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들, 전사자와 공동추모 제안
미래로 나아가는 길은 교육·기억
과거사 문제 해결 노력에 박수를
“노근리 희생자들과 미군 전사자들에 대한 공동 추모 행사를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은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의 한 한식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6·25전쟁이 발생한 지 약 한 달 뒤, 1950년 7월 25∼29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 총격으로 피란민을 포함한 민간인 최소 150명(비공식 집계까지 포함하면 약 400명 추정)이 목숨을 잃은 노근리 사건의 피해자 아들이자 이 사건으로 형제 두 명을 잃은 정 이사장의 말은 처음엔 낯설게 들렸다. 하지만 정 이사장을 비롯한 재단·유족회 관계자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들이 시작한 ‘화해’의 움직임은 굴곡진 현대사로 얽혀 어디서부터 풀지조차 알기 어려운 한반도의 수많은 과거사 문제의 나아갈 방향에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정 이사장과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유족회 관계자들은 25일 워싱턴에서 ‘과거를 넘어, 미래를 향해’라는 이름으로 평화 포럼을 열기 위해 미국에 왔다. 6·25전쟁 발생 75주년, 즉 노근리 사건이 발생한 지도 75년이 됐다. 한때는 이들의 진상규명 노력을 무조건 ‘반미운동’으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이 이제 와 ‘미래’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부터 시작한 몇십년에 걸친 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이 어느 정도 평가를 받고,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배상이 이뤄지지 않은 것을 지적하지만 이날 만난 재단, 유족회 구성원들은 미국 사회와 언론이 그간 노근리 사건에 보여준 공감대를 높이 평가했다. ‘어두운 역사의 이면’은 엄연히 존재하지만,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이만큼 노근리 사건을 공론화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국내 언론에서 다뤄지지 않던 노근리 사건의 전말이 1999년 AP통신의 보도로 공론화된 이후 한·미 정부는 공동조사단을 꾸려 약 1년간의 조사를 벌였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2001년 1월 ‘깊은 유감’(deeply regret)을 표명했다.
포럼에선 정 이사장, 양해찬 유족회장 등 피해자 유족들과 함께 존 틸러리 전 주한미군사령관, 6·25전쟁 참전을 결정한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손자 클리프턴 트루먼 대니얼이 발언했다. 재단 관계자들은 군인 입장에서 껄끄러울 수 있는 행사에 참석을 결정한 틸러리 전 사령관에게 고마움을 갖고 있었다. 또 미국의 인권 운동가, 역사학자, 중등학교 역사 교사들이 노근리 사건의 의미와 역사 교육, 한·미 동맹에 대해 토론했으며 미군 참전용사의 손녀도 참석했다.
정 이사장에 따르면 노근리 사건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열쇠는 ‘교육’과 ‘기억’이다. 재단은 미국의 초·중·고 교육에서 노근리 사건을 가르치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미국 역사 교사들을 충북 영동에 조성한 노근리평화공원에 초청하고 있다. 역사의 이면 그대로 가르쳐야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다. 재단은 또 노근리 희생자들과 함께 미군 전사자들의 희생을 언급하고 있다. 정 이사장은 “(노근리 사건 직전) 영동군에서 일어난 영동전투에서 사상자가 900여 명 발생한 미군에 대해서는 현지에 참전기념탑도 없다”며 노근리 희생자들과 함께 영동전투 전사 미군 유해 발굴 등에 대해 재단이 갖고 있는 의지를 설명하기도 했다. 노근리의 비극이 워낙 컸기에 영동전투는 6·25전쟁의 주요 전투임에도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번 주는 27일 정전협정 체결(1953년 7월 27일) 72주년을 앞둔 주였다. 워싱턴에선 정전협정 체결을 기념하고 미군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감사를 전하는 행사가 예년처럼 열렸다. 같은 시기, 노근리 희생자의 유족들이 워싱턴에서 역사의 비극을 기억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행사를 미국 사회와 함께 마련한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 속 영원한 숙제로 남은 과거사 문제에서 노근리 유족들이 보여준 노력은 ‘기억과 화해’라는 과제를 풀어가는 하나의 의미 있는 사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