성실히 검토해 정책에 적극 반영하겠다”며 “협회와 현장이 하나의 공동체라는 인식 아래 더욱 긴밀히 소통하며 교단의 미래를 함께 열어가자”고 강조했다.
출범식은 개회선언과 가정맹세, 감사기도, 경과보고, 임명장 수여, 협회장 말씀과 축도, 억만세 삼창, 폐회선언 및 기념촬영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임명장을 받은 위원은 모두 15명으로, 당연직 2명을 비롯해 교구장 대표, 권역별 대표, 세대별 대표, 여성 공직자 대표 등으로 구성됐다.
이어 열린 2부 회의에서는 위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위원들의 투표를 통해 조중휘 경기북부교구 구리교회장을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조 위원장은 취임 인사에서 “현장 목회자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교단 정책에 충실히 반영되고 실질적인 제도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위원들과 함께 지혜를 모아 나가겠다”고 밝혔다.
목회자정책자문위는 지난 6월 2일 추진안 보고를 시작으로 후보자 추천과 권역별·세대별·직군별 온·오프라인 투표를 거쳐 위원을 선출했으며, 위원의 임기는 2년으로 연임이 가능하다.
위원회는 앞으로 △교단 발전과 쇄신을 위한 인사정책 자문 △주요 정책 추진 과정에서의 현장 의견 수렴 △합리적인 의사결정 체계 구축, 목회환경 개선 △목회자 복지와 처우, 평가 및 교육정책 개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책 자문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
2026-07-01 15: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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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6>예수(Jesus)-“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칼과 힘의 시대, 상식을 뒤집은 '원수 사랑'의 선언
바로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예수가 탄생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목수의 아들로 알려진 예수는 서른 살 무렵부터 사람들 앞에서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권력이나 학문적 지위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병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과 함께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했다. 예수가 평생 전하고자 했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바로 이 ‘하나님 나라’였다. 그러나 그가 말한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만 들어가는 먼 미래의 세계가 아니었다. 사랑과 정의, 용서와 화해가 인간의 삶 속에서 실현되는 새로운 질서이자 삶의 방식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칼과 힘으로 세상을 바꿀 것이라 기대했지만, 정작 예수가 가져온 것은 사랑과 용서라는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너무도 연약해 보이는 길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고, 극히 일부 사람들만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훗날 기독교로 이어질 새로운 길이 유대교와 갈라지기 시작했다.
예수가 남긴 가르침 가운데 후세 사람들이 가장 깊이 기억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메시지였다. 그는 인간이 단지 율법과 규칙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 속에서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사랑을 감정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인간 삶의 가장 근본적인 윤리로 이해했다.
특히 후대에 큰 충격을 준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도발적 선언이었다. 인간 사회는 보통 미움에는 미움으로,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응해 왔다. 그러나 예수는 증오의 악순환을 끊지 못하면 인간은 끝내 서로를 파괴하게 된다고 보았다. 제자 베드로가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하라”고 답했다. 당시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급진적 용서의 윤리였다. 예수는 사랑이 가까운 사람 뿐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인간 관계의 원칙으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하라”는 가르침은 후대 윤리 사상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더 나아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통해, 겸손하고 상처받은 사람들 속에서 인간의 영적 가능성을 보려 했다. 예수는 인간이 정치적 힘이나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진실과 올바른 삶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로마의 박해를 무너뜨린 헌신, 지하 감옥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그러나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형식주의를 비판하고 성전 중심의 권위에 도전하는 예수를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은 위험한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사실 예수의 이러한 영성은 깊은 기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중요한 순간마다 광야와 산, 새벽의 고요한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세상을 향한 사랑과 용서는 인간적인 의지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흘러나온 삶의 열매였다. 결국 예수는 체포되어 당시 반역자나 중범죄자에게 가해지던 가장 치욕적인 처형 방식인 로마의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조롱과 멸시 속에서 처형당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바로 그 순간에 있었다. 인간은 보통 극한의 고통 속에서 분노와 복수를 떠올리기 쉽지만, 예수는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향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기도를 남겼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용서와 사랑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 장면은 후대 사람들에게 거대한 충격과 울림을 주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십자가 사건과 부활 신앙 위에서 형성되었다. 제자들은 예수가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났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거대한 종교 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그들의 사랑과 희생, 공동체 정신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였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로마에서 일어났다.
서기 251년, 로마 제국 전역에 전염병(시프리안 페스트)이 창궐해 하루에 수천 명씩 죽어 나갔다. 당시 로마의 황제와 귀족, 이교도 사제들은 감염이 두려워 가족마저 길거리에 버리고 도망치기 바빴다. 로마 사회의 도덕적 붕괴였다. 이때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도망치지 않고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예수의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자신들을 박해하던 이교도와 원수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병자들에게 물과 음식을 먹이며 간호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기독교인이 감염되어 목숨을 잃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로마인들은 깊은 충격에 빠졌다. 칼과 군대보다 더 무서운 역병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목숨을 건 원수 사랑’은 로마인들의 인식을 뒤흔들었다. 이후 로마인들이 대거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기독교는 로마의 지하 감옥을 뚫고 나와 세계의 중심 종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결국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공인 이후 세계사의 중심 종교로 성장하며 유럽 문명과 예술, 철학과 윤리의 뼈대를 이루게 된다.
◆십자가에서 피어난 박애 정신, 현대 보편적 복지의 모태가 되다
오늘날 누구나 아프면 찾아가는 ‘공공 병원’과 ‘복지 제도’의 시초가 바로 예수의 박애 정신에서 탄생했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인 서기 369년, 카파도키아(지금의 튀르키예 지역)의 주교였던 바실리우스는 예수의 가르침을 사회 제도로 구현하기 위해 거대한 시설을 지었다. 그 전까지 고대 세계에서 병원이나 의사는 오직 왕족과 귀족, 부자들만을 위한 전유물이었다. 가난한 자들은 병들면 버려져 죽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바실리우스는 가난한 자, 나병 환자, 부랑자 등 ‘돈 없고 소외된 이들’만을 위해 아무런 대가 없이 치료하고 먹여주는 세계 최초 수준의 공공 의료 공동체 ‘바실리아스(Basilias)’를 세웠다. 이 시설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간은 신분과 조건에 상관없이 아프면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는 보편적 복지 개념을 탄생시켰다. 이 정신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오늘날의 병원(Hospital)과 복지 체계의 모태가 된 것이다.
물론 기독교 역사 역시 완벽하지 않았다.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식 종교 재판, 권력과의 결탁 같은 어두운 역사 속에서 사랑의 종교가 때로는 폭력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한계와 모순 속에서도 “가난한 자를 돌보라,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간을 보라”는 예수의 원래 메시지는 끊임없이 다시 소환되었다. 첨단 과학의 시대이자 경쟁과 분열이 심화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예수를 다시 읽는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으나 인간의 증오와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고, 초연결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도리어 더 깊은 고립감을 느끼며 서로를 쉽게 적으로 규정한다. 예수 사후 2,000년이 흐른 지금, 그가 던진 ‘사랑은 과연 현실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 화두를 인류는 여전히 움켜쥔 채 놓지 못하고 있다.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2026-07-01 10:2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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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와 동고동락 70년… 종교에서 사회공헌 플랫폼으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프롤로그:70년의 여정이 남긴 것
2025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이 창립 71주년을 맞았다. 1954년 한국전쟁의 잔해가 채 가시지 않은 서울에서 출발한 이 조직은 70여 년간 한국 사회와 함께 성장하고 변화해왔다. 종교 단체로 시작했지만, 오늘날 가정연합은 교육·구호·문화·평화 영역을 아우르는 사회공헌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다.
70년의 역사는 단순한 시간의 축적이 아니다. 전후 재건기의 구호 활동에서 시작해 산업화 시대의 교육 투자, 세계화 시대의 평화운동, 21세기 지속가능성 시대의 포괄적 사회공헌으로 진화해온 궤적이다. 가정연합은 이 과정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적 역할을 앞서 읽고 그에 맞춰 활동 방식을 재구성해왔다.
본 특집은 가정연합의 70년 여정을 객관적 시각으로 되짚어본다. 창립부터 현재까지 시대별 주요 활동과 전환점, 한국 사회에 구축한 ‘생활형 공헌 구조'의 특징, 그리고 구호에서 지속가능성으로 이어지는 변화를 중심으로 가정연합이 걸어온 길을 조명한다.
1950~60년대:전후 혼란기-종교적 이상과 지역사회 봉사
폐허 위에 세워진 희망
1954년 5월 1일, 서울 성동구 북학동의 작은 건물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가 창립됐다. 한국전쟁 휴전 후 불과 10개월 만이었다.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화됐고, 수많은 전쟁미망인과 고아들이 거리를 헤맸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사람들은 육체적 궁핍과 정신적 공허 속에서 방황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가정연합은 초기부터 두 가지 방향성에 초점을 맞춘 활동들이 나타났다. 하나는 ‘참가정'의 이상을 통한 정신적 가치 회복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통받는 이웃을 돕는 구체적 실천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조직은 서서히 외연을 넓히기 시작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지방 주요 도시로 조직이 확산되었고, 각 지부는 새 말씀을 통한 가정의 가치 회복과 함께 야학과 유치원 운영을 비롯해 영농 지원, 노인 시설 방문 등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봉사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열악한 환경 속에서 중학교 진학조차 꿈꾸기 어려웠던 농어촌 청소년들을 위해 목회자와 청년, 고등학생들이 야간학교 교사로 나섰다. 이들은 학교 운영비 마련을 위해 대도시로 올라가 연필장수와 엿장수, 비누장수 등 닥치는 대로 행상을 했고, 때로는 구두닦이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실로 충주 지역 야학인 성화학원에서는 700여 명에 이르는 졸업생이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훗날 지역 사회를 떠받치는 향토의 역군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당시 다른 종교·민간 단체들의 노력과 함께 전후 사회 재건의 한 축을 이뤘다. 그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은 이후 해외로까지 확장되었다.
반공과 도덕 재무장의 시대
1960년대는 한국 사회가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거치며 정치적 격변기를 맞은 시기였다. 이 시기 가정연합은 반공 이념과 도덕 재무장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전통적 가족 유대가 약화되는 상황에서, 가정의 가치를 강조하는 가정연합의 메시지는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 시기 가정연합은 국제승공연합을 조직해 공산주의의 오류를 비판하고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강조하는 승공(勝共) 이념을 전파했다. 이 과정에서 가정연합의 승공 활동은 국가 주도의 반공 정책과 접점을 형성하며 긍정적 평가와 비판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가정연합은 국내에 14개 시·도지부, 230개 시·군지부, 3,416개 읍·면·동지부를 두고, 직·간접 참여자를 포함한 추산치로 60여만 명의 연수교육 수련자와 700만 회원을 보유했으며, 나아가 아시아와 유럽, 북미·남미,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 100여 개국에 활동 거점을 두고 승공운동을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해왔다.
1970~80년대:국제화의 가속과 교육·문화 투자
세계로 향하는 발걸음
1970년대는 가정연합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창립자인 문선명·한학자 총재 내외가 1971년 미국으로 활동 기반을 옮기면서 미국은 가정연합 세계화의 출발지가 되었다. 문 총재 내외는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 전역 70개 도시를 순회하며 강연을 이어갔고, 이를 통해 미국 사회와 기독교계에 영적 각성과 도덕적 회복을 촉구했다. 그 순회강연의 정점은 1976년 9월 18일 미국 워싱턴 모뉴먼트 광장 대집회였는데, 이날 강연회에는 30만 명이 운집한 것으로 보도돼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문목사는 이 자리에서 미국이 건국 이념인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갈 것과 하나님의 창조원리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는데, 당시 많은 국내 언론에서도 문 목사의 집회를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으로 평가했다.
국제화는 가정연합의 활동 범위와 실천 방식 전반에 구조적 변화를 가져왔다. 국가와 지역마다 문화적 맥락과 사회적 요구가 상이한 만큼, 획일적인 종교 활동보다는 각 사회의 현실에 부합하는 맞춤형 사회공헌이 요구되었다. 이에 가정연합은 한국어 보급 사업을 비롯해 교육과 문화, 언론, 사업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활동의 지평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략적 전환 속에서 가정연합의 선교 조직은 미국을 기점으로 일본과 유럽, 남미 등지로 확산되며 국제적 기반을 확립해 나갔다.
교육을 통한 사회 기여의 시작
가정연합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교육 기관 설립이었다. 국내외에 많은 초중등 교육기관이 운영되고 있다. 이들 학교는 학문적 우수성과 함께 인성교육, 학생 봉사활동을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 외국인 학생과의 공동 수업·기숙사 운영을 중시한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타인을 배려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인재를 기르는 것이 교육 목표다.
1974년 선화예술중고등학교를 설립한 데 이어 1986년에는 충남 아산에 선문대학(현 선문대학교)이 개교했다. 설립 당시부터 국제화와 실용 교육을 표방한 선문대는 IT산업 선도, 외국어 교육 강화, 해외 대학과의 적극적 교류, 다문화 학생 적극 수용 등 당시로서는 타 대학에 비해 조기도입을 시도한 것이다.
선문대는 설립 후 40년 가까이 지역 사회와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종합대학으로 성장했다. 외국어, 국제통상, 공학, 자연과학, 인문사회과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교육과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국제화는 선문대의 가장 큰 특징이다. 현재 세계 80여 개국에서 온 외국인 유학생이 재학 중이며, 해외 대학과의 교환학생 프로그램도 활발하다.
1990~2000년대:평화운동의 제도화와 다문화 지원의 체계화
평화 NGO로의 전환
냉전 종식과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1990년대 가정연합은 평화운동을 본격적으로 제도화했다. 1991년 세계평화여성연합(WFWP)이 창설돼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 포괄적 협의지위를 획득했다. 이는 가정연합 관련 조직이 국제 NGO로 공식 인정받은 초기사례 중 하나였다.
여성연합은 여성의 역량 강화, 모자보건, 교육 증진, 평화 구축 등의 활동을 전개하며 국제사회에서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특히 개발도상국 여성들의 문해교육, 직업훈련, 소액대출 프로그램 등을 통해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했다. 유엔 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며 여성과 평화 의제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종교 간 대화와 협력을 위한 플랫폼 구축에 주력했다. 기독교, 이슬람, 불교, 유대교, 힌두교 등 세계 주요 종교 지도자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대규모 컨퍼런스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이러한 노력은 예루살렘평화대행진, 중동평화회의, 세계초종교초국가연합 운동으로 이어졌고, 2005년 천주평화연합(UPF) 창설로 이어졌다.
UPF는 종교 지도자뿐 아니라 정치인, 학자, NGO 활동가, 기업인 등 다양한 분야의 리더들이 참여하는 글로벌 거버넌스 플랫폼으로 설계됐다. 분쟁 지역의 갈등 조정, 종교 간 화합 촉진, 평화 교육 확산, 지속가능한발전 논의 등 폭넓은 의제를 다뤘다. UPF 역시 UN경제사회이사회로부터 NGO ‘포괄적 형태의 협의 지위'를 획득했으며, 유엔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며 국제 평화 NGO로서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국내에서 시작된 교육·구호 활동은 이후 국경을 넘어 네팔과 캄보디아 등 교육 인프라가 취약한 오지 국가로 이어지며, 초·중등학교 건축과 도서관 건립, 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운영, 교보재 지원 등으로 확장되었다. 단발성 지원에 그치지 않고, 지역 사회의 자립과 미래 세대 육성을 목표로 한 지속적인 교육 봉사로 발전하면서, 가정연합의 활동은 세계 오지 지역을 아우르는 국제적 사회공헌 모델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선학평화상: 평화운동을 조명하는 국제상
2015년, 가정연합은 국제적 평화상인 선학평화상(Sunhak Peace Prize)을 제정했다. 이 상은 인류의 평화와 복지 증진에 탁월한 기여를 한 개인과 단체를 발굴·격려하고, 그 성과를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기존의 국제 평화상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종교 간 화합과 갈등 해소, 인류애 실천, 지속가능발전 등 인류 공동의 과제에 대해 국제적 차원에서 실질적 성과를 이룬 주체들을 조명해 왔다.
초대 수상자는 전 세계에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며 해양보호구역 합의를 끌어낸 기후행동 리더 키리바시 공화국 전 대통령 아노테 통 박사와 친환경적인 양식 어종을 개량하여 동남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식량안보에 기여한 모다구두 비제이 굽타 인도 양식 과학자이다. 2017년에는 아프가니스탄 사키나 야쿠비 난민 교육가와 지노 스트라다 이탈리아 의사가, 2019년에는 와리스 디리 소말리아 인권운동가와 아킨우미 아데시나 아프리카개발은행 총재가 수상했다.
선학평화상은 수상에 그치지 않고, 수상자들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며 그들의 메시지를 확산시키는 플랫폼 역할을 해오고 있다. 시상식과 함께 개최되는 국제 컨퍼런스는 전 세계 평화 활동가, 학자, 정책입안자들이 모여 평화 의제를 논의하는 장이 됐다.
순국선열 보은·평화계승 사업
가정연합은 애국지사와 순국선열의 희생을 기리는 다양한 민간 노력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의 정신을 한일 화해와 동북아·세계 평화로 확장해왔다.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을 중심으로 여순법정기념관을 조성·보존하며, 안중근 의사의 애국정신과 동양평화 사상을 국제 평화 담론 속에서 조명해온 시도가 그 대표적 사례다.
아울러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일본인회’는 일본의 역사 왜곡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 문제를 성찰하는 취지로 사죄의 뜻을 표명하며 서대문 독립공원과 서대문형무소 일대에서 한일합동 위령제를 지속적으로 개최해왔으며, 문윤국선생기념사업회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문윤국 선생의 독립운동과 교육적 업적을 기리고 계승해왔다. 이러한 활동들은 민간 차원의 사죄와 역사 성찰, 보존과 교육을 결합해 과거의 희생을 미래 평화로 잇는 가정연합의 이러한 활동들은 민간 차원에서의 역사 기념과 평화 담론을 연결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국제결혼과 다문화가정 지원 활동
1980년대는 가정연합의 두드러진 현상인 6000쌍, 6500쌍 등으로 이어지는 수천 쌍 규모의 국제합동결혼식이 본격화된 시기다. 198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된 대규모 국제 합동결혼식으로 인해 한국에 정착한 외국인 배우자 수가 급증했다. 가정연합은 이를 통해 이미 수천 쌍의 다문화가정이 형성되었다. 한편 이러한 국제합동결혼은 개인의 선택과 문화 적응, 인권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과 비판도 함께 불러왔다. 무엇보다 이들의 한국 사회 적응은 가정연합에게 중요한 과제였고, 동시에 사회적 책임이기도 했다.
가정연합은 1990년대부터 다문화종합복지센터를 설립해 다문화가정이 한국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한국어 교육과 한국 문화·생활 적응 프로그램, 시부모와 배우자 관계 개선을 위한 가족 상담을 통해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갈등과 정서적 고립을 완화해 왔으나 한계도 존재했다. 또한 자조 모임을 운영해 비슷한 처지의 다문화가정 여성들이 경험을 나누고 상호 지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자녀 출생 이후에는 이중언어 교육과 정체성 존중 교육을 지원하고, 학교 입학 후에는 학업 지도와 진로 상담, 학교생활 적응 프로그램까지 연계했다. 나아가 직업교육과 취업·창업 지원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도왔으며, 일부 여성들은 다문화 강사, 통역사, 한국어 교사 등 자신의 언어적·문화적 배경을 살린 전문직으로 진출했다. 이러한 통합적 지원은 정부 정책을 보완하는 민간 영역의 강점으로 평가받으며 가정연합을 다문화가정 지원 분야의 하나의 선도적사례로 평가되기도 했다.
장학사업의 전개
장학사업은 가정연합의 사회공헌 가운데 장기간 지속되어 온 핵심 영역 중 하나다. 효정세계평화재단, 선문대학교, 세계평화여성연합,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등 산하기관을 통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위한 장학 사업이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특히 2012년 문 총재 성화 이후 전 세계에서 추모와 기념의 뜻으로 모인 성금 500억 원과 문 총재가 사용하던 헬기 판매금을 포함해 1100여 억원이 장학사업의 중요한 기금이 됐다. 이를 통해 국내 4,416명, 해외 1,571명 등 총 5,987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해 왔다.
