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갑작스럽게 집을 팔게 됐다. 겨울방학이 이사철 성수기라는 이야길 듣고 급하게 전셋집을 보러 다니는 동안, 정말 ‘믿거나 말거나’급의 당혹스러운 현실을 만나게 됐다. 광나루역, 상왕십리역, 행당역 주변에 조건이 맞는 매물이 있다는 정보를 얻은 후 집 구경을 나섰는데, 세 집이 하나같이 전세를 놓고 자기 집을 떠나는 이유가 ‘대치동으로 입성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중 한 집에서 손녀딸 봐주는 친정어머니로부터 직접 들은 사연이다. “손녀딸 교육 때문에 대치동으로 갔다가 손녀가 대학 들어가면 다시 돌아올 요량이라 지금 이 집은 절대로 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넓은 집 놔두고 대치동에 손바닥 만한 집 전세로 가는데 이 살림 버리고 갈 수도 없고 해서 걱정은 되지만, 딸이 그렇게 하자니 그냥 따를 수밖에 없다”며 혀를 끌끌 찼다. 세 집 모두 아직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의 예닐곱 살 손녀를 위해 대치동에 전세를 얻어 이사 간다는 이야기를 듣자니 한편으론 신기하기도 하고 솔직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듯한 내 표정을 보고 부동산에서 친절하게 들려준 설명에 따르면, 서울 강북의 아파트 시세는 학군이 좋으냐 나쁘냐에 따라 전세가 1억5000만~2억원 정도 차이가 난다는 이야기였고, 강북에서 비교적 좋은 학군으로 알려진 광진구에서도 일부 극성 엄마들은 대치동 학원가로 ‘아이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했다. 교육부가 대입 정시 확대를 발표하자마자 강남 8학군 집값이 들썩이기 시작했는데, 특목고·자사고 폐지 발표는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라는 것 또한 부동산의 사려 깊은(?) 설명이었다.
특히 대치동 로망을 넘어 대치동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되려면 초등학교 입학 이전부터 사교육을 위한 ‘엄마 네트워크’에 끼어들어야, 초등학교를 거쳐 중·고등학교까지 무사히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오르듯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는 무용담도 잊지 않고 전해 주었다. 대치동 학원 파워는 워낙 난공불락이라, 압구정동의 웬만한 학원은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고, 목동 아파트는 대치동 학원 버스가 오는지 안 오는지에 따라 희비가 갈린다는 꿀 팁도 알려주었다.
‘대치동 로망’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육성으로 듣고 있자니 불현듯 대치동 입성에 성공한 우리의 자녀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정말 궁금해진다. 자녀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엄마들의 샘솟는 에너지와 헌신적 노력은 과연 얼마만큼의 보상을 받았을지도 솔직히 알고 싶다. 여기서 대치동 로망의 주인공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회학의 멋진 개념 중 하나인 ‘피해자 비난하기’의 전형적 사례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대치동 로망의 핵심에는 학부모의 불안심리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그 누가 부인하겠는가. 최근 재수 끝에 서울의 명문대 입학에 성공한 조카로부터 일반고등학교 현장이 얼마나 피폐하고 처참한지 직접 전해 듣고 분노를 넘어 공포를 느낀 경험이 있기에, 특목고·자사고를 폐지하겠다는 교육부 발표가 학부모 귀에 어떻게 들릴까 여부는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 같다.
사교육이 공교육을 확실히 대체하고 있는 상황에서 특목고·자사고를 폐지하겠다는 선언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명분으로 채워져 있어 비현실적으로 들리고, 일반고의 위상을 정상화하겠다는 교육부의 발표는 핵심 내용이 채워져 있지 않아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사교육의 폐해를 줄이고 사교육의 확산을 막겠다고 공언하며 나온 지금까지의 교육 관련 정책 중 실제로 소기의 성과를 거둔 정책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자녀의 학업성취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가족의 사회경제적 지위임은 이미 다양한 연구를 통해 여러 국가에서 검증된 바 있다. 서울대 입학생의 40% 이상이 강남 출신이라는 사실은 이의 방증이요, 금수저 자녀들이 공부 잘해서 명문대 들어가는 비율이 높음은 어느 나라에서나 관찰 가능한 현상임은 물론이다.
이 현실을 애써 감추려 하거나 왜곡하기보다는 가감 없이 직시할 수 있는 객관적 데이터부터 갖추길 희망한다. ‘대치동 로망’의 성공률과 실패율의 정확한 현주소를 검증할 수 있는 기초 데이터조차 없는 상황에서 온갖 괴담 수준의 이야기만 떠돌아다니는 현실은 학부모의 불안감과 초조함만 증폭시킬 뿐이다. 오죽하면 우리네 사교육을 향해 ‘부모의 불안심리를 이용한 공포 마케팅의 승리’라고 부르기까지 하겠는가.
한국 기업이 글로벌 기업의 성공사례를 훌륭하게 벤치마킹함으로써 경쟁력을 확보해가듯 우리 교육도 선진국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해 보는 것은 어떨까. 세계 유수의 대학 대부분은 사회적 신뢰를 기반으로 신입생 선발권에 관한 한 대학의 자율권을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선발하고 교육하는 데 대학만큼 책임질 수 있는 주체가 누가 더 있겠는가.
일찍이 한국은행 총재가 인정했듯이 한국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성은 조령모개(朝令暮改·아침에 내린 명령을 저녁에 고친다는 뜻)식 교육정책과 긴밀히 연계돼 있고, 교육정책의 핵심은 대학입시라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에서, 제발 학부모의 불안심리를 잠재울 수 있는 현실적 정책, 나아가 자녀의 미래를 향해 긍정적 전망을 가능케 하는 책임 있는 정책이 입안되기를 간절히 기다려 본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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