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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희의음식문화여행] 먹이는 것의 거룩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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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0-10 21:20:19 수정 : 2017-10-10 21:2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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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하면 음식이 떠오른다. 1930년대 말 궁핍하고 척박한 조선땅에서 명절음식에 대해 노래한 이는 시인 백석이었다. 식량이든 인력이든 언어든 민족혼이든 모든 것이 빼앗기던 시절, 백석은 굳이 유년의 명절음식을 떠올렸을까. ‘먹는 행위’야말로 민족혼의 아궁이를 데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절이 지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먹는 행위가 있으면 먹이는 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내가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사이 누군가 썰고, 가르고, 다지고 있었다는 것을. 졸이고, 찌고, 부치고, 차리고 있었다는 것을.

 

김애란의 단편소설 ‘칼자국’은 ‘먹이는 행위’에 대한 헌사다. 무엇보다 모든 음식은 ‘칼날’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전언한다.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에는 평생 칼국수 가게를 한 어머니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대개 그렇듯 음식점은 무능한 가장 탓에 어미가 제 식구 먹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다. 손칼국수 가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여자가 소자본으로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다. 그래서 어머니는 칼을 든다. 도마질소리에서 가족의 아침이, 식구의 밥벌이가 열린다.

 

나의 어머니도 외지에 나간 식구가 다 모였을 때 콩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손칼국수를 만들어주시곤 했다. 경상도에서는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칼국수 반죽을 한다. 흰 눈가루처럼 밀가루를 날리며 반죽을 하고 치대고 홍두깨로 민다. 홍두깨가 없으면 형광등으로 민다. 마침내 국수 가락을 한칸 한칸 썰어나갈 때 내 생이 따뜻하게 호위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칼국수에는 칼의 기억이 숨겨져 있다. 칼국수 한 가락 한 가락 썰어 나가는 마디마다 어머니 칼날의 섬세함이, 우직함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칼을 든 ‘무사’였다. 세상의 헐벗음 속에서 ‘새끼’를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 ‘칼’을 든 무사.

 

멸치와 바지락을 넣고 끓인 물에 국수를 삶아낸다. 칼국수와 고추 다대기와 김치 한 종지와 함께 상에 내놓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 가락을 젓가락으로 끌어올려본다. 호호 입으로 불며 우적거리는 시간, 그때 알게 된다. 칼국수 안에 ‘칼’의 사랑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김애란은 이야기한다. “어머니의 칼에서 사랑이나 희생을 보려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거기서 그냥 ‘어미’를 봤다. 그리고 그때 나는 자식이 아니라 새끼가 됐다.”

 

추석이 지났다. 먹은 이들이 있었다면 먹이는 이들이 있었다. 아니 평생을 먹이는 이가 있다. 새끼를 먹이는 제비처럼. 오므리는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던 칼자국이 있다. 씹고 삼키며 내장이 되고 간이 되고 심장이 됐던 음식들. 먹이는 것의 숭고함에 대해 생각한다. 먹이는 것의 거룩함에 대해 생각한다. 가을에는 그 한 사람을 앓아보는 것도 좋겠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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