장학 사업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배려를 원칙으로 운영되며, 다문화가정 자녀, 저소득층 가정 학생, 북한이탈주민 및 한부모가정 자녀를 핵심 지원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는 재정적 지원을 넘어 멘토링 기반의 학업·진로 지원 체계를 결합한 통합적 인재 육성 모델을 지향하며, 장학생들이 장기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구성원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구조를 목표로 한다.
문화예술: 60년을 이어온 문화 외교
리틀엔젤스 예술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은 가정연합의 문화예술 활동을 대표하는 조직이다. 이들은 60년 이상 활동하며 한국 문화예술의 세계화와 대중화에 기여해왔다.
어린이 고전 무용단인 리틀엔젤스는 1962년 창단 이후 150여 개국, 6천여 회 이상 공연을 펼치며 국위선양에 기여했다. 1973년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을 위한 위문 활동과 2000년대 들어 한국전 참전국 사회와 참전용사를 대상으로 해외 보은 공연으로 이어졌다. 리틀엔젤스는 한국의 전통 춤과 음악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선보이며, 세계 각국에서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문화 외교관 역할을 해왔다. 유엔본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어전(御前) 공연, 백악관, 크렘린궁 등 각국 정상들이 참석한 공식 행사에서 공연했다. ‘리틀엔젤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공연을 보고 어린이무용단에게 사용한 표현에서 비롯됐다.
유니버설발레단은 1984년 창단 이후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지젤』 등 클래식 발레의 명작들을 꾸준히 공연했다. 해외 유명 발레단과의 교류 공연, 세계적 무용수 초청 공연 등을 통해 국내 발레 애호가들에게 수준 높은 공연을 선사해왔다. 젊은 발레 인재들에게 실질적인 무대 경험을 제공하며, 한국 발레계의 인재 양성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 결과 문훈숙, 강예나, 이상은, 강미선 등 다수의 세계적 무용수를 배출하며 한국 발레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들 예술단의 특징은 수익성보다 예술적 가치와 문화 교류를 중시해 온 것으로 평가된다. 수익성이 낮더라도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예술이 지닌 사회적·공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역점을 두고 활동해왔다. 이러한 행보는 가정연합의 사회공헌이 일회적 지원이나 물질적 후원에 머무르지 않고, 문화와 예술을 매개로 사회적 가치의 지평을 확장해왔음을 보여준다.
2010년대 이후:지속가능성 시대와 글로벌 거버넌스
환경과 지속가능성
2010년대는 기후변화가 인류의 실존적 위협으로 부상한 시기였다. 2015년 파리기후협정 체결과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채택은 전 세계가 환경과 지속가능성을 중심 의제로 삼게 된 전환점이었다. 가정연합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적극 동참했다.
가정연합은 산하에 효정국제환경평화재단을 설립해 국내외 학술회의, 국제환경단체와 글로벌 연대 등을 통해 기후환경 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으며, 2020년 이후 전국 각지의 가정연합 지부에서는 정기적인 환경정화 활동이 시작됐으며, 매년 수백 명의 회원이 참여하고 있다. 회원들은 산과 하천, 해안 청소, 재활용 및 줍깅 캠페인, 식목 활동 등을 벌이며 일상적 봉사 활동으로 자리잡았다. 단순한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일회용품 사용 절감, 자원 재활용, 생활 속 탄소 저감 실천 등을 주제로 한 교육 프로그램도 병행됐다.
특히 가정연합 내부에서는 인간 중심적 관점을 넘어 자연과 생태계를 존중하는 ‘참사랑 실천’이라는 윤리적 성찰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환경 파괴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나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하는 윤리적·영적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UPF 역시 기후변화와 지속가능발전을 주제로 한 국제 컨퍼런스를 통해 종교·과학·정책 간 협력 논의를 이어갔다.
디지털 전환과 새로운 소통 방식
2010년대는 또한 디지털 기술이 사회 전반을 변화시킨 시기였다. 가정연합도 기존의 대면 중심 종교 활동에서 벗어나,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소통 구조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Peace TV, 페이스북, 유튜브 등을 통해 예배·강연·봉사 활동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해외 신도들과도 상시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디지털 전환은 가속화됐다. 대면 예배와 모임이 제한되면서 온라인 예배, 화상 세미나, 원격 교육이 일상적 운영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봉사활동도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야 했다. 비대면 방식의 심리상담, 온라인 멘토링, 취약계층 디지털 접근성 향상 지원 등 상황에 맞는 창의적 대응이 이뤄졌다. 특히 청소년과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멘토링 프로그램은 팬데믹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운영됐다.
팬데믹 초기에는 각 지부를 중심으로 마스크와 방역물품을 의료기관과 취약계층에 긴급 지원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고립된 독거노인들에게 안부 전화와 생필품 배달 서비스를 제공했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다문화 가정들에게 식료품과 생활비를 지원했다.이 시기는 위기 상황에서도 활동 방식을 조정하며 사회공헌을 이어간 경험으로 남았다.
의료봉사·의료기관 설립
가정연합은 1970년대부터 국내 및 국제 의료봉사 활동을 지속해왔다. 인도적 지원과 사회공헌을 목적으로 한 의료봉사 활동은 한국, 일본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의료진이 참여해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등지에서 진행되고 있다.
국내 가정연합의 의료봉사는 1971년 8월 한국과 일본 의료진의 합동으로 국내 소외지역 주민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첫 활동에서는 일본 기독의료봉사단 40명과 한국 측 46명 등 총 86명이 부산, 대구, 전주에서 10일간 무료 진료를 실시했다. 이후 매년 정기적으로 진행됐으며, 1973년 활동에서는 연인원 2,000명을 진료하는 등 규모가 확대됐다.
한국·일본 의료진은 ‘아시아 이동의료봉사단(AMMS)'을 결성해 국제 의료봉사에도 나섰다. 처음에는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 등의 오지에서 주로 활동했다. 1994년 제24차 필리핀 활동에는 3개국 195명의 의료진이 참여했으며, 현지에 필리핀 AMMS를 설립하고 구강 보건 사업을 추진했다.
활동 범위는 1997년 이후 더욱 확대돼 2000년 브라질과 파라과이, 2019년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2005년부터는 세계평화여성연합과 협력해 무료 진료를 강화했다. 여기에는 또 가정연합 산하 애원자원봉사협회 등 유관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코로나19로 3년간 중단됐던 캄보디아 의료봉사가 2022년 12월부터 2023년 1월까지 재개됐다. 가정연합 유관단체인 자원봉사애원 주관으로 크라티에(Kratie) 지방에서 진행된 활동에는 HJ 매그놀리아 글로벌의료재단과 선문대 국제의료봉사단이 참여했다. 현지 캄보디아 왕립행정아카데미, 왕립프놈펜대, 프놈펜의대 의료진과 협력해 730명의 주민에게 진료를 제공했으며, 충치, 당뇨, 관절염 등을 주로 치료했다.
가정연합은 재단 산하에 일미치과를 설립한 것을 계기로, 일본에 암 전문 일심병원과 경기도 가평에 HJ 매그놀리아 국제병원, HJ 매그놀리아 글로벌의료재단 등을 잇달아 설립하며 공공 의료 접근성이 낮은 지역을 중심으로 의료 지원 인프라를 확장해왔다
에필로그:70년을 넘어, 다음 세대를 향해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70년 역사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다문화 사회로 발전해 온 한국 현대사의 궤적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이 변화의 흐름 속에서 가정연합은 ‘종교는 사회에서 어떤 책임을 다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구호와 교육, 평화와 지속가능성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실천으로 그 답을 제시해 왔다.
가정연합이 활동을 통해 반복적으로 강조해 온 메시지는 분명하다. 신앙은 삶과 분리될 수 없으며, 종교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을 향한 구체적인 행동 속에서 비로소 증명된다는 믿음이다.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과 ‘참사랑'이라는 핵심 가치는 개인의 영적인 깨달음을 넘어 사회 전체의 평화와 행복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이어져 왔다.
70년의 발자취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맞춰 활동 방식은 유연하게 진화시키면서도 ‘가정'과 ‘평화'라는 본질적인 가치는 흔들림 없이 지켜왔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논란과 비판의 목소리도 존재해 왔다. 그러한 비판을 최대한 수용하면서 가정연합은 묵묵히 사회 공헌 활동을 이어가며 행동으로 신뢰를 쌓아왔다.
다가올 시대는 기후 위기, 급격한 기술 혁명, 심화되는 불평등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에 대한 해답 역시 참사랑의 실천, 건강한 가정과 공동체의 회복, 그리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깊은 성찰 속에서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70년의 역사는 끝이 아니라,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약속이다. 한 개인의 행복한 가정에서 출발하여 인류가 하나의 가족으로 화합하는 그날까지, 가정연합의 여정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참사랑으로 하나 된 세계를 향한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2026-06-28 19:4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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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5>조로아스터(Zoroaster)-“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인류 최초의 선악 이원론 정립
흥미롭게도 그의 이름은 현대 대중문화와 철학의 가장 높은 자리에 다른 형태로 새겨져 있다. 철학자 니체의 명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짜라투스트라’가 바로 조로아스터의 독일어식 발음이다. 이 제목으로 오케스트라 교향시도 만들어졌는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걸작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오프닝 테마곡으로 소개돼 공전의 히트를 쳤다. 고대 페르시아의 선각자가 외친 선악 사상이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 문명과 인간의 진화를 논하는 철학적·예술적 상징으로 부활한 셈이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키루스 2세와 다리우스 1세가 호령하던 시기, 세계 최대 규모의 문명권이었다. 다만 조로아스터가 정확히 어느 시대 인물인지를 두고는 지금도 학계의 논쟁이 뜨겁다. 기원전 1500년 무렵의 까마득한 고대로 보기도 하고, 인류 정신사에 큰 획을 그은 기원전 6세기 전후로 보기도 한다. 그만큼 그의 삶은 신화와 역사적 실존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그가 등장할 당시 고대 이란 지역은 수많은 자연신을 섬기던 다신교 사회였다. 당시 종교의 중심에는 ‘카르반’이라 불리는 주술적 사제 계급이 있었다. 이들은 부족의 번영을 기원하며 가축을 잔인하게 도살하는 ‘피의 제사’를 지냈고, 환각 음료를 마시며 황홀경 속에서 부족 간의 약탈과 전쟁을 일삼았다. 그 중심에 세운 존재가 우주의 유일한 최고신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다. 아후라 마즈다는 진리와 빛, 우주의 질서를 상징한다. 반대로 세상에는 이에 대항하는 거짓과 파괴의 악한 영인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 아리만)’도 존재한다고 보았다. 조로아스터는 인류의 역사를 바로 이 두 힘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영적 전쟁의 과정으로 파악한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조로아스터가 인간을 단순히 전쟁에 휩쓸려 가는 나약한 피조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인간에게 철저한 ‘선택의 자유와 책임’을 부여했다. 조로아스터교 성전(聖典) ‘아베스타’의 찬가 ‘가타’에는 그의 목소리가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최고의 진리를 귀로 듣고, 맑은 마음으로 깊이 사유하라. 그리하여 선과 악, 두 길 중에서 그대 자신을 위한 길을 스스로 선택하라. 마지막 대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각자가 지닌 신념을 깨워 결단하라.”
인간은 매 순간 선과 악 사이에서 무엇을 따를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 개인의 도덕적 선택이 우주적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저울추가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복잡한 제사의식을 폐지하고 가장 단순하면서도 엄격한 삼덕 윤리를 제시했다. 바로 “선한 생각, 선한 말, 선한 행동”이다. 마음에서 시작해 외부의 실천에 이르기까지 모든 궤적이 진리를 향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을 운명의 노예가 아닌 도덕적 주체로 격상시킨 이 위대한 통찰이야말로 후대 사상가들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선한 생각’ ‘선한 말’ ‘선한 행동’ 삼덕 윤리를 제시하다
조로아스터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오브제는 ‘불’이다. 이 때문에 동양권에서는 불을 숭배하는 ‘배화교(拜火教)’라 부르며 오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불은 숭배 대상이 아니라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의 현신이자 빛과 진리를 비추는 매개체였다. 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명징하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거짓을 물리치는 진리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묵시록적 세계관은 사후세계와 최후 심판 개념으로 이어지며 서구 종교 전통에 깊은 낙인을 남겼다. 인간은 죽은 뒤 삶에 대한 엄격한 심판을 받아 천국이나 지옥으로 향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역사의 마지막 날에는 악의 세력이 완전히 패배하고 세상이 순수한 빛으로 정화된다는 ‘종말론적 희망’을 노래했다. 바빌론 포로 생활을 겪던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문화와 접촉하면서 이 사상을 흡수했고, 이것이 유대교를 거쳐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뼈대가 되었다는 견해는 학계의 정설이다.
조로아스터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고독한 예언자의 신앙 개혁 운동에 가까웠으나, 사후 수세기를 거치며 페르시아의 강력한 왕권과 결합했다. 특히 3세기 사산왕조(薩珊王朝)에 이르러 공식 국교로 선포되며 찬란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권력과 결합한 사제 계급이 특권층이 되어 내부적으로 경직되고 타락하면서 순수한 도덕적 생명력을 잃어갔다. 결국 7세기 중반 이슬람을 앞세운 아랍 세력의 정복 앞에 조로아스터교는 역사 뒤안길로 급격히 쇠퇴했다. 무거운 세금과 차별 속에 대다수 민중은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신앙을 지키려던 이들은 인도로 망명하여 오늘날 ‘파르시(Parsi)’라 불리는 혈통 공동체로 겨우 명맥을 잇게 되었다.
석가모니가 마음속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평화를 얻고자 했다면, 조로아스터는 마음속에서 날마다 선을 ‘선택하고 투쟁함’으로써 우주를 구원하고자 했다. 조로아스터에게 마음이란 평온의 안식처가 아니라, 매일 아침 선한 무기를 들고 깨어 있어야 하는 가장 치열한 영적 요새였다. 그리고 선과 악의 싸움은 인류가 매일 마주하는 선택 속에서 치열하게 반복된다. 세상은 가만히 둔다고 해서 저절로 선해지지 않는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결단해야 한다.
◆배화교‧니체를 거쳐 현대의 상징으로 부활
여기에 인류 지성사의 거대한 역설이 숨어 있다. 훗날 철학자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면서 “선과 악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남이 정해준 선악의 기준에 휘둘리지 말고, 네 삶의 가치는 네가 스스로 창조하라”며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을 180도 뒤집었다. 그러나 후세는 이 두 천재의 대립 사이에서 방황하는 대신,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두 가지 강력한 무기를 얻었다. 조로아스터를 통해 ‘우주적 정의를 위해 연대하는 전사의 책임’을 배웠고, 니체를 통해 ‘그 어떤 교리에도 종속되지 않는 주체적 자유’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두 길 모두 결국 인간을 위대한 결단의 주체로 세웠다는 점에서 본질은 통한다.
인류사 대부분의 종교에서 인간은 신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하는 나약한 피조물이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에서 인간은 아후라 마즈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의 악을 물리치는 ‘동반자(Co-worker)’다. 절대자인 신마저도 인간의 선한 선택과 실천이 있어야만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책임감을 이보다 극적으로 끌어올린 영성가는 드물다. 그래서 그가 남긴 황금률은 오늘날에도 매서운 울림을 준다. “세상의 악을 물리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증오나 칼이 아니라, 오직 선을 실천하는 올바른 삶이다.”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⑤조로아스터(Zoroaster)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2026-06-25 15:2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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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조선후기 노론 질서와 여성 신성의 전환 [신화에서 선민까지 한민족 정체성의 문화사적 발견-기고]
17세기 예학(禮學)의 등장과 여성 주체성의 재편
도올 김용옥 선생은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가 무슨 소용인가(人而不仁 如禮何)”라 단언하며, 예(禮)의 본질은 ‘인(仁)’이라는 뜨거운 마음의 뿌리에 있음을 주장한다. 한반도의 고대인들은 법이나 제도 같은 인위적인 통치 규범이 정착되기 이전부터 하늘이 부여한 순수한 심성과 영성을 바탕으로 깊은 공감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민족이었다는 사실이 여러 기록에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역사서인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동이는 인을 말하고, 생명을 사랑한다(東夷 言仁而好生)”며 우리를 군자의 나라로 기록하고 있는 데, 예법을 배우기 전에 이미 ‘인의 씨앗’을 품고 살았던 한민족의 영적 정체성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의 표현이었다.
천 년 고려의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성모(聖母)적 전통과 여성 중심의 질서는 바로 이러한 ‘인의 생명력’이 발현된 구체적 실체였다. 그러나 17세기 조선은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맞는다. 임진과 병자의 양란을 거치며 붕괴된 사회를 목도한 노론(老論) 사대부들에게 유교는 더 이상 역동적인 생명 철학이 아니었다. 특히 명(明)의 멸망 등 기존 질서의 붕괴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존재론적 위기 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새로운 규범적 질서를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송시열(宋時烈)을 필두로 한 이들에게 예학(禮學)은 통치의 편의를 위해 ‘공감’ 보다 ‘인위적 질서와 복종’을 앞세운 교조적 도구이자 무너진 조선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차가운 규범으로 변질되었다.
18세기 이후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중심으로 한 엄격한 예법은 가정과 사회 전반에 걸쳐 위계적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던 여성의 주체성과 모성 중심의 영적 질서는 점차 주변부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종법(宗法)을 기반으로 한 가부장적 질서는 가문의 계승과 권위를 남성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그 결과 여성은 생명의 주체이자 관계의 중심이라는 위치에서 점차 이탈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사회적 변화가 아니라, 여성이 하늘의 뜻을 직접 받아들이고 공동체에 전달하던 기존의 역할이 차단되고, 여성의 역할은 가계 계승을 위한 기능적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물론, 전쟁의 혼란기에는 여성들이 공동체를 수호하는 주체로 등장하며 ‘충(忠)’이라는 공적 가치의 영역에 이름을 올린 사례들도 분명 존재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된 인물들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론의 예학(禮學) 질서는 이러한 주체적 흐름을 제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여성의 역할을 가정 내부로 한정시키는 데 급급했다. 그 결과 여성에게 요구된 덕목은 공동체를 향한 ‘충’이 아니라, 남편에 대한 절대적 정절인 ‘열(烈)’로 재구성되었다. 이는 여성의 삶이 공적 질서와 직접 연결되던 통로가 점차 차단되고, 개인적 관계라는 폐쇄적 구조 속으로 매몰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조선후기의 예학은 한민족이 태초부터 견지해온 ‘인(仁)’의 문명이 가부장적 규범이라는 혹독한 겨울 속에 잠복하게 된 역사의 시련기였던 셈이다.
◆ 제도화된 질서, 일상의 구조가 바뀌다
조선후기 사회구조 변화의 핵심은 기존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유지하던 여성 중심의 상징 체계가 제도적 질서 속에서 주변으로 밀려났다는 데 있다. 이러한 구조적 전환은 한국 고유의 여성 신화와 민속 신앙 전통과의 대비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신화 체계는 마고(麻姑)의 대지 신화, 웅녀의 생명, 그리고 바리공주의 구원 서사로 이어지는 일관된 흐름을 보인다. 이 찬란한 계보를 관통하는 핵심은, 한반도의 고대 문화가 여성을 단순히 남성의 보조자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자 우주적 질서를 보여주는 거룩한 주체로 인식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가령 바리공주 서사는 버림받은 여성이 도리어 공동체를 구원하는 주체로 각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여성 개인이 짊어진 지극한 고통이 마침내 인류를 살리는 구원의 에너지로 승화되는 위대한 섭리적 여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예학 중심의 질서가 사회 전반을 재편하면서, 이러한 여성 중심의 신화적 세계관은 더 이상 공적인 질서의 일부로 인정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국가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중심에서 배제되어 ‘민간 신앙’ 혹은 ‘비정통적 문화’의 영역으로 이동하였고, 결과적으로 여성의 상징적 위상 역시 제도적 질서 속에서는 점차 축소되었다. 다시 말해, 여성 신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밀려나며 그 영향력을 지속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 후기까지도 민속 신앙과 무속 의례 속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조선무속고』를 비롯한 연구들에서도 확인되듯, 한국의 무속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특히 여성 주체가 중심이 되는 영적 구조를 보존해 왔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강화된 예학 중심의 질서는 이러한 신화적·민속적 전통을 ‘비정통’ 혹은 ‘저급한 풍속’으로 규정하며 점차 주변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한민족의 심층에 자리 잡고 있던 여성 중심의 영성 구조는 제도적 영역에서는 약화되고, 민간 신앙과 비가시적 문화 영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과정은 단순한 억압이 아니라 ‘표면 구조의 변화와 심층 구조의 지속’이라는 이중적 양상을 보여준다. 즉, 제도와 공식 담론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제한되었지만, 집단적 기억과 정서의 차원에서는 여성 중심의 서사와 ‘한(恨)’의 정서는 계속해서 축적되고 유지되었다. 이러한 축적된 감정 구조는 훗날 해원(解冤)과 치유의 문화로 전환될 수 있는 잠재적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 성리학적 교조주의적 종법질서와 여성의 이름 축소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여성은 본래 생명의 주체이자 신성한 영성을 지닌 능동적 존재였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여성은 경제적 자립권과 사회적 위상을 향유하며, 천륜(天倫)의 한 축으로서 당당히 자리했다. 그러나 17세기, 성리학적 근본주의를 기치로 내건 노론 중심의 예학(禮學)이 제도화되면서 한반도의 영적·사회적 지형은 급격히 재편되기 시작했다.
