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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69〉 안씨(安氏)·순흥안씨(順興安氏)

토속 성씨 순흥안씨, 고려때 시조 증손 안향 이후 크게 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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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3-11 21:27:10      수정 : 2014-03-11 21:27:10
안(安, 顔)씨는

문헌에 전하는 안씨 본관은 모두 109본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주요 본관은 순흥(順興), 죽산(竹山), 광주(廣州), 강진(康津), 탐진(耽津), 신죽산(新竹山), 경주(慶州), 안동(安東), 수원(水原), 평안(平安), 순천(順川), 공산(公山), 태원(太原) 등 41개다. 중국에는 낯 안(顔)을 쓰는 안씨가 있는데, 공자의 제자였던 안회(顔回)가 있다. 또 당나라 현종 때 서예가로 유명한 안진경(顔眞卿)이 있다.

안씨(安氏)의 출발은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 중국에는 소수민족 등 10여개 계통의 안씨가 있다. 주로 안식국으로 불리던 우즈베키스탄과 위구르족 지역 출신들이 안씨가 되었다. 당나라 무렵에는 소그디아나에 안(安)국과 강(康)국이 있었다. 또 안씨에는 북위의 선비족 계통도 있다. 선비의 복성 중에는 안지(安?)라는 성이 있는데, 이를 줄여서 안씨로 불렀다고 한다. 그 외에 명나라 때 소수민족인 이족이 안씨로 창성하였다고 한다. 또 청나라 때 몽골족과 다우르족이 안씨로 변경하였다. 그 외에도 중국에서 안씨는 외국에서 귀화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의 안씨는 순흥안씨에서 분관된 신죽산안씨와 탐진안씨 등도 있지만, 유래를 달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순흥안씨의 시조는 안자미(安子美)이다. 그는 고려 신종 때 신호위상호군(神號衛上護軍)에 추봉되었다. 탐진안씨는 순흥안씨 시조 안자미의 6세손인 안목(安牧)의 셋째아들 안원린(安元璘)을 시조로 하는데, 안원린의 아들 안우(安祐)가 홍건적의 침략을 막은 공으로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진 뒤 분관하였다. 신죽산안씨 역시 안목의 둘째아들로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진 안원형(安元衡)을 시조로 하여 순흥안씨에서 분관하였다. 탐진안씨와 신죽산안씨는 각각 순흥안씨의 탐진군파와 죽성군파로 불리기도 한다.

죽산안씨의 시조는 당나라 출신인 이원(李瑗)의 장남인 안방준(安邦俊)이다. 이원은 신라 애장왕 때 건너와 정착했으며 그에게 지춘(枝春)·엽춘(葉春)·화춘(花春)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안씨 성을 하사받았다. 그때 이지춘은 이름을 안방준으로 개명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다. 광주안씨의 시조 안방걸(安邦傑)은 광주 지방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대장군에 오르며 광주군에 봉해져 광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원래 그는 성씨가 없었으나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지방 유력자들에게 성씨를 갖게 하는 정책에 따라 안(安)씨 성을 갖게 되었다. 안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19만7668가구에 총 63만778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전체 성씨 인구 중 17위로 1.4%다.

순흥안씨는

순흥안씨는 경상북도 영주시 소백산 기슭의 순흥면에 본관을 둔 안씨를 말한다. 순흥안씨는 토족 성씨로 고려 신종 때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내고 신호위상호군에 추봉된 안자미를 시조로 한다. 시조 안자미는 영유·영린·영화 등 3형제를 두었다. 이들 후손들이 각각 1파 추밀공파(樞密公派), 2파 별장공파(別將公派), 3파 교서공파(校書公派)로 나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 이들 3파에서 안영유의 후손으로 14개 파, 안영린의 후손으로 4개 파, 안영화의 후손으로 4개 파가 있다.

순흥안씨는 시조 안자미의 증손인 안향 이후 크게 일어나 11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고 20명이 봉군(封君)되었으며, 17명에 달하는 문형(대제학)을 배출하였다. 그래서 조선조에서는 김, 이, 박씨 등과 함께 6대 성씨의 하나로 인정되는 성씨였다. 11대에 걸쳐 과거급제를 한 사람은 안향(安珦)-안우기(安于器)-안목(安牧)-안원숭(安元崇)-안원(安瑗)-안종약(安從約)-안구(安玖)-안지귀(安知歸)-안호(安瑚)-안처선(安處善)-안정(安珽)이 그들이다. 또 6세 안축(安軸), 7세 안종원, 8세 안경공, 9세 안순(安純), 10세 안숭선(安崇善) 등 5대에 걸쳐 대제학을 지내기도 했다.

1파인 추밀공파 순흥안씨는 시조의 증손인 안향(安珦)이 크게 현달하여 가문이 번창했다. 안향은 경기 부곡에 ‘안자묘’(安子廟)가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주자학의 태두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아들 안우기(安于器)는 찬성(贊成)을 지냈고, 손자 안목(安牧)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또 안목의 후손에서 탐진안씨와 신죽산안씨가 분관되어 나갔다.

제2파인 별장공파 순흥안씨는 안영린의 후손으로 안문개(安文凱)가 유명하다. 그는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충절을 바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첨의참리가 되고 순흥부원군이라는 호를 받았다. 충혜왕 때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송천봉(宋天鳳) 등 33인과 함께 옥대(玉帶)를 하사받았다. 3파인 교서공파 순흥안씨는 안영화의 후손으로 충숙왕 때 원나라의 제과에 급제한 근재(謹齋) 안축이 유명하다. 충혜왕 때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고,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었으며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다.

