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변화하고, 연결되고, 영원히 계속된다’
양자역학 핵심 원리에서 발견한 예술명제
LED라는 매체 통해 1~9의 숫자로 시각화
물결을 타고 요동치는 입자로 구성된 ‘우리’
미립자가 아닌 우주를 생성케 만드는 ‘진원’
세상이 ‘세상’이 될 수 있게 만드는 존재가 돼
◆0으로부터: 미야지마 다쓰오의 사라지는 우주
우리는 끊임없는 흐름 속에 존재한다. 단단해 보이는 바위도 침식과 풍화를 피할 수 없고, 우리가 ‘산’이라 칭하는 것도 변화하는 지층과 생물들의 집합일 뿐이다. 내 몸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바뀐다. 이 순간에도 수십억 개의 세포가 죽고, 다시 태어난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7년에서 10년이면 대부분 세포가 완전히 교체된다. ‘현재’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순간을 붙잡으려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다. 지금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며, 우리가 보는 것은 변화에 불과하다. 어쩌면 우리는 시간 속에 사는 게 아니라, 변화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컹하고 유연한 세계
현대물리학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로 여겨지는 상대성이론은 시공간조차 절대적 배경이 아니라 휘어지고 변형되는 유동적 장(場)임을 밝혀냈다.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69)는 이처럼 고정된 실체 없는 세상을 “물컹하고 유연한 거대한 조개 속”에 비유했다. 조개 속 미시 세계도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현실은 관측에 의해 결정된다. 관측 이전의 세계는 순수한 ‘가능성의 상태’로만 존재하며 관찰자의 개입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의 현실이 수렴되는 것이다.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우리는 여전히 먼지보다도 작은 존재이지만, ‘나’라는 관찰자가 있어야 세계가 특정한 모습으로 실현된다는 사실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의미와 우주의 본질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우리가 실체라 믿었던 모든 것은 사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영하는 가능성의 파동과 사건의 그물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발견은 놀랍게도 흔히 비과학적으로 여겨지는 종교적 사유, 특히 세상에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으며 모든 존재는 관계와 상호작용 속에 존재한다는 불교의 연기(緣起) 사상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0의 침묵
일본의 미디어 아티스트 미야지마 다쓰오(68)는 이러한 우주의 비밀을 LED 숫자의 점멸을 통해 시각화한다. 예측불가능한 LED 디지털 소자(素子)의 작동 타이밍, 색의 발현, 점멸의 흐름 속에서 불확정성과 가능성이라는 양자역학의 핵심 원리를 발견한 그는 “계속 변화한다. 모든 것은 연결된다. 영원히 계속된다”라는 자신의 예술적 명제를 일관되게 구현해 왔다. 미야지마가 LED라는 매체를 통해 구축한 예술적 방법론은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처럼 비결정성이 깃든 세계를 적극 수용하며, 그 안에서 유기적으로 발생하는 변화 자체를 예술의 본질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드러낸다.
미야지마의 작품에는 0이 부재한다. 숫자들은 9부터 1까지 줄어들다가 0을 건너뛰고 다시 9로 되돌아간다. 혹은 카운트다운의 법칙을 거스르고 자유롭게 다음 수로 도약하기도 한다. 작가는 ‘0의 부재’를 통해 역설적으로 비어 있는 세계를 드러낸다. 0은 보이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서 새로운 수가 탄생하고 순환이 시작된다. 이는 고정된 실체 없이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공(空)사상의 텅 빈 충만을 상징한다.

◆영원의 흐름
6월 28일까지 서울 갤러리바톤에서 진행되는 개인전 ‘Folding Cosmos(폴딩 코스모스·접히는 우주)’에 대해, 작가는 고대 마야력의 최소 시간 단위 ‘k’in(하루)’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마야인들은 하루라는 시간에 천문·신화·생명주기를 겹쳐 읽었으며, 그것을 우주의 질서를 구성하는 성스러운 순환의 단위로 여겼다. 매일의 시간 속에서 우주의 질서가 다시 짜이는 것이다. 이처럼 반복되는 하루의 리듬은 미야지마의 숫자가 머무는 끊임없는 영원의 흐름과 공명한다.

이번 전시에서 핵심 장치로 등장하는 거울은 숫자의 순환에 관객의 역할이라는 레이어를 더한다. 숫자를 바라보는 순간, 작품은 관람자의 모습을 되비추며, 관측이 현실을 구성한다는 양자역학적 사유를 환기한다. 숫자가 소멸하고 탄생하는 틈새에서 세상은 ‘나’라는 좌표로 수렴된다. 작품을 관찰하는 시선은 곧 세계를 결정짓는 주체가 되며, 나와 세계 사이의 유기적 관계는 우주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드러낸다.
원통형 거울 연작 ‘Hundred Changes in Life(삶의 백 가지 변화)’에서는 이러한 상호작용이 더욱 직접적으로 전개된다. 작가는 지옥에서 천상계에 이르기까지 중생과 깨달음의 세계를 열 가지로 분류한 불교의 십계(十界)에서 영감을 받아, 하나의 세계 안에 또 다른 열 개의 세계가 담겨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숫자들은 무작위한 속도와 순서로 변화하며, 연기법에 따라 펼쳐지는 수백 가지 세계와 순환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관람자가 숫자를 보기 위해 고개를 기울이는 순간, 거울은 사방에서 ‘나’라는 상(象)을 비춘다. 움직일 때마다 따라다니는 왜곡된 자아의 모습은 이 세계에 고정된 것이 없음을 끈질기게 환기한다. 조그마한 원통들은 이처럼 떨림과 울림으로 가득한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변화를 조용히 끌어안는다.
◆꽃과 벌: 우주의 비밀
길이 340cm에 달하는 ‘Changing Time with Changing Self - Flower(변화하는 자아와 변화하는 시간 - 꽃)’는 가능성을 품은 존재들이 이루어낸 풍경이다. 각도를 달리한 숫자들은 마치 물속이나 우주를 유영하듯 떠다닌다. 제목에 포함된 ‘Flower(꽃)’는 피고 지며 변화하는 꽃의 속성과, 개별 입자로서의 인간이 피워내는 세계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미국의 시인이자 철학자 마크 네포(74)는 “꽃은 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꽃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벌이 올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꽃피운 세상은 우리가 자존(自存)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있는 그대로 충실히 머무를 때 세상이 조화롭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미야지마의 숫자 역시 아무것도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빛나고 사라지며 흐를 뿐인데, 우리는 그 앞에서 우주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거대한 파도와 물결을 타고 요동치는 입자인 우리들은, 따라서 이름 없는 미립자가 아니라 우주를 생성케 하는 진원(震源)이다. 우주는 ‘나’라는 관측이 있을 때마다 새롭게 접히고 펼쳐지는 가능성의 장이며, 우리는 세상이 ‘세상’이 될 수 있게 만드는 존재이다. 그래서 ‘순간’이라 부를 수 없는 매 순간이 소중하고, 우주를 함께 그려내는 모든 존재가 소중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빅뱅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 고대 마야인들이 엮어낸 매일의 우주와 소멸·탄생의 신비는 미야지마의 LED 한 점 속에서 되살아난다.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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