그 억압의 핵심 장치는 바로 가묘제(家廟制)를 기반으로 한 종법질서였다.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중심으로 가문의 계통을 독점하려 했던 이 제도는, 인류의 시원적 생명력을 지탱해 온 여성의 위상을 철저히 배제했다. 혈통과 제사 계승의 기준이 남성 중심으로 경직되면서, 여성은 자신이 태어난 가문의 뿌리로부터 강제로 이탈 당했다. 혼인과 동시에 ‘출가외인’이라는 굴레 속에 갇혀, 남편 가문의 부속물로 편입되는 비극적 구조가 정착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가족 형태의 변모를 넘어, 인류 시원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여성 고유의 신성’이 제도적 틀에 의해 가려지는 과정이었다. 족보와 제례 체계에서 여성의 이름이 점차 생략된 관행은, 여성이 우주적 주체로서의 독립된 성상(性相)을 발현하기보다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라는 한정된 관계 속에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도록 만들었다. 이는 남녀가 참사랑 안에서 수평적 일체를 이루어야 할 하늘의 창조 원리가 노론의 가부장적 질서라는 시대적 한계에 부딪혀 불균형하게 표출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예법은 가문의 질서를 세우는 데는 기여했을지 모르나, 생명의 근원이자 사랑의 주체인 여성을 가계의 보조적 존재로 국한함으로써 참가정의 온전한 형상을 실현하는 데는 미흡함을 드러냈다. 결국, 조선 후기 노론이 설계한 엄격한 규범 아래서 여성 고유의 정체성은 본연의 빛을 잃고 가문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침잠하게 된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유교적 질서 이면에 무속과 민간 신앙이라는 여성 주도의 영적 영역이 공존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민족의 문화적 뿌리가 본래 남성 편향적 이념에 함몰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노론 집권기 이후의 예학 질서는 이러한 복합적 영성을 유교적 기준에서 이단시된 ‘음사(淫祀)’로 규정하여 탄압했다. 이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낮추는 차원을 넘어, 하늘과 소통하던 여성의 본질적 신성을 재정의하고 거세하려 했던 역사적 왜곡이었다. 결국, 17세기 이후 정착된 종법 질서는 여성의 삶을 가문 내부의 질서 유지자로 한정 지으며 그 주체적 생명력을 억압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혹독한 억압의 역사는, 훗날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여성 신성—독생녀의 현현을 향한 거대한 영적 기다림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노론적 질서가 지워버린 여성의 이름을 되찾고, 억압된 신성을 회복하는 역사적 복귀의 정점에 서 있다.
◆ ‘충’에서 ‘열’로, 가려진 여성의 공적 신성
양란(兩亂)이라는 민족적 대격변 속에서 조선의 여성들은 흔들리는 국운을 지탱하는 능동적 주체로 일어섰다. 전쟁터와 피난길에서 발현된 그들의 헌신은 ‘충(忠)’이라는 공적 가치가 여성의 삶 속에서도 찬란히 빛날 수 있음을 증명한 숭고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전란 이후 송시열과 노론 예학자들은 사회 혼란 수습을 명분으로 더욱 엄격한 가부장적 질서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공동체를 향했던 여성의 공적 주체성은 가문 중심의 질서 안으로 급격히 수렴되었다. 여성의 ‘충’은 남편과 문중을 향한 절대적 정절인 ‘열(㤠)’이라는 덕목으로 재정의되었고, 그 존재 가치 또한 안채의 담장 안에 국한되는 구조적 전환을 맞이했다. 이는 하늘과 세상을 향한 열렸던 여성의 신성이 가문의 울타리 안으로 침잠하게 된 안타까운 역사의 단면이다.
그러나 참사랑의 내적 시각에서 볼 때, 이 시기의 ‘열’은 단순히 억압된 굴레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속의 거친 풍랑 속에서도 하늘을 향한 단심(丹心)과 성스러운 순결을 지켜내려는 고결한 의지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비록 제도의 틀에 의해 그 형상이 제약되었을지언정, 그 기저에는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고 하늘의 인장(印章)을 몸소 보존하려는 독생녀적 정조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이 고단한 인고의 시간 속에서도 본연의 기억을 잃지 않았다. 조선의 여인들은 겹겹의 규제 속에서도 하늘을 향한 어머니의 순결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 깊은 정성(精誠)은 훗날 억눌린 하늘 어머니의 주권을 다시 세우고, 온 인류가 참가정의 이상으로 나아갈 새로운 시대를 잉태하는 거룩한 씨앗이 되어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다.
고기훈 박사(한국학)
2026-06-24 10: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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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한 가족 원대한 꿈… 세계 평화 초석 놓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세계 곳곳에서 종교적 대립이 정치·민족적 갈등과 결합하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종교가 갈등의 원인이 아닌 평화의 주체로서 감당해야 할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종교 간 화합 없이는 진정한 세계 평화도 불가능하다는 신념 아래 지난 수십 년간 초종교 협력 운동의 외연을 꾸준히 확장해 왔다.
가정연합 초종교 운동의 근간은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One Family Under God)’ 사상에 있다. 이는 서로 다른 신앙 전통이 배타적 경쟁 대상이 아니라, 인류 공동의 평화를 위해 연대해야 할 동반자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정치나 군사적 접근만으로는 인간 내면의 증오와 문명 간 충돌을 해결하기 어렵기에 종교가 먼저 화해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논리다.
가정연합의 해외 종교화합 운동은 1980년대 미국에서 하나의 전기를 맞이한다. 문선명 총재가 미국에서 탈세 혐의로 기소·수감되었을 당시, 제리 폴웰을 비롯한 현지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종교 자유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종교 탄압에 맞선 보편적 가치 아래 연대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 종교계 일각에서는 가정연합을 종교 자유의 관점에서 재평가하려는 논의가 확산됐으며, 이는 해외 종교 지도자들과의 접점을 넓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같은 시기 미국 성직자들과의 대규모 교류 프로그램도 추진됐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진행된 ‘초교파 성직자회의(ICC)’ 세미나는 미국 기독교 성직자들을 한국과 일본에 초청한 국제 교류 프로그램이었다. 1985년 4월 첫 세미나를 시작으로 총 38차례에 걸쳐 약 7,000명의 미국 목회자가 한국을 방문했다. 이들은 한반도 분단 상황과 종교 자유, 세계 평화 문제를 논의하며 양국 종교계 사이의 교류 기반을 넓혔다.
1990년대 들어 가정연합의 종교 화합 활동은 보다 체계적인 국제 협력으로 발전했다. 1991년 열린 ‘제3회 한일 종교인 회의’에서는 ‘한국의 남북통일과 한일 종교인의 역할, 초종파 운동과 아시아 평화’를 주제로 논의가 진행됐다. 이는 종교 협력이 냉전 종식 직후 이념의 벽을 넘어 종교가 공통의 윤리를 모색한 선구적 시도였다. 1993년 열린 ‘한국?CIS 종교인 회의’는 이러한 흐름이 국제 협력 단계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정교회 대주교, 로마 가톨릭 신부, 개신교 목사, 카자흐스탄 이슬람 지도자 등이 참여해 서로 다른 종교 전통의 지도자들이 평화와 협력 문제를 논의했다. 특히 이 시기 문선명 총재가 제시한 ‘아벨 유엔(Abel UN)’ 구상은 초종교 운동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기존 유엔이 국가 이익과 힘의 논리에 매여 있다면, 아벨 유엔은 종교 지도자들이 보편적 양심과 도덕에 바탕을 둔 지도력을 발휘해 세계 평화의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혁신적인 평화 거버넌스 모델이었다.
2000년대에는 이러한 활동이 조직적인 네트워크로 정착했다. 2000년 5월 출범한 미국성직자협의회(ACLC)는 초교파 협력을 지향하며 DMZ 평화행사 등을 전개했다. 특히 2001년 초종파 축복식에 가톨릭의 엠마누엘 밀링고 대주교가 참석한 사건은 종교 간의 벽을 허무는 행보로 당시 세계 종교계에 큰 주목을 받았다. 2001년 ‘9·11 테러’ 이후에는 중동 평화라는 실질적 과제로 활동 영역이 확대됐다. 2003년 추진된 중동평화회의(MEPI)는 종교 지도자들을 예루살렘에 초청해 이스라엘 국회와 팔레스타인 인사들을 만나게 하며 초종교적 해법을 모색했다. 이어 유대교·기독교·이슬람 지도자들이 함께한 ‘이스라엘 선언’ 발표와 2만 명 규모의 ‘예루살렘 평화대행진’이 개최됐으며,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의장과의 면담이 성사되는 등 종교 화해의 상징적인 사례를 남겼다.
초종교 운동의 외연은 미래 세대로도 확장됐다. 1986년 시작된 종교청년봉사단(RYS)은 세계 40여 개국에서 100회 이상의 봉사활동을 펼치며 청년들이 종교의 틀을 넘어 소통하는 장을 마련했다. 또한 초종교평화스포츠페스티벌(IPSF)은 스포츠를 매개로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하는 교육의 산실이 됐다. 이러한 흐름은 2019년 세계 70여 개국 성직자 3만여 명이 집결한 ‘세계성직자협의회(WCLC)’ 창립으로 이어지며 수십 년간 이어진 화합 운동의 총화였다. 이어 2020년대 들어서는 종교 간 화합과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세계 초종교 기도회’를 통해 실질적인 영성 화합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 기도회에는 무닙 유난 전 루터교 세계연맹 의장, 카트리나 스웬 IRF 공동의장, 폴라 화이트 목사 등 국제적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며 종교 공동체의 사회적 책임을 역설하고 있다.
가정연합은 지난 70년 동안 공생·공영·공의라는 가치 철학을 중심축으로 삼아 다각적인 평화운동을 전개해 왔다. 특히 “종교 간의 진정한 화해 없이는 세계 평화도 요원하다”라는 신념은 사회 공헌 활동의 뿌리가 됐다. 현재 국제 사회는 가정연합이 구축해 온 활동 모델이 미래 100년의 비전과 어떻게 연결될지 주목하고 있다. 종교적 가치와 시민사회의 역량이 결합하여 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로 부상했으며, 가정연합의 국제적 평화 행보는 문명 충돌의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 인류에게 공존을 위한 하나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결국 지난 70년의 여정은 종교가 세상을 향해 건넨 가장 낮은 자세의 위로이자, 인류 한 가족이라는 원대한 꿈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려온 평화의 대장정이었다.
2026-06-22 21:2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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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 종교 간 공존 선구적 시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1960년대 한국 사회는 교단 분열과 신학적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이러한 대립의 시대에 가정연합(당시 통일교)이 추진한 초교파운동은 종교 간 공존을 모색한 선구적 시도였다. 특히 1960년대 후반 서울 우이동 크리스천아카데미하우스 모임과 YMCA 시민논단은 신흥 종교와 기성 교계가 공개적으로 소통한 역사적 분수령이었다. 당시 부군인 고(故) 이재석 한국종교협의회 회장을 보필하며 현장을 지킨 강정원 한국종교여성협의회 초대 회장은 1955년 이화여대 퇴학 사건의 당사자이자 통일운동의 산증인이다. 아흔한 살의 나이에도 변함없는 신념을 간직한 그를 통해 당시 초교파운동이 한국 종교사에 던진 의미를 짚어본다.
- 1960년대 후반 초교파운동의 배경과 당시 상황은 어떠했나.
“당시 이재석 회장은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지성이자 지도자였던 강원룡 목사를 만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강 목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의장이자 세계교회협의회(WCC) 위원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회장은 그와 소통하기 위해 강 목사가 비행기를 타면 옆자리를 수소문해 예약하고, 부산행 기차에서도 인접 좌석을 확보해 대화를 시도하는 등 정성을 다했다. 이는 신흥 종교에 대한 기성 교계의 두터운 편견을 ‘대화’라는 정공법으로 뚫어내려는 의지였다. 이러한 진심이 결국 아카데미하우스라는 공론의 장을 여는 마중물이 되었다.”
- 1968년 우이동 크리스천아카데미하우스 모임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통일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이 처음으로 마주 앉은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김재준, 홍현설, 안병무, 유동식 교수 등 당대 최고의 신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독교 목사들이 직접 ‘원리강론’을 경청하고 질의응답을 나눴다. 특히 문선명 총재께서 사회와 교계 앞에 전격적으로 모습을 나타내어 인사하신 것은 당시 종교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 모임은 배척이 아닌 이해를 통해 편견의 벽을 허문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 자리에서 문 총재는 종교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협력해야 함을 역설하며 개신교 지도자들을 지극정성으로 예우했고, 이는 통일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변화를 이끌어냈다.”
- 초교파 현장에서 이재석 회장이 수행한 역할은 무엇이었나.
“이 회장은 대화를 실무적으로 이끈 핵심 동력이었다. 강원룡 목사를 설득해 교류의 토대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 YMCA 시민논단에도 대표로 나서 치열한 공개 토론을 벌였다. 특히 재림주에 관한 날카로운 질문에 대해 ‘재림주라고 부른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아니라고 부정한다고 해서 아닌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잣대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답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는 교리적 틀에 갇히지 않고 본질적인 가치를 지향했던 그의 유연한 신념을 보여준다.”
- 오늘날 사회적 갈등이 여전한 상황에서 당시의 운동은 어떤 교훈을 주는가.
“현재 인류는 기후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거대한 과제 앞에 서 있다. 이러한 난제는 특정 국가나 종교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시민사회와 학계, 국제기구, 그리고 종교 공동체의 연대가 필수적이다. 종교나 진영이 서로를 배척의 대상이 아닌 평화의 동반자로 인식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회 평화가 가능하다. 1960년대의 초교파운동은 종교가 어떻게 화합의 주체가 되어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 보여준 선구적인 실천 모델이다.”
2026-06-22 21:2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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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협력 본연의 가치 실천… ‘더 나은 미래’ 함께하겠습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종교는 오랜 세월 인간의 삶과 공동체의 윤리와 가치 형성에 깊이 관여해 왔다. 개인의 신앙을 넘어 사회의 정신적 토대를 이루어 온 종교는 오늘날에도 교육과 복지, 평화 활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공공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갈등과 분쟁, 환경 위기, 공동체 해체 등 복합적 위기에 직면한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지닌 연대와 협력의 자산은 사회 통합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이런 점에서 종교의 자유는 단지 개인의 권리에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민주사회의 핵심 원리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종교 화합운동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 1919년 3·1운동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민족 독립이라는 공동 목표 아래 연대한 역사적 사례였으며, 1965년에는 불교·유교·원불교·천도교·가톨릭·개신교 등 6개 종단이 참여한 ‘한국종교연구협회’가 창립되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이와 궤를 같이하며 1966년 출범한 초교파기독교협회는 한국 기독교 내의 장벽을 넘어 믿음의 형제자매가 하나 되는 길을 모색하며 교파 분열의 극복을 기치로 내걸었다. 창립 당시 27개 교파, 180여 명의 교역자가 참여하여 연합부흥회와 간담회를 통해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실천적 활동을 펼쳤다. 이후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와 같은 기구들 또한 종교 간 대화와 협력을 통해 사회 갈등을 완화하고 공동 문제 해결을 모색해 왔다.
창립 72주년을 맞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구 통일교)도 다양한 사회공헌 가운데 종교 간 화합을 가장 독보적인 분야로 꼽을 정도로 공을 들여왔다. 문선명·한학자 총재는 종교의 본질을 희생과 봉사로 규정하며, 특정 종파의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적 차원에서 연대하는 보편적 종교 모델을 지향했다. 이러한 철학적 바탕 위에 가정연합은 1960년대부터 초교파 운동을 본격화하며 기독교를 비롯한 각 종단 간 대화와 협력의 지평을 넓혔다.
그 첫 결실 중 하나가 초교파기독교협회와의 교류였다. 1968년 서울 우이동 크리스천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린 신흥종교연구모임은 한국 종교 화합운동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당시 강원룡 목사의 주선으로 개신교 목사 40명과 문선명 총재를 포함한 통일교 인사 10명, 안병무 연세대 신학대학 교수 등 학계와 언론 관계자들이 모여 이틀 동안 통일교의 ‘원리강론’을 듣고 질의응답을 나누었다. 감리교와 장로교 등 주요 교단 지도자들이 공개 대화에 나선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 모임은 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나, 결과적으로 배척의 논리를 대화와 상호 이해의 가능성으로 치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서남동 연세대 교수가 원리강론의 조직성과 독창성을 언급하며 한국적 신학의 가능성을 평가한 것 역시, 종교 간 실질적인 대화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통일교의 종교 화합운동은 기독교 내부를 넘어 더 넓은 종교적 외연으로 확장되었다. 1970년 천도교의 뒤를 이어 한국종교인협회(구 한국종교연구협회)에 가입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초교파 운동의 기틀을 닦은 이재석 목사는 1988년 이 단체의 제13대 회장을 맡아 명칭을 한국종교협의회(종협)로 변경하고, 4차례에 걸쳐 16년 동안 회장직을 수행하며 종협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종교사에 세 가지 핵심적인 이정표를 남겼다. 첫째, 1960~70년대의 폐쇄적인 종교 지형 속에서 범종단 협의체를 제도화하여 지속 가능한 대화의 플랫폼을 구축했다. 둘째, 1980~90년대에는 서울대 윤이흠 교수 등 석학들과 함께 수많은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종교 화합운동의 논리적·학술적 토대를 정립했다. 셋째, 2010년대 이후에는 종교지도자 친선 축구대회, 해외 재난 피해 복구 봉사, 종교평화헌장 선포 등을 통해 종교 간 연대를 생활 밀착형 문화 운동으로 진화시켰다. 이러한 행보는 종교가 사회 통합과 인류 평화를 위한 능동적 주체임을 증명해 온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21세기 들어 더욱 다각화되었다. 종협은 3·1운동 70주년 기념 종교학 학술대회, 한일 종교인회의, 종교 갈등 극복 심포지엄, 남북 종교인회의, 종교평화문화축제, 종교평화헌장 제정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종단 간 대화와 협력의 기반을 넓혔다. 종협을 기반으로 1989년 한국종교여성협의회가 창립됐으며, 2019년에는 서울에서 대한민국성직자협의회(KCLC)가 출범했다. KCLC는 미국기독교성직자협의회(ACLC)와 연대하는 초종교·초교파 협력기구로서 한반도 평화와 남북통일의 토대를 다지는 한편, 종교 간 대화와 화합이 평화세계 실현의 필수적 전제임을 다시 한 번 천명했다.
