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대통령은 영애 근혜 근영, 영식 지만 육사생도와 함께 정문에 도착, 김성진 문공부 장관 안내로 흥국문 앞에서 자녀들과 함께 테이프를 끊었다.’ 1970년대 모 신문의 1면 사이드 기사 첫 문장이다. 이 시절 신문, 방송 뉴스에는 이런 종류의 대통령 동정 보도가 계속됐다. TV 시계가 ‘삐∼’ 하고 오후 9시를 알리면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로 그날의 첫 소식을 알리던 ‘땡전 뉴스’의 원조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영애, 영식이 무슨 뜻인지 몰라 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어사전을 펼쳐보고서야 영애(令愛)는 윗사람의 딸, 영식(令息)은 윗사람의 아들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돼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 마음에도 “대통령은 자식도 높여 부르는구나” 하고 느꼈던 위화감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북한 매체에서 김정은의 딸 김주애에 대해 ‘제일로 사랑하시는 자제분’이라고 하는 존칭이 1970년대의 영애, 영식이었던 셈이다.
세월이 흘러 현재 우리 매체에서 아주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면 평칭(平稱)을 쓰는 것이 원칙이다. 그 극소수 예외 중 하나는 중, 승려의 높임말인 스님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스님이라고 쓰려면 신부, 목사도 신부님, 목사님이라고 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부적절한 사용이다. 또 다른 예는 부인, 여사다. 유독 국내외 전현직 대통령 아내에게만 남의 아내를 높이는 부인, 결혼한 여자를 존칭하는 여사를 사용한다. 한술 더 떠 영부인이라고도 한다.
‘대통령 부인 ○○○ 여사’, ‘대통령 전 부인 ○○○ 여사’. 민주국가, 양성평등 시대에 맞는 어법인지 의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배우자가 없어서 당장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여성 대통령이 다시 나오면 배우자는 ‘부군(夫君) ○○○ 선생’이라고 불러야 맞다. ‘대통령 각하’라고 부르던 시절도 지났다. 대통령실이나 정부 행사에서는 ‘대통령님’이라고 부를지 모르겠으나 매체 등에선 일상적으로 그냥 ‘○○○ 대통령’이라 쓴다. 대통령도 높여 부르지 않는 시대에 배우자를 존칭하는 것이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다. 부인, 여사 대신에 아내, 씨라는 말을 쓰는 시절이 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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