순흥안씨에서 배출된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641명이나 된다. 문과에 121명이며, 무과에 91명, 사마시에 327명, 역과에 42명, 의과에 24명, 음양과에 26명, 율과에 9명, 주학에 1명이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 14만5254가구에 총 46만88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는 전체 안씨의 73.5%에 달하는 수치이다. 

순흥안씨 추원단 경북 영주 순흥면에 있는 순흥안씨 추원단의 모습이다. 정축지변 당시 순흥면에 거주하던 순흥안씨가 멸문지화를 당해 뿔뿔이 흩어졌다가 숙종 때 이르러 복권이 된 후 시조의 묘를 찾아 추원단을 세우게 되었다.
순흥안씨의 연혁과 인물

순흥안씨는 시조의 증손인 안향 이후 크게 번성했다. 안향은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 한 뒤,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렬왕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하고 후진 양성에 진력하여 유학의 학풍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에서 백이정(白?正)과 우탁(寓倬) 등 훌륭한 유학자가 배출되었으며, 이제현(李齊賢)과 이색(李穡)으로 이어졌다. 또 이색의 문하에서 권근(權近)이 나와 조선조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주자학의 태두로 추앙되고 있으며,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장단 대덕산에 있고, 경기도 부곡에 안자묘가 있다.

안향의 아들 안우기는 찬성을 지냈고, 손자 안목은 정당문학을 지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안침(安琛), 안당(安?)과 안위(安瑋), 안현(安玹), 안상(安?) 3형제가 유명하다. 

안향 영정 풍기 소수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111호인 회헌 안향 영정.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안향 사후에 주변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려졌다고 한다.
안침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전라도 관찰사와 한성부윤, 대사헌, 경상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고 공조판서를 거쳐 지돈령부사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5형제도 모두 현달하였다.

안당은 성종 때 친시문과에 급제한 뒤 중종 때 형조·공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으나,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처형당할 때 사사(賜死)되었다. 안위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수하고 호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다. 또 안현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명종 때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안상은 음악에 조예가 깊어 선조 때 거문고, 비파, 장고의 악보를 망라하여 ‘금합자보(琴合字譜)’를 발간하였다. 교서공파에서는 고려 말의 명신 안축, 안보(安輔), 안즙(安輯)의 3형제가 유명하다.

안축은 충숙왕 때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고, 충목왕 때 첨의찬성사, 춘추관감사(春秋館監事)가 되어 충렬, 충선, 충숙왕조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안보는 공민왕 때 정당문학, 안즙은 대제학을 지냈는데, 3형제 중 안축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안축의 아들 안종원(安宗源)은 조선 개국 후 삼사영사(三司領事)에 오르고, 안종원의 아들 안경공(安景恭)은 조선 개국공신으로 태종 때 집현전 대제학이 되었다. 안경공의 아들 안순(安純)과 손자 안숭선(安崇善), 안숭효(安崇孝)도 명신으로 유명하며, 안숭선의 현손으로 안자유(安自裕), 안명세(安名世) 등이 뛰어났다.

하지만 순흥안씨 집안에 멸문지화가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종 복위와 관련된 정축지변(丁丑之變)이 대표적이다. 또 기묘사화에 이은 신사무옥(辛巳誣獄)에서 안당과 그의 아들 안처겸이 처형당했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안명세가 참화를 당했다. 또한 안중근, 안명근 사건으로 일제가 순흥안씨 집안에 가한 탄압도 빼놓을 수 없다.

그중 가장 큰 화는 단종 복위 사건과 관련된 정축지변인데, 당시 순흥에 유배되어 왔던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 영월에 유배되어 있는 단종과 연계하여 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단종과 금성대군이 죽임을 당하고, 순흥도호부에 세거하고 있던 700명에 달하는 순흥안씨가 멸문지화를 당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순흥안씨 근·현대 인물

순흥안씨에서는 근·현대 인물로 독립운동가와 정치가 등이 특히 많다. 안중근, 안창호를 비롯하여 안명근, 안익태, 안재홍, 안춘생 등 숱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도산 안창호는 독립협회에 가입한 뒤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1912년 미국으로 망명해 흥사단을 설립했다. 59년 일생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고 끝내 침략자의 형벌에 순국했다.

안중근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유필을 남겼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선천에서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안명근이 그의 사촌동생이다. 특히 안중근의 순흥안씨 가문은 백범 김구와 깊이 얽혀 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백범 김구를 숨겨주었고, 안중근의 친척인 안미생은 김구의 며느리이다. 하지만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도 순흥안씨 가문이다.

안중근 의사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처형당하기 전 뤼순감옥에서 찍은 안중근 의사의 사진. 안중근 집안과 김구의 인연은 깊이 얽혀있다.
순흥안씨 현대 인물로는 정관계에 안경모(교통부장관), 안응모(내무부장관), 안동혁(상공부장관), 안동일, 안동준, 안동선, 안갑준, 안종열, 안교덕, 안상수, 안철수(이상 국회의원), 안춘생, 안필준(예비역육군중장), 안철호(육군소장), 안우만(서울지법 부장판사)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안세희(연세대총장), 안병욱(숭전대교수), 안상원(건국대교육대학원장), 안림(성균관대교수), 안인희(이화여대교수) 등이 있다. 

배우 안성기.
또 재계에서는 안영모(한일은행장), 안철환(대한통운대표이사사장), 안상국(동서증권㈜대표이사회장), 안정식(세방기업㈜사장), 안영철(한국화학사장), 안영승(정우개발대표), 안원종(동진산업회장), 안인혁(한국바이엘약품회장), 안세영(대전일보사장) 등이 있다(무순, 전·현직 구분없음). 이 외 영화배우 안성기, 가수 토니안(본명 안승호), 러시아에 귀화한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선수인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 등도 순흥안씨이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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