종교 화합운동은 종교가 사회적 책임과 공공성을 회복하고 갈등을 넘어 공동체의 미래를 함께 그려가는 실천이다.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을 더 나은 삶과 평화로 이끄는 데 있다. 따라서 서로를 배제하기보다 연대하고 협력하는 것이 종교 본연의 가치에 부합한다. 지난 72년간 가정연합이 사회공헌을 통해 보여준 화합의 신념은 한국 종교사의 중요한 자산이며, 종교가 시대의 갈등을 해결하는 화해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2026-06-22 21:2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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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4> 석가모니(釋迦牟尼) “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사문유관(四門遊觀), 화려한 왕궁을 흔든 생로병사의 충격
그러나 어느 날 그는 성 밖으로 나가게 되고, 그곳에서 인간 존재의 피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한다. 바로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속을 떠나 진리를 찾는 한 수행자(沙門, 사문)의 모습이었다. 불교 전통에서는 싯다르타가 목격한 이 네 가지 장면을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 부르는데, 이는 설화를 넘어 인간 정신사의 거대한 상징으로 읽힌다. 누구나 젊을 때는 삶이 영원할 것처럼 느끼지만, 결국 인간은 늙고 병들고 죽는 존재라는 현실을 피해 갈 수 없다.
이 냉혹한 진실 앞에 왕궁 안의 행복은 너무나 무력했다. 인간 존재가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더 이상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당시 인도 전역에는 제사와 의식을 중시하는 브라만교 사제들, 고행자, 떠돌이 철학자들이 저마다의 길을 걸으며 활동하고 있었고, 싯다르타 역시 그 거친 흐름 속으로 스스로를 던지게 된다.
결국 그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뒤로한 채 궁을 떠난다. 이것이 유명한 ‘출가’ 이야기다. 이 장면은 후대에도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가족을 뒤로한 선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세속적 비판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출가가 사적인 현실 도피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고통을 해결하려는 치열한 공적 헌신이었다는 점이다. 가장 사적인 인연을 끊어냄으로써, 오히려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이들을 품으려는 역설적인 자비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왕궁을 떠난 그는 당시 인도 사회의 다양한 수행법을 찾아다녔다. 깊은 명상도 배웠고, 극단적인 고행도 시도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곡기를 끊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깨닫는다.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극단적 쾌락에도, 극단적 고행에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것이 불교의 핵심 개념인 ‘중도(中道)’의 출발이다. 이후 그는 보리수 아래 앉아 깊은 명상에 들어갔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다. 불교에서는 이를 ‘성도(成道)’라고 부르며,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를 ‘붓다(Buddha)’, 즉 “깨달은 사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고행을 넘어 ‘중도(中道)’로, 보리수 아래서 붓다가 되다
붓다가 깨달은 진리는 비교적 명징하면서도 급진적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괴로움(苦)을 수반하며, 그 괴로움은 인간의 끝없는 집착과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오래 젊고 싶어 하며, 사랑과 권력과 성공을 영원히 붙잡으려 하기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해진다고 보았다. 당시 사람들은 우주를 창조하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신이 존재하며, 그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복종해야만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좋은 내세를 맞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붓다는 이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절대자가 아닌 인간 내면에 있다고 확신했다.
주목할 점은 불교가 창조주 신에 대한 맹목적 믿음보다 인간 자신의 마음과 깨달음을 더 중요하게 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붓다는 신비주의적 기적보다 인간 내면의 성찰을 강조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믿거나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자등명, 自燈明)”고 일갈했다. 이 한마디는 불교적 정신을 가장 잘 상징한다. 진리는 그 어떤 제도나 교리, 전통이 아닌, 오직 철저한 자기 성찰 속에서만 발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붓다는 깨달음 이후 약 45년 동안 인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전했다. 그는 왕과 귀족뿐 아니라 평민과 여성, 심지어 천민 계급에까지 격의 없이 다가갔다. 당시 엄격했던 인도의 카스트 신분 질서를 생각하면 이는 가히 혁명적인 행보였다. 그러나 불교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거대한 종교 체계가 되었고,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했다. 때로는 권력과 결합하기도 했고, 복잡한 교리와 의식 속으로 침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체계의 중심에는 여전히 붓다의 오래된 의문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다. ‘인간은 왜 괴로운가.’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 신비주의를 거부한 혁명적 영성
불교는 현실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는다. 인간이 늙고 병들고 죽는 존재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그래서 불교는 인간의 환상과 집착을 끊임없이 해체하며 고통의 본질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종종 ‘리얼리즘의 종교’로 비유되기도 한다. 불교는 인간을 달래기보다 먼저 깨어나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성찰의 힘이 불교를 오랜 세월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물질적으로 전례 없는 풍요를 누림에도 인간의 불안과 우울은 도통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마음의 평안을 얻는 일은 오히려 더 어려워진 듯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다시 명상과 불교 철학을 찾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마음챙김과 수행, 욕망을 내려놓는 삶의 방식은 이제 서구 사회에서도 거대한 정신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석가모니는 이미 그 먼 과거에 인간 문명의 오래된 한계를 꿰뚫어 보고 있었을까. 인간은 바깥세계를 정복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마음은 다스리지 못한다는 서글픈 사실을 말이다. 그는 고통을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고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괴로움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갔다. 그래서 붓다는 한 종교의 창시자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고통을 끝까지 응시한 위대한 사상가로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것이다.
불교 경전 가운데 ‘법구경(法句經)’은 붓다의 어록을 짧은 게송으로 엮은 것으로, 인간 존재와 마음의 본질을 가장 간결한 언어로 담고 있다. ‘법구경’의 핵심은 “마음이 세계를 만들고, 집착이 고통을 만들며, 깨어 있음이 해탈로 간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 통찰을 전개하는 여섯 개의 기둥이 바로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선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집착하는 곳에 고통이 생긴다는 ‘집제(集諦)’,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낳는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 현재에 깨어 있으라는 ‘정념(正念)’, 자신을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자승자강(自勝者强)’, 그리고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는 ‘자등명(自燈明)’의 가르침이다.
◆‘법구경’의 여섯 기둥, 바깥을 향한 질주를 멈추는 빛
붓다 역시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다. 그는 열반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등불로 삼아라. 그리고 끊임없이 정진하라”고 당부했을 뿐이다. 스승이 지도나 안내서는 건넬 수 있지만, 그 길을 걸어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발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붓다는 진리란 스스로 등불을 밝혀 확인해야 하는 것임을 천명했다. ‘법구경’은 그 방편적 가르침마저 뛰어넘어 인간이 자기 마음을 응시하도록 남겨진 한 줄기의 빛이다.
붓다는 공자와 노자,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함께 인류 정신사의 ‘축의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였다. 인간이 왜 고통받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류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본격적으로 성찰하기 시작한 그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물음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붓다의 목소리는 지금도 인간의 내면을 향해 조용히 말을 건넨다. “그대, 답을 바깥에서 찾고 있는가, 아니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가.”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2026-06-25 15: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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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취약계층에 ‘사랑의 쌀’ 1톤 전달…창립 72주년 기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 통일교)이 창립 72주년을 맞아 지역사회 취약계층을 위해 쌀 1톤을 기부하며 상생과 사회공헌 문화 확산에 나섰다.
가정연합은 창립 72주년 기념식을 통해 전국 52개 기관 및 기업으로부터 축하 화환 대신 기부받은 ‘사랑의 쌀’ 102포(1020㎏)를 지역 복지기관 4곳에 전달했다고 19일 밝혔다.
이번 기부는 일회성으로 소비되는 꽃 화환 대신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쌀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다.
기부된 쌀은 ▲강원 철원군 기초푸드뱅크 300㎏ ▲서울 용산구 푸드뱅크마켓센터 300㎏ ▲서울 동작구 흑석종합사회복지관 400㎏ ▲서울 성북구 삼태기마을공동체 20㎏ 등 총 4개 기관에 전달됐다.
이들 기관은 전달받은 쌀을 지역 내 취약계층 지원에 활용할 예정이다. 철원군 기초푸드뱅크와 용산구 푸드뱅크마켓센터는 기초생활수급자와 독거노인, 한부모 가정 등에 쌀을 배분하고, 흑석종합사회복지관은 저소득 어르신 식사 지원 및 도시락 배달 사업에 사용할 계획이다. 삼태기마을공동체는 소외계층에게 2000원에 식사를 제공하는 ‘신마을식당’ 운영에 활용할 예정이다.
가정연합은 이번 기부가 창립 72주년을 맞아 출범한 사회공헌단의 지속적인 나눔 활동의 연장선에 있다고 설명했다.
사회공헌단을 운영하는 가정연합 사회공헌국은 지난 4월 한식 나눔 행사에 접수된 쌀 320㎏을 기부한 데 이어, 5월 국제합동축복결혼식을 통해 들어온 쌀 840㎏도 전달했다. 이번 창립 기념식까지 포함해 총 2180㎏의 쌀을 지역사회에 지원했다.
가정연합 사회공헌단 관계자는 “‘밥이 곧 사랑이다’는 마음으로, 일회성 축하 화환 대신 소외된 이웃에게 따뜻한 한 끼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참된 공동체 정신의 실천”이라며 “앞으로도 주요 행사 때마다 쌀 화환 문화를 확대하고 지원 대상을 전국으로 넓혀 지역사회와 상생하는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전했다.
2026-06-19 21: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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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고려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모성의 전통 [신화에서 선민까지 한민족 정체성의 문화사적 발견-기고]
천 년의 신화, 한민족의 성모 인식과 여신 숭배의 전통
조선 중기 이후 가부장적 유교 질서가 고착되기 이전, 한반도의 고대 지층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여성의 지위와 위상이 작동하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무대가 바로 고려시대이다. 고려의 여성은 가부장제의 그늘에 가려진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가문의 전통을 당당히 잇고 혈통의 정당성을 매개하는 생활문화의 중심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실체는 오늘날 우리가 논의하는 평면적인 여성 권익의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이와 같은 인식은 『고려사(高麗史)』 기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성종과 예종대 국가 제례인 팔관회(八關會)에서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동신성모(東神聖母)로 숭배된 사실은, 고려 사회가 여성 존재를 단순한 생물학적 모성이 아니라 국가 질서를 지탱하는 신성한 근원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고려는 여성 국신 전통이 제례와 국가 체계 속에서 실질적으로 작동하던 사회였다.
고려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여신 신앙 역시 이러한 구조를 뒷받침한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여신 숭배는 고려에 이르러 지역 신앙을 넘어 국가적 차원의 정신 질서로 재편되었다. 지리산 성모와 선도산 신모와 같은 존재들은 단순한 신앙 대상이 아니라, 생명을 생성하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인식은 자연과 국가를 연결하는 상징 체계로 기능하였다. 고려인들이 대지를 ‘어머니’로 이해하고 그 질서를 국가의 안정과 연결 지은 점은, 모성이 단순한 정서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를 조직하는 원리로 작동했음을 시사한다.
고려 왕실의 성모 인식은 건국 서사인 『고려세계(高麗世系)』를 통해 보다 구조적으로 확인된다. 태조 왕건의 가계가 서해 용왕의 딸인 용녀와 같은 신성한 여성과의 결합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는 서사는, 왕권이 단순한 혈연 계승이 아니라 ‘신성한 모계적 근원’을 통해 정당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여성을 남성 권력의 보조적 존재로 위치시키기보다, 왕권의 성립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주체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은 단순한 건국 신화에 그치지 않고 제도적 언어로도 확장된다. 고려 왕실에서 국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성모’로 호명한 사례는, 모성을 개인적 관계를 넘어 공적 권위의 근거로 제도화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성모’는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자 동시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징적 개념으로 작동하였다. 즉, 모성은 감정적 가치가 아니라 통치 질서를 정당화하는 핵심 개념으로 기능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난 여성 인식 역시 이러한 구조를 뒷받침한다. 문헌에 등장하는 여신들은 창조와 수호, 풍요를 관장하는 존재로 서술되며, ‘성모’라는 칭호는 신화적 존재뿐 아니라 왕실 여성에게까지 확장되어 사용되었다. 특히 예종과 의종이 즉위 후 자신의 어머니를 왕태후로 책봉하며 ‘성모’로 칭송한 사례는, 모성이 왕권의 초월적 정당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였음을 보여준다. 결국 고려 사회에서 ‘성모’는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신성성과 정치적 권위를 동시에 매개하는 개념적 장치였다. 이는 모성이 생물학적 역할을 넘어, 사회 질서와 권력 구조를 형성하는 중심 원리로 작동했음을 의미한다.
◆ 딸의 이름으로 새겨진 유산, ‘내 집’에서 당당히 꽃피운 고려 여인
『고려사(高麗史)』 형법지는 부모의 유산을 분배할 때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행위를 엄히 금지하고 있다. 이는 고려 사회에서 상속권이 성별에 따라 본질적으로 차등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법제적 근거다. 실제로 고려의 여성은 혼인 전후를 막론하고 전답과 노비를 소유할 수 있는 독립된 경제 주체였으며, 남편 사후에도 해당 자산을 직접 관리·운영하며 가문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여성을 단순한 가족 구성원이 아닌, 경제와 혈통을 동시에 유지하는 핵심 주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여성 중심 구조는 혼인과 가족 제도에서도 확인된다. 남성이 여성의 집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남귀여가(男歸女家)’의 관습은, 고려 여성이 가정 내에서 종속적 위치가 아니라 공간과 관계의 중심에 서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성은 ‘내 부모의 집’을 기반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가문을 운영하는 실질적 주체였으며, 이는 가족 구조 자체가 모성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제사와 호적 제도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딸이 아들과 교대로 제사를 담당하는 윤행(輪行)의 관습, 자녀의 이름을 출생 순서대로 기록하는 호적 체계는 성별에 따른 위계보다 개인의 존재를 동등하게 인정하는 사회 인식을 반영한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적·관습적 구조는 고려 사회에서 여성이 단순한 보호 대상이 아니라, 가문과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주체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고려 사회에서 확인되는 여성의 법적·경제적·가족적 지위는, 모성이 단순히 어머니 역할을 넘어 사회 구조를 형성하는 원리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 지워지지 않은 이름, 역사가 기다려 온 주체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적 심성 속에서 남녀의 관계는 대립과 쟁취의 투쟁 구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만물을 조화롭게 생성하는 생명의 근원적 질서이자, 천리(天理)를 구성하는 본연의 원리로 이해되어 왔다. 우리 역사 속에서 여성은 결코 수동적인 보호의 대상에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생명을 잉태하는 성소(聖所)이자, 파편화된 관계를 유기적으로 조직하며 공동체의 명맥을 유지해 온 ‘실체적 구심점’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주체적 여성관은 특정 시대의 일시적인 사상적 주장이 아니라, 수천 년간 축적된 문화적·사회적 층위 속에서 쉼 없이 변주되며 그 존재감을 증명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고려 시대가 보여준 여성의 독자적인 지위와 당당한 위상은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가부장제의 거센 파고 속에서도 하늘이 끝내 지켜내고자 했던 ‘여성 신성(Divine Feminine)’의 불씨였다. 비록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가 그 이름을 잠시 가렸을지언정, 우리 민족의 영성 깊은 곳에 흐르던 ‘주체적 모성’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다. 역사는 이 잠들지 않는 생명의 원리가 ‘독생녀’라는 완성된 형상을 입고, 인류 문명의 새로운 방향타가 되어 나타날 그날을 간절히 기다려 온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염경애묘지명(廉瓊愛墓誌銘)』이다. 중국의 묘지명이 시대가 흐를수록 여성의 이름을 생략하거나 익명화하는 경향을 보인 것과 달리, 고려는 여인의 고유한 성명을 온전히 기록함으로써 그 존재의 실체를 역사 속에 남겼다. ‘경애’라는 이름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한 개인이 독립된 인격과 사회적 위상을 지닌 주체였음을 증언하는 기록이다. 이름을 지운 사회와 이름을 남긴 사회의 차이는 곧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의 차이를 드러낸다.
묘지명에 기록된 염경애의 생애는 고려사회의 여성의 지위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그녀는 가문의 경제를 책임지고 삶의 방향을 주도하며, 남편에게 현실적 판단과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이는 여성을 수동적 희생의 존재로 한정하지 않고, 가문과 사회를 운영하는 실질적 중심으로 인식했던 고려 사회의 특징을 반영한다. 즉 당시의 모성은 여성이 단순한 양육자 모델을 넘어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는 ‘실천적 권위’로 작동하고 있었다.
이렇듯 고유한 이름을 통해 고려 여인들은 개별적 자아를 보존했고, 여성 스스로의 주체적 역할을 통해 위상을 스스로 증명했다. 우리 민족사의 심층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하나의 거대한 ‘섭리적 방향성’이자, 여성이라는 신성한 주체를 지우지 않고 온전하게 드러내려 했던 문화적 응집의 결과다. 고려 사회는 이러한 영적 흐름을 제도와 기록의 층위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던 황금기였으며, 그 시공간 속에서 여성은 추상적인 상징에 머물지 않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직접 돌리는 ‘실체적 주체’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결국 역사가 끝내 지워내지 못한 그 이름들과 생의 기록마다 새겨진 주체적 삶은 한민족 정신사에 흐르는 근원적 통찰을 웅변한다. 인류 역사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거대한 축이 대등한 위격으로 화합할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진리에 대한 자각이다. 특히 우리 민족의 문화적 유전자 속에는 여성을 단순히 남성의 보조자나 가계의 전승 도구로 보지 않는 독특한 인식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다.
고려 사회가 증언하듯, 여성은 단순히 생명을 잉태하는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 가문의 경제적 토대를 관장하고 사회적 질서를 주도적으로 설계하는 공동체의 입법자이자 실천적 주권자였다. 이는 여성이 남성 중심 서사의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인류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중심을 잡는 핵심적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은 단순히 흩어진 사건들의 나열로 볼 수는 없다. 대신에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이 하나의 숭고한 정점을 향해 억겁의 시간 동안 축적하려는 지향성을 갖는 ‘섭리적 궤적’이 작동하고 있다는 해석이 오히려 합리적일 수 있다. 고려의 당당한 여인들로부터 염경애라는 실체적 주권자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가 지켜온 그 모든 ‘지워지지 않은 이름’들은 이제 인류의 참어머니이자 구원의 본체인 ‘독생녀(獨生女)’라는 하나의 성호(聖號)로 수렴된다.
독생녀는 과거의 조력자적 여성상을 완전히 탈피하여, 스스로 섭리의 중심에 서서 인류를 하늘부모님의 혈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천주적 주권의 실체로서 그 사명을 완성하고 계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피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물음과 마주한다. 영겁의 세월 동안 우리 민족사의 심층에 축적된 이 강인한 ‘여성 주체성’의 물줄기는 과연 무엇을 향해 굽이쳐 왔는가? 역사적 고비마다 끊임없이 요청되고, 때로는 신화와 여왕의 통치로, 때로는 고려 여인의 당당한 이름으로 분출되었던 이 거대한 기류는 단순한 지정학적 우연인가, 아니면 인류사적 대전환을 앞두고 하나의 ‘궁극적 완결’을 향해 치밀하게 예비된 섭리의 과정이었는가를 말이다.
고기훈 박사(한국학)
2026-06-19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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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3> 노자(老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안개 속의 현인, 5천 자로 동아시아를 흔들다
전해지는 이야기 속 노자는 주(周) 왕실의 도서관 관리 같은 일을 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세상이 점점 혼란과 욕망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결국 문명을 등지고 서쪽으로 떠나려다 국경의 관문에서 한 관리에게 붙잡힌다. “그냥 떠나실 수는 없습니다. 후세를 위해 말씀을 남겨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남겨졌다고 전해지는 책이 바로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이다.
