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벨상 수상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읽었다. 작가의 나이 61세에 쓴 소설이었다. 환갑을 지난 작가가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을 썼을 때 ‘사랑’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궁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젊은 시절 운명적 사랑에 빠졌던 남자 주인공이 51년 하고도 9개월 4일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남편과 사별한 첫사랑 연인과 다시 놓쳤던 사랑의 연을 이어가는 과정은 읽는 내내 쫄깃한 재미와 왠지 모를 비애감을 안겨다 주었다.
남자 78세 여자 73세 나이에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 남녀 주인공은, 기다릴 것이라곤 죽음뿐인 상황 앞에서 늙고 쇠락한 서로의 육체를 보듬으면서, 지금 이 순간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는 둘만의 항해를 계속해간다. 사랑과 콜레라는 서로 닮은 구석이 많다는 작가의 해학적 유머가 순간순간 미소 짓게 한 소설이었다.

역시 노벨상 수상 작가인 도리스 레싱도 77세 나이에 ‘러브, 어게인’이란 제목에 ‘결코 다시는 원치 않았던’이란 부제를 단 소설을 발표했다. 자세한 내용은 오래전 읽었기에 잘 생각나진 않지만, 80세를 앞두고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주인공의 모습만큼은 손에 잡힐 듯 생생히 떠오른다.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가는 자신의 육체를 응시하며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의 기복을 다스리기 위해 온 힘을 다했던 여주인공의 시선에서, 레싱은 운명을 거스르기보다 순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때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인생의 쓰디쓴 맛을 한 조각도 빠짐없이 절묘하게 표현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소설가뿐만 아니라 시대의 획을 그은 사회학자들의 작업에서도 나이 들어가며 인생을 관조할 때 나오는 학문 세계의 변화 분위기가 비슷하게 감지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이다. 20대 후반부터 왕성한 연구 활동을 벌였던 기든스는 초창기엔 정통 마르크시스트를 자처하며 영국사회의 계급구조를 분해하고 비판적 사회학이론을 분석하는 데 주력했다. 그런 그도 54세에 이르자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을 출간했다. 한국 번역서는 부제를 책 제목으로 삼았으나 원래의 제목은 ‘친밀성의 변동 구조’였다.
현대인의 미덕으로 성찰의 가치를 강조했던 기든스는 이 책을 통해 가장 친밀한 관계의 본질 및 특성이 사회구조적 환경의 변화에 부응해 어떤 변환 과정을 겪는지에 대해 현미경을 들이댄 것 같은 치밀하고도 세밀한 분석을 시도했다. 거시적 관점으로부터 미시적 관점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한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친밀성을 구현하는 대표적 관계라 할 부부 사이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정치제도의 민주화는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현대인과 현대사회 고유의 특성을 ‘위험사회’에서 찾았던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도 50대 중반 이후로 가면 사랑의 본질과 의미를 규명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로 나온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현대의 고전이란 평가를 받고 있고, 뒤를 이어 부부가 함께 쓴 책 ‘장거리 사랑’ 또한 현대인의 일상에 스며든 글로벌화의 영향력을 풍성하게 분석해내고 있다. 결국 베크 부부는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가족이 위험사회의 핵심축으로 부상했음을 경고하면서,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함께 찾아 나서자고 호소하고 있다.
현대인은 ‘큰 구조’로부터 ‘작은 이야기들’로 정체성의 핵심 기반이 이행해가고 있음에 주목한 지그문트 바우만 또한 자신의 나이 78세에 역작 ‘리퀴드 러브’를 발간한다. ‘액체 근대’하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는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몰입보다는 쉽게 들고날 수 있는 네트워크를 향해 가고 있다는 바우만의 주장은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우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의 작업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충실히 유지하면서도 나이 들어가면서 인생을 관조하며, 그 의미를 치열하게 찾아가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치기나 집착에서 벗어나 학문적으로도 격조 있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몸소 실천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하지만 유독 우리네 정치권의 현실은 격조 있게 나이 들어감의 미덕과 정반대 모습을 보이는 것만 같아 아쉽다. 한편에서는 현재진행형인 정국 혼란과 국민 분열을 야기한 데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과 ‘나만 옳다’는 독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버티기에 들어간 원로 당대표들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식욕이든 성욕이든 인간의 욕망 대부분은, 심지어 혁명을 향한 열정까지도 나이가 들면서 약화하거나 순화되게 마련인데, 노화에도 수그러들지 않는 것, 그건 바로 권력욕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순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다양한 연구가 입증해주고 있음을 기억할 일이다. 하버드대학 연구팀의 70년 연구를 결산한 ‘에이징 웰’의 결론인즉, 자신의 삶에 대해 진정 긍정적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면, 성별과 인종과 계급을 불문하고 성숙하게 나이 들어가는 미덕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