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지역 음악 축제에 초대 받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처음
“사실상 전쟁 협조자” 반대 여론 확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두터운 친분 때문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세계 공연계에서 ‘왕따’가 된 발레리 게르기예프(72) 마린스키 극장 음악감독이 모처럼 서유럽 무대에 설 전망이다. 이를 두고 국제사회의 대(對)러시아 제재에 구멍을 뚫고 우크라이나를 모독하는 행위라는 비난이 거세게 일고 있다.

12일(현지시간) BBC 방송에 따르면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주(州)는 7월 말로 예정된 지역 음악 축제에 게르기예프를 지휘자로 초청했다. 축제 주최 측은 “문화는 정치나 정치적 논리의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고 밝혔다. 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유로 러시아 예술인들을 거부하는 행위를 “멍청한 짓이자 광기의 순간”이라며 “우리는 정치인들이 그들(러시아 예술인)에게 내린 평가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덧붙였다.
게르기예프는 2022년 2월24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영토로 쳐들어가며 전면전이 발발한 뒤 유럽 국가의 무대 위에 서 본 적이 없다. 1988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마린스키 극장 음악감독에 오른 게르기예프는 1990년대부터 푸틴의 열렬한 지지자로 활동했다. 그는 푸틴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적극 후원했으며, 2013년에는 푸틴으로부터 문화 훈장에 해당하는 ‘노동 영웅상’을 받았다. 이듬해인 2014년 러시아군이 푸틴의 지시로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름(크림)반도를 강탈했을 때 게르기에프는 이를 크게 환영하고 나섰다.
그 때문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후 서방 국가들은 게르기예프가 자국 내에서 공연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했다. 캐나다의 경우 아예 게르기예프의 입국을 금지하고 캐나다 국내에서 그의 자산이 발견되면 모두 동결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마침 이탈리아는 지난 10일 우크라이나 재건 협의회(URC)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를 주재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정부 차원의 재건 지원을 약속했다. 그 직후에 게르기예프의 초대 사실이 알려졌으니 비록 중앙 정부가 아닌 지역 차원의 행사라고는 하나 이탈리아는 체면 손상이 불가피해졌다.

극우 진영에서는 게르기예프를 옹호하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멜로니가 속한 이탈리아 형제당 알프레도 안토니오치 의원은 “게르기예프는 그저 위대한 예술가일 뿐”이라며 “대통령(푸틴)의 실수 탓에 모든 러시아인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이는 문화적 학살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유럽연합(EU) 집행부와 유럽의회 의원들을 중심으로 비판이 확산하는 모양새다. 피나 피치에르노 유럽의회 부의장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게르기예프를 “푸틴과 그가 저지른 범죄의 문화적 대변자”라고 부르며 “예술을 앞세워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비판 여론을 완화하려는 크레믈궁의 전략에 말려들어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치에르노 부의장은 게르기예프에게 초청장을 보낸 캄파니아 지역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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