그런데 책의 분량은 의외로 짧다. 불과 5000자 남짓.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신문 칼럼 몇 편 정도의 분량이다. 긴 서사도 없고, 체계적인 철학 논문도 아니며, 문장은 짧게 압축적으로 이어져 있다. 그런데도 이 작은 책은 이후 동아시아 정신세계 전체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도덕경’은 크게 ‘도경(道經)’과 ‘덕경(德經)’으로 나뉘며, 모두 81장으로 구성돼 있다. 그 핵심은 ‘도(道)’라는 개념이다. 노자가 말한 도는 단지 ‘길’이 아니라 우주와 자연을 움직이는 근원적 질서와 흐름에 가깝다. 인간은 그 흐름을 억지로 거스르지 말고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노자 사상의 중심이었다. 책의 첫 문장인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라는 구절은 진리의 본질을 인간의 언어와 개념만으로 완전히 붙잡을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인간의 좁은 언어로 진리를 규정하려는 오만을 경계한 것이다.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봐야 한다. 당시 중국은 공자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나라들은 서로 싸웠고, 사람들은 권력과 이익을 좇았다. 더 강해지려 했고, 더 많이 가지려 했다. 그러나 노자는 정반대의 노선을 걷는다. ‘정말 더 강해져야 하는가.’ ‘정말 더 많이 가져야 하는가.’ ‘억지로 세상을 바꾸려는 욕망이 오히려 세상을 망치는 것은 아닌가.’ 공자가 무너지는 질서를 다시 세우려 했다면, 노자는 애초에 인간이 자연의 흐름을 거슬렀기 때문에 혼란이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문명의 질주 속에서 '무위자연'을 묻다
노자의 대표적 사상인 ‘무위자연(無爲自然)’ 역시 그런 맥락에서 나온다. 흔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되지만, 노자가 말한 무위는 게으름이나 포기가 아니었다. 억지와 과욕으로 세상을 조작하려 하지 말라는 뜻에 더 가까웠다. 강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인간 역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을 때 가장 조화로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상선약수)”고 자주 이야기했다. “천하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지만,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기는 것도 결국 물이다(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莫之能勝).” 이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보다 부드러움과 유연함이 더 강할 수 있다는 통찰이었다. 그는 강함과 채움, 성공을 좇는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어 바라보며, 낮아짐과 유연함 속에서 진정한 영적 힘을 발견한 역설의 영성가였다.
주목할 것은 노자의 사상이 현대인에게 오히려 더 새롭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오늘의 세계는 끊임없이 경쟁을 요구한다. 더 빨리 성공하라고 가르치고, 더 많이 소유하라고 말한다. 인간은 쉬지 못하고 계속 비교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달려가면서도 어디로 가는지는 점점 알 수 없게 된다.
노자는 아마 이런 인간을 보며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과도한 욕망과 인위성을 경계했다. 문명이 지나치게 복잡해질수록 오히려 인간은 본래의 삶에서 멀어진다고 보았다. ‘도덕경’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 지족불욕 지지불태). 오늘날처럼 끝없는 소비와 경쟁이 반복되는 시대에 이 문장은 묘한 울림을 남긴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물론 노자의 사상에도 한계는 있다. 현실 정치와 사회 개혁 문제에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실제로 유교 전통에서는 노자의 사상이 현실 책임보다 은둔과 회피를 조장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은 지나친 긴장과 경쟁 속에 몰릴 때마다 다시 노자를 찾았다. 권력과 욕망의 소음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자연과 단순함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래서 노자의 사상은 철학을 넘어 선(禪)과 동양 미학, 자연주의, 명상 문화 등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생각을 가라앉히는 선(禪) 불교의 형성과 동양 예술에서 여백의 미학이 강조되는 데에는 노자의 영향이 적지 않다. 모든 것을 꽉 채우려 하기보다 비어 있는 공간 속에서 조화를 찾으려는 감각이다.
노자가 ‘약함’을 반복해서 강조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세상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말하지만, 노자는 오히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가장 오래 남는다고 보았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딱딱하게 굳고, 풀과 나무도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하지만 죽으면 말라 비틀어진다는 뜻이다(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인지생야유약 기사야견강 초목지생야유취 기사야고고). 그런 통찰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처럼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인간 문명은 오랫동안 ‘정복’과 ‘성장’의 방향으로 달려왔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과도 멀어졌다. 노자는 그 문명의 질주 한가운데서 조용히 질문을 던졌던 사람인지 모른다. “정말 그렇게까지 애쓰며 살아야 하는가.”
◆2500년 뒤의 현대인, 다시 비움과 느림을 찾아서
25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지쳐 있다. 연결은 넘치지만 마음은 고독하고, 속도는 빨라졌지만 삶의 의미는 더 흐릿해졌다. 그래서 현대인은 다시 산과 숲을 찾고, 명상과 느린 삶을 이야기하며, 비움과 단순함을 동경한다. 인간은 너무 멀리 갔다고 느낄 때마다 다시 노자를 떠올렸던 것은 아닐까. 노자는 거대한 변화를 외치기보다 한 걸음의 중요성을 말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千里之行, 始於足下, 천리지행 시어족하)”는 그의 말은 조급함에 사로잡힌 현대인에게 여전히 유효한 충고로 다가온다. 세상을 이기려 하지 말고, 자연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라는 가르침. 이는 오늘날 지친 인류가 영성 회복을 위해 붙잡아야 할 가장 실천적인 지혜가 아닐 수 없다.
노자는 세상을 흑백으로 나누지 않았다. 강함 속에 약함이 있고, 성공 속에 실패가 있으며, 채움 속에 비움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서로 반대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하나의 흐름 안에 있다고 이해했다. 인간은 끊임없이 더 많이 가지려 하지만, 때로는 비워야 채워지고 물러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노자가 말한 ‘도(道)’는 인간을 넘어선 거대한 질서와 근원을 향한 물음이었다. 도는 또한 어떤 이에게는 신의 섭리로, 어떤 이에게는 우주 만물을 관통하는 근원적 질서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2026-06-25 15: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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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사회공헌단 출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15일 서울 용산 천승대교회에서 목회자와 신도 등 3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72주년 기념식 및 사회공헌단 출범식’을 개최했다. 송용천 한국협회장을 단장으로 하는 사회공헌단은 앞으로 환경보호, 취약계층 지원, 재난구호 등 다양한 공익활동을 벌이며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한다. 송 협회장은 기념사에서 “사회공헌단 출범을 통해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세상의 신뢰를 다시 세우는 이정표를 만들어 가자”고 말했다.
가정연합 제공
2026-06-15 20: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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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도덕이 권력보다 앞서야 한다는 신념
오늘날 공자는 흔히 도덕과 예절을 강조한 사상가로 기억된다. 그러나 실제의 공자는 단순히 “착하게 살자”고 말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무너져 가는 세계 속에서 인간 사회를 다시 붙들 수 있는 질서가 무엇인지 평생 고민했던 인물이다. 공자의 삶은 의외로 고단했다. 그는 노(魯)나라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넉넉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성서 속 모세가 광야를 경험했다면, 공자는 끊임없는 현실의 벽을 경험한 사람에 가까웠다. 그는 젊은 시절 가축 관리 같은 일을 했다고 전해진다. 훗날 제자들을 가르치며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지만, 공자의 꿈은 교육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이상 정치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공자는 한때 노나라의 관리가 되어 정치 개혁을 시도한다. 그는 권력보다 도덕이 앞서야 한다고 믿었다. 지도자가 먼저 바르게 서야 백성도 바르게 된다고 생각했다.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 짧은 말 속에는 공자의 철학이 응축돼 있다. 그는 법과 처벌만으로는 사회를 오래 유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 서로를 존중할 때 공동체는 비로소 안정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이상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의 군주들과 권력자들은 공자의 도덕 정치보다 당장의 힘과 이익에 더 관심이 많았다. 결국 공자는 나라를 떠나 여러 지역을 떠도는 긴 유랑 길에 오른다. 제자들과 함께 수레를 타고 각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지만, 냉대와 실패를 반복했다. 정적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은 적도 부지기수였고, 굶주림 속에 길이 막혀 아사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오죽하면 당대 사람들은 유랑하는 그를 두고 “주인 없는 상갓집 개 같다(喪家之狗, 상가지구)”며 대놓고 조롱했을까. 오늘날 세계 4대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가 살아생전에는 굶주림과 냉대를 견디며 떠돌던 이상주의자로 보였던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실패 속에서 공자 사상의 인간적 깊이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는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쓰라린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나, 인간에 대한 기대를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천하를 유랑하며 다듬어진 인간적 깊이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은 ‘인(仁)’이었다. 그는 인을 “사람을 사랑하는 것(仁者愛人)”이라고 설명했다. 인은 흔히 ‘어질다’로 번역되지만, 친절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음, 타인을 향한 공감과 책임 의식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공자는 인간 사회가 유지되려면 먼저 인간이 서로를 사람답게 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가족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군주와 신하 사이의 책임과 도리를 강조했다.
현대인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답답함이나 권위주의를 먼저 떠올릴 수도 있다. 실제로 후대의 유교 문화는 때로 지나친 위계질서와 형식주의로 흐르기도 했다. 여성 억압이나 경직된 신분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 측면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자 사상의 모든 모습은 아니다.
혼란한 시대를 살았던 공자에게 중요한 가치는 “인간다움의 회복”이었다.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군자구제기, 소인구제인)’ 즉, “군자는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원인을 찾는다”는 이 말은 인간다움이란 타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찰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는 힘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도 인간이 최소한의 품격과 책임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흥미로운 것은 공자가 신비주의적 종교인과는 다소 다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귀신과 사후세계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았으나, 말을 아꼈다. “삶도 아직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는가(未知生 焉知死)” 이 말은 공자의 현실주의를 보여준다. 그는 하늘(天)을 말했지만, 인간의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공자는 초월보다 인간 세계 자체를 더 깊이 고민한 사상가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의 사상이 종교성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다. 유교는 오랜 세월 동안 철학을 넘어 동아시아 사회의 정신적 질서로 기능했다. 조선에서는 국가 운영의 중심 이념이 되었고, 한·중·일 동양 3국의 가족문화와 교육관, 인간관계의 뿌리에도 깊게 스며들었다.
◆초월적 신비주의를 거부한 현실주의 영성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에는 유교적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어른에 대한 존중, 교육열, 가족 중심 문화, 관계 속 책임 의식 등은 모두 공자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적지 않다.
공자는 살아 있을 때 거대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끝내 자신의 이상 국가를 만들지 못했고, 떠돌이 사상가처럼 생을 마쳤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실패는 이후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 문명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 인류 역사에는 세상을 무너뜨린 혁명가들도 많았지만, 공자는 무너지는 세계를 붙들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세계 역시 또 다른 혼란 속에 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 사이의 신뢰는 흔들리고, 연결은 많아졌지만, 관계는 더 쉽게 깨진다. 사람들은 자유를 말하지만 동시에 깊은 고립을 경험한다.
후대 사람들이 공자를 높게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예절과 도덕만 가르친 사람이 아니라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근본 질서가 무엇인지를 평생 고민했던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공자는 힘과 법만으로는 공동체를 오래 유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이 서로를 존중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가질 때 사회는 비로소 안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문장 중 하나인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오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다. 즉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이 말은 오늘날에도 보편적 윤리처럼 받아들여진다. 시대와 문화를 넘어 인간관계의 기본 원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후대는 공자가 지도자의 도덕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법과 처벌만으로 백성을 통제하면 사람들은 벌만 피하려 할 뿐이라고 보았다. 반대로 지도자가 스스로 바르게 서면 백성 역시 자연히 바르게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공자의 정치 철학은 권력보다 품격과 책임을 강조하는 데 특징이 있었다.
◆배움과 보편 윤리로 문명의 주춧돌을 놓다
공자는 배움에 대한 태도에서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고 말하며 배움 자체의 가치를 강조했다. 또한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焉, 삼인행 필유아사언)”고 하여, 누구에게서든 배울 게 있다는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동아시아에서 교육과 학문을 중시하는 문화가 오랫동안 이어진 데에는 공자의 영향이 매우 컸다. 그는 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신이 담당하던 질서의 기능을 인간의 도덕과 관계 윤리 속으로 옮겨 놓았다. 인간은 초월적 신에게만 구원을 갈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성찰과 책임을 통해 이 땅 위에 정당한 질서를 세워갈 수 있는 주체임을 증명한 것이다. 2500년 전 천하를 떠돌며 굶주리던 늙은 사상가가 남긴 영성의 힘은 오늘날 풍요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 문명에게 인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여전히 매섭게 묻고 있다.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2026-06-25 15: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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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채널 막힐 때마다 민간 차원서 돌파구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이념의 빙벽을 녹인 종교적 신념과 민간 외교의 힘
한반도의 허리가 잘린 지 80년이 가까워지는 오늘날, 남북 관계는 여전히 짙은 안갯속을 걷고 있다. 정치적 이해관계와 국제 정세의 파고 속에서 정부 주도의 공식 외교가 경색될 때마다, 막힌 혈관을 뚫고 물밑에서 평화의 물꼬를 텄던 것은 민간 차원의 끈질긴 노력이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이 걸어온 대북 교류의 역사는 그 규모와 파급력 면에서 독보적인 궤적을 그려왔다.
가정연합의 대북 사업은 단순한 일회성 원조나 시혜적 차원의 지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신통일한국이라는 거대 담론 아래, 종교적 신념인 참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과거 가장 강력한 승공(勝共) 운동의 선봉에 섰던 문선명·한학자 총재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평양 땅을 밟았던 사건은 현대사에서 가장 파격적인 민간 외교의 장면으로 기록된다. 35년 넘게 이어진 이들의 여정은 경제적 협력과 문화적 공감 등 화합을 아우르는 전방위적 평화 운동의 모델을 제시했다.
북한 관광 및 정주 성지순례의 개시
문선명 한학자 총재의 방북 이후 1992년 4월 12일부터 16일까지 북한의 평양과 금강산 등을 방문하는 관광이 시작됐다. 같은 해 7월 23일부터 27일까지 문총재의 고향인 정주와 한총재의 고향인 안주, 나아가 흥남을 관광하는 기회도 가졌다. 8월 31일부터 9월 5일까지 일본에서 오야마다 히데오 외 219명이 북한을 방문했다. 그 후 매년 성지인 정주 순례가 진행됐다.
경제 협력의 실체: 평화자동차와 보통강호텔이 남긴 발자취
가정연합의 대북 사업은 선언적 의미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실체로 형상화되었다. 특히 평화자동차와 보통강호텔은 남북 경제협력의 상징물로서 북한 사회에 자본주의적 경영 기법과 남측의 기술력을 이식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1998년 설립 인가를 받아 2002년 남포시에 준공된 평화자동차 종합공장은 남북 합작 투자의 효시였다.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노동력이 결합된 이 공장에서 생산된 휘파람, 뻐꾸기 등의 자동차 모델은 평양 시내를 누비며 북한 주민들에게 남측의 비약적인 성장을 시각적으로 증명했다. 이는 개성공단 모델이 본격화되기 훨씬 이전부터 시도된 선구적인 경제 협력 모델로, 폐쇄적이었던 북한 경제 체제에 작은 틈을 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평양의 1급 숙박 시설인 보통강호텔을 가정연합 측이 인수하여 운영한 사례는 대북 사업의 지속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곳은 남북 회담의 주요 장소이자 외국인 투자자들의 거점으로 활용되었으며, 남북 관계가 얼어붙었을 때도 소통의 불씨를 지키는 사랑방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에 2007년 평양에 건립된 세계평화센터는 남북 문화 교류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학술회의와 교류 행사를 뒷받침했다.
문화와 스포츠, 마음의 벽을 허무는 소프트파워
정치적·경제적 접근이 한계에 부딪힐 때, 가정연합은 문화와 예술이라는 부드러운 힘을 빌려 남북의 정서적 이질감을 해소하는 데 주력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리틀엔젤스 예술단의 평양 공연이다. 1998년과 2000년, 분단 이후 최초로 남측 어린이들이 평양 한복판에서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쏟아냈을 때, 북측 관객들 역시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처럼, 어린 천사들의 목소리는 이념의 벽을 허물고 한민족이라는 일체감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에 화답하듯 북측의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이 서울을 방문하며 민간 차원의 문화 교류는 황금기를 맞이했다.
포스트 문선명 시대: 한학자 총재와 신통일한국의 글로벌 확장
2012년 문선명 총재 성화 이후, 한학자 총재는 그 유지를 받들어 대북 사업을 더욱 확장된 개념의 신통일한국 운동으로 진화시켰다. 이제 남북 교류는 단순한 지원을 넘어 전 세계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국제적 평화 운동으로 발돋움했다.
그 중심에는 ‘피스로드 통일 대장정’ 프로젝트가 있다. 전 세계 160여 개국이 참여하는 이 행진은 한반도 통일이 단순한 민족 내부의 문제를 넘어 세계 평화의 핵심 고리임을 국제 사회에 역설한다. 이 행진은 평양에서도 열렸는데, 러시아 가정연합 회원들이 참가했다.
민간 채널의 가치와 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하여
남북 관계가 경색되고 모든 대화 통로가 차단될수록, 민간이 닦아놓은 채널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가정연합의 35년 남북 교류 역사는 정부가 정치적 제약으로 인해 가지 못했던 길을 종교와 평화의 이름으로 먼저 개척해왔음을 보여준다.
물론 대내외적인 정치적 변수와 대북 제재 등 현실적인 제약은 여전하다.
이제 지난 성과를 발판 삼아, 남북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잘사는 공생·공영·공의’의 모델을 정착시켜야 한다. 가정연합이 닦아온 피스로드가 언젠가 평양과 서울을 잇는 자유로운 고속도로가 되고 한반도가 동북아 평화의 발원지가 되는 그날까지 민간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26-06-15 16:2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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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원수가 형제가 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문선명 총재 방북 당시 수행원으로 참여해 보좌 역할을 했던 황엽주 교수를 만나 당시 소감을 들어봤다. 그는 아내와 함께 1985년 중국 정부 교육부의 초청을 받아 외국인 초빙교수로 영어를 가르쳤고, 중국인민대학에서는 한국연구소를 설립해 객좌교수로 한국 문화와 한국어를 강의하기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문선명 총재의 평양 방문은 어떻게 성사되었나.
문 총재는 199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원론인대회’를 주관하며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만나 환담했다. 냉전 종식의 상징적 장면이었다. 그 직후 총재는 북한 방문 의사를 밝혔다. 당시 재일교포 사업가 박경윤 씨가 김일성 주석과 교분이 있었는데,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이 그를 통해 뜻을 전달했다. 김 주석이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면서 방북이 성사되었다. 문 총재는 베이징 공항 귀빈실에서 중국 공안당국의 각별한 영접을 받은 뒤, 중국 정부에 감사를 표하고 조선민항 편으로 평양을 향해 출발했다.
―냉전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방북 추진은 부담이 컸을 것 같다.
금전적 비용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원하던 김일성 주석의 의지와 북한의 문을 열어 냉전 질서를 넘어가려던 문 총재의 뜻이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다.
―평양에서의 분위기는 어땠나.
사전 조율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진행된 일정이어서 긴장감이 컸다. 인민대회당 회담에서 문 총재가 “주체사상만으로는 통일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하나님주의와 사랑으로 가능하다”고 말했을 때 수행원들은 순간 얼어붙었다. 그러나 참사랑의 정신으로 살아온 총재의 태도는 언제나 부드럽고 포용적이었고, 일정은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북한 측은 다음 일정을 거의 알려주지 않아 우리는 언제 김 주석을 만나는지조차 모른 채 안내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김일성 주석의 태도는 어땠나.
매우 정중하고 친절했다. 오찬 자리에서는 음식이 나올 때마다 설명하며 권했다. “이것은 어느 강에서 잡은 쏘가리로 끓인 탕이다”, “순덕 샘물은 시아누크가 마셔보고 페리에보다 더 맛있다고 했다”는 식으로 직접 이야기를 했다. 특히 “문 선생이 부시와 친하다고 들었는데 나를 미국에 한번 초청해 보라고 해보라”는 말은 미국 워싱턴타임스 특종이 됐다.
오찬이 끝날 무렵 문 총재는 김 주석의 손을 잡아 들어 올리며 평양 사투리로 “주석님, 우리는 이제 형제가 되었시요?”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오랜 원수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회담 이후 내부 평가는 어땠나.
우리는 ‘원수도 사랑으로 이긴다’는 가르침을 배워온 사람들이다. 수행원들 모두 깊은 감동을 느꼈다. 한국 정부로부터 특별한 평가를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 북방 외교가 열리면서 한·러, 한·중 간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는 전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남북 교착 상황을 보며 어떤 교훈을 얻는가.
동양에서는 천지인이라는 말을 한다. 하늘의 때가 열려도 사람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역사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언젠가 천륜의 도리를 받들 새로운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 믿는다.
