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가장 경계한 것은 선을 넘는 일
“과연 그 법관을 법을 아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1421년 3월, ‘임군례 난언(亂言) 사건’을 다루던 사헌부 관리에게 세종이 던진 일갈이다. 임군례는 관청 물품을 절취하다 발각되어 파직된 뒤 “태종이 병을 핑계 삼아 왕위를 세종에게 넘긴 사실을 명(明) 황제에게 알려 전위(傳位)를 취소케 하겠다”는 위험한 말을 내뱉었고, 그로 말미암아 같은 해 2월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그의 아들 임맹손의 처리 문제였다. 그다음 달인 3월, 사헌부 관리 심도원은 “임군례가 그 난언을 할 때 임맹손이 옆에서 이를 듣고 아비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만류했다는 증언이 있다”며 연좌 처벌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세종은 “너의 말이 옳지 않다”고 답하며 “임금과 신하의 의리[君臣之義]가 비록 중하나, 아버지와 아들의 은혜[父子之恩] 또한 크다. 어찌 군신의 의리로 부자의 은혜를 무너뜨릴 수 있겠느냐”며 처벌을 반대했다.
세종의 판단은 분명했다. 임맹손이 아버지의 옷깃을 붙잡아 위험한 발언을 막은 행위는 효심에 합당하니, 이를 들어 난역 가담의 죄를 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헌부 관리가 어전에서 물러나자 세종은 이렇게 덧붙였다. “심도원은 법을 맡은 관원인데, 임맹손이 그 말을 들었다는 이유로만 유죄를 논하고, 정작 아버지를 염려한 효심은 헤아리지 못하니, 어찌 법을 안다고[知法] 하겠는가.”
지난주 조희대 대법원장과 민주당 사이에 불거진 ‘세종 법철학’ 논란을 보며, 문득 실록의 이 대목이 떠올랐다. 과연 그들이 세종의 법철학을 제대로 알고 말하는가. 논쟁의 핵심은 대법원장의 “세종은 법을 왕권 강화에 이용하지 않았다”는 발언이다. 이 말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개혁을 에둘러 비판하는 메시지로도 들린다. 이에 민주당은 곧바로 “사법개혁이야말로 세종이 꿈꾼 민본(民本) 사법의 구현”이라며 역사 왜곡을 지적했다. 그러나 내 판단으로는 양측 모두 세종을 각자 논리에 끌어다 쓰는 데 그쳤을 뿐, 정작 그의 법철학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우선 ‘왕권 강화’ 운운 자체가 세종 시대에 대한 피상적 인식을 드러낸다. 왕권의 집중과 정비는 이미 태종대에 대체로 완결되었다. 세종은 확립된 권위를 바탕으로 수성(守成)의 과업, 곧 제도와 질서로 안정된 나라를 이루는 일에 집중했다. 그는 “나라에서 금지하는 것을 사람마다 알게 하여[人皆知法] 스스로 피하게 하자”고 하였고, 그 점에서 훈민정음이 사법 접근성을 높이는 유효한 도구였다는 대법원장의 지적은 옳다. 다만 그러한 조처들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당성을 끌어올렸고, 그 정당성은 다시 왕의 재량(인사 임명과 정책 추진력)을 떠받쳤다. 결과적으로 세종은 사법 접근성을 높여서 ‘고차원의 왕권 강화’를 실현한 셈이다.
세종의 법철학을 끌어와 사법개혁을 옹호하는 민주당 또한 본질을 비껴갔다. 그 개혁안이 과연 세종이 지향한 민본 사법의 방향과 합치하는가. 대법관 증원, 내란 전담 재판부 신설, 검찰청 폐지, 행안부 산하 중수청 설치 등이 실제로 국민의 사법 접근성을 높여 억울한 서민을 줄이고, 일터가 신바람 나는 나라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가.
세종이 가장 경계한 것은 선을 넘는 일이었다. 그는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법과 ‘삼강행실도’로 분명히 알리고, 그 선을 넘은 자에 대해서는 엄형을 결행했다(사죄(死罪)사건의 87% 사형 집행). 앞의 ‘임군례 난언 사건’이 보여주듯, 무엇보다 세종은 권력이 가족의 내밀한 영역까지 침투하는 일을 단호히 막았다. 법 맡은 자가 자의로 법을 휘두르고, 정치권력이 가족·도덕의 경계를 넘어 파고들면 사람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 유소불위(有所不爲). 할 수 있되 하지 않는 바가 있어야, 마땅히 해야 하고 또 잘할 일에 역량이 모인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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