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공동체 통일방안 위기 직면
대화·접촉 통해 공존적 관계 회복
교통망·물자 교류 등 연결 노력을
한국이나 일본의 정치외교사 자료를 찾다 보면 필자가 종종 ‘정책의 고고학’이라고 일컫는 현상을 발견할 때가 있다. 즉 어느 시점에서 정부가 결정한 주요 안보정책의 기원을 따지다 보면 수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공식적인 통일정책인 ‘3단계 민족공동체 통일방안’도 ‘정책의 고고학’ 사례가 될 수 있다. 이 방안은 1989년 노태우정부 당시 이홍구 통일부 장관이 국방대학원 강연을 통해 원형을 공표하였고, 후임 김영삼정부에 의해 약간의 수정을 거쳐 1994년 공식적으로 정립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즉 제1단계에서 남북한 간에 화해 협력을 증진하고, 제2단계에서 국가연합을 구성하며, 마지막 단계에서 민족공동체의 통일을 이룩하자는 방안이 현재 우리의 통일정책인 것이다.

그런데 남북한 간의 분단 상태를 몇 단계에 걸쳐 점진적으로 해소하면서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는 발상은 1970년대 초반으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1971년 박정희정부 당시 외무부 장관에 임명된 김용식은 그해 8월, 기자간담회를 통해 남북한 통일방안에 대해 3단계 접근방식을 밝힌 바 있다. 제1단계에는 적십자회담을 통해 인도적 문제를 해결하고, 제2단계에서는 물자교환, 인적 왕래 등을 통해 비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고, 제3단계에서는 통일문제 등 정치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방안을 제안한 것이다. 김용식 장관은 그의 회고록에서 자신의 3단계 방안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도 공감을 표시했고, 이에 힘입어 1972년과 1973년에는 미국 프레스클럽 및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국제사회에도 이 방안을 소개했다고 밝히고 있다.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였던 김학준도 1970년대 중반 한반도 3단계 평화론을 제안한 바 있다. 그는 세계적인 평화학자 요한 갈퉁이 제안한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 개념을 원용하여, 제1단계에서는 남북한이 동시 유엔 가입이나 교차 승인을 통해 소극적 평화를 정착시키고, 제2단계에서는 남북한 상호 불가침 협정이나 평화협정 체결을 통해 평화를 제도화하고, 제3단계에서는 남북한 간 교류와 협력을 통해 적극적 평화를 구현할 것을 제안한다. 한반도에 적극적 평화가 구현되면 통일의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 1980년대 접어들어 북한이 고려연방공화국 통일방안, 즉 남과 북이 각각 자치를 행하면서 국가연합을 통한 연방국가를 형성하자는 방안을 다시 제기하자, 당시 전두환정부는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으로 이에 응수하였다. 이 방안도 크게 보면 단계적인 통일방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최초 단계에서는 남북한이 기본관계협정을 체결하여 상호 불가침 약속하에 교류 및 협력을 증진하고, 다음 단계에서는 남북한 대표들로 민족통일협의회의를 구성하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 협의회에서 제정하는 통일헌법에 따라 의회와 통일정부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요컨대 현재 우리의 통일방안인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1970년대 이래 우리 정책결정자들과 전문가들이, 한편으로는 북한의 통일방안에 대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헌법이나 유엔헌장 등에서 규정하는 국가 간 규범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만들어온 집단지성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통일방안이 현재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23년 말과 2024년에 걸쳐 북한 김정은 정권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선언하면서, 통일을 향해가는 잠정적 특수관계로 남북관계를 규정한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사실상 폐기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북한의 정책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현재 우리의 대북정책이나 안보정책상 중대한 과제의 하나이다. 일각에선 두 국가론을 수용하자는 견해도 제기되고, 다른 편에선 아예 흡수통일을 추진하자는 주장도 있다.
어떻든 북한의 주장처럼 한반도를 적대적 상태로 방치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우선은 대화와 접촉을 통해 공존적 관계를 회복하고, 이어 교통망 연결이나 물자 교류 등을 통해 연결적 관계를 만들고, 종국에는 민족공동체를 회복해 가는 통일비전의 재천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을 극복하면서, 우리의 통일비전을 재확인하는 집단지성의 노력이 다시 필요한 시점이다.
박영준 국방대학교 국가안보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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