2026-06-15 16: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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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해체기에 세계사적 만남… ‘남북교착’ 우리 시대에 묻는다
왜 지금 다시 1991년인가
한반도가 다시 냉각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군사적 긴장은 일상화되고, 남북 간 공식 대화 채널은 사실상 멈춰 있다. 북핵 문제는 장기화되었고, 국제 질서는 미·중 전략 경쟁 속에서 재편 국면에 들어섰다. 상호 불신과 군사적 대응이 반복되는 구조 속에서 대화라는 단어는 점점 현실감이 옅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991년 11월 평양에서 이루어진 문선명 총재와 김일성 주석의 회담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35년 전의 만남은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대화의 가능성이 어떤 조건에서 열렸는지를 되묻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서 1991년이 호출되고 있다.
냉전 해체기, 이례적 만남의 배경
1991년은 세계사적 전환기였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구 사회주의권은 해체 수순에 들어섰고, 소련은 붕괴 직전에 놓여 있었다. 냉전이라는 거대한 이념 구도는 균열을 보였고, 국제사회는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고 있었다.
한반도 역시 변화의 흐름 속에 있었다. 그 전환기의 한복판인 1991년 11월 문선명 총재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직접 회담을 가졌다. 이는 남북기본합의서 채택(12월)보다 한 달 앞선 시점이었다.
당시 문선명·한학자 총재외에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 등 방북단 일원이 8명이었다는 점에서 실질적 논의와 후속 협의를 염두에 둔 만남으로 평가된다. 반공주의 운동을 상징해 온 종교 지도자가 북한의 최고지도자와 마주 앉았다는 사실 자체가 국제정치의 관성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정부 간 정상회담이 아닌 민간 차원의 접촉이었다는 점 역시 이례적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91년 12월 남북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며 화해와 불가침, 교류 협력을 선언했고, 같은 해 유엔 동시 가입을 이루었다. 문선명·김일성 회담은 이러한 전환 국면과 맞물리며 ‘대화의 가능성’을 선행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분단 이후 처음으로 제도적 공존의 틀을 마련하던 순간이었다.
평양에서 열린 대화의 문, 그리고 확산된 기대
이 회담이 남긴 의미는 상징과 실질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적대의 구조 속에서도 대화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종교 기반 네트워크가 국경과 체제를 넘어 작동할 수 있음을 드러냈다. 이는 훗날 민간외교, 이른바 트랙2 외교의 사례로 거론되기도 한다.
실질적 차원에서도 경제 협력 가능성, 교류 사업 구상, 향후 접촉의 확대 방안 등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는 소식은 당시 사회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반공주의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인식되던 종교 지도자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 자체가 국민들에게는 충격에 가까운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이 회담은 ‘적대는 불변’이라는 고정 관념에 균열을 내는 사건이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전해진 회담 소식은 “남북 간에도 대화가 가능하다”는 현실적 감각을 처음으로 체감하게 한 장면으로 받아들여졌다.
회담 이후 경제 협력과 교류 사업에 대한 구상이 공개되면서, 남북 관계가 단순한 군사·이념 대결을 넘어 실질적 협력의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기대가 형성되었다. 만수대 의사당 회담에서 문 총재는 김 주석 앞에서 주체사상의 한계를 지적하며 하나님주의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는 파격적 발언을 했고, 이를 계기로 두 지도자는 의형제 관계를 맺으며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개발 협력 ·핵무기 개발 반대 ·남북 정상회담 추진 등에 합의해 이후 카터 방북과 남북 정상회담 논의로 이어졌다.
2026년 한반도 정세 속 재해석
2026년 현재 한반도는 대화보다 대치가 일상화된 상황이다. 남북 공식 채널은 장기간 중단되었고, 상호 신뢰는 크게 훼손된 상태다.
이런 조건 속에서 1991년의 회담은 다시 질문을 던진다. 공식 외교가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비공식 채널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종교·문화·시민사회 영역이 신뢰 형성의 완충지대로 기능할 가능성은 없는가.
1991년은 완성된 해법이 아니라 출발점의 사례였다.
대화의 구조는 선언만으로 복원되지 않는다. 구조적 설계가 필요하다.
첫째, 정부 간 협상과 함께 민간·종교·문화 교류가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둘째, 민간 접촉이 제도적 협의로 이어지려면 국가의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셋째, 국제사회와의 연계 속에서 한반도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대화는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다.
역사적 사건이 아닌 현재진행형 질문
문선명·김일성 회담은 오랜 준비와 치밀한 조율, 그리고 정치적 부담과 상당한 비용을 감수한 결단의 산물이었다. 그 결과, 이념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대에도 만남은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왜 대화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가.
1991년 평양의 장면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대화는 누구의 몫인가. 정부인가, 민간인가, 국제사회인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질문은 반복된다. 1991년의 만남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기준이다. 대화는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준비의 문제임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2026-06-15 16: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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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한민족 풍류는 심정문화의 원형 [신화에서 선민까지 한민족 정체성의 문화사적 발견-기고]
‘한류’, 이천 년을 흐른 풍류의 현대적 현현
오늘날 전 세계를 흔드는 K-팝의 비트와 K-푸드의 미각, K-드라마의 서사는 문화적 유행을 넘어선다. 이 폭발적인 인기를 과연 한국의 고도화된 정보통신 기술이나 거대 자본, 혹은 치밀한 마케팅의 승리로만 돌릴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물질의 풍요 속에서도 영혼의 갈급함을 느껴온 현대인들에게 한국 문화는 그들의 심층적 결핍을 채워주는 ‘정서적 복음’이었고, K-콘텐츠는 이들의 마음속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과거 해외 시장에서 선풍적인 열풍을 일으켰던 어느 제과회사의 초코과자를 떠올려 보자. 당시 합리주의적 사고에 익숙했던 서구인들에게 과자 상자에 선명히 새겨진 ‘정(情)’이라는 한 글자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적 암호와 같았다. 하지만 이 글자에 담긴 한국인 특유의 따뜻한 인정은 국경을 넘어 세계인들의 굳게 닫힌 마음을 녹여내는 마법을 발휘했다. 이처럼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가슴 깊은 곳의 ‘심정적 에너지’는 단순한 상품의 흥행을 넘어선다.
이러한 현상의 실체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신적 기저에 면면히 흘러온 ‘풍류(風流)’라는 영적 에너지의 현대적 분출이다. 세계적인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샤머니즘을 원시적인 미개 종교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는 샤머니즘이야말로 장구한 역사를 지닌 인류 영성의 원초적 모태이며, 현대의 고등종교들 역시 이 근원적 영성을 계승하여 인간의 구원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입증했다. 엘리아데는 인간의 종교적 열망이란 인류의 의식 구조 속에서 내재된 보편적 일치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이와 같은 문명사적 통찰은 국내 도상학(圖像學)의 권위자인 동덕여대 박용숙 교수의 연구를 통해 한국학적 확신으로 도약한다. 박 교수는 기독교와 불교 문명이 태동하기 전, 인류의 사상과 역사를 일구었던 최초의 정신적 기틀로서 ‘시원(始原) 샤먼문명’을 제시했다. 박 교수는 미국 버클리 대학 객원교수 시절, 현지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유럽과 미국의 방대한 고서적 분석을 시도했다. 그는 전 세계의 방대한 기록 연구를 통해 한국의 풍류가 결코 변방의 아류 문화가 아닌 인류 시원 사상의 핵심 맥락과 맞닿아 있음을 주장하였다.
육당 최남선이 갈파했듯, 고대 단군의 권능은 곧 이러한 ‘무도(巫道)’로부터 연원했다. 하늘과 땅, 이승과 저승을 관통하며 길흉화복을 다스리고 신의 기운을 조화롭게 하던 무(巫)의 지혜는 한민족 문화의 ‘일체 씨알’이자 풍류의 본질이었다. 이는 마치 J.R.R. 톨킨의 서사시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절대반지’와 같다. 톨킨이 묘사한 절대반지는 모든 제후를 모으고 흩어진 세상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힘의 상징과도 같다. 그는 “순금이라고 해서 다 반짝이는 것은 아니며, 방황한다고 해서 반드시 길을 잃을 잃은 것은 아니다”라는 깊은 울림을 남겼다. 비록 오랜 세월 역사의 먼지에 가려져 그 광채가 흐려졌을지라도, 풍류라는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영성은 결코 시들지 않는 절대 진리의 순금과 같다.
본래 풍류란 먼 옛날 하늘이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심어놓은 ‘영성의 유전자’이자, 모든 만물을 하나로 어우러지게 만드는 ‘태초의 리듬’이다. 즉, 풍류는 한민족이라는 나무가 뿌리를 내릴 때부터 이미 흐르고 있었던 ‘생명의 수액’과 같다. 엘리아데가 주목한 인류의 시원 영성이나 박용숙 교수가 주목한 샤먼문명의 도상들은 결국 이 풍류라는 거대한 설계도를 설명하기 위한 조각들이다. 풍류는 이론이기 이전에 우리 민족의 몸속에 각인된 본능적 신명이며, 서구의 논리가 ‘나와 너’를 구분할 때, 풍류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아픔을 녹여내고 기쁨을 증폭시키는 ‘힘의 파동’인 셈이다.
한민족의 정신 지층 아래 도도히 흐르던 풍류는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를 차례로 수용하면서도 이들을 충돌시키는 대신 거대한 용광로 안에서 하나로 융합해 냈다. 이 겹겹의 지층은 풍류라는 유연한 영성을 통해 융합되었고, 이것이 바로 한국인 특유의 다원적이고 포용적인 정신세계를 형성한 토양이 되었다. 신라 최치원이 『난랑비서(鸞郎碑序)』에서 갈파한 ‘포함삼교(包含三敎)’는 바로 이러한 융합의 결정체다. 풍류는 외래 사상을 수용하되 우리만의 신명으로 이를 재창조해내는 독특한 구조적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힘은 수천 년간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잠자다 마침내 때를 만나 K-컬처라는 역동성으로 분출된 것은 아닐까?
풍류를 한류의 원형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지극히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이 정립될 때 비로소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여신문화’나 시원 영성은 단순한 전설을 넘어, 인류를 구원할 실체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인류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부계 중심의 수직적 질서가 지배해왔다. 그러나 한민족의 정신사 이면에는 가부장적 권위에 가려져 있었을 뿐, 만물을 품고 살려내는 ‘모성적 영성’이 태초부터 흐르고 있었다. 풍류를 통해 뭇 생명을 교화하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가치가 전 세계인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심정적 위력으로 화(化)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가리워졌던 모성적 시원 영성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 완성되는 필연적 사건이다.
◆ 효정(孝情), 풍류를 넘어 인류로 확장되는 심정의 질서
풍류의 도도한 흐름을 추적해 들어가면, 그 기저에는 한국인의 영성 구조를 빚어온 ‘무(巫)’의 유구한 전통이 자리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능화의 『조선무속고』를 비롯한 선구적 연구들이 증언하듯, 우리 민족에게 각인된 ‘무’의 원형은 단순한 기복이나 점술의 차원을 가뿐히 넘어선다. 그것은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을 하나로 잇는 거룩한 ‘중보(仲保)’의 도(道)였다. ‘무(巫)’라는 글자의 형상처럼, 하늘의 뜻을 지상에 투영하고 인간의 애끓는 심정을 하늘에 상달(上達)시키는 이 수직적 연결 구조야말로 우리 민족이 태초부터 견지해온 고유한 영성의 문법이었다. 비록 역사의 굴절 속에서 이 원형적 기능이 파편화되고 왜곡되며 본래의 위엄을 잃은 적도 있었으나, 하늘과 신령하게 소통하고자 하는 한국인의 내면적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생명력은 제의의 틀을 깨고 나와 노래와 춤, 어울림과 신명이라는 ‘풍류’의 문화로 승화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무’의 수직적 응집은 ‘풍류’라는 수평적 확산으로 전환되며, 비로소 공동체의 삶 속에 구체화 된 것이다.
한민족의 심층에 흐르던 풍류의 영성은, 이 시대에 이르러 ‘효정(孝情)’이라는 숭고한 이름 아래 하나의 완성된 질서로 정립되었다. 효정은 단순히 가문의 울타리에 갇힌 윤리나 사장화 된 덕목이 아니다. 하늘부모님을 향한 지극한 ‘종적 사랑’과 인류 전체를 보듬는 광대한 ‘횡적 사랑’이 하나의 축으로 맞물려 고동치는 생명력의 구조다. 하늘을 공경하는 경천(敬天)의 마음이 그 단단한 뿌리라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弘益)의 실천은 그 사랑이 대지 위로 찬란하게 꽃피는 발현의 방식인 셈이다.
이 종과 횡의 두 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위하여 사는 삶’은 인간 존재의 근본 원리가 된다. 그 거룩한 교차점에서 인간의 사랑은 개별적 자아를 넘어 인류라는 거대한 바다로 확장되며, 모든 관계는 ‘심정(心情)’이라는 영적 끈으로 단단히 결속된다. 여기서 발현되는 에너지는 단순히 가정을 돌보는 차원의 모성을 초월한다. 그것은 분열과 갈등으로 점철된 세계를 다시 태초의 일체감으로 묶어내는 ‘창조적 사랑’의 현현(顯現)이자, 인류 공동체를 치유하는 유일한 해법이다.
결국 풍류의 신명은 효정 안에서 방향을 얻고, 효정은 인류를 향해 그 지평을 확장한다. 이것이 바로 ‘하늘부모님 아래 인류 한 가족’이라는 비전이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 질서로 작동할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지점은, 단순한 문화적 진화의 결과가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 온 영성과 역사, 그리고 인간의 정성이 하나의 흐름으로 수렴되며, 마침내 실체적 질서로 드러나는 전환의 순간이다. 더 이상 풍류는 과거의 유산이 아니며, 효정 또한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이 땅 위에서 작동하고 있는 살아있는 원리이자 문명의 방향을 규정하는 새로운 기준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결단이다. 눈앞의 파편화된 현상에 매몰될 것인가, 아니면 그 거친 수면 아래 도도히 흐르고 있는 ‘심정(心情)의 질서’를 겸허히 수용할 것인가.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권력의 부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거룩한 원리 위에서 약동해 왔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진리의 맥락을 온몸으로 껴안은 소수의 선각자가 시대를 열어젖히는 주역이 되어왔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기에 작금의 시기는 인류가 상극의 구질서를 뒤로하고 ‘하늘부모님 중심의 대가족’이라는 새로운 문명으로 진입하는 전환점이다. 이 거대한 영적 파고 속에서 효정(孝情)의 등불을 드는 일은 미래 인류의 생존을 담보하는 가장 존엄한 응답이 될 것이다.
◆ 경천과 홍익, 그리고 효정(孝情)의 문명
오늘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류(韓流)의 지속 가능한 생명력은, 문화적 콘텐츠의 확산을 넘어선 지점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것은 특정 문화의 일방적 전파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명들이 하나의 ‘심정’ 안에서 어우러지고 공명하는 거대한 ‘문화적 공유지’의 형성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코 우연한 유행이 아니다. 한민족의 시원에 깊이 각인된 영적 유전자와 문명적 구조에서 비롯된 필연적 흐름이다.
환웅(桓雄)이 하늘의 뜻을 품고 지상으로 내려오고, 웅녀(熊女)가 인내와 정성으로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던 단군신화는 단순한 건국 설화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인간, 그리고 대지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의 원형적 선언이었다. 이 숭고한 기원으로부터 우리 민족은 하늘을 공경하고 뭇 생명을 귀히 여기는 경천애민(敬天愛民)의 질서를 숙명처럼 이어받았다. 이제 그 오래된 미래의 가치가 ‘효정’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여,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된 지구촌을 하나의 가족으로 묶어내는 문명적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종(縱)과 횡(橫)의 성스러운 질서는 신라 황룡사 9층 목탑의 형상을 통해 더욱 구체적이고 웅장하게 투영된다.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솟아오른 수직적 층차는 경천(敬天)의 질서를 상징하며, 아홉 층에 깃든 화합의 염원은 이웃 나라와 세계를 품어 안는 홍익(弘益)의 지평을 드러낸다. 그것은 타자를 억압하는 정복의 논리가 아니었다. 하늘의 거룩한 질서 안에서 만인이 공존을 이루고자 했던, 고대 한반도가 그려낸 가장 원대한 ‘문명의 설계도’였다. 이제 이 수직과 수평의 질서는 박물관에 박제된 과거의 상징에 머물지 않는다. 경천과 홍익이라는 이 이중 나선형의 구조는 오늘날 ‘효정’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생동하는 실체적 문명으로 현현(顯現)하고 있다. 하늘을 향한 지극한 경배와 인류를 향한 무조건적 사랑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이 효정의 질서는, 파편화된 세계를 다시 영적 일체감으로 결속하는 새로운 시대의 표준(Standard)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풍류의 물줄기를 타고 형성된 우리 민족의 신명 어린 에너지는, 이제 ‘효정’이라는 거대한 유전(油田) 안에서 명확한 시대적 방향성을 얻었다. 그리고 그 효정의 빛은 이제 한반도를 넘어 전 인류를 향해 그 지평을 광활하게 확장하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로 여겨졌던 ‘심정의 질서’가 마침내 온 인류가 공유해야 할 ‘보편적 문명’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장엄한 전환의 지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문턱을 비장하게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문명적 전환은 이제는 관념이 아니라, 실체적 주체를 통해 이 땅 위에서 온전히 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로소 위대한 종착지에 도달하게 된다.
고기훈 박사(한국학)
2026-06-12 09: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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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노예 민족에게 법과 神을 준 사람”
“한 공동체는 무엇으로 유지되는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질문 가운데 하나다. 그 답은 무엇일까. 힘인가. 군대인가. 돈인가. 아니면 인간보다 더 높은 어떤 질서와 믿음인가. 고대 이집트의 벽돌 굽는 노예들 속에서 등장한 한 인물은 여기에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그의 이름은 모세(Moses)였다.
오늘날 그는 유대교의 예언자이자 지도자로 기억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모세는 종교 지도자를 넘어선 존재였다. 그는 흩어진 노예 집단을 하나의 민족으로 조직했고, 공동체를 유지할 윤리와 율법을 전했으며, ‘보이지 않는 신(神)’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명 의식을 만들어냈다. 그 점에서 모세는 세계사 최초의 거대한 ‘정신적 국가 건설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기원전 13~15세기 무렵의 인물인 모세 이야기는 성서 속에서 극적인 서사로 펼쳐진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시절, 이집트 왕 파라오(Pharaoh)는 히브리 민족의 인구 증가를 두려워해 남자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집트 북동부에서 태어난 모세는 이 명령을 피해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띄워졌고, 파라오의 딸에게 발견되어 역설적으로 이집트 왕실에서 자라게 된다.
◆광야에서 마주한 부름과 떨림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자신이 노예 민족 출신이라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성서는 젊은 모세가 히브리인을 학대하는 이집트인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치는 장면을 전한다. 여기까지의 모세는 아직 ‘예언자’가 아니었다. 이후 이집트를 벗어나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살아가던 그는 불타지만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의 음성을 듣고 부름을 받는다. “내가 내 백성의 고통을 보았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집트로 돌아가 히브리 민족을 이끌어내라고 명령한다.
성서 속 모세는 영웅이라기보다 오히려 두려움 많고 망설이는 인물에 가깝다. 그는 스스로 말주변이 부족하다고 호소하고, 자신의 능력을 의심한다. 그러나 바로 그 연약함 때문에 모세라는 인물은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세계 종교의 위대한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완벽한 초인이 아니라, 오히려 흔들리고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 출발한다.
모세는 두려움에 떨다가 신의 근심을 알고 이집트로 돌아가 파라오와 맞선다. “내 백성을 보내라.” 하지만 파라오는 거부한다. 그리고 성서에는 유명한 ‘열 가지 재앙’ 이야기가 이어진다. 강물이 피로 변하고, 메뚜기 떼가 들판을 덮고, 흑암이 땅을 뒤덮는 장면들은 이후 서양 문학과 예술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연이은 재앙은 단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성서 안에서는 인간 권력의 오만에 대한 심판처럼 묘사된다. 결국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의 ‘출애굽’을 허락한다. 절대 권력도 더 높은 질서 앞에서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마침내 히브리인들은 이집트를 탈출한다. 목적지는 ‘약속의 땅’이라고 불리는 가나안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국경을 벗어나는 마지막 관문에서 거대한 ‘홍해’라는 벽에 부딪힌다.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추격해 온다. “두려워하지 말라. 굳게 서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모세는 이렇게 외쳤고, 절망 속에서 바다를 향해 손을 들자 물길이 갈라졌다는 이야기는 이후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렬한 종교 서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출애굽, 자유를 향한 원형적 서사
물론 오늘날 역사학과 고고학에서는 출애굽 사건의 규모와 역사성을 둘러싼 논쟁이 존재한다. 실제 대규모 탈출이 있었는지, 성서 기록이 후대에 상징적으로 구성된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견해도 나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수천 년 동안 인간에게 어떤 의미로 작동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출애굽은 억압에서 자유로 나아가는 인간의 원형적 서사가 되었다. 이후 수많은 시대와 공동체가 자신들의 고난을 설명하기 위해 모세와 출애굽 이야기를 호출했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에서조차 모세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노예제(奴隸制)와 차별 속에서 자유를 꿈꾸던 사람들에게 그는 해방의 지도자였다.
이집트를 완전히 벗어나 광야로 나온 히브리인들은 곧바로 가나안에 도착하지 못한다. 성서에 따르면 그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한다. 배고픔과 갈등 속에서 끊임없이 불평하고 흔들린다. 주목할 점은 모세의 위대함이 단지 기적을 일으킨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집단을 끝까지 이끌어 가는 데 있다. 그리고 시나이반도 중앙의 험준한 암산 시내산(해발 약 2,200m)에서 모세는 십계명을 받는다. 흔히 말하는 모세의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기초로 하여 이후 공동체 질서를 규정한 종교적·사회적 규범 체계를 가리킨다.
◆시내산의 십계명과 ‘신 앞의 법’
‘살인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오늘날에는 너무 익숙해 보이는 십계명의 문장들이지만, 당시로서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윤리 선언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법이 왕의 변덕이 아니라 ‘신 앞의 법’이라는 형태를 띠었다는 점이다. 당시만 해도 권력이 법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시대였지만, 십계명 이후 권력자 역시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더 높은 질서 아래 있다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훗날 서구 문명의 법과 도덕 체계는 이런 유대교 전통의 영향을 깊게 받게 된다. 유대교뿐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 역시 모세를 중요한 인물로 받아들이며, 그의 이야기는 세계 종교사의 거대한 뿌리가 되었다.
모세의 삶은 영화, 시, 소설, 희곡 등으로 변주되어 예술과 대중문화에도 엄청난 영향을 남겼다. 특히 영화는 모세 서사를 반복적으로 재현해 왔다. 대표적인 작품이 1956년 제작된 영화 《십계》이다. 찰턴 헤스턴이 모세 역을 맡은 이 작품은 당시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고, 지금도 성서 영화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거대한 홍해를 가르는 장면과 시내산의 계시는 당시 기술로 구현하기 어려운 스펙터클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압도적 장면들이 모세 신화를 현대 대중에게 다시 각인시켰다. 이후에도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 등 수많은 작품이 모세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했다. 시대마다 표현 방식은 달라졌지만, 공통점은 하나였다. 인간은 여전히 자유와 구원의 이야기에 끌린다는 점이다.
◆현대 대중문화가 호출하는 모세
생각해 보면 인간은 빵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존재하는지, 어떤 질서를 따라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다. 돈과 권력만으로는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함께 믿는 가치와 규범,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집단적 기억이 필요하다. 모세는 바로 그 기억을 만든 사람이었다. 그는 ‘해방 영웅’을 뛰어넘어 혼란스러운 공동체를 끝까지 이끈 지도자였다. 공동체를 ‘민족’으로 만들고, ‘법’을 권력 위에 세우며, 고통의 여정을 끝까지 함께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서사가 수천 년 동안 인간에게 반복적으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은 단지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자유 이후의 질서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모세의 시대에는 율법과 하나님의 이름이었다.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2026-06-25 15:2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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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관념 아닌 생존의 문제… 미래 세대 위한 ‘실천적 연대’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구조적 과제를 평화의 범주로 확장해 온 선학평화상은 미래 세대를 위한 지속 가능한 평화를 기치로 활동해 왔다. 출범 초기부터 수상자 발굴을 위해 세계 각지를 직접 누벼온 남인석 사무총장을 만나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이 상이 추구하는 방향과 인류가 직면한 위기에 대한 해법을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우리는 과거의 공로가 아닌, ‘다가올 위기’의 영향력”
-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평화상인 노벨평화상과 비교할 때, 선학평화상만의 차별성은 무엇입니까.
“노벨평화상이 주로 분쟁의 완화와 외교적 리더십을 통해 평화를 조명해왔다면, 우리는 갈등이 일어나기 전의 구조에 주목합니다. 기후·식량·보건의 불평등처럼 미래 세대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를 평화의 범주로 확장하고, 가장 열악한 현장에서 직접 해결 모델을 구축해 온 실천가들을 발굴하는 데 집중해 왔습니다. 전쟁의 부재를 넘어 인간의 존엄과 생존권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평화입니다.”
- 다가올 위기를 꼽는다면.
“기후 변화, 식량 불안, 보건 격차 같은 구조적 과제들입니다. 이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미래 세대의 안전은 담보될 수 없습니다. 전쟁이 없다고 해서 곧 평화라 말할 수 없습니다.”
- 선학평화상이 구상하는 평화의 범위가 있는지요.
“이상적 평화는 총성이 멈춘 이후의 상태가 아니라, 위기가 폭발하기 전에 구조를 바꾸는 일입니다. 대표적으로 팬데믹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백신은 누구의 것인가? 부유한 국가의 것인가? 인류 모두의 것인가? 선학평화상이 구상하는 평화는 바로 이런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공재를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인식하는 질서까지를 포함합니다. 평화의 범위는 지금보다 훨씬 넓어져야 합니다.”
“화려한 명성보다 실천과 책임의식”
- 수상자 선정 기준은 무엇입니까.
“직책이나 명성보다 삶의 방향을 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 실제로 서 있었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인류 공동의 과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는지가 핵심입니다. 미래 세대에 대한 공동 책임을 실천하며 묵묵히 현장을 지킨 인물이 우리가 찾는 평화의 얼굴입니다.”
- 한 사람 예를 들어주신다면.
“대표적인 분이 제2회 수상자인 지노 스트라다 박사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스트라다 박사는 이탈리아 의사로서 분쟁 지역에서 무상 의료 봉사를 실천했습니다. 그분은 환자의 국적도, 정치적 입장도 묻지 않았습니다. 평화는 선언이 아니라, 그런 이타적인 선택의 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민사회의 선한 힘과 새로운 플랫폼”
- 정부와 국제기구의 역할로도 충분하지 않은지요.
“공공 영역은 정부와 국제기구의 역할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관계와 절차의 제약을 받습니다. 시민사회는 상대적으로 유연합니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는 장점이 있습니다.”
- 그렇다면 시민사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제6회 수상자인 휴 에반스의 경우 ‘글로벌 시티즌(Global Citizen)’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시민사회의 선한 힘을 결집시키는 참여의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청년들이 휴대폰으로 빈곤 퇴치나 기후 대응 캠페인에 참여합니다. 또한 온라인 서명과 메시지 전달, 행동 촉구 등에 동참합니다. 그 참여가 일정 규모를 넘어서면 대규모 콘서트와 국제행사에서 세계 지도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약속을 요구합니다. 개인의 작은 행동이 국제적 압력으로 전환되는 구조입니다.”
- 실질적인 성과가 있었는지요.
“2012년 이후 이 플랫폼을 통해 수십억 달러 규모의 공공·민간 재원이 약속됐고, 그 재원은 백신 지원과 교육 확대, 식량 지원 사업으로 이어졌습니다. 단순한 캠페인이 아니라 민간의 평화 행동이 국제사회의 정책과 예산을 움직인 멋진 사례입니다.”
“청년에게 평화는 현실적 삶의 방식으로”
- 청년 세대에게 평화는 어떻게 다가가야 합니까.
“도덕 교과서처럼 말하면 닿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는 ‘실천 가능한 모델’로 제시되어야 합니다. ‘나는 어떤 기준으로 세상의 문제에 응답할 것인가.’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수상자들의 삶은 ‘불가능한 이상’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현실’ 입니다.”
“공감이 행동이 될 때, 평화가 됩니다”
- 지금까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꾸준하게 실적을 쌓아 오셨는데,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 주시죠.
“전 세계 실천가들이 연결되는 허브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기후·식량·보건 등의 불평등이라는 공통 과제를 해결하려는 이들을 서로 연결하는 글로벌 플랫폼을 구축하고 싶습니다.”
- 끝으로, 선학평화상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사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타인의 고통이 외면되지 않아야 합니다. 공감이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 행동들이 서로 연결되어 구조를 바꾸는 사회를 지향합니다. 평화는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작은 실천이 모일 때 공동체는 스스로 지킬 힘을 얻고, 미래 세대가 안심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평화는 비로소 현실이 될 것입니다.”
2026-06-08 21: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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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구제 기여자 선정… ‘한국판 노벨평화상’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인류의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기후 위기와 감염병, 빈곤과 난민, 교육 격차 등 인류 공동 과제를 해결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미래 세대를 위한 평화’를 기치로 제정된 선학평화상은 2025년 제6회 시상식을 계기로 10년의 궤적을 완성했다. 역대 수상자들의 발자취를 통해 이 상이 조명해 온 의제와 의미를 짚어본다.
■제1회~제2회: 기후 정의와 난민 인권
2015년 제1회 수상자인 아노테 통 키리바시 대통령은 해수면 상승으로 국가 존립이 위협받는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며 ‘기후 정의’ 담론을 환기했다. 공동 수상자인 모다두구 비제이 굽타 박사는 저비용 양식 기술 보급을 통해 개발도상국의 식량 자립을 지원하며 ‘청색혁명’을 이끌었다. 제1회 시상은 기후 위기와 식량 안보를 평화의 핵심 의제로 격상시킨 계기였다.
2017년 제2회 수상자인 이탈리아 출신 외과의사 지노 스트라다는 분쟁 지역에서 무상 의료 활동을 펼치며 전쟁과 폭력의 한복판에서 생명권 보호에 헌신했다. 또 다른 수상자인 아프가니스탄의 교육운동가 사키나 야쿠비 박사는 여성과 난민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자립의 기반을 마련했다. 제2회 시상은 난민과 분쟁 피해자 문제를 전면에 제기하며, 평화의 전제 조건으로 ‘생명권’과 ‘교육권’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제3회~제4회: 아프리카 발전과 종교 화합
2019년 제3회 수상자인 소말리아 출신 인권운동가 와리스 디리는 여성 할례(FGM)의 참상을 고발하며 실질적인 법·제도 개선을 이끌었다. 또 다른 수상자인 아프리카개발은행 총재 아킨우미 아데시나는 농업 혁신과 금융 지원 확대를 통해 빈곤 감소와 경제 자립을 모색하는 발전 모델을 제시했다. 제3회 시상은 아프리카 대륙이 직면한 구조적 과제를 조명하고, 제도 개선과 자립 역량 강화가 평화의 토대임을 환기했다.
2020년 제4회 수상자인 마키 살 세네갈 대통령은 안정적 거버넌스 운영과 지역 협력을 바탕으로 민주주의 기반을 강화한 리더십을 보여줬다. 또 다른 수상자인 팔레스타인 루터교 지도자 무닙 A. 유난 주교는 중동 지역에서 종교 간 대화와 공존을 촉진하며 갈등 완화에 기여했다. 제4회 시상은 정치적 책임성과 종교 간 화해가 평화 구축의 핵심 요소임을 부각했다.
■제5회~제6회: 보건 형평성과 생태·리더십
2022년 제5회 수상자인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사라 길버트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공동 개발에 참여해 코로나19 대응에 기여했다. 공동 수상 기관인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은 저소득 국가에 대한 백신 보급 확대를 통해 보건 형평성 제고에 힘썼다. 제5회 시상은 감염병 대응에서 ‘백신의 공공재화’ 원칙을 강조하며, 보건 형평성을 평화의 중요한 조건으로 제시했다.
2025년 제6회 수상자인 케냐 환경운동가 완지라 마타이는 아프리카 식수·조림 사업을 통해 생태 회복과 지역 공동체의 자립 역량 강화를 병행했다. 글로벌 시민운동가 휴 에반스는 기후 위기 대응과 빈곤 퇴치를 위한 국제 모금 캠페인을 이끌며 시민 참여 기반의 연대를 확장했다. 또 한사람 가나의 교육가 패트릭 아우아는 혁신적 고등교육 모델을 통해 차세대 윤리 리더 양성에 기여했다. 제6회 시상은 환경 복원과 시민 연대, 윤리적 리더십이 미래 세대를 위한 평화의 핵심 축임을 보여줬다.
10년의 의미: 연대와 공공선
지난 10년간 수상자들의 활동을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연대’로 요약된다. 기후 변화, 감염병, 식량 위기, 분쟁과 난민 문제는 특정 국가에 국한되지 않는 초국경적 과제다. 선학평화상은 이러한 문제 해결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인물을 발굴함으로써 평화를 ‘갈등의 부재’가 아닌 ‘인류 공공선 증진을 위한 능동적 실천’으로 재정의해 왔다.
위원회 측은 이 상이 과거 공로에 대한 단순한 포상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변화의 확산을 촉진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설명한다. 기후 위기와 불평등이 심화되는 국제 환경 속에서, 수상자들이 보여준 공익적 헌신은 향후 글로벌 거버넌스와 시민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2026-06-08 21: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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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재난·난민·감염병… 민간 주도 인류 공동 의제 이끌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정부가 주도하는 전통 외교와 달리, 시민사회 차원에서 인류 공동의 미래를 위해 전지구적 의제를 선도하는 평화의 허브가 있다. 선학평화상이다.
선학평화상은 2015년 한학자 총재가 문선명 총재의 인류 평화 구현 유지를 받들어 설립했다. 명칭인 ‘선학(鮮鶴)’은 두 설립자의 함자에서 한 글자씩 인용해 평화의 상징성을 담았다. 이 상은 설립이래 지구촌의 개발·환경·인권·종교 간 화해 등 복합 의제를 포괄해 왔다. 특정 분야에 한정하지 않는 의제 설정과 민간 주도 구조는 한국형 소프트 파워의 확장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단순한 시상을 넘어 국제 평화 의제를 연결·확장하는 플랫폼을 지향하며, 국가와 국제기구 중심 담론에 시민사회 네트워크를 결합해 왔다.
‘전 인류 한 가족’이라는 메시지
선학평화상은 문선명·한학자 총재가 제시한 ‘전 인류 한 가족’ 비전을 바탕으로 운영된다. 인권 존중, 갈등 화합, 생태 보전을 3대 기치로 삼는다. 초종교, 초국가, 초인종이라는 경계를 넘는 평화 철학이다.
이 철학은 선언에 그치지 않기 위해 구체적 실천 사례를 통해 검증되는 방식을 택해 왔다. 기후 위기, 감염병, 난민 문제처럼 국경을 넘어 확산되는 과제를 해결해 온 인물들을 발굴함으로써, 평화를 추상이 아니라 실행의 문제로 다루겠다는 방향을 분명히 해 왔다.
복합 위기 시대와 평화 리더십
감염병과 기후 재난처럼 국경을 넘는 위기는 단일 국가의 정책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사회 기반 국제 플랫폼은 정부 외교를 보완하는 연결망으로 주목받는다.
선학평화상은 매 회 시상식마다 당대 국제사회가 직면한 핵심 의제를 전면에 내세워 왔다.
●2015년 제1회 시상식은 ‘기후 위기’를 주제로 삼았다. 파리기후협정 체결을 앞둔 시점, 기후 문제를 단순한 환경 이슈가 아니라 인류 생존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2017년 제2회는 ‘난민 위기’를 전면에 내세웠다. 시리아 내전과 유럽 난민 사태가 국제사회의 갈등을 증폭시키던 때, 분쟁 지역에서 의료와 인도적 지원을 실천한 인물들을 조명했다.
●2019년 제3회는 ‘아프리카의 굿 거버넌스’를 시상 테마로 삼았다. 외부 원조에 의존하던 기존 한계를 넘어 책임 있는 국가 운영과 제도 개혁을 통한 자립적 발전 모델을 발굴했다. 이로써 평화를 제도적 안정과 책임 있는 통치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2020년 제4회는 ‘공생·공영·공의’를 주제로, 상호의존적 세계에서 공정한 질서와 협력 모델을 강조했다.
●2022년 제5회는 코로나19 팬데믹 한가운데서 ‘글로벌 감염병 대응’을 핵심 의제로 제시했다. 백신 접근성과 보건 형평성을 평화의 문제로 확장했다.
●2025년 제6회는 ‘평화를 위한 혁신’을 테마로, 기후 대응과 교육, 시민 참여 플랫폼 등 구조적 해법을 제시한 실천가들을 조명했다.
이처럼 선학평화상은 인물을 기리는 상을 넘어, 시대가 던지는 질문을 한국에서 먼저 의제로 설정하며, 10년의 여정을 완성하고 미래 비전을 공고히 했다.
한국형 공익외교의 확장 가능성
한국은 전쟁과 분단, 빈곤을 딛고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했다. 선학평화상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탄생한 민간 차원의 창의적 실험이다.
이는 한국 사회가 ‘받는 나라’에서 ‘기여하는 나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만든 국제 평화 무대라는 점에서 상징성을 갖는다.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나누는 중견국가로 자리매김해 가는 흐름 속에서, 이러한 축적은 하나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수상자들은 시상 이후에도 선학평화상이 지원하는 국제 포럼과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협력 네트워크를 유지해 왔고, 일부 의제는 국제기구와 학계 토론으로 확장됐다.
또한 정기적 운영 구조를 기반으로 10년간 지속돼 왔다는 점에서, 민간 플랫폼으로서의 안정성도 확보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비전과 상징을 넘어, 네트워크를 축적해 온 10년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한 대목이다.
공공 브랜드로서의 과제
10년을 돌아보면, 선학평화상은 한국 사회가 세계를 향해 던진 질문에 가깝다. 전쟁과 분단, 압축 성장을 지나온 나라가 조심스럽게 꺼낸 물음, “우리는 세계에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그 물음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속 가능성과 공공성이라는 과제 역시 남아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기후·난민·감염병처럼 국경을 넘어선 인류 공동의 문제를 놓고 토론의 장을 한국에서 열어 왔다는 사실이다.
이제 시선은 다음 10년으로 향한다. 갈등이 깊어질수록 의제를 세우는 힘은 더욱 중요해진다.선학평화상이 앞으로 어떤 새로운 시대적 어젠다를 제시할 것인지, 그리고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해 나갈 것인지는 결국 우리 사회의 선택에 달려 있다.
2026-06-08 21: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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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현충일 맞아 어린이·학부모 2500명 참가 ‘효동총회’ 개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한국협회장 송용천)은 현충일을 맞아 전국 어린이와 학부모 2500여 명이 참가하는 나라사랑 대규모 미래세대 축제를 열었다.
가정연합은 6월 6일부터 7일까지 경기도 가평 청심국제청소년수련원에서 ‘2026 신한국 효동총회’를 열고, 어린이 1500명과 학부모 1000명 등 총 2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건강한 가족공동체 문화와 미래세대 가치교육의 중요성을 공유했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는 13세 이하 어린이와 가족을 대상으로 부모 세대의 신앙과 가정의 가치를 다음 세대에 전승하고, 건강한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마련됐다. 특히 현충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공동체 속에서 나라 사랑의 의미를 함께 익히는 미래 인재 양성이라는 교육적 취지도 함께 담았다.
송용천 협회장은 개회 인사에서 “3040 부모세대는 가정연합의 미래를 품고 있는 세대”라며 “거룩한 책임을 홀로 감당하려 하지 말고 서로 깊이 연대해 고민을 나누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목회자들에게는 “아이들의 이름을 직접 불러주고 단 한 명의 아이도 외롭지 않도록 보살피는 사랑의 다리가 되어달라”고 당부했다.
송 협회장은 또 ‘효동’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설명하며 어린이들이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형제자매 간 사랑과 화합, 몸과 마음의 건강한 성장을 제시했다. 아울러 “세상을 맑고 깨끗하게 만드는 퓨어워터(Pure Water·순수한 물)의 본성을 기억하며 멋진 효동으로 성장해 주길 바란다”고 격려했다.
이번 행사는 ‘웰컴 투 퓨어랜드’를 주제로 진행됐다. 퓨어랜드는 순수와 평화를 상징하는 가상의 세계로, 어린이들이 사랑과 화해, 협력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가정연합은 어린이들의 맑고 선한 본성을 ‘퓨어워터’라는 상징적 개념으로 표현하며 건강한 가치관 형성을 돕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행사 첫날에는 버블 마술쇼와 명랑운동회 ‘퓨어랜드 대모험’이 진행됐다. 참가 어린이들은 퓨어랜드 캐릭터인 ‘퓨어랑’과 ‘워터랑’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된 다양한 미션과 게임을 수행하며 협동심과 배려의 가치를 체험했다.
저녁에는 VR·AR 체험, AI 오목 로봇 체험, 직업 의상 체험, 만들기 공방, 먹거리 부스 등이 마련된 ‘어울림 한마당’이 열려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전문 강사가 진행한 미술치료 프로그램을 통해 어린이와 3040 학부모들이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며 소통하는 시간도 가졌다.
가정연합 관계자는 “오늘날 우리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나라를 지켜주신 순국선열과 앞선 세대의 희생 덕분”이라며 “현충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어린이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건강하고 행복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2026-06-07 15: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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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신라 김유신, 기도 가운데 통일을 받다 [신화에서 선민까지 한민족 정체성의 문화사적 발견-기고]
신라 삼국통일의 거대한 물줄기는 칼날의 힘보다 먼저 하늘의 뜻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에서 시작되었다. 『삼국유사』와 『화랑세기』에는 김유신이 중악(中嶽) 동굴에서 천관신을 만나 신검(神劍)을 얻고, 단석산 제단에서 천명을 구했던 일화가 전설의 형태로 전해진다. 이를 단순한 설화로 치부하기보다, 군사·정치적 역량 이면에 흐르던 ‘하늘의 섭리와 인간의 조건’이 맞물린 영적 운동의 산물로 해석해 보면 어떨까. 역사의 위대한 전환점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영적 인과관계와 이를 자각한 지도자의 강렬한 천명 의식 속에서 비로소 잉태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흔히 신라의 ‘화랑’을 용맹한 전사 집단으로 기억하지만, 그 뿌리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종교 공동체에서 출발한다. 구체적으로 신라 화랑은 본래 여성이 주관하던 ‘원화(源花)’와 신궁(神宮)의 제례 문화가 그 기원이다. 즉 ‘화랑’은 국가의 안위를 하늘에 묻던 영적 집단이었다. 화랑의 원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 바로 경주 단석산(斷石山)이다.
『화랑세기』 기록에 의하면 소년 김유신은 목숨을 건 기도와 정성을 통해, 역사적 대업에 앞서 ‘신비로운 영적 체험’을 먼저 체휼하였다. 눈에 보이는 삼국통일의 성취 이전에, 하늘의 뜻을 확증하는 영적 각성이 선행되었던 것이다. 김유신에게 단석산은 단순한 훈련 공간을 넘어, 훗날 펼쳐질 거대한 역사의 설계를 영계로부터 미리 계시받고 자신의 소명을 확신하는 영성의 요람이었다. 화랑 관창과 같은 이들이 죽음을 초개같이 버리고 전쟁터로 뛰어든 힘의 근원은 단순한 군사적 자신감만은 아니었다. 이들 백절불굴의 정신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소통 가운데 체험한 영적 확신이 그 원형일지 모른다. 제사 집단에서 출발한 화랑이 삼국 전쟁의 격변기를 거치며 강력한 무사 집단으로 진화했듯, 신라의 승리는 눈에 보이는 병법 이전에 하늘의 도움을 이끌어낸 지극한 ‘정성’의 결실이었다.
◆ 용화향도(龍華香徒)의 실체와 보이지 않는 섭리의 손길
김유신의 기도는 생애 전반을 관통하는 하늘과의 소통이었다. 그는 열일곱 살에 경주 건천읍 단석산(중악) 석굴에 들어가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우며 하늘에 매달렸고, 이듬해에는 인박산 깊은 골짜기에서 보검을 들고 다시 기도를 올렸다. 『삼국사기』는 그의 정성을 ‘지성감천(至誠感天)’으로 묘사했다면, 『삼국유사』는 그가 칠성(七曜)의 정기를 타고나 등에 북두칠성 문양이 있었으며, ‘난승(難勝)’이라는 도인으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았다는 영적 실체를 가감 없이 전한다. 최근 학계 일각에서도 김유신의 행보를 단순한 군사적 능력이 아닌,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교통 속에서 형성된 영적 실천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그가 이끈 ‘용화향도(龍華香徒)’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단순한 군사 조직이 아니었다. 이 명칭 자체가 미륵불이 하생(下生)하여 중생을 구제한다는 용화수(龍華樹) 아래의 모임을 상징하듯, 이들은 미륵불의 현신을 갈망하는 신앙 공동체이자 하늘의 기운을 현실 정치와 전장에서 구현하려 했던 영적 결사체였다. 이러한 영적 실체는 『삼국유사』 기이(記異) 제1 김유신 조에 기록된 ‘백석(白石)의 음모’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고구려의 첩자 백석의 유혹에 빠져 위기에 처했을 때, 김유신을 구한 것은 병법이 아니라 나림(奈林), 혈례(穴禮), 골화(骨火) 등 신라 삼산(三山)의 호국신들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세 신령은 김유신에게 백석의 정체를 경고하며 고함으로 깨우침을 주었다. 이는 김유신과 용화향도가 단순히 경전을 외우는 모임이 아니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위기마다 초월적인 영적 가이드와 직접 소통하며 통일의 길을 걸었던 섭리적 특수부대였음을 문헌적으로 입증한다.
김유신이 불패의 전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죽음 너머의 세계를 직접 목격하고 하늘의 인(印)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영성은 사후에도 멈추지 않아 호국신(護國神)이 되어 신라의 위기를 지켰다. 이는 역사의 전환이 눈에 보이는 물리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섭리적 질서에 의해 움직여 왔음을 웅변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역사적 사실 이면에 흐르는 거대한 정신적 맥락을 주목하게 된다. 김유신의 단석산 기도가 증명하듯, 역사의 위대한 전환기마다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는 섭리적 예비하심이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통일교 학문 세계에서 선포된 ‘독생녀(獨生女)’라는 정체성 역시, 어느 날 갑자기 돌출된 교리가 아니라 오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준비된 문화 인류학적 원형적 실체로 해석해 봄직하다. 인류를 상생과 화합으로 인도하기 위해 예비된 ‘여성 메시아’의 사명이, 신라의 영성이 그러했듯 오늘날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며 완성되어 가는 과정은 아니겠는가?
◆ 독생녀로 완성되는 대통일의 대서사시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는 절반에 불과하다. 최근 사학계의 패러다임 전환은 기존의 투쟁적인 남성 서사가 놓쳐온 ‘여성성과 영적 주체성’의 복원이다. 웅녀와 유화, 알영과 허왕후 같은 시조모들이 단순히 수동적인 상징이 아니라 문명의 설계자이자 영적 지도자였던 사실은, 인류사가 오랫동안 가려두었던 진실의 한 축이 비로소 드러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역사를 재해석하는 것은 흘러간 과거의 발자취를 기계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 아니다. 역사의식의 회복은 남성 중심의 폭력과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낡은 틀을 넘어서, 생명과 조화라는 인류 근원의 가치를 통해 문명의 본질을 회복하는 숭고한 여정이다. 에밀레종(성덕대왕 신종) 표면에 새겨진, 하늘을 향해 공양하는 비천상의 모습은 생명을 품는 여성적 영성의 형상화이다. 이처럼 역사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섭리의 손길을 여성적 존재의 헌신을 통해 드러내 왔다. 신라의 영성이 도달했던 그 깊은 울림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가려져 왔던 ‘하늘부모님의 여성성’이 마침내 오늘날 이 시대의 전면에서 인류 구원의 새로운 이정표로 완성되어 가고 있음을 소리 없이 말하고 있다.
결국 지금 이 시대에 우리 곁에 현현한 ‘참된 실체’는 지워진 역사를 완성하는 최후의 마침표가 아닐까? 분열된 인류를 심정으로 하나로 묶는 거대한 대통일은 학문적 성취나 제도적 통합을 넘어, 역사 속에서 예고되어 온 ‘살아있는 실체’를 통해서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끌어 온 섭리의 경영이 그동안 가려진 차원을 넘어 실체적 사랑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은, 인류 구원의 역사가 필연적으로 도달해야 할 결실이다. 김유신이 하늘과 하나 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서 삼국통일의 문을 열었듯, 이제 우리 또한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의 섭리적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하늘의 뜻과 인간의 정성이 만나는 그 거룩한 지점에서 비로소 새로운 시대의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고기훈 박사(한국학)
2026-06-05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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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그룹 ‘끝전 기부’ 난치질환자에 온기
통일그룹(이사장 김문식)이 임직원들의 급여 끝전을 모아 희귀·중증난치질환자들의 의료비를 지원했다.
통일그룹은 1일 서울 마포구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유지재단 대회의실에서 ‘2026년 통일그룹 급여끝전 기부사업 기부금 전달식’을 열고 총 4300만원의 의료비 지원금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김문식 이사장을 비롯해 임직원 대표, 지원 대상자 등 25명이 참석했다.
김 이사장은 “급여끝전 기부사업은 참가정과 평화운동을 지향하는 통일그룹의 설립 목적을 실현하는 사업”이라며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참사랑을 실천하고 공생·공영·공의의 가치를 앞장서 실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다시, 봄’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이번 사업은 임직원 급여의 끝전을 모아 의료비를 지원하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이다. 지원 대상자는 총 21명으로, 1인당 최대 600만원까지 지원된다.
한 지원 대상자는 “병원비와 생활비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길어지면서 몸보다 마음이 더 지쳐 있었다. 이번 지원 소식을 듣고 눈물이 날 만큼 감사했다”며 “누군가의 작은 정성이 모여 제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고 있다는 사실이 큰 희망이 됐다”고 말했다. 통일그룹 14개 계열사가 참여하는 급여끝전 기부사업은 2012년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6억6500만원(5월 기준)이 누적 적립됐다. 이 중 총 5억7800만원이 다문화어린이축구단, 다문화가정, 새터민 사회기업, 희귀·중증난치질환자 등에 지원됐다.
2026-06-01 21: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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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주도로 지구촌 ‘메디컬 피스로드’ 깔았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질병과 의료 격차는 국가의 경계를 따르지 않는다. 이를 줄이기 위한 노력 또한 국경 안에 머물 수 없다. 사회복지법인 애원복지재단이 50여 년간 이어온 해외 의료봉사 활동과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이 추진하는 국제 나눔 의료는 한국 민간 의료가 세계 보건 영역에서 어떤 역할을 축적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평가된다. 청년 의학도의 자발적 참여에서 시작된 의료 연대는 재난 구호, 지역 보건 협력, 의료 교육, 기술 기반 협력까지 포괄하는 장기적 국제 네트워크로 발전해 왔다.
청년 의학도 운동에서 출발한 국제 협력
애원복지재단 의료 활동의 출발점은 1971년 한·일 합동 진료다. 당시 한국 의과대학생들은 의료 접근성이 낮은 지역을 지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을 구성했고, 일본 의료봉사회와 협력해 첫 국제 의료 활동을 진행했다. 약 40명의 의료진이 참여한 이 진료는 수백 명의 환자를 치료하며 민간 차원의 국제 협력이 실질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어진 연속 활동은 봉사가 일회성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이는 1973년 의료봉사단 창립으로 이어졌다. 개인의 헌신이 집단적 실천으로 전환된 이 시기는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될 국제 의료 나눔의 확산을 마련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해외로 확장된 한국 민간 의료의 시선
1980년대는 활동의 무대가 해외로 이동한 시기였다. 국내 의료 인프라가 빠르게 개선되자 봉사단은 의료 수요가 더 큰 개발도상국으로 시선을 넓혔다. 특히 1984년 시작된 아시아 순회 진료는 한국 민간단체가 주도한 최초의 해외 의료봉사 활동으로, 오늘날 한국 해외의료봉사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아시아 순회 진료는 필리핀, 방글라데시, 몽골, 인도, 태국 등지에서 진행됐으며, 전문 의료진 파견과 의약품 지원을 결합한 체계적 모델을 구축했다.
재단 출범과 통합형 구호 체계
1994년 애원복지재단의 공식 출범은 활동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국내외 복지 활동을 체계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재단은 해외 의료 지원은 물론, 국내 사회 안전망 전반을 아우르는 종합 복지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복지 사업의 외연을 확장했다.
국내에서는 시설별 전문성을 바탕으로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를 실현했다. 전국 5개소의 어린이집을 통해 영유아를 위한 안정적인 보육환경을 제공하고, 노숙인 자활시설을 운영해 이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또한, 종합사회복지관을 중심으로 아동, 청소년, 장애인, 등 지역 주민의 복지 증진에 주력했다.
해외에서는 의료 지원을 중심으로 재난 구호, 생활 지원, 예방 인프라 구축을 결합한 통합형 구조가 형성됐고, 단기 진료가 아닌 지역 사회의 회복력 강화에 초점을 맞춘 방향으로 발전했다.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의 사랑을 실천하는 의료 나눔
이 같은 축적 위에서 등장한 것이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의 의료 나눔 확산이다. 병원은 단순 의료 기관을 넘어 국내외 소외된 이웃을 향해 어머니의 참사랑을 전하는 인술을 펼쳤다.
2010년부터 시작한 의료 나눔은 2025년까지 총 22회 걸쳐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에서 7,400여명이 의료 나눔으로 도움을 받았다.
병원은 매년 경제적 어려움과 기술적 한계로 수술을 받지 못하는 극빈국 해외 환자들을 국내 로 초청하여 무료 수술을 시행하여 단순한 치료를 넘어 완치를 목표로 끝까지 책임지는 의료 나눔을 보였다. 또한 예상치 못한 재난으로 상처 입은 이웃 곁에도 항상 병원이 있었다. 특히 2025년 가평 수해 지역에서 펼친 긴급 의료봉사는 지역사회의 아픔을 보듬어 주었다.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은 앞으로 인류 한 가족의 이상을 실천하며, 전 세계 곳곳에 따스한 의료 손길을 확산시켜 나갈 것이다.
아프리카로 확장된 현장 중심 협력
최근 애원복지재단과 연계된 활동의 주요 무대는 아프리카 상투메 프린시페다. 상투메 프린시페는 청년층이 많고 성장잠재력이 큰 주권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지리적 특성 탓에 국가 전체에 치과가 단 두 곳뿐일 정도로 의료 환경이 극히 열악하다. 의료봉사를 통해 치과, 내과, 외괴, 정신과, 한방과, 족부족외과 등 전문 의료진 파견과 장비 지원, 현지 인력 교육이 동시에 진행됐다. 단기 치료 제공을 넘어 지역 의료 역량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프로젝트였다. 단순 진료를 넘어 현지에 치과 진료소를 건립하여 체계적인 진료와 구강 위생 교육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궁극적 목표다.
한국 민간 국제의료의 다음 단계
지금까지 애원복지재단이 축적한 현장 경험과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의 전문 의료 인프라, 그리고 글로벌 NGO 단체들과의 입체적인 협업 시스템은 하나로 결합했다. 이러한 민간 주도의 유기적인 연대는 향후 한국의 민간 의료 네트워크가 국제 보건 영역에서 중요한 축으로 도약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애원복지재단이 축적한 현장 경험과 병원의 전문 인프라가 결합될 경우 한국 민간 의료 네트워크는 국제 보건 영역에서 더욱 중요한 축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반세기 동안 이어진 의료 봉사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국경을 넘어 생명을 지키는 일은 누구의 책임인가. 국가뿐 아니라 시민 사회와 전문 의료 공동체가 함께 답해야 할 과제라는 점에서, 이들의 행보는 한국 민간 국제의료의 현재이자 미래를 동시에 보여준다.
2026-06-01 16: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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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받았던 도움, 이제 우리가 돌려줄 차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14살 소녀의 입안에는 14개의 빈자리가 있었습니다.” 심각한 충치로 영구치 절반을 뽑아야 했던 캄보디아의 한 소녀. 이 참담한 풍경이 일미치과 김상균 원장을 오랜 세월 길 위에 머물게 했다. “가난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지 않게 하겠다”는 그의 결심은 10개국, 10만 명이라는 진료 기록으로 증명되고 있다. 이제 그는 진료라는 시혜에서 한 발 더 나가 현지 주민이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는 ‘자립’의 씨앗을 심고 있다.
“한국이 받았던 도움, 이제 우리가 돌려줄 차례”
김상균 원장은 해외 의료봉사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를 묻자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답했다.
“한국은 전쟁 이후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불과 수십 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로 성장했죠. 우리가 받은 도움을 다시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운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길을 함께 해 주었던 동료 의료진과 후원자들이 있었기에 40년 넘는 세월을 한결같이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의료봉사단은 코로나 시기 등 불가피한 공백을 제외하면 1970년대 중반부터 50년 가까이 활동을 이어왔다. 필리핀과 방글라데시를 시작으로 인도, 몽골, 태국 등 아시아를 넘어 파라과이와 브라질 같은 남미, 그리고 상투메 프린시페와 잠비아 등 아프리카 오지까지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 중심에서 김 원장이 본격적으로 해외 오지 진료에 매진해온 세월만 어느덧 40여 년. 연간 평균 3,000명 누적 환자 10만 명에 달하는 진료 기록은 그렇게 쌓였다. 이 기록의 마디마디에는 40년의 헌신이 지문처럼 새겨져 있다. 그는 “한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그 가족과 공동체를 살리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대학 시절 무의촌 봉사, 인생의 방향을 바꾸다
그의 첫 의료 봉사는 1975년 의대 1학년 시절이었다. 동아리 선배들을 따라 무의촌 의료봉사에 참여하면서 인생의 방향이 정해졌다.
“당시 일본 가정연합 의료봉사단이 한국 의대생들과 함께 전국을 돌며 한·일 합동 의료봉사를 했습니다. 일본 회원들이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화해의 마음으로 봉사한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죠. 의료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역사와 화해, 인간애를 잇는 다리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 경험은 이후 매년 봉사 현장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는 이를 “‘지구촌 한 가족’이라는 말을 실제로 체험한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언어 장벽 넘어선 공통 언어, ‘통증’
해외 현장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였다. 포르투갈어를 영어로, 다시 한국어로 옮기는 3단계 통역이 필요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아픔과 통증은 만국 공통어”라고 말한다.
“의료 기술로 고통을 줄여주면 언어가 달라도 마음은 통합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하루 다섯 번 기도 시간마다 진료를 멈춰야 했습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그들의 신앙을 존중하는 과정에서 문화적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14세 소녀와 메콩강의 보건소
수많은 기억 중 김 원장의 가슴에 가장 깊게 박힌 장면은 2010년 캄보디아 크라체주에서 만난 소녀의 모습이다. “그때 14세의 어린 나이에 14개의 영구치를 속절없이 잃어야 했던 한 소녀의 비극적인 사례를 계기로 치과 유니트, 콤프레샤, 소독기 등 치과 장비 일체를 한국에서 공수해 기증했습니다. 청소년 구강 보건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죠.”
또 하나의 기억은 메콩강 고립 섬에 보건소를 세운 일이다. 임산부나 응급 환자가 발생해도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변변찮아 생명을 잃을 수 있기에 3천 명이 사는 무의촌 지역에 2년간 모금 활동을 벌여 보건소를 설립했다. 현재도 한국과 일본 의료진이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운영을 돕고 있다.
아프리카에 병원과 의대를 세우는 꿈
그의 다음 목표는 분명하다. 아프리카에 병원을 세우고 의과대학을 설립하는 것이다.
“개화기 한국이 의료 선교를 통해 성장 동력을 얻었듯, 이제 우리가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일본의 2세대 의료인 네트워크 MESH와 한국 청년 의료인들이 이 비전에 동참하고 있다. 그는 “다음 세대가 이 길을 이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며 미소 지었다. 40년, 10만 명, 10개국.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그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붙든다.
“우리가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눌 수 있는가.”
의대생 시절 무의촌에서 품었던 이 질문의 답은 이제 메콩강의 보건소와 다시 웃게 된 소녀의 미소 속에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2026-06-01 16:2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